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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길지 Gelson Engel(1868.10.10-1939)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역사신학)
1. 성장 배경과 한국선교동기
왕길지 선교사의 본명은 겔손 엥겔(Gelson Engel)로서 1868년 남부 독일 비텐베르크(Wüthenberg)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4살 되던 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다. 엥겔은 6살에 뮤링엔(Murlingen)에 있는 일반교양학교(the College for Classical Study)를 다녔고 뉘팅엔(Nütingen)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에, 교사대학(Lehrer Seminar)에서 공부했다(1883-88).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천직이 교사인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엥겔은 경건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고향 비텐베르그는 독일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다. 필립 스페너(P. J. Spener)에 의해 시작되고 헤르만 프랑케(A. H. Francke)에 의해 더 발전된 독일 경건주의는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닌 딱딱한 교리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면서 신앙의 내면화, 개인의 신앙체험과 변화, 기도와 성경읽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에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로 연결되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 지도자는 저명한 신약성서학자였던 요한 벵겔(Johann A Bengel, 1687-1752)이었다. 그는 성서 영감설을 믿으면서 신약성경사본들을 정리하여 1734년에 독일 최초의 원문비평성경인 벵겔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비텐베르크 경건주의는 라인강을 건너서 “바젤 선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바젤선교회의 설립자, 크리스챤 불름하르트(Christian G. Blumhardt, 1779~1838)는 뷔템베르크의 개신교회 목사이며, 독일 기독교 공동체(Deutsche Christentums gesellschaft)의 신학부 총무(1803~7)였고, 바젤선교회의 감독(1815~38)이었다. 독일기독교공동체는 선교잡지를 발행하고 선교단체를 설립하도록 사람들을 장려함으로써 유럽전역의 경건주의자들을 연결했고 1815년에 바젤선교회를 설립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도 세계선교운동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고향의 분위기는 엥겔이 원어성경연구과 선교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는 한 선교대회에 참석한 후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1세의 나이에 바젤선교회(Basel Mission)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의 교육을 받고 1892년 인도의 푸나(Poona)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1894년 엥겔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호주 감리교 목사의 딸 클라라 바스(Miss Clara Math)와 만나 결혼했다. 바젤선교부 선교사로 6년을 사역한 후에 그는 1898년 그는 감리교선교부로 이적을 했다. 그러나 곧 질병에 걸려서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주의 작은 마을 스토웰(Stawell)의 중등학교인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에서 교장으로 14개월 동안을 일했다.
2. 엥겔과 클라라의 결혼 1894
그 당시 부산에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여선교회연합회(PWMU)가 파송한 4명의 미혼 여선교사들과 같은 교단의 청년연합회(YMFU)가 파송한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가 호주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선교사들은 아담슨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 수 없다고 사임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여선교회연합회는 아담슨을 대신해서 여선교들을 감독할 수 있는 목사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엥겔은 한국선교사로 자원했다.
엥겔이 한국선교사를 자원하게 된 동기는 세 가지였다. ⑴ 그의 부인 클라라와 한국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Miss Agnes Brown)은 1895년 멜버른에서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클라라는 한국선교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 ⑵ 1899년 4월 멜버른을 방문한 아담슨 목사는 장로교에서 목회를 하고 싶어 하는 엥겔에게 한국선교를 추천했다. ⑶ 엥겔은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며 많은 선교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크게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2. 전도자와 목회자
엥겔선교사 부부와 세 명의 아이들은 1900년 9월 19일 일본선박 “카수가 마루”호를 타고 멜버른을 출발해서 10월 29일 오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풍습을 익혔다. 그는 그달 말에 한국어 발음을 연습해서 축도를 시도했고 3~4개월이 지나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국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는데 “엥겔”과 “왕길”의 발음이 비슷했고 그 이름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왕길지 목사는 부산에서 16년 동안 순회전도자로 목회자로 교육자로 봉사했다. 그는 아담슨 선교사와 지역을 분할해서 아담슨은 경남의 서부지역을 담당했고 자신은 동부지방 울산, 기장지역을 순회했다. 그는 순회전도여행을 하다가 1904년 10월 일본인 하급노동자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09년도 총회보고서 왕길지는 26개의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있고 울산 지역에서는 6개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1914년까지 부산진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했다. 1916년 그는 언양의 12개 교회와 김해의 10개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
경남 최초로 한국인으로 목사가 된 사람은 심취명이었다. 그는 1894년 경남지역의 첫 번째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죽음 이후 예수를 믿고 1904년에 부산지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왕길지 목사는 심취명 장로를 권고해서 평양신학교에 보냈고, 1914년 그를 부산진교회의 자기 후임 목사로 세웠다.
3. 왕길지 목사의 부인들(?)
그의 부인 클라라는 한국에서 질병을 얻어 호주로 돌아갔으나 불행하게도 1906년 4월 2일 시드니에서 3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왕길지 목사는 평양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날 수 없었고, 10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어 호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그는 휴가 중인 아그네스 브라운에게 청혼했고 두 사람은 1907년 7월 3일에 멜버른에서 결혼을 했다. 클라라와 아그네스의 친밀했던 관계로 인해 엥겔과 아그네스는 쉽게 맺어질 수 있었다. 선교사에게 동반자는 필수적이었고 같은 선교지의 동지만큼 좋은 배후자도 없었던 것이다. 왕길지 목사는 자신의 휴가와 결혼 때문에 1907년 평양신학교의 7명의 초기 졸업생들이 안수를 받는 것과 한국 최초의 노회가 형성되는 것에 참석하지 못하게 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그네스 브라운은 대단한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전도자였다. 그녀가 울산에서 전도할 때, 교회 나가는 것 때문에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한 여인의 집을 심방한 적이 있었다. 다행이 남편은 멀리 첩의 집에 가 있어서 그들은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예배 중에 집주인이 들어왔고 그는 성난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불쌍한 부인은 두려움에 떨었고 다른 부인들도 안절부절했다. 놀랍게도 아그네스는 조용히 좁은 마루로 나가서 미소를 지으면서 정중하게 집주인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선생님, 평안히 다녀오셨습니까? 선생님의 부인은 아주 정성스럽게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아그네스는 한국남자들의 타고난 본성은 상대방이 정중할 때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 교수로서의 왕길지 선교사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연합신학교(Union Seminary)였기 때문에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목사를 교수로 파송했다. 1906년 그는 정식강사가 되었다. 그 당시 신학생들은 1년에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만 수업을 했고 나머지는 목회와 실습으로 대치했다. 대신 5년의 긴 학제를 운영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6년 3월 8일부터 평양신학교의 정식교수가 되었고 전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 해에 그는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했고 5월 한 달은 44명의 목사들이 참가한 학급에서 〈어거스틴의 생애와 교리〉를 특별 강의했다.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는 평양신학교에서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은 왕길지 목사에게 넘어왔다. 그는 평양신학교 최초로 영어강독과 성서언어를 가프친 분이다. 훗날에는 주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당시 성서언어 교재는 영어로 되어 있었고 오직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대학졸업자들이 성서언어 수업에 참가했고 한 학급은 5~6명에 불과했다. 같은 총회에서 왕길지 목사는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7년 그는 평양신학교 이사겸 정교수로 선정되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는 학술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을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왕길지 목사는 그 첫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18~1921년까지 총13권을 발간하는 동안 편집책임을 맡았고 총 27회의 글을 기고했다. 신학지남은 수업시간이 짧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목회현장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공급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원칙에 철저하기로 소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솔직하고 마음이 여린 분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양신학교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목사될 사람들이 무슨 시위냐?”하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때 학생들은 민족정의를 무시하는 왕길지 목사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교내 시위를 일으켰다. 이 노교수는 학생들에게 “내가 잘못하였지요. 용서하여주세요”하고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왕길지 목사는 평생을 언어공부를 즐겼다. 왕길지 목사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던 방지일 목사는 그가 “16개 국어를 통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고전헬라어와 신약성서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의 성서언어와 고전어, 모국어인 독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서방 현대 언어, 그가 인도선교사시절 획득한 마라티어, 흰디오, 우르드어 등 인도의 방언,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후일 일본어도 독학을 하여 불편 없이 사용하였다. 왕길지 목사는 한국의 풍속과 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영문잡지 《코리아 뷰》(The Korea View)에 소개했다. 예를 들면 “여인의 지혜”와 “한국의 장사” (1905.2), “영리한 도둑”과 “호랑이보다 무서운 곳감”(1905,7), “나무꾼과 호랑이와 토끼”(1905, 12)등이 있다. 또 한국의 수수께끼들도 소개를 하고 있다(1906. 2).
그의 언어사용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평양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냈는데, 하루는 채플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원래 서책은 무족(無足)이라 자래(自來)하거니와 자거(自去)하지 못하는데 책이 없어졌지요.”
6. 성경개역작업과 음악사랑
한국 내에서 성경번역작업은 주로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20년에 호주선교사로는 최초로 왕길지 목사를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마지못해 한 듯한 인상도 있다. 1919년에 번역의 주축멤버였던 게일과 레널즈가 휴가를 떠났고, 한국인 번역위원들도 3.1운동이후 투옥되었기 때문에 개역을 진행할 인물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와 성서언어 양쪽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왕길지는 가장 적임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22년 9월 왕길지는 옥스퍼드 히브리어 사전(the Oxford Hebrew Lexicon)과 긴스버그(Ginsberg) 히브리어 구약성경 3부를 런던의 영국성서공회에 부탁했다. 그후 1923년부터 개역자회는 긴스버그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저본으로 사용했다. 1933-4년도에 왕길지는 아모스를 개정했다. 한편, 호주선교부의 프랭크 커닝햄(Frank Cunningham) 목사는 신약개정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신구약개정판은 1937년에 출판되었다.
왕길지 목사는 음악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서 반주 일을 돕기도 했고 평양신학교에서는 채플 때에 늘 본인이 풍금을 연주했다. 그는 루터의 음악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는 찬송가 편찬위원으로도 있었는데 그는 루터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내주는 강한 성이요”(찬송384장)를 번역했다.
7. 공교회조직의 지도자 왕길지
왕길지는 공교회 조직에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경남지역의 노회조직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왕길지 목사는 내한 이후에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할협력에 적극적인 역을 했다.
1911년 12월에 경상노회가 설비되었을 때 왕길지 목사는 초대회장이 되었고 그는 4차례 연속적으로 노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그는 노회 안에 혼재된 직제를 정비해서 목사, 장로, 영수, 집사로 통일시켰다. 1912년에는 한국장로교회가 총회를 구성하였고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다음 제 2차 총회에는 왕길지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 호주선교부는 4개의 장로교선교부 중에서 가장 연약한 조직이었지만 왕길지 목사가 노회장과 총회장으로 임명된 것은 아마도 미국 선교사들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14년 북장로교선교부가 경남에서 완전한 철수를 하는데도 왕길지 목사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또한 그는 1916년 6월에 경상노회를 남북노회로 나누자는 헌의 안을 발의해서 1916년 9월에 창립되는 경남노회의 초대회장이 되었고 1917년 12월까지 연속 3번의 노회장을 역임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2년부터 1920년까지 경남노회 총대로 총회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평양노회소속 총대로 총회에 참석했고 1925년부터 1934년까지는 총회총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에 다시 평양노회 총대로 참석했다. 1938년 왕길지 목사는 70세가 되어 31년간 봉직했던 평양신학교와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아그네스 엥겔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왕길지 목사의 아들 프랭크 엥겔(Frank Engel)은 1911년 한국에서 태어났고 평양에서 성장했다. 그는 멜버른 대학을 졸업하고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호주와 아시아의 유명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1950년대 초반에 호주 기독학생운동(SCM)의 상임총무를 역임했고, 1959-61년까지 세계기독학생연맹의(WSCF) 동아시아총무를 역임했다. 그리고 호주교회협의회의 총무와 의장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멜본신학대학(MCD)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Rev. Gelson Engel MA DD. b. Wurtemberg, Southern Germany, October 10, 1868; d. Melbourne, 1939.
Fusanchin 1900-1919; Pyeng Yang 1919-1937.
Gelson Engel studied Arts and Theology in Basel, Switzerland, and then in Edinburgh. He was ordained for the mission field on June 6, 1892, and was sent to Poona, India, under the Basel Mission. During his six years there, he transferred to the Methodist Mission and became principal of the Taylor High School for boys. While there he married an Australian teacher, Clara Bath on 19 December, 1894. They returned to Australia in 1898 on account of Mrs Engel’s ill-health.
After a period as principal of Harvard College in Stawell, Mr Engel applied and was appointed as superintendent of the women’s division of the Mission, arriving in Fusan with his wife and family on 29 October, 1900. At the time the whole Mission was in disarray because of ongoing mistrust between Mr Adamson and the women missionaries. Mr Engel took control. Through him the early pioneering efforts of the women came to fruition. Within four months of his arrival, he baptized 68 people, the fruit of the evangelistic efforts of the women over the previous years. He became the first minister of Fusanchin Church, and also of Tongnae. He taught and baptized all the people who had been prepared by the women in villages and towns north-east of Fusan.
He was the dominant figure in the whole Mission for the next four decades, exercising a leading role in strategy and policy formulation. Clara’s health deteriorated and she returned to Sydney in March 1906, but she did not respond to treatment, and died on 2 April. However news of her death did not reach Fusan until 7 May.
Engel then married Agnes Brown at her home Church, Ebenezer, in Ballarat, on 3 July 1907. They arrived back in Fusan on 17 September.
Engel suffered numerous bouts of ill-health. But he supervised all the churches to the north-east of Fusan, and when at home divided his time between Fusanchin and Tongnai until after Mackenzie arrived in 1910. He taught each year in local classes and in The Men’s Bible Institute. At the same time, Engel spent three months each year at the Theological Seminary in Pyeng Yang, teaching courses in Church Histor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Pedagogy, and the Acts of the Apostles. He was chair of the Hymnbook Committee. He published a church history.
Engel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Korean Church, his work in training students for the ministry meant that he influenced every group of students in the first thirty years of the church. In 1913 Engel was elected Moderator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and also served as Presbytery Moderator. This was all achieved in spite of recurring bouts of ill-health and eye problems. On one occasion he was assaulted by Japanese youths and badly beaten.
In 1919, he and Mrs Engel moved to Pyeng Yang, where he was appointed Professor of Church History, and taught Greek and Hebrew in addition. He also worked part time for the next 18 years at revising the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Korean.
He combined gifts of thoroughness and mysticism, scholarship and music, linguistic skills and churchmanship, and a faith that was never daunted.
1.왕길지 선교사에 대한 한국어 소개는 다음의 책들을 참조하라.
수안교회, 《왕길지 목사의 선교발자취》(1991); 이상규, 《부산지방 기독교 전래사》(2001); 방지일, 《야사(野史)도 정사(正史)로》(2001); 부산진교회,《부산진교회 초대목사 왕길지 선교사》(2005).
첫댓글 이런 귀한 분들을 우리나라에 보내주셨기에 한국교회가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되었군요!!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