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09년 11월말 쯤이었을 겁니다. 서울에서 불과 30분이면 갈 수 있는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옆 왕산 해수욕장에서 실미도로 카약투어를 가볍게(?) 다녀오자고 번개투어를 갔을 때의 일화입니다.
왕산 해수욕장 인근 해역은 서울 사시는 카약커들에게는
바다 맛을 보기엔 정말 멋진 곳이죠.
가깝기도 하고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 영화 '실미도'가 주는
뭐랄까 살짝 흥분되는 그런 섬을 정말 가볍게 다녀올 수 있기도 한 곳입니다. 왕산 해수욕장에서 실미도까지는
직선거리로 7 km 남짓하니까 천천히 저어도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으니 가볍게(?)란 말을 쓰는 겁니다.
전날 저녁에 학교 동문회에 참석해서 진탕 퍼
마시곤 지방서 올라온 동기와 함께 신촌의 어느 모텔에서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왕산 해수욕장으로 갔죠. 여전히
정신이 없는 건 당연지사....약속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하나 둘 씩 모여서는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남자들끼리 킬킬거리며 수다 떠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릅니다.
저는 이때 왕산 해수욕장은 물론 실미도도 처음
가보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약킹 장비는 초 간단 모드로만 준비했습니다. 나침반이나 해도같은 건 아예 가져가지도 않았죠. 왜냐하면 함께 투어를
가는 분들이 다들 이 코스를 자주 다녀보셨다고 익히 알려져 있던 터라 그저 그분들 뒤만 졸졸 따라가면 되겠다 싶었던 데다 학교 졸업 이후 거의 15년만에 처음 동문회에 참석하는 것이라 거기에 더 설레어 투어 준비를 대충한 것이죠.
부슬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이고 바다도 거의
장판 같아 늦가을 카약킹으론 나름 운치가 있었죠. 게다가 수도권지역에서 거의 10명이나 되는 카약커들이 카약킹을 하는 게, 그것도 번개투어인데
정말 드문 일이었죠. 10명이면 수도권 인구를 2,000만이라고
할 때 대략 0.00005%에 해당하죠?
왕산 해수욕장을 출발해서 서남쪽으로 돌아나가니
탁 트인 바다에 섬들이 옅은 연무 속에 아스라히 옹기종기 떠 있는데, 어느 게 어느 섬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저 무의식적으로 희뿌연 바다 위를 노 저어 남쪽으로 갑니다. 한 30~40분 정도 가는데 카약 대형이 횡으로 벌어지더니 슬슬 그 간격이 넓어지길래 궁금해서 일행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많이 타셨죠?"
"네! 여기가
우리 나와바린데요"
"아..네.. 전 오늘 그냥 여러분만 믿고 따라갑니다"
"걱정 마세요"
조금 있다가 갑자기 OO즈님이 외칩니다.
"어이 OO스
실미도가 어느 건데 그쪽으로 가?"
"저거 아냐?
정면에 보이는 거..."
"형! 저거
아냐.. 저 멀리 보이는 거야. 저렇게 가깝지 않아"
"엥? 저렇게
멀다고? 저렇게 멀지 않아...야! 코 박어!"
"아이고...저게
먼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욧!"
한참을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10명의 카약커가 슬그머니 둘로 나뉩니다. 한 무리는 소위 서해 제일의 3등급 카약커를 더 신뢰하는... 다른 무리는 그래도 명색이 서해지역을
관장하는 지역장을 더 신뢰하는 초행 카약커들(저도 포함)입니다. 딱 5:5로 나뉘더군요.
그렇다고 그룹을 둘로 찢을 순 없는 일이라
난감해 하는데, 순간 날O님이 제안을 합니다.
"행님들! 그럼
누가 맞는지 두분 중에서 틀리는 분이 저녁사시면 되겠네요"
옆에서 덩달아 두 리더의 자존심 대결을 부추기니까
본인들 얼굴이 순간 굳어지면서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입니다. 뭐 다른 카약커들은 생고생 아니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니...ㅋㅋㅋ 한쪽에선 "오케이~" 다른 쪽에선 "내가 그걸 대체 왜 하는데?" 결국엔 등 떠밀려 저녁내기로 넘어갑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해도를 가져온 카약커가 한
명도 없었다는 건데, 나침반이 있으면 뭐 한답니까? (사진에
보면 나침반은 보입니다) 나침반은 아주 순진하게 동서남북만 알려주니 서해바다에서 길을 잃으면 그저 동쪽으로만
가면 언젠간 육지에 닿겠죠? 하지만 해도나 지도 없는 나침반은 앙꼬 빠진 붕어빵이죠. 너무 가까운데다 함께 가는 이들도 이곳에서 자주 타시는 분들이고
10명이나 되니 그랬을 법도 합니다. 맨날 장비 잘 챙겨 다니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아무것도 챙기질 않았으니까요. 헐~
결국 어느 섬이 실미도인지는 3등급 카약커인 OO스님의 승리로 끝나 투어 후에 맛난 바지락 칼국수를 OO즈님이 쏘셨지만, 이날 실미도에 상륙해서 점심을 먹고 온 해안은
실미도에서도 제일 쓰레기가 많고 랜딩포인트도 그리 썩 좋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쓰레기가 많아 작게나마
모닥불을 지펴 따뜻하게.. 드라이팬츠 구멍 내고 왔고요.(ㅠㅠ)
점심 먹고 마침 만조 때라(간조 때는 실미도와 무의도가 연결되기 때문에 일주를 못합니다) 섬
한 바퀴 돌자고 나섰는데 딱 100m 남쪽에 랜딩 하기 좋고 영화 '실미도'에서 익히 보았던 멋진 백사장이 있더라는 겁니다. 이날 이후에 실미도를
두어 번 또 갔는데, 실미도에 있는 소록길(영화에서 총질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길)도 걸어봤죠.
이날 이후로는 아무리 그 지역을 훤히 꿰고
계신 분들을 따라 나선다 해도 제 나름대로 몇 번씩이고 투어 가는 곳의 위성지도와 물때표를 체크하는 것은 물론 나침반을 챙겨가는 습관이 생겼답니다. "가깝다 방심말자 다시 보자 실미도"
사진: 이경복님(한국투어링카약클럽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