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성문 선생님』
-어안 최상호
“야들아, 내가 넌센스 퀴즈 하나낸다.
알아맞히는 놈은 오늘 청소 면제다!”
“우와!”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가 뭐꼬?”
“….”
머리 굴리는 소리로 갑자기 교실 안이 조용해진다.
“죽은 바다를 머라카제? 그걸 생각하면 답이 쉽게 나올낀데...?”
‘죽은 바다는 사해… 그러면 열해, 그런 말 듣지 못했는데…’
“피바다!”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 우.”
그렇다, 아니다로 시끄러워진다.
소민이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아이, 열받아! 꼭 어려운 걸로 사람 골 아프게 만드노,
우리 샘은… 아이, 열 받아, 열. 바. 다… 그렇구나.’
“샘요, 열바다요! 열바다.”
“우와! 맞았다, 열바다가 가장 뜨겁지.
소민이는 청소 면제다!”
소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신굽신 양 손으로 V자를 그렸다.
선생님은 우리들 중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는 작은 막대기로 교탁을 탁 탁 친다.
“아, 아, 조용. 다음 문제다.”
순식간에 쥐죽은 듯하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바다는 뭐게?”
“온해요.”
사자소학 박사인 창영이의 재빠른 대답이다.
“땡!”
“목욕탕요”
“아니, 바다만한 목욕탕이 어디 있노? 다음?”
한동안의 혼란이 가라앉고 모든 아이들의 눈길이 선생님에게 모일 때 쯤,
선생님은 양손을 머리 위로 모으며 가볍게 말했다.
“사, 랑, 해!”
다시 한바탕 우레가 지나간다.
촐싹이 만규는 책상 서너 개를 뛰고 넘었다.
우리 담임- 강오진 선생님은 호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작년에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오셨는데 첫 출근을 하는 날에, 교문에서 슬리퍼 신고 등교하는 6학년들을 무더기로 꿇어앉히고는 반성문 5장씩을 쓰게 했다는 소문으로 하루 종일 학교가 술렁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나는 금세 잊었다.
학년도 달랐을 뿐 아니라, 교실이 있는 건물도 달라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6학년 언니오빠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반성문을 자주 쓰인다하여 “미스터반성문”으로 불린다는 이야기에 혼자 속으로 웃었는데…….
사람의 일은 아무도 미리 모른다던 할아버지 말씀이 왜, 그날따라 갑자기 떠올랐던 것일까?
시업식 날-
운동장에 모여 줄을 선채 선생님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누가 담임이 될까에 온통 신경을 쓴다.
키가 작은 소민이는 맨 앞에서 교무실 현관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얼굴은 알아볼 선생님, 낯익은 작년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반가웠으나, 완전 낯선 얼굴도 보인다.
괜히 두렵다. 체육 선생님이 겁을 주려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차렷 열중쉬어를 몇 차례 하시고는 조회대를 내려오신다. 삼삼오오 모이셨던 선생님들도 우리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시더니 바른 자세를 갖추신다.
조회대 오른쪽으로 낯선 선생님들이 줄을 맞추신다. 새로 오신 분들이다.
어느 정도 낯이 익은 분들은 학년 앞에서 싱글벙글이다.
아이들은 자기 줄 앞을 보랴, 새로 오신 분들을 살피랴 속닥속닥 수근수근 줄밖으로 고개를 기웃댄다.
나는 숨이 막혔다. 강오진 선생님이 바로 눈앞에 서 계신 것이다.
‘아이쿠, 저 호랑이가 우리 담임인 걸까?
죽었다!’
혹시 눈길이 마주칠까 봐 소민이는 일부러 다른 곳을 봐야만 했다.
오늘따라 게양대의 태극기는 왜 저리 펄럭이는 걸까?
비둘기 한 마리가 후드득 교실 너머로 날아가고 뒤를 이어 또 한 마리가 바삐 날아갔다.
뚱뚱이 교무 선생님의 유난히 불룩한 뱃살도 이젠 우습지 않았다.
후리후리한 키의 멋쟁이 교감 선생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재미있는 훈화로 즐거움을 주시던 구레나룻 교장 선생님 말씀도 하나도 재미없다.
오로지 소민이는 교감선생님의 담임 발표에 정신을 쏟았다.
“1학년 1반... 2학년.......5학년 ...
6학년 1반 강오진.”
소민이의 머리 속은 온통 강오진이라는 이름만 가득했다.
‘호랑이, 호랑이, 반성문, 반성문’ 몇 번 중얼거리다가 보니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마침 강오진 선생님은 새로 오신 선생님 대표의 인사 하는 모습을 보시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있다.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얼음땡 놀이를 하는 듯하다.
언제 우리들이 이토록 조용한 적이 있었던가.
꼼짝달싹 않고 제자리를 지킨 적이 있었던가.
옆줄의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동정심이 그득했다.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웃음도 보내준다.
‘아차!’ 싶어 자세를 바로 하자 아니나 다를까 강오진 선생님이 소민이를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입을 앙다물고 눈썹도 찡그린 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순간이동을 펼칠 수만 있었다면 나는 그 어떤 요구도 들어주었을 것이다.
교실로 들어가서는 우리 모두 후다닥 자리를 잡았다.
어느 누구도 짝꿍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못했다.
쥐 죽은 듯한 교실로 옆 교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는 마치 우레와 같았다.
“꼴까닥.”
누군가 침 넘기는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지루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시끄러워지고 나중에는 거의 난장판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건 작년까지의 추억일 뿐이다.
목에 쥐가 날 때쯤 강오진 선생님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씩씩하게 교실 문을 열고 우리 앞에 섰다.
“꼴깍.”
소민이는 침을 삼켰다.
강오진 선생님은 우리들을 한 차례 스윽 둘러보시더니 살짝 웃음을 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들이 와 이리 얼었노. 그리 춥나?
고마 됐다. 힘 빼라. 일 년 동안 잘 지내보자.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데이.”
“…….”
유난한 수다쟁이도 장난꾸러기도 금방 자세를 풀지 않았다.
작년에 회장 부회장을 했던 아이들이 어깨를 낮추자 여기저기서 의자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야, 꼬맹이! 넌 이름이 뭐꼬?”
선생님이 소민이를 지목했다. 울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예에. 강소민인데요.....”
목소리가 차츰 기어들어간다.
“뭐라? 강소민? 종씨네. 반갑다.
그나저나 아침밥도 안 먹고 온 거니? 목소리가 그게 뭐야?”
“아니요, 먹고 왔는데요.”
이를 꽉 깨물자 제법 큰소리가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를 못했다.
사투리에서 표준말로 바뀐 것을 몰랐던 것이다.
“여러분, 반가워요.
나는 여러분과 일 년 동안 함께 웃고 함께 찡그리며 함께 고민할 담임 강오진이라고 해요.
함께 지켜야 할 학급 생활규칙에 따라 함께 반성하고 함께 고쳐갈 것이나….”
‘하나, 둘, 셋, 넷, 다섯….’
소민이는 속으로 선생님이 사용하는 ‘함께’라는 말의 횟수를 세고 있었다.
한참 동안에 선생님은 ‘함께’라는 낱말을 무려 열 세 번이나 사용했다.
‘십삼일의 금요일’- 그랬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출석번호에 따라 이름을 부르고 우리는 그 번호를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소민이는 여학생 중에서 맨 앞 번호였다. ‘6학년 1반 19번, 강소빈’ 이게 올해 운명이다.
출석번호에 따라 끝까지 이름을 부르고 나니 서서히 교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우리들 참을성이 얼마나 가겠는가.
그러나 그 웅성거림도 잠시 뿐- 선생님의 교탁 치는 소리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야들이 정신을 놓고 사나?
여가 시장통이가? 와 이리 시끄럽노, 어이? ”
“ㅋㅋㅋ.”
어디선가 웃음을 참는 고통이 전해진다.
사투리가 낯설었다기보다는 그 억양이 우스웠으니 웃을만한 일인데도 나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꼬? 웃은 눔이? 일로 나온나.”
“…….”
아무도 선뜻 나서질 않는다.
“하나, 두울….”까지 세자 병수가 겁먹은 표정과 몸짓으로 앞으로 나선다.
“이름!”
“저, 김병순…데요. 죄송합니다. 사투리가 웃겨서 그만….”
“뭐라꼬? 웃겨?
야 인마, 네 이름이 더 웃긴다.
남자가 병순이가 뭐꼬?”
“저, 병순이가 아니고, 병수라카이께요, 김,병,수!”
“병수? 거봐 라. 니도 바쁘니까 사투리 나오네.”
그제야 우리들은 참았던 웃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 놓고 웃는다. 참았던 만큼 더 크게 웃었던 것이다. 소민이도 피식 웃었다.
“탕! 탕, 타당!”
어느새 선생님은 교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다.
다시 조용해지는가 싶었는데, 병수가 입을 뗀다.
“그럼 수고하이소.”
고개를 꾸벅 하고는 성큼성큼 제자리로 들어간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말을 이었다.
“자, 6학년 1반!”
“예, 예, 선생님!”
작년처럼 우리는 입을 모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작년에 제대로 습관을 들였구나.
아주 좋아, 올해도 그렇게 하는 거다, 알았니?”
“예, 예, 선생님!!”
아이들 목소리는 교실 천장을 무너뜨릴 듯 컸다.
“조용하게 잘 들어라.
아는 가 모르겠다만 나는 성격이 좀 화끈한 편이다.
함께 정한 생활규칙만 잘 지켜준다면 나도 너희들 자유의사를 너희와 함께 존중할 것이다.
함께 정할 규칙에 대해 말하겠다. …….”
우리들은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고 듣고 적었다. 이야기를 나눌 틈도 주지 않았다.
등교, 자율학습, 교실 출입, 좌석 결정, 포상 징계… 등등 금방 받아 적지 못한 친구는 앞뒤, 옆으로 바쁘게 고개를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공책 한쪽을 다 채운 셈이다.
저학년 때 말고 이토록 바쁘게 받아쓰기를 해 본 적은 단연코 없다. 작년 선생님은 매일 컴퓨터를 이용하였기에 천천히 적을 수 있었는데... 글씨 모양이나 띄어쓰기 같은 것에 신경조차 쓸 수 없었지만 소민이는 그래도 평소대로 할 수 있었다. 성적은 그럭저럭 남 따라갈 정도였으나 글쓰기와 글씨쓰기는 남에게 보여줄 만했던 것이 소민이에게는 행운을 불러온 부적이었다.
시간표를 결정하고 필요한 학용품에 대한 주의가 끝나자 친구들은 잠시 휴식을 원했다.
화장실에는 반드시 둘이서 다녀오도록 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쉬는 시간은 화장실을 다녀와서 책상 정돈을 하는 시간일 뿐이다!
-수업 중 잡담은 고통을 부르는 투자다!
-모든 생활 규칙을 어기는 자는 반성문, 3장이면 학부모 면담이다!
소민이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새겼다.
짝꿍 은지를 잡은 손아귀로 진땀이 흘렀다. 추운 게 다 뭔가. 은지도 나만큼 땀이 고였다.
하루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밥상머리에서 부모님이 담임에 대해 물었지만 소민이는 고개만 흔들었을 뿐이다.
동생이 이죽거렸다.
“엄마, 누난 올해 죽었다. 소문난 호랑이가 담임이야.”
‘아니야!’하고 소리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거 잘 됐네. 선생님은 무서워야 해.
그래야 정신 차리고 학교생활을 하지.”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다행이라는 표정과 말투였다.
“우리 소민이 올해는 성적이 오르겠는 걸?
특별히 혼내 달라고 부탁해야겠는 걸.”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공부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양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공부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구요!’
소민이의 고함은 절대로 밖으로 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말이다. 먹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수업할 교과서와 준비물을 살펴본다. 스스로 생각해도 차분하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탁상시계 초침 소리가 방안에 크게 울린다. 유리창 너머엔 별자리가 또렷하다.
3월 중순 어느 화창한 날-
선생님 책상 위엔 누구 부모님이 보내신 걸까 앙증맞은 화분 하나가 놓여있었다. 네모난 선인장 화분이었다.
선인장보다 빙 둘러선 까만 숯덩이가 더 커보였는데 하얀 조약돌이 참 예뻤다.
자리에 놓인 책가방 갯수로 보아 일찍 학교에 나온 아이는 별로 없었다.
있었더라도 아마도 방과 후 프로그램에 갔으리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안녕. 일찍 왔네? 부지런도 해라.”
복도에서 누군가의 아침 인사말이 들렸다.
화들짝 고개를 들어보니 강오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소민이구나. 와 잠이 안 오드나?”
“…….”
소민이는 그냥 씨익 웃었다.
선생님은 컴퓨터를 켠 뒤, 교실을 한 바퀴 돌며 창문을 하나 둘 열었고, 커튼 높이를 조절하고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소민이도 얼른 내 자리에서 책상 속에 교과서를 챙겨 넣고 첫 시간 공부할 준비를 한 다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야야, 이 화분 누가 갖다 놓았니?”
“저도 몰라요. 오니까 있던데요…”
“고맙기는 하다만…….
나는 이런 것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또 한참 애먹겠군. 헛 그것참.”
“왜요? 5학년 때 선생님은 화분을 참 좋아하셨거든요.”
“이건 선인장이라서 좀 덜 하겠다만….
화분은 늘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하거 든. 안 그러면 이내 죽고 말아.
그럼 보내준 분께도 예의가 아니고 돌보지 못 한 나나 아이들에게도 성질나잖아?
그래서 나는 싫다.”
“당번을 정해서 돌보면 되잖아요?”
“그래? 그럼 이건 네가 돌보겠니?”
“…….
“왜? 싫어?”
“아니, 아니요.”
소민이는 공연히 새로 혹을 붙인 기분이었다. 이러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소민이는 키가 작아도 어떤 책임을 맡는다는 게 부담스럽다. 여태껏 학교에서나 집에서도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낸 기억이 별로 없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이틀이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해지고 마는 이유는 자신도 잘 모른다. 그저 지금 하고있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할 뿐이다. 할 수 없이 아침 스케줄을 조정해야했다. 등교 시간을 10분 앞당기기로 했다. 선인장 화분 하나가 소민이의 일정을 좌우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봄이 익고 태양도 익어갔다.
올 초여름은 너무 덥다.
달랑 세 대 뿐인 교실 천정에 달린 선풍기가 일으키는 바람으로는 더위를 식힐 수가 없었다.
슬슬 교실이 어지러워진다. 아이들이 가지고 온 물병-작은 페트병이었지만-이 비어지자 말자 교실 구석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선생님에게서 담배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코를 막으면서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담배 피지 마세요. 건강에 해롭대요. 간접흡연이 더 위험하대요.
아이들은 누구에게 뒤질세라 쉬지 않고 재잘댔다. 그래도 선생님은 끄떡도 않았다.
수업만 마치면 교실 밖으로 나가셨다. 곧 담배 냄새를 데리고 돌아오셨다.
“얘들아, 누구에게도 나쁜 버릇이 있는 법이지.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병 같은 것이지.
너무 그러지 마라.”
가끔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고백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무척 더웠다.
아이들은 등교하면서 가지고 온 얼린 물병을 손수건으로 싸서 놓고 틈만 나면 마셔댔다. 금세 비워지면 수돗가로 가서 수돗물을 받아오거나 급식실로 가서 끓인 보리차를 몰래 담아왔다. 그래도 갈증은 가지지 않았고, 점심을 먹고나서는 수돗가를 찾는 발걸음이 더욱 잦아졌다. 수돗가에서는 연신 물싸움이 벌어진다. 분수를 만들어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마구 뿌려댄다. 머리가 젖고 옷이 젖었다.
아뿔사! 시작종이 울린 줄을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다.
“동작 그만!”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강오진 선생님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 이 근처에 있는 모두, 학년별로 집합해라.”
아이들은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독사를 만난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너, 너, 너는 교실로 들어가라.
물에 젖지 않은 걸 보니 구경꾼이었거나 물 마시러 왔을 테고….
너는 아주 목욕을 했네. 잘 하는 짓이다.
물 부족 국가에 살면서 귀한 물을 가지고 장난을 쳐?
그것도 수업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차라리 땀으로 목욕을 해라.”
모두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운동장을 여섯 바퀴 돌았다. 안 그래도 더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선생님은 세수를 하게 하고는 수돗가에 꿇어앉히더니 운동장이 들먹거리도록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
-이러고도 내가 6학년이다.
내가 왜 이럴까? 물을 아껴 씁시다!
친구들의 외침으로 본관 2층 3층 교실에서는 창밖으로 비죽비죽 얼굴이 나타나고 꽃처럼 벙긋 피었다.
소민이도 유리창을 통해 그 광경을 보아야 했다. 3층까지 들려온 한마디.
“야, 너희들 내일 아침까지 반성문 제출, 알겠나?”
5월부터 바뀐 짝꿍 민석이가 오늘 하루 종일 보이질 않았다.
‘방과후 프로그램에 나가는 아이도 아닌데…?’
민석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지 늘상 같은 모습 같은 옷차림으로 지낼 뿐이다. 그래도 항상 싱긋거리며 지낸다.
특별하게 친한 아이도 없지만 따돌림도 받지 않는다.
막상 짝꿍이 되고 보니 가끔 얼굴이 찌푸려질 때가 있었다.
체육 시간을 마치고 들어오면 땀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소민이도 자신도 모르게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던 것이 생각났다. 선생님도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나보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고개도 갸웃하며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다.
솔직히 혼자 지내니까 아주 편하였는데…. 점심 급식을 하고 나자 민석이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선생님은 민석이를 데리고 상담실을 다녀오셨다. 별 다른 눈치를 챌 수는 없었지만 둘 다 평상시와 같았다.
소민이는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도덕 시간에 선생님의 인생 강의가 그 답을 알려주었다.
“ ... 가슴이 답답하면 숨쉬기 운동을 자꾸 하면 되고,
배가 고파 먹을 게 없으면 수돗가에서 물이라도 마시면 되고,
자꾸 눈이 감기면 아무데서나 잠들면 되고 공부하기 싫어도 학교 와서 제자리에서 졸면 되고
몸에서 냄새 나면 집 에서 찬물로 목욕하면 되지. … ”
소민이는 민석이가 무슨 짓을 하느라 학교에 늦었는지 알았다. 청소 시간에 물어보았다.
“민석이 너 찜질방 갔었구나? ”
“…….”
민석이는 눈망울만 굴렸다.
“내가 냄새난다고 해서 기분 나빴니? 그게 아니었는데….”
민석이는 그냥 씨익 웃었다. 내가 거들 틈도 없이 혼자서 이 구석 저 구석 열심이 쓸고 닦고 하였다.
그날따라 왠지 푸석푸석하던 그 애 머리도 무스를 바른 것처럼 생생하게 일어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회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려는데 들려온 선생님 말씀-
“야, 김민석 너 내일 아침까지 반성문 써와.”
그날 이후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아 민석이네 형편도 약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먼데로 일 떠났다는 것, 어머니 혼자서 식당 일로 집안 살림을 꾸려간다는 것,
중학생 누나가 한 성질 한다는 것…. 다른 아이들이 수군거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 온 은지가 내게 살짝 귀띔을 해 주었다. 얼른 화장실로 갔다.
소민이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그냥 넘길 일이 결코 아니었다.
-소민이와 민석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도라에몽-
-민석이를 좋아하는 건 미친 짓이다-
정말 기가 막혔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나보다. 선생님이 오신 것도 몰랐으니 말이다,
강오진 선생님은 무척, 심하게 화를 냈다.
화장실로 가서 락스를 이용해서 낙서를 말끔히 지운 다음 책상 위에 무릎을 꿇게 하고는 양손으로 만세까지 부르게 했다.
“이 녀석들, 누가 뭐래도 이건 아니다.
상상으로 없는 일을 사실인양 퍼뜨리면 이건 무고죄에 해당한다. 형사처벌 감 이다,
글씨를 보아하니 누구 짓인지도 알겠는데… 요게 더 문제란 말이지.
남자가 여자 회장실에 들어가서 요런 싸가지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단 말이다.
너희 모두 반성문 1장씩 내일 아침까지 직접 제출할 것!
400자 미만이면 숫자만큼 충격파를 맞게 될 것이다. 이상!”
아이들은 웅성거렸지만, 대부분이 그 아이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소민이는 그게 누군지를 알듯 모를듯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소민이가 무슨 반성문을 써야 하나, 왜 내가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콱콱 쑤셨다.
집에 와서도 학원에 가지 않았다. 책상 앞에 머리를 싸매고 앉았으려니 어머니가 까닭을 물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으시더니 정색을 하고 말씀하였다.
“소민아, 네가 반성할게 없다고?
내가 듣기론 그건 아닌 것 같다.”
“왜요? 내가 무얼 반성해야 하는데요?”
“우선 네 눈으로 그런 못된 낙서를 봤다면 얼른 네가 지웠어야지.
그리고 울긴 왜 울어? 그 아이가 누군지 알던 모르던 전체 아이들에게 경고 했어야지.
민석이는 그냥 짝꿍일 뿐이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대하고 있다고 왜 말을 못했어?
소민이는 네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나본데 아니지. 너희 모두가 피해자야.
생각해봐라.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 손가락질할 때 나머지 네 손가락은 누굴 향하지?
그래. 바로 너 자신을 가리킨단다.
야, 너희 선생님 멋쟁이시다. 얼른 반성문 써라. 나도 먼저 좀 봐야겠다.”
어머니가 나가시자 거울 앞에서 손가락질을 해보았다. 집게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거울 속 나였다.
구부린 네 개의 손가락은 내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부터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200자 원고지 한 장도 채우지 못했던 소민이가 A4 한 면을 다 채운 뒤 뒷면에까지 이어졌다.
저녁 식사 때 아버지로부터 놀림을 받고, 동생의 비웃음도 샀지만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씩씩하게 웃으며 민석이와 다른 아이들에게 아침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
|
첫댓글 역시 어안 최상호 선생님은 동작이 빠르시어 벌써 동화 작품 한 편을 올리셨군요
동화가 귀한 우리 소백동인회 연간집에 멋진 동화가 실리게 되어 빛을 내겠군요.
감사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