삼상 1:1-8,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23.11.15,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 1장은 사무엘의 출생 배경입니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던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입니다. 엘가나는, 역대상 6장이 증거하는 대로,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6:28; 34-38). 그러므로 그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다는 말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레위 지파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 아내는 한나이고 둘째 아내는 브닌나입니다. 브닌나가 자식이 있었던 반면 한나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엘가나가 두 아내를 둔 이유는 한나의 불임 때문인 것 같은데 본문은 한나의 불임 이유를 여호와께서 자녀를 가지지 못하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나는 불임으로 받은 고통과 더불어 브닌나가 주는 멸시와 대적으로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눈물로 고통하며 번민했습니다. 그때마다 엘가나는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철없는 위로로 아내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못난 남편입니다.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사사기의 혼란과 불 신앙과 절망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려 주시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그를 위해 다윗 왕조를 세우는 하나님의 개입이 신화적이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은 불임 여성 한나의 억울함과 눈물과 원통함, 그리고 그녀의 못난 남편 엘가나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무엘서는 역사입니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경의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영웅담이나 위인전에 나오는 감동적인 사람들의 스토리가 아니라 온갖 실패와 좌절과 죄악과 혼돈의 반복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역사를 포장지 삼아 당신의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내는 일을 담아내고 계십니다. 역사 속에 담아내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보십시오.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바로바로 하시지 않고 시간을 끄시는지,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우여곡절과 말이 안 되는 모순과 충돌과 의심과 불안을 허락하시는지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당장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사기의 혼란을 왕정 시대로 전환하는 하나님의 방법도 바로 다윗으로 가지 않고 사무엘과 사울, 사울로부터 오는 온갖 핍박과 고난을 거친 다윗으로 풀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조차 그럴듯한 영웅이나 위인의 모습이 아니라 억울한 눈물의 한나와 그녀를 달래는 못난 모습의 엘가나입니다.
특별히 저자는 엘가나의 가문을 4대까지 언급합니다.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이며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인 엘가나입니다. 이렇게 4대를 거슬러 언급하는 그의 가문에 한나가 불임 여성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없음은 미래가 없음을 뜻합니다. 사무엘서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암시해주는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를 언급하면서 엘가나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홉니와 비스하스가 대변하는 영적 혼란뿐 아니라 또 다른 레위인 엘가나가 보여주는 영적 불임의 상태가 사사 시대 말기의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엘가나 가정에 브닌나가 둘째 아내로 들어와 자식을 낳지만 정작 그 가정에는 그로 인한 고통과 갈등과 미움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인간적인 해결책이 바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사기의 혼란을 질서로 바꾸는 다윗 왕조를 일으키기 위해 이런 한나와 엘가나를 사용하십니다. 한나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자식이 없어서 분하고 억울한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넌 자식도 없잖아”라고 격동시키는 브닌나가 너무 밉고 분합니다. 얼마나 억울한지 남편의 사랑도 소용없습니다. 이 분함을 갚지 못하면 음식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습니다. 기도밖에는 답이 없는, 다음 주에 보겠지만 자식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그녀의 서원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 되심, 그 왕의 통치를 받기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대적 브닌나가 주는 격동과 분을 풀기 위한 기도라고 보는 것이 더 문맥에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너무 쉽게 한나가 믿음의 여인이고, 기도의 여인이어서 하나님이 그녀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칠 걸 왜 달라고 합니까? 한나는 지금 위대한 기도의 여인으로 등장하지 않고 대적 브닌나가 주는 멸시를 갚고 분을 풀기 위해 울면서 매달리는 엉어리진 가슴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는요? 불임의 고통과 자신을 멸시하고 깔보는 브닌나 때문에 음식도 먹지 못하고 분해하는 한나에게 “여보, 내가 잘해주는 것이 자식 열 명보다 낫잖아!” 이런 바보 같은 소리나 하면서 아내의 마음 하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못난 남편으로 등장합니다. 사사기의 혼란을 질서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처음부터 준비된 영웅과 믿음의 위인들을 데리고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못난 남편 엘가나와 눈물의 여인 한나, 이들을 데리고 다윗 왕조를 세우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시편 106편을 보십시오. 1-2절이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시작합니다. 마지막 48절도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하라”로 끝이 납니다. 그 중간에는 무슨 내용이 있겠습니까?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이 나려면 그럴듯한 복을 받은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6절부터 보면 온통 이스라엘이 행한 사악한 범죄의 역사를 열거합니다. 홍해의 거역, 광야의 탐욕과 불순종, 금송아지를 만든 배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반복되는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든 수많은 범죄와 우상숭배의 역사 들이 나열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구원을 만들어내십니다. 사무엘을 세우고 사울을 거쳐 다윗을 세웁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마침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들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거기에 할렐루야가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처음부터 한나의 기도를 부각하고 그녀의 눈물어린 기도와 믿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풀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가 아니라 우리도 한나처럼 기도하자고 기도의 여인 한나를 높이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도 성경을 보는 하나의 방법은 되지만 성경의 역사를 보는 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불굴의 영웅이 아니고 멋진 믿음의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역사라는 포장지에 담아 우리에게 베푸실 때 그럴듯한 모습으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실 때 마굿간으로 보내셨습니다. 말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아무도 메시아인지 모르는 모습의 포장지에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을 담아 역사 속에서 펼쳐내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주시려고 다윗 왕조를 허락하시는데 못난 남편 엘가나와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아내 한나를 통해서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사무엘서를 보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이 현실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으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엘가나와 한나와 같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늘 모자라고 억울하고 분한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대책 없고 미련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아내 둘을 거느려 자식을 보지만 정작 그 결과는 가정의 분란과 싸움과 갈등과 미움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에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기적입니다. 은혜입니다. 그처럼 못나고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수요기도회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은혜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 때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고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읽어가는 내내 이런 고백과 찬송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구약학 교수가 사무엘 주석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사무엘서 본문에 보전되어 있는 해석이 예술적 담론을 가진 공동체를 소집하고 일깨움으로써, 그것에서 권력과 개성, 그리고 섭리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고 또한 이 요소들이 모두 삶의 구성인자로써 주목받고 존중되며 기념되기를 바란다” 사무엘서의 역사에 담긴 사건과 내용이 권력과 개성과 종교적 섭리의 차원을 넘어 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구원 계시의 인자와 요소로 주목받고 존중되며 기념되어 우리의 믿음과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포장지로 삼아 그 안에 당신의 구원 계시를 담고 펼쳐가십니다. 이걸 모르면 늘 겉모양과 포장지 싸움하다가 그 안에 하나님이 담아주신 구원의 지혜와 신비라는 내용을 놓쳐버립니다. 교회도 구원이라는 예술적 담론, 창조적 담론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늘 외형과 숫자와 규모라는 권력으로 싸우는 기관으로 전락하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운명론적 종교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와 개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구원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의 생애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내어야 합니다. 한나의 불임과 억울함과 눈물과 고통과 엘가나의 못남을 사용해서 사무엘을 주시고 나아가 다윗을 주시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 삶에 허락된 어떤 조건과 내용에도 격동과 분함과 억울함으로 현실을 체념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시며 당신의 뜻 안에 있는 우리의 영화로움을 만들어내고 계시니 원망하고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떠넘기지 말고 인내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나의 현실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왕이 되시는 가장 위대한 일들을 담아내고 계심을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소유는 힘과 연결됩니다. 힘은 곧 힘없는 자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권력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유한 자가 권력자로 존재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 체계 속에서 인간이 갈망하는 구원은 힘을 가지는 차원의 권력입니다. 사무엘서는 자식의 소유를 모티브로 한나와 브닌나를 세워서 하나님의 구원은 그 힘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소유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음이 가장 큰 힘이며 영원한 힘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사무엘서의 교훈 앞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