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에서 태어난 아기가 늙은이가 되기까지
늙은이가 되어 이제야 제가 살아온 때(시간)를 돌아봅니다.
창조주의 뜻에 따라 세상에 보내심 받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가정의 품에 안긴 지 여든 다섯 해가 되어갑니다.
일본 제국주의 막바지에 태어나
여섯 살에 우리 나라를 되찾아
애국가 넉 절을 마음껏 부르게 되어,
그 때 이미 청년이었던 오빠들이 번쩍이는 커다란 나팔을 불며
벅찬 기쁨의 흥분으로 높이 들떠서
북간도 용정의 거리를 행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서언합니다.
그 감격도 잠깐,
해바라기 씨를 마술사 마냥 술술 까먹던 러시아 군인들이 물러나더니,
공산 세계가 된 북쪽 판도에서 믿음생활을 심히 억누르니,
도저히 살 수 없어,
숨 죽이며 원산을 거쳐,
한 밤중에 임진강을 아버지 등에 업혀 건너왔지요.
서울 와 김 재준 목사님 댁 방 한 칸에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목회 일 찾으신 김천에 가서 초등 학교 두 해를 마치고,
서울 신암교회를 맡으신 아버지 돈암동 사택에서
6.25 전쟁을 맞게 되었고,
제주도로, 거제도로 피난민 생활을 하며
초등학교 다섯 곳을 거쳐
국가 시험을 보고,
부산 영도에 있던 피난 중학교 천막교실에 들게 되었지요.
다음 해 내 생일에 휴전협정 되어
드디어 서울에 있는 본교에 돌아와서,
대학 진학까지 쉬이 하고,
바라던 무의촌 지망 의사가 내 길이 아니라고 여겨,
본과 2학년에 몸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을 목표로 해
이제까지 길고 긴 날을 감사히 살고 있지요.
"이제까지 지내온 것 주님 크신 은혜라"
찬송을 절절한 감사의 마음으로 늘 부르는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다 다른 늙은이들의 서로 다른 부모, 그리고 어린 시절
그러면서 멀고 가까이 있는 이웃 늙은이들에게 눈을 돌려봅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생각으로,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없지요.
신문화를 접하고 눈을 뜨게 하려는 정신을 지닌 젊은이들을 길러낸
상동 교회에서 파견한 청년 정 재면 선생이 간도에 오셨는데,
마침 실학파 사람들이 정신 차리며 살자고
공동체를 만든 간도 명동촌까지 이르신 거지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지요.
새 교육을 베풀기로 하고,
모두 기독인이 되기를 권했지요.
그 때까지 애칭밖에는 정식 이름 없는 여아들에게 이름을 만들어 불러 주시며,
(돌림자 믿음 '신'자를 지닌 이름이었대요. 어머니가 늘 내가 닮았다시던 이모 한 분은 신희였고,
내 어머니는 신묵이라 이름 받으셨자요. 이모 가운데 또 한 분은 신애였다지요.)
아들 딸 구별 말고 이 나라를 구할 하나님 자녀들로 길러내려 하셨지요.
그렇게 그곳을 거쳐간 분들은 그 뒤로도 성경학교를 다니시고,
가르치시고, 여자 독립군에 가입하셨지요.
나라 잃고 집을 떠난 어른들이 그 곳을 많이 거쳐 가시며
그곳 젊은이들을 길러내는데 한몫하셨다지요.
(나중에 그 분들 가운데 한 분, 역사가 황 의돈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지요.)
내 할아버지가 재무 담당자셨어요.
외 할아버지는 성경을 다 읽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교회에 스스로 들어서셨지요.
유교에는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무릎을 꿇게 되신 거지요.
내 부모님은 그 명동 소학교의 첫 학생이셨어요.
나는 우리 집 밥을 먹지 않은 독립군이 없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어요.
다 다른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웃을 돌아보니 모두 제 각각 다른 부모님 품에서,
모두 제각각 다른 가르침을 받으며,
모두 제각각 다른 사랑을 받으며,
모두 제각각 다르게 살아온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모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모두 다르게 자라고,
모두 다르게 살고,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으니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은
나와 다른 사람을,
적어도 나만큼이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선 서로 잘 알아야 하고,
서로 공감하면서,
함께 사는 것을 실천해야 하겠다 여깁니다.
그래야 서로 편 가르지 않고,
서로 소통하면서,
평화롭게,
잘 살수 있겠다 싶없지요.
나 혼자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서
몹씨 애써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마음 건강이라는 목표가 생겼지요.
우선 내가 여자이니 여성들과 힘을 모으자 싶었어요.
<마음이 건강한 여성들이 만드는 착한 세상>을 목표로 삼았지요.
어머니에겐 힘이 있다, 어머니들과 함께
가정을 움직이고,
아이들을 기르며,
우리 사회를 주름잡는 여성,
힘을 가진 어머니들과 함께 해야겠다 마음 먹었지요.
각자 나서, 자라며, 바뀌고,
나이 답게 때마다 성숙해온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나서,
다르게 자라고,
다르게 성숙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는 서로 알아볼 수도 없고,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니까요.
서로 나누며, 거울 되어 서로 알아봐 주고,
힘을 북돋으며,
함께 사는 모임을 지금까지 해 오려 애쓰고 있지요.
그전 같으면 다른 사람을 보면
"왜 저러지? 이상해!"
자기 안목으로만 봐 왔는데,
"내가 다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구나!"
서로 "저 사람은 그럴 수도 있구나!" 고개 끄덕이게 되어 갑니다.
그러니 혼자 잘난 척 할 수 없게 되지요.
"하나님 밖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하셨는데
어찌 자기만 옳다 하겠나요?
의인이 아니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인데
내가 어찌 사랑하지 못하겠나요?
서로 사랑하니,
서로 신뢰할 수 있지요.
서로 믿으니 실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게 되지요.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게 되어야지요.
그러니 우리에 호흡이 길어지고,
참을성도 자라지요.
사랑을 믿고 자랐지만 늙은이가 처음 되니 당황스럽기도
우리 모두
갓 태어나 어린이 시절을 보내면서
사랑하는 이웃과 동무들 사이에서
어른들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믿고,
자신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자라고, 바뀌고, 그때답게 성숙해 갑니다.
그러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또 자라고, 바뀌고 성숙해 갑니다.
앞선 시기를 경험했으니,
곁에 있는 동무들도 알게 되고,
동기간에도 믿고 따르게 됩니다.
또
자기 뒤를 이어 자라는 다음 세대도 이해하게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점점 늙어갑니다.
그런데도
늙은이가 처음 되어 당황하게 됩니다.
노후를 돈으로만 준비할 수 있나?
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침이
'먹고 살기'만에 급급하게 되어 더욱 여유를 잃게 합니다.
현장에서 은퇴하면 버틸 힘을 잃었다 느끼게 만듭니다.
간난쟁이는 돈 벌이 못했어도 앞으로 할 거라는 기대라도 받지요.
은퇴라 도장 찍고는 코 앞에서 문을 꽝 닫습니다.
괄호 바깥으로 밀려난듯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노후 준비'는 돈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어쩌라구요!
몸도 약해집니다.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라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지고, 윤기를 잃습니다.
저도 골다공중으로 키가 8쎈치나 줄어들고,
근육이 빠져.
온 몸이 주름투성이고,
허벅지는 가늘어지고,
엉치 살은 흐늘거립니다.
젊음의 든든함을 다 잃는 것 같습니다.
‘젊음’이 기준이 될 수 없다
또 역시 우리 문화가 젊음을 기준 삼습니다.
이는 틀린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삶의 시기, 모두 귀하게 여기십니다.
"어린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어린이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젊은이 답게 높은 뜻을 위해 몸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귀히 기록하셨습니다.
늙은이의 보람도 눈 여겨 보십니다.
아기 예수를 감격으로 맞은 할아버지 시몬과 할머니 안나는
성전에서 메시아를 만나 평생의 구원의 높은 소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린이 때도 귀하고,
갓 태어난 아기의 아름다움과
어린이들의 생기와
젊은이의 탄력이 그 때마다 다른 아름다움으로 있었듯이
늙은이 다운 모습,
이도 각기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을!
늙은이로 살아보니
그러면서 우리는
또
아직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삶의 마지막 죽음에 이를 것을 예측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이제는 살 날이 아주 짧아진 것을 압니다.
돌아설 수 없는 막다를 골목에 더 가까이 들어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땅의 삶의 마침표를 찍는 것을 이미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막막 하게 느낍니다.
특히 여성들은 자녀들 기르기에 줄곧 외곬으로 달려오기만 해 왔습니다.
가족들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밖에 다른 생각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몸이 편하기만 기대하는데,
이제 좀 숨 돌리고 느긋이 즐기며 살고 싶은데,
함께 살며 즐길 사람들과 같이 살아 버릇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제
혼자이고,
너무 늦었다 싶으니.
앞이 보이지 않으니,
깜깜하여,
허둥대며
힘을 잃게 됩니다.
시대가 바뀌어 사는 방식도 점점 생소해 갑니다.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을 무시하는 것 같이 느낍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문 닫고 제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젊은이들의 등짝만 보게 됩니다.
이 때도,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을 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 뜻보다 사람의 뜻으로 살아온 사람은 실패합니다.
사람은 부족하니까요.
사람의 생각은 이기적이고, 좁고, 차원이 낮으니까요.
삶의 어떤 시기에 처한 어떤 이웃도 귀하게 여기는
친절한 사랑으로 이웃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성령이 그 높으신 뜻을 이루십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잘난 척하려 착한 일 한 것이 아닙니다.
도움 받는 사람을 자기보다 못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 주는 사람과 도움 받는 사람의 인권을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 하나님의 자녀니까요.
이웃 사랑을 적선하듯,
자선 사업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알아주는 게 절실하다
우리 늙은이끼리도 서로 알아주어야,
서로 자기를 제대로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와도 늙은이들이 먼저 알아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알아들을 수 있게,
오해하지 않게,
적합하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으로 소통하게 됩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도 함께 구원의 약속을 받습니다.
몸과 마음이 편한 것만이 좋은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을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겪으신 고난은 고난주간에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세포분열의 아픔이 있어야만 하듯이,
어려서 생장통 겪듯이,
출산할 때 기꺼이 진통을 참았듯이
늙어지는 몸의 바뀜으로 오는 아픔,
요단강 건널 목에 이르는 아픔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요즘 발달했다는 '치유 문화'가 진통만을 바라게 합니다.
그냥 기분 좋고, 편한 것이 참 '치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적극의 극복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치유의 길을 믿으니까요.
늙은이가 되어서도 건강하게 변화하기!
세상에서 늙은이들이 못 된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고집 세고,
완고하고,
염치 없고,
대접받기만 좋아하고,
고리타분 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 그럴까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제한된 틀에 갇혀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자신이 살아온 것이 완전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웃의 처지를 눈 여겨 보고,
이웃의 신음 소리를 세심히 듣고,
이웃의 신발을 신어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늙은이들에게 기대하는 삶이
사려 깊고,
참을성 있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원숙한,
앞선 이로
서로 존중하는 사랑을 받게 될 거라 믿어요.
누구나 주님 안에서 자기답게 삶을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고,
주 뜻 안에서 자기답게 풍성한 삶을 살다가 이 땅을 떠나
주님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걸 믿어요.
뒤에 남은 이웃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어,
영혼의 소통을 계속할 거구요.
그러니
우리 모두 늘 모이기 힘써야지요.
ㅁㅇ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