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1-27, 사울이 죽은 후에, 24.11.6,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무엘서’ 한 권입니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구약 히브리 성경 중에 네 권의 ‘전 선지서’로 분류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무엘서입니다. 유대인 전통은 역사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네 권을 역사서가 아니라 ‘전 선지서’로 분류했습니다. 이것이 70인 역, 즉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역사서로 분류되었고 사무엘 상하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기점이 사울의 죽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죽은 후에” 이렇게 시작되지 않습니까? 히브리어 성경이 같은 ‘전 선지서’로 분류했던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시작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고,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는 것처럼 사무엘 하도 “사울이 죽은 후에”로 시작하여 인간 지도자가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무엘 하는 사울의 죽음부터 다윗 왕정의 확립과 다윗의 생애 마지막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는 않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은 여전히 사울의 집안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2장에 가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만 세움을 입습니다. 언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까? 사무엘 하 5장에서 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후 근 2년이 지난 사무엘 하 5장에 가서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왕국이 아브넬의 배신과 부하 장수들의 암살극으로 막을 내릴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식 취임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지 15년 만입니다(삼하 5:1-3).
그리고 사무엘 하의 나머지 부분은 다윗의 업적과 실패의 기록으로 구성됩니다. 5:4-10:19까지는 이스라엘의 공식 왕이 된 다윗이 여부스 사람의 손에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법궤를 그곳으로 옮겨 신정정치의 토대를 마련하는 다윗의 다양한 정치, 행정, 군사적 업적이 소개됩니다. 11장부터 20장까지는 밧세바 사건을 비롯하여 다윗의 뼈아픈 실패의 기록들이 나옵니다(11:1-20:26). 그리고 21장부터 24장까지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일종의 부록으로 사무엘서 전체의 주제를 반영하는 일화들이 대구구조로 서술됩니다. 특별히 마지막 24장은 다윗의 인구조사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끝이 나서 다윗의 실수와 취약함과 한계를 그대로 노출 시킵니다. 사울만 아니라 인간 왕이라면 다윗마저도 참된 소망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무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1장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겨 가족을 찾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울이 죽는 그 순간, 다윗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말렉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했던 왕인 사울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주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의 교만과 불 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을 물리치고 있는 다윗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의 죽음에 담겨 있고, 그와 대조되는 다윗의 승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십니까? 인간의 절망과 실패로부터 구원의 희망을 일구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말입니다.
사무엘하 1장은 이 섭리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에게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지는’ 정도의 기쁜 소식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 아닙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안도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옷을 잡아 찢고 저녁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합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극도의 슬픔으로 애도했고 다윗으로부터 받을 보상을 기대하고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한 아말렉 소년을 처형합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조가를 지어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도록 명령하여 온 나라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이끕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지어 만든 이 애가의 제목이 ‘활의 노래’입니다. “어찌하여 용사들이 쓰러졌는고”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적들의 활에 쓰러져 죽은 비극을 애도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은 단지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죽음이 아닙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택으로 허락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죽음으로 언약 백성의 치욕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 애가에서 요나단과 자신의 우정만 아니라 사울의 장점을 극도로 부각시켜서 사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 소식을 알려준 아말렉 소년이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뿌렸지만, 사울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만 했던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왕과 왕자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과 좌절에 빠진 백성을 위해 사울에 관한 좋은 점을 부각시켜 노래합니다. 자신에게 나쁜 기억만 안겨주었던 사울을 영광스럽다고 칭찬합니다. 위선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고통을 안겨주었던 사울의 생애와 그의 죽음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좌절과 슬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원수가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한 아말렉 사람에 의해 사울이 죽은 사실을 더 슬퍼하고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유불리보다 여호와의 뜻과 주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보면 그가 무엇을 열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합니까? 나를 괴롭히던 원수가 죽었다는 기쁨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며 애도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울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힘들게 했고 고통스럽게 했고 아프게 했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자신을 연단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울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사울 때문에 더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으며 악한 사울 때문에 오히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고난받았던 근 15년 이상의 오랜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압니다. 사울이 살았다고 자신의 삶이 더 비참해지지 않으며 사울이 죽었다고 자신의 인생이 더 잘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함을 이제는 압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울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정적이 아니라 그저 불쌍한 존재이며 긍휼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시원함이 아니라 가슴을 아리는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죄악으로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사울의 삶이 진정으로 슬펐기에 옷을 찢고 마음을 찢어 애통해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마음이 중요합니까? 왜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이런 마음이 있어야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애통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