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월 바다까지 - 송재학
- 제주시편 2
바다를,
물빛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한눈으로 붙잡지 못하는 부피가 버겁다
아무리 퍼내도 걷잡을 수 없는
코발트 물빛이다
방파제와 정적이 서로 혀 들이미는 오후,
내 꿈을 유채꽃 대궁 위에 올려놓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食道
검은색의 비애에 사로잡힌 건 내 소용돌이다
칼날이 된 바다가 옆구리에 박힌다
천천히 서 있는 전신주들,
느낌표처럼,
터질 듯 부푼 어떤 생의 입구마다 꽂혀 있다
애월 바다는 파랑 주의보에 익숙했으리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
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 송재학
붉은 색의 극점까지 가서 난분분 떨어지는
붉은 꽃잎이 결국 내 핏속으로 튀어 들어오고 말 듯
나는 붉은 색을 닮을 수 없는 것이더냐
나는 아직 광기를 다 말하지 못했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성성은 잘려진 가지를 둥글게 감싼다 (몸에 화살을
맞았다 바깥쪽 화살만 부러뜨려 없앤다 몸 안의 화살을 살 속
깊이 집어 넣는다 몸이 더 아프지 않느냐) 어떤 흉터라도 부드
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힘은 희망을 되풀이하면서 두
터워졌는가
* 비명 - 송재학
그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발자국을 보려면 밤새 눈이 내려야 한다
그의 발자국은 종기처럼 번져서
함박눈도 함부로 지우지 못한다
대설주의보에 귀기울이면
그의 길이 천산남로로 향했음을 알리라
얼마나 많은 밤이 그를 따라왔는지
이제 심지마저 다 타 버린 깜부기불을 보라
봄이 오기 전에 피는 꽃의 향기가 진한 것은
눈의 무게를 이겨낸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것은
울음을 디딘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뼈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육체가 되어 버린 낭떠러지 아래
그는 커다란 비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모슬포 가는 까닭 - 송재학
- 제주시편 1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따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 나비 사이의 혼례는 나비 날개의 무늬로 결정한다 - 송재학
벌써 잊어 버렸던가
등짝의 흉터는 그의 귀가를 부추긴다
서까래가 무너지기 시작한 낡은 집의 문지방을 떠올릴 때
옛 집은 다시 낮은 곳부터 물 차 오르듯 천천히 불을 켠다
오랫동안 비워 둔 방마다 창이 먼저 부서지면서
옛 집은 눈먼 사람처럼 캄캄해졌던 것
어둔 잎으로 바뀐 것이 얼마나 많기에
저 자귀나무는 피칠갑하듯 쉼 없이 꽃을 피우는가
울타리 높이 따라 꽃은 다른 빛깔이었으니
그 집 떠날 때 열린 방문은 가면의 구멍인 양 조용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나비들이 서로 날개 아래 숨어드는 거기
여우비 틈새 환해지는
아자창의 창호지 뜯고 자귀나무 잎새로 매달리고픈 날,
그는 물살에 흉터를 떠맡긴다
* 산벚나무가 씻어낸다 - 송재학
다 팽개치고 넉장거리로 눕고 싶다면
꽃핀 산벚나무의 솔개그늘로 가라
빗줄기가 먼저 꽂히겠지만
마음 구부리면 빈 틈이 생기리라
어딘들 곱밉든 군식구가 없겠니
그곳에도 두 가닥 기차 레일 같은 운명을 종일 햇빛이 달구어내지
먼저 온 사람은 나무둥치에 파묻혀 편지를 읽는다
風磬이 소리내는 건 산벚나무도 속삭일 수 있다네
달빛이나 바람이 도와주지만
올해 더욱 가난해진 산벚나무家
울어라 울어라, 꽃핀 산벚나무가 씻어내는 아우성
봄비가 준비된 밤이다
* 환하면 추억, 어두우면 우레 - 송재학
오래 전 그곳은 햇살과 노래 곁이거나
마타리꽃의 금빛 안이었다
자주 해일이었던 바다였다
환하면 추억
어두우면 우레와 더불어
지금 해와 달이 몸 바꾸는 그곳
시들어 가는 꽃의 순서는 아름답다
* 풍금 - 송재학
풍금 소리가 유리창을 깬다
그 뜰은 개망초로 덮였다
약한 내 뼈는 굽었고
나는 그늘만 골라 다닌다
슬픔조차 없는 집에 풍금이 울린다
깊은 잠을 기웃거리는 明暗의 건반을 거슬러 가면
아직 어린 내가 있다
거미는 누추한 머리 속과 무덤을 집으로 만든다
빈 방의 영혼마저 불태우는 날들이 지나가고
희게 부서지는 저 햇빛 사이 먼지들이 나의 밥이던 때!
쓸쓸함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그 집까지의 발자국 소리를 위해 어둠은 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검고 흰 건반은
푸르고 맑은 물소리를 찾아낸다
그 집의 방들은 늘 비어서 나를 기다린다
* 얼굴을 붉히다 - 송재학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붉은 꽃대가 여럿 올라온 상사화를 캤다 상사화가 구근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놀랍도록 크고 흰 구근을 너덜너덜 상처 입히고야 그놈을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은 붉어지고 젖은 신문지 속 구근의 근심에 마음을 보태었다 깊은 토분을 골라 상사화를 심었어도 아침에 시들한 꽃대를 들여다보면 저녁에는 굳이 외면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물어 비료며 살충제며 잔뜩 뿌리고 잔손을 대었지만 상사화의 꽃을 보고자 함은 물론 아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꽃은 아주 늦어도 대수롭잖다고 다짐했다 상사화 꽃대가 차례로 시들어갈 때 내 귀가는 늦어졌다 한밤중에 일어나 바깥의 상사화를 들여다보고 한숨쉬는 내 불안을 알아보는 식구는 없었다 나는 꽃 필 상사화에 기대어 이제는 물 아래 잠긴 땅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언젠가 이곳도 물에 잠기리라 결국 내가 시든 줄기를 토분에서 뽑아냈을 때 상사화는 그러나 완전한 구근과 수많은 잔뿌리를 토해 내었다 그 아래 두근거리는 둥근 세계가 숨어 있었으니, 시든 꽃대 대신 뽀족한 푸른 잎이 구근과 무거움을 딛고 겨울을 준비하였으니! 내 근심은 겨우 꽃의 지척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상사화가 스스로의 꽃대를 말라죽인 이유를 사람의 말로 중얼거려보았다
* 봄 밤 - 송재학
봄밤은 비애를 만진다
며칠 내내 빗소리
그 집은 지붕이 낮다
다리 저는 늙은 남자는 이불을 펴고
나이 찬 딸을 기다린다
딸이 엊그제 들여논 약장의
서랍은 스무 개도 넘는 약장의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약장의
서랍마다 빗물을 채우고도
비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
도둑괭이가 암컷을 쫓아가버린 밤
연탄냄새마저 비에 막혀 고인다
마당 구석의 꽃들이 피우는 것은 봄
* 격렬함을 감추다 - 송재학
나는 바다를 달래려 합니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 해뜨는 바다를 급히 보러 왔습니다 영산홍이 꽃 피어 며칠을 대신 버텨주기도 했습니다 그 붉은 꽃이 시들기 전 도망치듯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영산홍 밖에 나오면 무엇도 감추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의 시작된 아우성임을 깨닫습니다 내 격렬함을 통과하던 영산홍의 만개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산홍 가득 핀 세상이란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장 붉은 꽃 한송이 꺾어 화병에 꽂았습니다, 아닙니다 이 꽃은 역시 제 붉음이란 운명 사이에 휩싸여야 합니다 그것은 영산홍의 오랜 비밀입니다
* 목계 길에 물어보면 - 송재학
목계 길에 물어 보면
아픈 사람 달래는 적막한 은빛을 볼 수 있다
눈 내리는 목계쯤 오면
대처의 제 새댁 대신
늙은 여자와 사는 그를 볼 수 있다
늙은 여자와 버릇없는 아이들 등쌀에 떠밀려
그믐치에 기대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내가 있다
* 동백 - 송재학
한때 이른봄은 천산북로의 사막길이었다
지금 이른봄은 동백이 병을 다스리는 일에 간섭한다
봄 강이 열어놓은 빛의 체 속으로
슬픈 일이 계속되면서
봄 하늘마저 문득 어두워질 때
동백이
그 빛깔만으로 우레 앞에 나선다
누군가 이곳에 되돌아와
흰옷을 갈아입음도 동백이 부추긴 일이다
* 산 - 송재학
겨울 내내 사내는 물만 마신다네
갸름한 손이 천천히 살을 발겨 뼈만 남기면
그 눈빛을 마주하기 어렵다
결가부좌 사내의
마지막 옷을 벗겨,
동안거의 묵언 위로
얇고 검은 빌로드 천의 바람을 덮어주면
밤새 눈 내려,
높은 곳은 구름의 무구(無垢)를 껴안고
낮은 곳은 까마득하게 추락하는
흑백의 주월산
* 마흔 살 - 송재학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 튤립에 물어보라 - 송재학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차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 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 보라.
* 소래 바다는 - 송재학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 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 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 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같은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가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 흰색과 분홍의 차이 - 송재학
겨울 노루귀 안에 몇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는지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노루귀는 흰 꽃잎에 무거운 추를 달았던 것, 분홍이 아니라도 무엇인가 노루귀를 건드렸다면 노루귀는 몇 세대를 거듭해서 다른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분홍이라니! 분홍은 病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 숲이 울고있는 흔적,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
*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 송재학
비오면 넓어지는 고요의 얼안을 견딜 수 없으므로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에 머물지 못한다
봄날의 위 쪽에서 피는 꽃을 따라잡기 위해 솟구친 찰주
엉컹퀴에는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을 것이다
내 어느 날처럼 떨어지기 위해 높이 올라갔던가
두 눈동자를 파 버리고 물끄러미 서서 기약없이 다리품 파는 내 水面에는 탑 그림자가 눈물의 방향으로 누웠다
체온이 떨어지는 서늘함, 머리칼은 허옇게 바뀐다
팔다리를 석탑 일부와 이어주는 가랑비 속
탑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빈터란 더 큰 절을 꿈꾸면서 숨가쁜 늑골 몇 개로 두리 기둥 세우는 곳이다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탑에서 내 미간까지 느린 진자가 움직인다
점점 말라가는 못은 구겨진 금박지 같은 노을을 퍼 담는다
* 빈틈 - 송재학
마흔 나이의 네 출가 소식으로
내 등 뒤 문이 삐걱거림을 안다
때마침 해국 화분에서
생게망게하게 하늘매발톱이 슬며시 솟아오른다
네 갠지스강 엽서가
아픔 몸 곳곳의 빈틈을 찾아온다
범람하는 갠지스강과 같은 방향이다
하늘매발톱이 보랏빛 꽃을 피울 땐
금은이 부딪치는 소리 들었느냐
아니면 극락왕생극락왕생 중얼거리는
네 梵語와 비슷하지 않느냐
네 환속의 풍문이 다시
내 시신경의 눈물, 등과 절벽 사이
천 개도 넘을 빈틈을 찾기 시작한다
* 빈집 - 송재학
나는 오래 폭설을 기다렸다
해평마을의 빈집은 해면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 구름은
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
간유리문을 지날 때 어딘가 지독하게 아프다가
물바람마저 사금파리 빛 띄우면
히말라야시다는 가지 꺽고 귀로를 가로막는다
입술이 닿은 성애꽃에 매달린 내 청춘이
온기 한 점 구하지 못할 때
빈 집은 폭설로 무너진다
그 사랑에는 육체를 피한 흔적이 있다
* 노인 - 송재학
1
벼랑에 뿌리 내린 배배 꼬인 소나무같이 뼈가 살과 힘줄을 바싹 끌어당긴 셈이다 뼈는 무엇이든 버거워 벼랑으로 떠밀어 버리고 싶다 웃음은 눈 주위의 움푹 꺼진 웅덩이에서 지친 달처럼 떠오르지만 월식에 가깝다 울음에는 물 퍼담을 바가지 하나 없다 바늘로 푹푹 찔러도 몸은 공수병처럼 물곬을 피할 뿐
2
삶이란 살 속에 파묻은 고무 호수 통해 빨아들인 몇 밀리미터의 공기를 몸의 칸수만큼 천천히 나누는 일, 뼈와 살의 틈으로 활자처럼 물줄기가 쏟아졌을 때 살은 울음에 내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제 뼈는 느린 걸음을 떠받치는 보도 블록의 단조로움만 견딘다 어떤 생각도 목구멍 위로 떠올리지 말자 지금 갑작스럽게 토하는 청년도, 눈에 띄게 부른 저 임산부의 배도
* 금호강 - 송재학
강은 오랫동안 내 안에 있었다
세상 모든 그림자가 어룽지던 물의 박수와
갈대 서걱인 갈채
그때 강은 스스로 몸을 바꾸어 갔다
이제 강은 수문을 열지 않는다
폭우 뒤의 햇빛이 흙탕물을 피해
염소떼를 핥는 새 나는 달개비꽃에 떠밀려
붉은 물가에 내려오곤 한다
저 산 아래까지 고요의 부피가
우레가 딸린 강물이
저 산 아래까지 범람했다는 흔적이다
이끼와 고지랑물에 가까운 내 불면이란
홍수나 가뭄과 싸울 수 없다는 금호강에
다름 아니다
* 애인 - 송재학
너는 악을 통해 다가왔다
석류꽃 향기를 밀어 내는 밤이
흰 손가락으로 타이프라이트처럼 찍는 너의 발자국은
내 체온을 따라와 흑백으로 인화되어 있다
섭씨 39도 쯤에서
너의 고백이 나를 불심검문하리라
너는 곧 알게 되겠지
왜 내 두 손이 붕대를 가고 있는지
내가 만졌던 너는 벌건 숯덩이 이전에
악의 두께였다
심장에서 손바닥까지 흐르는 피를 보듯
사랑을 시작할 때가 있다
너는 나의 애인이니
너 안에서 불탄 몸을 밟고 가던 나를 보았겠지
참담하여라, 그러고도 너는 출렁거리는 호수이다
* 고요가 바꾼 것 - 송재학
대비사 대웅전 돌 계단 앞에 남풍이 머물면
고요는 돌 계단을 상승이 아니라 하강으로 바꾼다
고요가 붙잡는 정지의 힘!
맞배 지붕의 대웅전이 옥빛 손뼉을 치면서
계단 너머는 팽팽해져 알 수 없는 깊이까지
나는 빛의 속도롤 다녀온다
돌 나간에 향기처럼 새겨진 안동초는
꽃피우는 순간의 정지에서 벋어 나왔다
그때 물 소리는 폭우에서 뿜어져 나왔고
물봉선은 모든 씨앗을 바람의 난간에 맡긴다
그때 저녁의 저수지에서 찰랑거리는
종소리는
느림에서 정지 사이의 돋을새김
* 푸른 빛과 싸우다
송재학 시의 특징을 평론가 김영헌은 "끝모를 병의 심연까지 담궜다가 꺼낸 격렬한 수사, 그 격렬함이 거느리는 이미지의 중층구조,켜켜로 쌓인 이미지의 지층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면서 온갖 파편들이 튀어오르고 뭉개지는 순간 폭풍우처럼 거세게 내면 세계로 끌려드는 언어의 회오리"라며 "불투명한 의미망의 자장을 넘나들며 돌출을 넘보는 감춤과 미학을 꿈꾸는 이미지가 삼투하고 퉁겨내는 소용돌이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했다. 근래 시의 덕목인 언어의 재련과 깊은 상찰보다는 새롭고 낯선 것에 지나치게 강박돼 있는 이 시대의 시 쓰기에 송재학의 시는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또 송재학씨는 "사월이면 은해사 햇빛 따라간다/눈 희미한 어머니 절마을까지/희고 붉은 복숭아꽃밭, 눈이 부셔/눈부셔 돌아가신 아버지 따뜻하다"(은해사길)며 언어로 그린 아름다운 정물화를 보여준다.
송재학(39)씨의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들은 죽음과 소멸을 의식하지 않을 수없는 실존의 비애를 노래하면서도 생명의 푸른빛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기록하고 있다.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한국일보
송재학의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간)는 현란하고 섬세한 이미지들이 들끓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나비무늬가 그런 것처럼, 이미지들은 어떤 관념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자립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 해서, 시 안에서 의미의 논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시들은 특히 색채에 대한 묘사에서 인상적이다. 가령 곳곳에서 나오는 분홍색은 어떤 특정한 관념을 대신하는 기호는 아니지만, 절대적 이미지도 아니다. [흰색과 분홍의 차이]에서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격렬함이다]라고 한 뒤, 다시 [분홍은 병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시작한 겨울 숲이 울고 있는 흔적,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라고 쓴다. 시인은 분홍에 자신의 시적 자의식을 불어넣는다.그것은 흰색의 정형적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감각을 갱신하려는 욕망의 색채다.
[초록]은 어떠한가? [풀잎]이라는 시에서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 수 없는/오랑캐 들판/그 넓이만큼 죽음이나 여름을 만난다]고 노래한다. 초록은 운명의 빛깔이다. 풀잎은 초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풀잎 안에서야 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 때를 알고 있다]. 분홍색과의 대비로 초록을 읽는다면, 초록은 사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런 의미에서 초록의 관념은 차라리 서늘하다.
현란한 직유들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어떤 공허를 보고 있다. 공허야말로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하는 관념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가령 [삶이란 살 속에 파묻은 고무 호스 통해 빨아들인 몇 밀리미터의 공기를 몸의 칸수만큼 천천히 나누는 일]([노인]에서)이라고 쓸 때,삶은 더 이상 화사하지도 격렬하지도 않다.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이 모두 공허에 바쳐지지는 않는다. 시인이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상, 시는 여전히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씻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호.문학평론가.서울예전교수>
송재학
55년 경북영주생.
경북대학교 졸업.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집> <푸른 빛과 싸우다>
제5회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