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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국민된 기본상식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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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이승만 [ 李承晩 , 1875.3.26~1965.7.19 ]
본관 전주(全州). 호 우남(雩南). 초명 승룡(承龍).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윤보선 [ 尹潽善 , 1897.8.26~1990.7.18 ]
호 해위(海葦).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韓英)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國民黨)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저서에 《구국(救國)의 가시밭길》이 있다. 박정희 [ 朴正熙 , 1917.11.14~1979.10.26 ]
경북 선산(善山) 출생.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 ·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수 ·순천사건 관련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구명운동에 의해 복역은 면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시대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그의 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사태(釜馬事態)’를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연설문집》 등이 있다. 최규하 [ 崔圭夏 , 1919.7.16 ~ ]
호 현석(玄石). 자 서옥(瑞玉). 강원 원주(原州) 출생. 1941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 해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10·26사건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 해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81년 4월부터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91년 이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고 있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제회의 참석만도 19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하여 30여 회에 이른다. 그 밖에 서훈(敍勳)으로는 1970년 일등수교훈장, 19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9년 무궁화대훈장, 198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국내훈장과 타이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훈장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 전두환 [ 全斗煥 , 1931.1.18 ~ ]
경남 합천 출생. 1951년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 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그 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사법처리되었다. 노태우 [ 盧泰愚 , 1932.12.4 ~ ]
대구 달성(達城) 출생. 1955년 육군사관학교, 196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政局)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킴으로써 4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그 해 6월과 이듬해 4월에 러시아 대통령 M.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으로 한·러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었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있다. 김영삼 [ 金泳三 , 1927.12.20 ~ ]
경남 거제(巨濟) 출생.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8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盧泰愚),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김대중 [ 金大中 , 1925.12.3 ~ ] 한국의 정치가.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여전히 제1야당의 실력자로 알려졌다.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고, 같은 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계파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생활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 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노무현 [ 盧武鉉 , 1946.8.6 ~ ]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46년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진영중학교를 거쳐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이듬해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으면서 이후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수임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