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가보려 했던 때는 무척 오래 전이였다.
차일 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야 가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정리가 될듯 해서 준비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유명인사들의 묘에는 간략하나마 설명이 있고, 또 그렇치 않아도 대략 알 수있는 분들이였다.
하지만 생각밖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분들이 거의 모두였고,
내가 모른다고 해서 이분들의 옛날 조선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였다.
결국 이틀만에 다시 찾아 갔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묘지 옆에 설명이 있는 분들은 어떤 분인지 알수 있었지만
때로는 나중에 찾아봐도 누구인지 알수 없는 분들도 많았고,
더구나 영어가 아닌 제2 외국어로 표기된 묘비명은 누구인지는 커녕 읽을 수도 없었다.
위의 그림처럼 묘지에 대한 안내판은 여러 형태로 있지만 이 조차도 유명인사만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들이라고 그분들의 조선에 대한 공적이 없을까?
작은 공적이라고 해서 무시되는 것은 아닐까?
어디엔가 이분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을것이다.
몇번을 찾아 뵙더라도 한분, 한분, 그분들이 어떤 연유로 해서 타국 땅에 잠들었는지 알고싶다.
Charles A. Sauer(찰스 사우어) 1891 ~1972.
Marguerite S. Sauer(마가렛 사우어) 1896 ~ 1981.
Robert G. Sauer (로버트 사우어) 1925 ~ 1995.
Missionaries in Korea(한국에서 선교) 1921 ~ 1990.
Buried in Ohio, USA(미국 오하이오에 영면)
"이 분들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여 2대에 걸쳐 그들의 전 생애를 한국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임".
A구역으로 가면 제일 처음 왼쪽에 있는 이 碑를 보게 된다.
뒤는 경사가 심한 곳이라 묘는 없다.
누구일까?
돌아와서 여기 저기 찾아 봤다.
다행하게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찾게 되었다.
"한국감리교회"는 세 사람의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선교 부흥을 일으켰다.
첫 20년(1885-1902)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주도했고,
다음 40년(1900-1940)은 "노블" 선교사가 했으며.
다음 20년(1945-65)은 "사우어"(Charles A. Sauer, 1891-1972)선교사가 한국감리교회를 주도(선교재단 책임자) 했다.
"찰스 사우어"는 교육자, 역사가, 목회자, 행정가로 아름다운 영향을 준 선교사이다.
특히 한국전쟁 전후로 복구 사업을 위하여 미국에서 모금 활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1891년 6월 27일 오하이오 주 파울스빙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성서교육을 전공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정훈 장교로 근무한 뒤 "마거리트 서틀즈"와 결혼하게 되고,
한국에서 활동한 "노블" 선교사의 권유로 한국 선교를 결단하게 된다.
1921년 9월1일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첫 선교지 평북(平北) 영변(寧邊)"숭덕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며
비신자(非信者)들까지 인정을 받는 아름다운 학교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의 더 나은 교육을 위하여 건물과 시설 건축을 계획하며
건축 모금액이 3만 엔을 정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모금이 달성되었다.
새로운 교사와 내부적 변화로 학교 발전이 질적으로 크게 향상 되었다.
이후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간 그는 석사 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주 영명학교 농촌계몽 운동
지난 선교사 열전에서 소개한 충청지역 선교에 있어 감리교 선교사들의 섬김과 희생도 빠지지 않는다.
그중 특별히 충남 공주지역은 영명학교(永明學校) 를 중심으로 한 교육 사업이 진행되었다.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영명학교 농촌계몽운동으로 지역사회를 섬기고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공주의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가 다니던 학교다.
학교 건물 입구위에는 유관순 열사의 상이 있다.
영명학교 설립자 Williams의 像.
"사우어"선교사는 미국에서 1차 안식년을 갖고 귀환한 다음에는 충남 공주읍 중·고등학교(현 영명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하게 된다.
"영명학교"는 1906년 "윌리엄스" 선교사가 윤성렬과 함께 공주시 중동에 설립했으며,
1928년부터 감리교 농촌사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농촌운동을 지도한
"윌리엄스"가 정규농업학교의 필요성을 느껴 1932년부터 실업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이때 "사우어"는 영명학교의 회계 겸 교사로 파송됐다.
"사우어"는 그곳에서 "윌리엄스"를 도와 한국 농촌을 살리고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역에 임하게 된다.
선교활동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과 농촌에 살고 있는 농민의 소득을 향상하는 일에도 직접 참여한 것이다.
특별히 일요일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농촌 계몽운동을 했으며,
그는 항상 우유를 짜기 전 성경을 한 장 읽고, 씨를 뿌리기 전에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양봉을 직접 가지고 다녔고, 가축 예방주사를 직접 놓았으며,
양철통이나 장롱 등 가구와 집도 직접 짓는 등 성실하고 다재다능했다.
농사 실습하는 "영명학교" 학생들과 공주에서의 실수교육 상황을 미국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공주지역에 거주하는 135만 명의 주민은 일 년에 우유 한 컵도 채 못 마시는 실정에 있어 실무교육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소, 닭, 토끼, 양, 꿀벌들을 어떻게 기르며 무엇을 먹이는지를 교육 받고,
오후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는 아침 시간에 배운 이론의 원칙에 따라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실습을 합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벌통을 만들고, 닭장도 짓고 우물도 팝니다.
이렇게 해서 일 년 내내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방법을 계속하여 교육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때 "사우어"의 실수교육을 받은 학생 중에는 "사우어"의 둘째 아들로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한 "로버트 사우어"(Robert G. Sauer)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명학교" 교사와 이사로 사역했다.
이들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여 2대에 걸쳐 그들의 생애를 한국에서 헌신했다.
성광모자원 미망인 구제 사역
당시 국제적으로 중,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되면서 한국 선교사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 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고 결국 미국 선교부에서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귀환조치 명령이 내렸다.
모든 감리교 선교사들은 책임자 5인을 남기고 1940년 11월 미국에서 특별 송환선을 보내와 219명이 떠났다.
그때 한국에 남아있던 5인중에 한명이 "사우어" 선교사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압력이 더해지자 남아 있는 자도 다 철수하게 되었다.
"사우어"는 미국에 머물면서도 다시 한국에 돌아갈 기회를 기다리며,
오하이오주에서 있는 서부 연합 감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49년 11월 한국을 다시 찾은 "사우어"는 총리원 회계직을 맡아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먼저 일제 말기 추방당할 때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데 힘을 쏟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오는 전후 복구비와 구제비를 관리했다.
"사우어"는 언제나 최소의 생활비로 살았고, 사업비와 구제비를 잘 사용해 주변 사람을 도왔다.
그는 회계직에 있으면서 전쟁미망인을 위한 "성광모자원" 사업을 적극 지원했고,
미국에서의 모금활동을 통해 한국교회 복구 사업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전쟁미망인들은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어려웠고,
글을 모르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회활동에도 어려움이 컸다.
"성광 모자원"은 전쟁미망인들에게 주택을 제공하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터를 제공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였던 그의 노력으로
한국교회는 해방과 전쟁이라는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빠르게 복구될 수 있었다.
이후 1957년 성광 모자원에서 시작된 성광교회 예배당(마포구 신수동)이 건축된다는 소식을 들은 "사우어"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서 1만 달러를 모금해 예배당 건축기금으로 보냈다.
"성광교회"에서는 1962년 3월 25일 예배당 앞뜰에 "사우어 부부의 기념비"를 세웠다.
1962년 4월 16일 사우어 선교사는 정년 은퇴하고 본국에 귀국하여
1972년 9월 13일, 오하이오주 애슐리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미국 감리회 선교부 연례대회에서 대한민국의 U.N. 가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제출하여
채택 받게 될 만큼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존경받는 진정한 선교사이다.
나는 감리교 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마땅히 추앙받아야 할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