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과 유등(流燈)이야기
남강유등축제 야경
아들아..요즘 우리 진주시는 매년 돌아오는 큰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단다.
너도 이미 여러번 봐서 알겠지만, 기억하지? 진주남강유등축제 말이야.
10월만 되면 진주남강유등축제로 불꽃놀이도 하고, 화려한 상징등 행렬에..
거리엔 사람도 많고, 시내에 차도 많고..남강엔 유등이 넘쳐 울긋 불긋하고..
진주성내도 남강 고수부지도 거닐어 보고 그랬었지.
남강유등축제 야경
이 축제기간엔..진주성도 그렇고 남강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유등의 모습을 보러
진주의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진주를 찾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화려한 유등과 진주 남강의 야경만 즐길뿐..왜 진주에서, 진주성과 남강에서
이 축제가 열리는지, 왜 매년 10월에 축제를 하는지..그 기원은 무엇인지 모르고들
보는 것 같아. 알고 보면, 훨씬 더 의미있는 시간이 될텐데 말이지.
요새 아빠하고 엄마 TV에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을 즐겨본단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이 그들 나라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며 체험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단다.
이탈리아, 멕시코, 독일 사람들이 다녀갔는데..그 나라 사람들의 성격이라 할지,
그 개성이 드러나더구나. 난 특히 독일 친구편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공감했단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면..제대로 된 여행자라면 그런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독일 친구들..진주에 한번 왔으면 좋겠다. 보여주고 싶은 곳도 많고..
그들의 눈에 비친 진주성과 남강, 그리고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비칠지 기대도
되고 그렇네..아마도 그 친구들이라면 그 진지함으로 진주의 진가를 제대로 봐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본 그 친구들은..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친구들이었으니까.
특히 마리오란 그 친구는 뭔가 더 나눌 수 있는게 많을 것 같기도 해.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진주성)
아들아..진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어.
충무공 김시민(忠武公 金時敏, 1554~1592) 장군이지.
보통 충무공하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만을 떠올리는데..조선시대에만 충무공은 9명이나
있었단다.
충무란 시호는 조선시대에 무장으로서 가장 큰 공헌이 있는 훌륭한 장수에게만 주어진
영예인데..우리 진주는 그 충무공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두분..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충무공 김시민 장군 모두 일생에서 중요한 계기를 맞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이 아닐까 한다.
진주성 촉석루와 남강, 의암, 진주교 정경
아들아..지금부터 약 400여년 전, 1592년 우리나라는 일본이 일으킨 명분없는
전쟁 때문에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엄청난 고초를
겪었지. 거기에...마을은 물론, 논밭도..산도, 강도 모두 황폐하게 변해버렸지.
그게 다..저 일본의 전쟁 범죄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 전쟁에서 우리는 한달이 못되어 서울을 잃고, 왕은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했고..심지어 중국으로 나라를 버리고 가려고 했다고 까지 했단다.
그러나..그런 위기에도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를 살며..용감하게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바다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있었고, 육지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있었단다..
조선의 육군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있었단다.
김시민 장군은 7년 조일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에 진주판관이 되어 진주로 오셨지.
그전엔 훈련원 주부란 벼슬에 계셨을때..군기가 해이하고 무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염려하여 나라에 변란이 있을때 큰 화근이 되니 빨리 시정하자 건의했는데,
상관인 병조판서가 무시하며 수모만 당하자 쓰고있던 전립을 벗어 그 병조판서 앞에서
밟으며 사직서를 던진 적이 있었단다.
그만큼 소신이 있고, 옳은 일을 하는데 두려움 없었던 강인한 분임을 알 수 있지.
그리고 벼슬없이 몇해를 지내다가 저멀리 북방에서 사나운 야인(여진족)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다시 복직하게 되었단다.
진주판관이 된 김시민 장군은 일처리가 공정하고, 위엄을 세우니 백성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해. 그렇게 부임해서 능력과 인품이 뛰어남을 인정받아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된 것이지.
7년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진주목사 이경이 피신했다가 지리산에서 병사했고,
초유사로 진주로 내려온 학봉 김성일 선생이 진주판관이던 김시민 장군을 불러들여
목사직을 대신케 하였지.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을 고쳐 쌓았고, 새로 병사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을 시켜
강한 군사를 양성했단다.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제조하고, 또 우리의 화약무기인
각종 총통을 만들었지.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군사와 무기가 후일 진주대첩..7년 조일전쟁사에 빛나는
큰 승리를 이룬 기초가 된 것이야.
김시민 장군은 강하게 조련한 군사들을 이끌고, 진주 주위의 왜군을 토벌했어.
사천, 고성, 진해부터 거창에서도 왜군을 연달아 패배시키고, 왜군 장수 평소태를
생포하여 의주 행재소로 보내..그 공로로 정식으로 진주목사가 되었지.
古 진주성도. 진주성은 내성과 외성 구조로 되어 있었고, 현재는 내성만 남아 있다.
왜군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연달아 패배하고..또 전라도로 가려는 여러 시도가 막히면서
진주를 주목하게 되었어.
왜군이 경상우도 지역에서 연패한 것은..그 주력군이 진주성의 본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왜군이 전라도로 가려면 반드시 진주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부산의 왜군은 결진하여 2만, 3만의 대군으로 진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어.
왜군은 나가오카 타다오키와 하세가와 히데카즈가 이끄는 3만으로 김해와 함안,
창원을 거쳐 진주로 공격해 왔단다.
그에 반해 진주성에는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7백과 곤양군수 이광악 장군이 이끄는
1백을 더해 3천8백이 있을 뿐이었지. 진주성은 넓고 지켜야 할 곳은 많은데..군사는
모자랐단다.
10월 4일부터 10월 10일까지..진주성의 우리 군민은 7~8배나 많은 병력의 왜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전투를 벌여야 했지.
충무공 김시민 장군 존영(괴산 충민사)
전투 전에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군민을 불러모아 이렇게 말씀하셨어.
"나는 마땅히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 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를 따르는 자..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멸(滅)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때까지 싸우리라!"
불리한 전투였단다. 하지만 반드시 진주성을 지켜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싸웠고,
그래서 전투는 늘 처절했지..하루에도 몇번씩 전투가 벌여졌단다.
우리의 병력이 작은 것을 감추려 성벽에 허수아비도 많이 세워두고, 여자들에게도
남자 옷을 입혔지..왜군이 가까이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활도 쏘고 총통도 쏘도록
해서 무기를 낭비하지 않으려 애썼단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에게 돌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어 막기도 했단다.
왜군이 포로로 잡은 우리 아이들을 시켜 노래를 불러 성안의 민심을 흔들려 했지..
그러자 김시민 장군은 밤에 악공들을 시켜 피리를 불러..왜군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단다. 그렇게 심리전도 펼쳐졌단다.
진주는 조선시대에도 아주 중요한 곳이란다. 그 진주의 위기를 구하려고 주변에
많은 의병부대가 모여 들었지..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선봉장인 심대승을 보내
진주성을 지원했고, 고성의 최강, 이달 의병장..그리고 산청 단성에는 정기룡과
김준민 장군이 ..호남에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장 부대도 진주성을 구하러 왔지.
그렇게 1592년 10월 4일부터 10월 10일까지..진주성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단다. 우리 진주성의 모든 군민과 주위에서 지원하러 온 의병들의
연합작전 덕분이었지..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이끈 사람이 바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었단다.
이 전투에서..왜군은 3만중 무려 1만이나 되는 군사가 죽었다고 해..
그리고 장교급은 3백이 죽었다고 일본측 기록에서 전하고 있지..
일본으로선 7년 조일전쟁에서 당한 최대의 패배이고, 최대의 수치였지.
그런 대역사를 그때 진주성에 있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루어낸거야.
충무공 김시민 장군 묘소(괴산 충민사)
전투 마지막 날에..불행히도 김시민 장군이 왜적의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18일 눈을 감으셨단다.
그때 우리 진주성의 모든 군민이 다 어버이를 잃은 듯..대성통곡하였지.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조정에서 김시민 장군을 경상우도 병마사를 겸하게 했는데
그 소식이 닿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지금..
충북 괴산군의 달천이 흐르는 강가 언덕의 충민사(忠敏祠)에 잠들어 계신단다.
2년 전이던가..그때 여름휴가때 아빠, 엄마랑 가서 봤었지?
그리고 아빠가 향을 피우고 인사드려라 했잖아.
아빠는 지금도 한번 생각해 보곤 해.
만약에 김시민 장군께서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계사년 진주성 전투의 양상은
또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7만 민관군이 모두 산화한 그런 비극이
없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것은 우리의 비극이 되고 말았구나.
김시민 장군 사후에..7년 조일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여러 공신을 포상하는데
조정에서는 김시민 장군에게 선무공신2등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상락군이란 군호를
내리며..충무(忠武)란 시호를 내렸다고 한단다.
사실..원균 같은 사람도 선무공신1등인데 김시민 장군이 2등이라니..
이런 말도 안되는 포상이 있을까 싶다. 그만큼 선조란 임금이 잘못된 것이 많았어.
어쨌든 그렇게라도 김시민 장군은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지.
그 내력을 기록한 김시민장군 선무공신 교서가 있단다.
이 교서가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이 교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거야. 이때 2005년 도쿄의 한 경매장이었다고 해.
그러자 우리 국민들이 성금 모금활동을 펼쳐 환수해 오는데 성공했단다.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는 우리 국민이 지켜낸 보물 중의 보물이 된거란다.
아들아..10월 10일은 진주시민의 날이란다.
10월 10일이 진주시민의 날인 이유는..아빠가 벌써 말했지?
1592년 진주대첩의 역사를 이룬 바로 그날이란다.
1592년 10월..진주성 전투가 벌어질 때..진주성 남쪽을 흐르는 남강에 수많은
등을 띄웠단다.
그 유등은 남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려는 왜군을 방해하기 위해 띄운 것이기도 하고
진주성과 외부의 지원군을 잇는 연락망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띄웠단다.
또..진주성안의 군민이 진주성 밖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도 띄웠단다.
지금은 화려한 색색의 모양을 자랑하는 큰 유등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 하지만,
알고보면 그 유등엔 이른 아픈 역사를 살아가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리고..아들아, 유등의 화려한 모습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또 한편으로 그날
진주성에 있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그 마음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싶어.
아들아..나는 네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진주대첩의 대역사를 이루어낸 그분들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길 바래.
그리고..남강유등축제와 진주시민의 날이 그 진주대첩의 역사에서 온 것임을 알고,
그 의미를 새겨보면 좋겠다.
이제는 또 충무공 이순신 제독만 있는게 아니고 충무공 김시민 장군도 있음을
알았으면 해.
얼마전..아빠, 엄마하고 같이 갔던 달성의 녹동서원 기억하지?
거기 해설사 선생님하고 대화하는데..녹동서원을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
그리고 그중엔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그들이 진주성을 알고 있다고 그러네..자신들이 7년 조일전쟁 중 당한 최대의
패배임을 안다는 거야. 그들이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그랬다 하더구나.
그 얘기를 듣고 아빠는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선학산 전망대에서 본 진주성과 진주 시가지 모습
1592년과 1593년 진주성 전투를 치루었던 그분들의 후예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너의 DNA 속에 잠재 되어 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너의 핏줄 속에 흐르는 그 뜨거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기억하기를 바래.
아들아..너는 진주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과는 진주남강유등축제를 보고 생각하는게
남달라야 하는 법이다. 이것도 네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라 생각해.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