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3/29 [13:47] 최종편집: ⓒ 광역매일
5. 골목의 문장 | | | | 한영채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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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을 지나며 골목이 문장이 되는 어제와 오늘이 모인고서古書들 봄비 내리고 먼지 같은 추억이 일어나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물레처럼 돌고 길거리 떡볶이를 먹던 분분한 시간들이 모여 고딕활자는 길 위에 나무냄새처럼 눕는다 정수리엔열기가 돋고구름은 보수동을 건넌다 낡은 골목길에서 진달래 향내가 나고 어린 사슴이 뛰어노는모퉁이 골방에서 마음의 텃밭을 가꾸는 실개천 고향의 아득한 소리 들리기도 하는 보수동 골목을 탑돌이 하듯낡은 책방을 뒤진다 편편히 봄비 내리고 고문서의 축축한책장을 넘기며 뒷산 진달래를 생각하는 보수동 헌책방
비 내리는 사월 기차여행을 떠난다. 보수동 헌책방을 찾으며 어제와 오늘이 모인 고서(古書)들을 만난다. 담뱃대 물던 선배의 낡은 시집 앞이 숙연해진다. 나무 냄새나는 책방 골목길엔 진달래와 실개천을 그리는 향수와 그리운 동주를 만나며 기형도의 시를 생각하다가 탑돌이처럼 책방을 빙빙 돌다가 축축한 낡은 책장을 넘기며 사월이 간다.
| | | | | | 기사입력: 2017/04/19 [17:29] 최종편집: ⓒ 광역매일 |
6. 신화마을 | | | | 한영채 시인 |
| | 고래가가파르게 날숨을 뿜는다 신화로부터 멀리 와 버린 여기, 어디쯤 인가 관절마다 뙤약볕이 욱신거린다 화첩처럼 펼쳐진골목 고래들 벽면을오른다 등대처럼서 있는 해바라기 벽화 바람이 불어도 미동이 없다 어제 오늘의 경계가 없는 지금 혹등고래가 헤엄을치느라고 신화마을이 파도처럼 일어난다 등뼈 굵은 황소고래가 지나가고 창문아래 나팔꽃도 핏빛으로 피어나고 늙은 아버지, 고래를 기다리다 뱃고동 소리로 돌아 올 때, 마을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된다 맑은 눈빛이 내려다보는 창문에 턱을 괸 누렁이가 졸고 있는 사이 벽화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들숨을 뿜은 나도 벽화 속으로 들어간다 평화구판장엔 막걸리 사발 오가고 관절 식힐 비구름이 신화의 언덕을 오를 때 고래를 타고 산마을을 내려간다 *장생포 신화리 벽화마을
시는 신화에서 잉태하고 신화는 시가 된다. 햇볕이 찰 찐 날 신화마을을 다녀왔다. 장생포 신화리, 마을 벽화 속엔 고래 한 마리 골목을 누비고 있다. 골목마다 사연이 있고 그리움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아버지는 고래의 꿈이 크나큰 풍경일거라는 말씀을 새기며 고래는 태화강을 건너 반구대까지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지금은 다소 소외되어 있는 듯한 장생포 신화마을의 벽화에서 다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고 큰 고래 한 마리 우리의 가슴에 품고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 | | | | | 기사입력: 2017/04/26 [14:24] 최종편집: ⓒ 광역매일
7. 거풍擧風 | | | | 한영채 시인 | | | 수장고가 열렸다 어느 가문에서 온 오래된 글자들 박물관 대곡 그늘에서 숨 쉰다 먼지를 털어 말리자 구겨진 문장들이 내밀하게 등을 편다 냄새는 소유권을 따라 나선다 검은 시간의 장, 넘기다가 고문서 앞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이월 초이레 새벽 네 시 문풍지 울리며 떨리던 목소리, 밭고랑 매던 누이의 필사본이 시조창으로 나오고
어느 골짜기를 다녀간 묵객 시가 정갈하게 시냇물처럼 흐르고 일꾼이 일군 한 해 새경 장부 밀알이 굴러와 심어진 점, 점들이 모여 덧바른 두께 만큼 묵책을 만들고 나무 기둥에 열매가 열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크나큰 풍경일 거라는 곰방대를 문 아버지가 걸어 나오시고 묵향 깊은 시골 장방 냄새가 아버지의 손길처럼 들락거리는 수장고 열리는 날 어느 듯 박물관 뜰에 묵화처럼 걸리고,
대곡박물관 수장고가 열리던 날 낯선 고문서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흰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겸손하게 구겨진 문장들을 편다문장마다 시대의 역사가 있고 그들의 삶이 구깃구깃 새겨진 장부들, 대곡골짜기 바람에 눅눅한 고문서를 말리자 기억 속에서 나를 키워낸 아버지의 역사도 이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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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사입력: 2017/05/30 [14:00] 최종편집: ⓒ 광역매일
8. 대추꽃 | | | | 한영채 시인 | | | 대추나무가 자진했다 달디 단 열매를 수 년 낳은 후 붉은 물들었다 너의 한낮 같은 정열 대추처럼 붉었다 봄부터 푸른 새싹이 돋은 후 먼 듯 가까운 듯 도착한 안부는 가지가 휘도록 꽃을 피웠다 땅을 파 낡은 숟가락으로 거름을 듬뿍 주었다 심장으로 내린 뿌리가 튼튼하리라 믿었다 햇볕과 비와 바람이 다녀 간 후 붉은 열매는 그해 다산을 했다 온통 도로를 달리거나 시를 쓰거나 강변을 걷거나 붉었던 너의 그해 가을을 기억한다 무엇이었을까 너와 나의 나뭇가지엔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안녕, 전송 실패 대추나무 가지 옹이를 심장에 박았다 타래처럼 얽힌 꽃이피기 시작했다 닷 되 빗물이 뿌리를 적셔도 핏빛은 더욱 짙어질 뿐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처럼 고것이 고된 노을처럼 찬란하게 붉은 꽃, 뿌리로 부터 자진했다
이파리를 가장 늦게 끌어 올리는 대추나무는 우리 가까이 있어 친근한,제사상이나 몸에 이로운 과일 중의 하나다. 정원에서 달게 꽃피우던 그 대추나무가 어느 날 붉은 머리를 헤치고 신음하고 있다. 한 때 그리운 사람에게 대추처럼 달달한 추억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 추억 대추나무 아래 파묻기도 했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더니 신음하기 시작한다 멀리 떠난 그대처럼 고된 하루의 노을처럼 찬란하게 추억을 묻으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추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안녕 전송실패.
| | | | | | 기사입력: 2017/06/13 [14:43] 최종편집: ⓒ 광역매일
9.
명찰 | | | | 한영채 시인 | | |
오동나무가 강변에 누웠다 낮은 의자 하나 오동나무를 지킨다 유모차 몰고 온 등 굽은 할머니 의자에 앉아 며칠 째 강물을 응시 중이다 ‘날 가져가시오’ 뿌리에 단 명찰, 오동나무 허리에 왼팔을 얹고 물에 비친 기러기 떼 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 흔들며 젖은 눈가를 말리는 할머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저 허리 둥치를 키우려면 얼마의 천둥과 번개가 있는지 소낙비와 착한 햇볕을 얼마나 쬐는지 내원사 와불 인양 눈 감고 있다 -나를 일으켜 줘, -밥상 같은 강변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싶어 오동나무 곁을 지키는 비스듬한 의자에 앙상한 엉덩이 걸치고 있다 쪼골해진 젖가슴엔 큼직한 명찰, 김순임
바람을 가르며 강변을 걷는다. 잔잔한 물결 위로 물고기가 튀고 왜가리 몇 마리 멀리 날아간다. 잘 다듬어진 강변공원에 자유로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옥동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태화강 전망대를 지나자 오래된 누운 오동나무를 본다, -필요한 사람 가져가세요, 오동나무의 명찰을 본다. 몇 걸음 건너 느티나무아래 지팡이를 쥔 동네 노인들이 쉬고 있다. 줄지어 높이 날아가는 새들을 쳐다보는 눈동자 멍한 노인의 가슴에도 명찰이 빛난다. 김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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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사입력: 2017/06/21 [14:26] 최종편집: ⓒ 광역매일
10.
조문일기 | | | | 한영채 시인 | | | 거문고 울자 황룡사 석탑 따라 운다 박대성 화백의 갤러리, 현향玄香과 만월, 불국사 설국이 화산으로 분출한다 고요히 가벼운 육신 봉우리 낙수는 어찌 금강석 뚫었을까 참나무 숯, 순간 숲이었다가 조리개 열어 순한 빛 할아버지를 만나는 새벽길 연다 원경으로 가파른 콧등바위 능선을 넘는 흰 두루마기 입은 아버지, 수년 째 조문을 읽으신다 목젖을 넘던 울음이 골짜기를 타고바람에 어스름 새벽 현을 켠다 등줄기에서 일만 이천 봉 낙수물 소리 우레처럼 들린다 박 화백의수묵 청솔가지들 수직으로 쏟아져 청음이 된다 흑백낙관엔 번개 뿌리가 터지고, 내 안 고요의 알갱이들이 수런거린다
박대성 화백의 전시 현향 앞에서 내 안의 고요 알갱이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 흰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단석산 콧등바위를 오르는 아버지,언덕을 오르는 흰 개미 같다, 검은 묵향이 수직으로 내리는 폭포아래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쉼이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삼 년을 그 멀고 가파르던 산소를 향해 새벽을 오르시던 아버지, 제사 때마다 눈물을 훔치시던 아버지, 콧등처럼 높다는 바위산을 오르시던 아버지 기억이 현향의 중심에 있다. 가정이 해체되는 이 시대 가정의 중심은 누구인가 새벽마다 먹을 갈았던 묵향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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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사입력: 2017/06/27 [15:16] 최종편집: ⓒ 광역매일
11.
풀무의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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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영채 시인 | | |
언양 시장, 제일 용광로 불기둥 솟는다 망치소리 후끈한 마당 귀퉁이 수십 년 땐땐한 하루를 고집한다 아버지의 사고는 우레처럼 오고, 팔 남매 구겨진 길 엉키어, 입에 풀칠 대신 풀무를 배워라, 유언 같은 말씀은 어린 발로 풀무를 몰아 풍량계가 구불구불 전류처럼 돌고, 개망초 보다 작은 열두 살 가슴이 유월 미나리보다 푸르게 자라나 물위에 통통 튀는 푸른 반항끼에 물기가 돋고, 둥글게 불꽃이 핀다, 피운다 지워진 지문이 물맛을 당기는 오후 불기둥에 앉은 땡볕은 그 해 앵두보다 붉다 호미, 낫, 도끼, 곡괭이… 이마 주름이 구릿빛 낙관 이두박근이 화석처럼 망치로 새기는 대장장이 구씨, 탕탕 붉은 하루가 노을에 물든다
언양시장, 용광로 앞에서 불기둥으로 발그레한 얼굴이 떠오른다. 반세기를 한 자리에서 농기구를 만드는데 오늘도 탕탕 망치로 하루를 새기시는 할아버지, 해방이후 가난을 견뎌 온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굴곡진 인생이자 오늘의 이 시대의 숨길 수 없는 역사다. 몇 달째 낙관처럼 오늘도 불볕더위다.
| | | | | | 기사입력: 2017/07/11 [15:08] 최종편집: ⓒ 광역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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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거미 | | | | 한영채 시인 | | | 병실 너머 현대아파트 107동 거미 한 마리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엉덩이 쑥 내밀며 비단실을 뽑듯 낡은 글자를 지우며 붓 놀린다 리듬을 탄다
계단을 오르는 길 힘들었지만 오른손 연신 허밍허밍 붓 놀린다
삼십 년 터전 지우고 다시 박음질 하는 낡은 벽, 상처를 꿰매 듯 비단실로 어두운 내력 지우고 쓰고 있다
그가 걸어 온 길이 허공을 빌려 주인 없는 폐가 담 쌓는 일이지만 허기진 배 안고 허리띠 졸라맬 때마다 붓 들어 길을 만들고 새로운 길이 되고
무릎 굽혀 발을 툭툭 치자 이마에 맺힌 구슬땀이 길 위에 떨어진다
지나 온 길 축축하지만 저녁바람이 헹굴 것이다 일몰 오기 전 바람 모서리에 선 거미 아파트 벽을 치유하고 있다
한 직장에서 삼십 년을 일한 거미가 있다. 가족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오랜 긴장이 풀렸는지 퇴직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병원 창 밖 낡은 아파트 도색하는 일 거미 오랜 터전을 다시 박음질하는 저 붓놀림, 사람이나 사물이나 오래된 것에 대한 숭고함,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용기를 내라고 응원한다. 인생 2막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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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5 [14:13] 최종편집: ⓒ 광역매일
23. 인력시장 | | | | 한영채 시인 | | | 안개 사이로 더딘 새벽이 온다 동트기 전, 세 들어 사는 사내의 무거운 걸음을 벚나무가 듣는다
주전으로 가는 굴다리 난간에 엉덩이를 밀어 올린 낡은 신발들 모서리로 날아든 시든 꽃잎들이 시장을 만든다
휴일 없는 일요일 새벽 삼동을 건너 온 바람의 칼이 가지를 흔들 때마다 귀볼 움츠린다 어제도 월세 독촉을 받아 언제 날개를 펼지, 죽지 속으로 파리한 손을 끼고 흙 묻은 엉덩이를 난간에 밀어 넣고 아이에게 쥐어 줄 단팥빵을 생각한다
바람에 잔가지 부서질 때마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 주려나, 언제? 귀를 쫑긋 새우며 보내는 난독증의 시간
그의 새벽은 안개주의보 창문에 비친 움, 벚꽃이 곧 피겠다고 신발 끈을 다시 묶는 허씨가 평화국밥집 따순 국물을 꼬르륵 들이키는 소리,
해마다 연말은 취업의 계절이다. 취업은 바늘구멍보다 좁다고들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 취업은 누구에게나 로망이다. 취업난, 눈을 낮춰라 그러면 자리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 것 또한 어렵다. 여기 굴다리 난간에서 취업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 안개주의보가 있는 일요일 새벽에도 인력시장에서 하루치 일 꺼리를 찾는다. 몸은 무겁고 쉬고 싶지만 아이에게 줄 단팥빵을 생각해야하는 날품팔이, 그래도 희망은 있다 봄이 오는 내일은 좀 더 나은 삶이 올 거라고
| | | | | | 기사입력: 2017/11/07 [14:22] 최종편집: ⓒ 광역매일 |
22. 모서리의 말
| | 각角을 연다 장롱 정리를 하던 그녀, 모서릴 지키는 옹이 틈을 들여다 본다 무얼 꺼낼까, 꺼낼까 망설이는 사이 눈이 흐려 각이 흔들리다 서랍 귀퉁이에 깊이 넣어 둔 딱정벌레 같은 속살의 조각 뼈가 보인다
찢기고 구겨진 신문 모서리에 낯익은 이름 남편 홍 대리, 낡은 폐선 위 가스 폭발, 푸른 달팽이관을 울리고 울고, 둥글지 못한 나의 각이 소리를 낸다.
그와 보낸 아우라지 한 때 기억할 새도 없이 터 잡은 난소암, 턱이 뾰쪽한 아들 처진 어깨에 부글거리다 침전된 효소들의 눅눅한 이끼가 상자 안을 채우고 있다
각을 열자 그와 나를 가둔 까만 상자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마로니에 그늘이 푸르게 각을 만드는 오후
서랍을 열자 서랍 안에 가둬둔 꼬깃꼬깃 사연이 나온다. 남편의 죽음이 흘러나오고 어깨 처진 아들이 나오고 터 잡은 난소암의 기억이 서랍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가을, 그 동안 서랍 속에 가둬 두었던 설움들을 햇볕에 말리기로 한 날, 모서리는 둥그러지고 각을 여는 날, 어느 모임에서 눈물 글썽이며 서랍을 열 듯 풀어놓는 한 여인의 사연에 울컥한 그런 날 가을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온다.
| | | | | | 기사입력: 2017/11/01 [14:15] 최종편집: ⓒ 광역매일 |
21. 너렁국 끓이는 저녁 | | | | 한영채 시인 | | | 감나무 그늘이 기울던 저녁이었다 백철 솥 아궁이엔 장작이 활활 타며 너렁국이 끓어 넘쳤다 사랑방엔 사춘기를 건너는 오빠의 반항기 아버지와 싸우는 소리 들렸다 감나무 가지는 담장 밖으로 기울고 대문 앞 우물은 파문으로 깊었다 그늘엔 아궁이 불이 활활 타오르고 불을 때던 동생의 달군 쇳소리가 담장 너머 불꽃처럼 튀었다 그가 동생의 가슴팍을 치자 해가 붉게 기울었다 달려온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땅거미가 깊게 어둠과 경계를 지을 때 부지깽이 하얀 연기는 어머니의 부화로 피어올랐다 그와 노을은 뒤란으로 숨었고 끓어오르는 어머니의 속앓이는 흰 광목 치맛자락으로 숨었다 백철 솥엔 철철 넘친 너렁국만이 어머니를 달랬다 *너렁국 : 칼국수의 경주 사투리
마당 가장자리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 평상을 펴 여름그늘을 즐겼다. 그늘아래 백철 솥이 걸려 저녁이면 자주 너렁국을 끓였다. 오빠의 반항기는 펄펄 끓는 너렁국 같았다. 대문 앞 우물은 파문이 일었고 어머니 가슴도 불꽃처럼 일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저녁식사, 백철 솥에 철철 넘친 너렁국만이 어머니를 달랬다. 청춘의 순간이었다.
| | | | | | 기사입력: 2017/10/24 [14:53] 최종편집: ⓒ 광역매일 |
20. 계절도 꿈을 꾼다 - J형에게 | | | | 한영채 시인 | | | 겨울이 지날 무렵 다방 창가에 앉은 청춘들 대자보는 글자 몇 줄로 시작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골목마다 계엄령에 깔려 숨죽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낯선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는 그, 사무치던 청춘은 변성기를 앓았고 사월의 목소리는 굵고 거칠고 떨렸지만 눈은 살았다
최루탄이 터지고 꽃망울이 펑펑 터지면 거친 운동이라 부르며 서시를 외웠지만 계절은 청춘이었으며 청춘은 불끈 쥔 주먹이 주름치마처럼 울었고 목울대는 굵은 핏줄을 세웠다
계엄령은 직립이었고 침을 튀기듯 툭툭 터져 나오는 말의 씨앗 같은 언어는 담을 넘어 파도처럼 튀었다
연애는 사치가 되던 시절 다방의 차는 식었고 그의 눈동자는 빛났다 창을 보며 벚꽃이 피기를 기다릴 무렵, 봄은 잔인하게 그의 온 몸을 사정없이 칭칭 감았다
꿈을 꾼 듯 한참, 몇 계절이 다녀 간 오후 근육이 풀어진 사각 턱으로 희끗한 중년인 그의 안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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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일들이 난국이다. 민주화를 외치던 암울했던 시절 청춘들이 들끓고 계엄령에 숨죽이던 그때 그래도 시간은 가고 지나간 시간이 그 일들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들이 과거나 현재나 매 한가지, 젊은 핏기로 시국을 논하던 한 때 그도 시간처럼 흐르고 역사 앞에 서 있다. 희끗한 중년의 모습으로
기사입력: 2017/10/11 [14:14] 최종편집: ⓒ 광역매일
19. 시인론 | | | | 한영채 시인 | | | 소문에 눈이 멀다는 촌수 먼 조카가 전화가 왔다 첫 시집을 낸 내게 삼십 년의 안부를 더듬고 자주꽃 감자밭에 똥물을 푸던 화곡 댁을 풀어놓고 헛간 시래기가 밥이었던 양어머니의 긴 한숨소리가 들리고 고랑에서 자라던 헛헛한 산비알 텃밭의 간절함은 새끼처럼 꼬이고, 심장에 고여,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눈이 흐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다고 하는 조카 글은 어떻게 쓰냐고 물으니 아내가 받아 적는다고 한다 시큰한 콧등 하나 먼저 그가 밟던 낡은 축담에 도착 한다 -너는 이미 시인이다
전 국민이 시인인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가슴에 꽃물을 품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끔 새끼처럼 꼬인 심상을 풀어, 품고 보듬어 맑은 감성을 키워 다시 풀어내는 아름다운 사회 시인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
기사입력: 2017/10/10 [13:33] 최종편집: ⓒ 광역매일
18. 암각화 | | | | 한영채 시인 | | | 강 너머 꼬물거리는 선사의 그들, 빗살 바위에 앉았다 물길 휘어진 구곡 사이 흙발 부처가 옹송이는 절벽 호랑이 늑대 꽃사슴 거북 물고기들 비단고래귀신고래혹등고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바다를 건너 온 그들 암각
부엉이 눈보다 둥근 망원경 안에 강 건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각질 분분한 선사의 서書 21세기 고래가 된 나는 첨벙 선사 마을을 건넌다.
선사를 거쳐 온 반구대 암각화 21세기 고래가 된 나와반구대 암각화의 보존을 고래고래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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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12 [13:30] 최종편집: ⓒ 광역매일
17. 푸른 잎을 엿보다
| | | | 한영채 시인 | | | 귀를 열자 소리 전쟁이다 와르르 공기 알맹이 모래톱으로 쌓인다 가을로 가는 밤 오롯이 그와 대치 중 허리 구부려 혈맥을 찾는 마당 구석 남천 이파리에 숨었다가 긴 발목으로 물 위를 걷다가 세수 마친 여자의 종아릴 훔친다 빵빵해진 뱃가죽을 두드리는 하루 그의 하루는 벽돌에 기댄 구월, 꽃무릇 같은 침대 오른 남자의 얼굴을 갈기다 붉게 솟구친 북쪽 벽 순간의 꽃 절창으로 피어나고 푸른 이파리 사이 엿보다 거미가 엮어둔 그물에 긴 발목이 잡히기도 하는 어둠이 좋다 새벽이 닫기 전 긴 빨대로 목을 누른, 여자의 붉은 소리가 다섯 번의 자명종으로 울리고 모래알처럼 소리는 왱왱 구르고 눈동자는 붉다
가을이 오고 있다. 입추 지나자 땡볕 더위도 극성인 모기도 한풀 꺾인다. 올핸 가뭄으로 모기가족이 번성하지 못했다. 나무들이 무성한 정원엔 굵고 실한 검은 띠를 가진 모기가 창을 들고 푸른 잎에 숨어 엿보고 있다. 언제 주인님의 종아리를 훔칠까 궁리 중이다. 숨을 곳은 많다 오래된 향나무이거나 변해가는 담쟁이거나 동백의 푸른 잎이거나, 뾰족한 긴 창으로 종아리를 누른, (여자의 붉은 소리를 듣고 싶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 푸른 잎을 엿보며 아우성대고 있다. 자연의 공존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가고 온다.
| | | | | | 기사입력: 2017/08/29 [18:50] 최종편집: ⓒ 광역매일 |
16. 몸살 | | | | 한영채 시인 | | | 그해 초가을의 비는 지루했다 시골 마당 작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신 새벽 아버지는 비질을 하시고 비 오기 전 콩깍지 탁탁 튀는 불을 지폈다 짙은 연기는 그의 마른버짐에 독을 감 듯 온몸에 독을 지었다 검게 탄 구들장에 발 모으고 어둠 속 물레를 돌리듯 검은 이불로 둥글게 항아리를 빚었다 쪽진 어머니 문지방 넘는 발걸음, 불꽃이다 흠뻑 땀 흘린 후 애처로운 그녀의 손길 이마에 스치자 쌀쌀한 바람에 감항아리 툭 갈라지는 소리 들렸다 아궁이 속 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그라지고 검은 독에서 향기 돋아나 눈가에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여름나기엔 시원한 감주가 최고다. 감주는 우리의 전통 음료로 단술 식혜라고도 한다 시골에서 감주 만드는 법은 검은 독에다가 고슬고슬한 밥과 엿기름물을 넣은 후 따뜻한 아랫목에 반나절 숙성 후 다시 끓이면 된다. 그리고 식혀서 먹으면 여름나기 음료이거나 살얼음이 살짝 깃든 겨울나기 음료에도 으뜸이다. 큰살림을 하시던 어머니는 가마솥에 식혜를 끓이시며 몸살 난 어린 딸에게 독이 차지한 아랫목에서 따뜻한 시간 보내기를 종용한다. 열나는 이마를 짚는 발걸음이 불꽃처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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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15 [15:11] 최종편집: ⓒ 광역매일
15. 송현이 | | | | 한영채 시인 | | | 비가 내렸다, 그날 어둠 깊이 잠든 시간의 언어는 풀어지는 고요를 채울 수 없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고개 들어 기억 할 수 없는 미로迷路 빛이 들지 않은 시간 족장은 물처럼 사라지고 화석 속 젊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엔 빛보다 깊은 그림자 그를 사랑한 나는 순장이었을까 새끼줄로 묶인 나였을까 납작한 돌이 수형번호를 달고 돌 덧널 된 가시개미가 진흙 속에 빠진 듯 켜켜이 쌓은 성城안에 빈자리만 남았다 홍가시 이파리 붉어질 무렵 쏘아 올린 빛의 한 켠 그가 달아준 귀고리가 구석을 지키다 깨어났다 빗소리가 들리고, 겹으로 된 긴 항아리 볍씨와 콩, 밤과 복숭아씨가 궤적으로 엇돌다 굳어버린 씨앗 뚜껑달린 바리 속 그들이 여기, 사랑의 증표는 무엇, 무엇일까 구름과 햇볕과 우레의 문양들이 지나고 참꽃 나눠 먹던 나이테 출렁거리는 유리벽 물속에서 족적을 찾는,
* 송현 : 창녕 송현동에서 발굴된 소녀 미라.
비가 내린 그날, 송현이는 눈꺼풀을 내리고 대곡박물관 입구를 지키고 있다. 꽉 다문 입술 화석처럼 빛나는 그의 미소, 천 년을 수장되어 캄캄하게 살다가 빛을 본 지 수 해, 볍씨와 콩 밤과 복숭아씨 그와 함께 있었던 여러 부장품을 전시 중이다.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과거와 오늘과 미래가 함께 나열되고 있다. 송현이는 경남 창녕군 송현동 가야사 연구에서 발굴한 17세 소녀 미라 이야기다.
| | | | | | 기사입력: 2017/08/08 [14:03] 최종편집: ⓒ 광역매일 |
14. 태화강 소묘 | | | | 한영채 시인 | | | 소나기 지나자 강변 풀숲이 구불텅하다 튀어오르던 물고기 활현처럼 휘었다 숨는다 둥지를 떠난 왜가리 저 어린 것 대나무 뿌리를 쫄 때 일가를 이룬 코스모스 손을 흔든다 모래톱엔 발목 담그는 갈대, 우듬지 백로가 묵묵히 내려다보는 물 아래 강 건너 십 리 대밭이 물속에 누워 있다 수양버들 머리를 풀어 강물에 붓질 한다감자 밭을 매는 할머니 호미질이 바빠진다 바람이 슬몃 토란잎을 흔들다 간다 개망초, 강아지풀, 달맞이가 지키는 돌무덤, 호박꽃이 노란 생각을 물 위에 옮겨 놓는다 토란잎이 흔들릴 때마다 그늘이 일어난다 강물로 옮겨가는 그늘 마당에 탑을 새겨 놓았다고 백로가 물 위로 점묘를 한다 강변을 걷는 나도 풍경이 된다.
가지산에서 작은 물방울로 시작하여 반구대를 돌아 바다로 가는 강, 울산의 젖줄 태화강이다올해 광역시 승격 20주년, 울산 방문의 해를 맞아 태화강 십리대숲은 벌써 떠들썩하다. 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사람들은 살을 부비고, 강을 끼고 대나무숲이 푸르게 십 리를 이루고 있다, 남쪽 대숲엔 천 마리 백로가 알을 품고 있으며 겨울이면 만 마리의 떼까마귀가 줄지어 태화강을 따라 나서는 곳이기도 하다. 소소하거나 소란스런 풍경을 보며 우리들은 살갑게 살아간다. 누구나 강변의 풍경이 된다.
| | | | | | 기사입력: 2017/08/02 [14:31] 최종편집: ⓒ 광역매일 |
13. 중복 | | | | 한영채 시인 | | | 한 계절이 열린다 더운 바람이 구석진 골목까지 돌다 나간다 개망초는 왜 이맘 때 피어나는지, 철망 상자를 실은 낡은 트럭이 북으로 간다 유월 하순 어제도 개들을 실은 아파트 몇 동 몇 호, 오늘도 몇 동 이 휙 지나간다 개망초 흔들릴 때마다 목 죄어 온다 길게 빠진 혓바닥은 간밤에 잠을 설친 듯 허공에 침이 사선으로 흐르는 골을 타고 엎드린, 바람은 꼬리로 잡고 어딜 가는지 거꾸로 방향을 맞춘다 바싹, 엎드려도 소용이 없다 다시는 못 올 순백의 언덕, 이 길을 기억한다 유리창에 비친 백구의 흐린 눈 비가 오르는지 쓸쓸한 구름이 지나가고 중복으로 가는 뜨거운 곡소리, 바닥을 달군다
하늘과 땅이 창으로 부터 열림이 시작되는 계절, 길가 개망초가 하얗게 분을 피우고 있다. 초복 중복을 지나 말복을 향할 때쯤 절정을 이룬다. 절기 중 가장 더운 중심인 중복, 살갗을 태울 듯 하루하루가 따끔하다 등줄기나 이마에 땀이 흐를 때 수난이 시작되는 그들, 철망 상자에 실려 고속도로로 달리는 모습이 애달프다 순백의 언덕을 넘으려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 길을 기억하려는 슬픈 눈동자가 가고 있다. 더운 바닥을 식히려고 수박화채를 먹어도 바닥은 오늘도 뜨겁다. 오늘도 섭씨 39도
| | | | | | 기사입력: 2017/07/25 [14:45] 최종편집: ⓒ 광역매일 |
12.
드므가 사는 집 | | | | 한영채 시인 | | |
오월 꽃그늘이 포록포록 달포 된 강아지를 재운다. 처마 밑 펑퍼짐하게 눌러 앉은 독, 옹이진 가슴 불길 잡으려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사랑채 모퉁이의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이파리에 쌓여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초록은 그늘을 안는다 혼기 지난 시누의 신열 같은 골똘함이 옹이진 채 개울물소리 안으로 흐르는 촉수 세운 새싹들 할아버지 손길은 느리게 수평을 일군다 드므 앞 앉은뱅이 나무의자가 둥근 독 속에 비친 그의 파랑을 기억한다 느티 아래 무순을 뽑아 새댁 입덧 맞추느라 분주한 오후 구름 한 자락 줄장미 담장을 걷다 드므를 다녀간다 오래된 물거울이 훤하다
높이가 낮고 넓적하게 생긴 독. 물두멍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물이 멀거나 수도 시설이 잘 되지 않거나 아니면 추녀 끝에 빗물을 받아 화재예방 용수로 쓰기도 하고. 십 수 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주로 물을 담아 놓는데 쓴다. 결혼과 동시에 서울에서 살게 된 난, 한옥에 사시던 시댁 주방 가까이 드므가 있었다. 관절염을 앓던 시어머니의 여섯 남매는 둥근 드므에 추억과 애환이 한가득 담겨져 있었겠다. 모두가 떠난 자리 드므엔 구름이 한가롭게 다녀가고 오월 장미가 담장을 지키고 느티나무 아래 강아지가 누워 있던 마당 한켠, 드므에 비친 풍경들이 다시 그립다.
| | | | | | 기사입력: 2017/07/19 [14:30] 최종편집: ⓒ 광역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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