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37:3-6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먼저 하나님의 비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의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서는 결코 그의 비전을 품을 수가 없다. 자신의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오직 그분을 의뢰하고 그분의 성실을 우리의 먹을거리로 삼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과 비전을 향해 정진하여 달려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 곧 비전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이상과 이 땅에서의 현실의 괴리 속에서 오는 것이다. 이 괴리를 보고 아파하고 갈등하며 고뇌할 수 있어야만 한다.
성경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라! 특별히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보라! 그들은 무엇 때문에 아파하며 무엇을 향해 외쳤는가? 먼저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모습, 교회의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이 땅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바로 이 괴리를 정확히 꿰뚫어 볼 때 우리에게 마음에 소원하는 바로 주어지는 것이다. 곧 비전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과 이 땅의 현실이 만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비전을 위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방향의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의 온전한 모습 또한 교회의 온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반해서 현실의 비참함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물댄동산교회는 왜 개척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요즘 교회와 교인의 수가 많이 줄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많다. 거리마다 교회는 넘쳐난다. 그런데 왜 개척을 해야만 하는가?
만약 물댄동산교회가 현재 거리마다 넘쳐나고 있는 수많은 교회 중에 하나를 더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개척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목사인 나 역시 적당한 임지나 담임목사자리를 얻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교회를 개척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스스로를 직업인으로 전락시키고 일자리 창출이 주된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개척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아니 왜 개척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보시며 아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야 하며, 또한 그 교회를 통해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열방을 향한 주님의 명령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과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이루려 함이다.
현재 이 땅의 많은 목사들은 직업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자기의 밥그릇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이라도 서슴지 않으며,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보다는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러다보니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지 못하고 언제나 분주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교회를 향한 혹은 목사를 향한 비판과 비난을 듣기 싫어하고 교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히스테리 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자고 말하는 목사들에게 ‘너 잘 낫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생각해보자!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그 현실이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모습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하자고 외친다. 그러니까 정확한 현실에 대한 직시가 없다면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간절함도 없다. 물론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목회자들은 오늘날 교회 현실에 대한 직시를 피한다. 그런 설교를 대놓고 하지 말라고 부교역자들에게 말한다. 불편하다는 것이다.
‘동역자를 초빙한다’고 언제나 광고를 내지만 그들은 애초에 동역할 마음이 없다. 동역은 함께 나눔에서 시작된다. 과연 이 땅의 많은 담임목사들은 부교역자들과 함께 나눌 마음이 있기라도 한가? 나눔의 가장 기초가 되는 물질에 대해서도 나누지 않는데 무슨 동역이란 말인가? 또한 ‘평신도 사역자’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성도들에게 붙여주지만 그 내면에는 그래도 목사인 자신들과 평신도들은 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솔직해 보자! 성경 어디에서 목사와 평신도가 다르다고 말하는가? 사실 ‘평신도’라는 말 자체도 웃긴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동역자들인 것이다.
현재 수많은 담임목사들은 교회가 무조건 담임목사 위주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 태도와 행동은 분명 그렇게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담임목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남의 설교를 베끼며 설교를 해도, 공금횡령을 해도, 아무리 비열하게 사람들을 대해도, 그래도 훈련 받는다 생각하고 그저 담임목사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좋은 부교역자라고 말한다. 심지어 몇 년 전까지 담임목사들이 부교역자들을 뽑을 때 유행하던 면접질문이 무엇이었는가? “담임목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부교역자는 어떤 뜻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 아니었는가? 그 정답으로 그들이 외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 참담하게도 담임목사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나에게 부교역자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정직하게 충성하며 사역한다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까지 이야기를 했다. 이런 권위주의 의식이 교회를 망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교회의 회복과 권위주의를 함께 외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과연 성경은 담임목사 한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가 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행 11:25-26절을 보라. 바나바가 교회를 책임지고 난 뒤에 교회를 섬길 동역자로 바울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행 13:1절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 두 명의 리더에서 교회 리더가 다섯 명으로 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동역이다. 오늘날 오직 당회장만 부각시키고 담임목사 위주로 되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지만 초대교회는 다수의 리더가 그 은사와 역할에 따라 교회를 그야말로 동역하며 세워가고 있다.
물론 담임목사는 교회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함에는 분명하다. 어떤 측면에서 교회에서 어떤 사람도 그 역할을 대체할 사람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교회 전체의 비전과 방향 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의 차이일 뿐 그것이 모든 권위주의를 정당화 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시대 교회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바른 교회론’을 함께 나누고 정착화 시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에게 교회론이 있다. 인식하든 못하든 자기 나름의 교회론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 리더 그룹은 반드시 이에 대해 함께 논의하며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올바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찾고자 교회론을 함께 연구하고 나누어야만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 많은 담임목사들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다. 알량한 자신의 권위주의가 무너질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교회는 건강할 수가 없다. 교회마다 제자훈련을 하고, 성경연구반이 있고, 성경통독을 하며, 큐티를 가르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가 건강한가? 성도들의 삶이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외칠만한 정직한 모습인가?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가?
이런 인식이 바로 물댄동산교회의 개척의 출발적인 고뇌였다. 만약 물댄동산교회가 수많은 건강치 못한 교회의 하나가 될 바에야 세워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사실 나는 개척을 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개척을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또한 담임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의 소원함은 교회의 동역자로서 성도들을 말씀과 양육으로 훈련시키고 목회자 아볼로를 채우고 깨웠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능력과 겸손함이 있는 성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계였다. 교회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니 목회자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도들의 역동적인 변화가 한계에 부딪힘을 느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를 찾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게 건강한 교회에서 좀 편안하게 목회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분당우리교회에 간절히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추석 때 대구로 내려가면서 듣게 된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는 나를 회개케 하였다. 1년에 무려 3500명이 분당우리교회에 등록을 하는데, 목사님은 과연 이런 현상이 괜찮은 것이냐 자문하셨다. 그러면서 본인은 이 현상을 보며 두렵고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분당우리교회로 수없이 몰려드는 성도들을 보면서 마치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직전에 사람들의 휩쓸림 현상이 떠올랐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한국교회가 침몰하기 일보직전인데 그리고 이 휩쓸림 현상으로 더욱 참혹한 침몰로 이어질 것인데 과연 괜찮냐고 물으셨다.
그랬다. 내가 분당우리교회로 가고 싶었던 진심은 무엇이었나? 나 역시 보다 안전하고 보다 건강하다 판단되는 곳에 가서 살고싶다는 간절함 아니었는가? 그저 좀 마음 편안하게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 아니었는가?
그런데 나 역시 괜찮은 것인가? 그 휩쓸림 현상에 내 한 표를 던지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목사로 부르셔서 과연 내 마음 하나 편하게 목회하라고 부르신 것은 아니실 것인데, 과연 그 선택이 괜찮은 것인가?
그래서 나는 분당우리교회에 청빙광고가 나와도 이력서를 넣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분당우리교회로 휩쓸림 현상이 일어나고 기울어짐이 나타나는데 이 한국교회를 위해 그와 같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교회를 세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세우신 의미가 아니겠는가 자문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내가 너무도 준비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부교역자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면접 보는 곳마다 여지없이 다가오는 것은 실망과 상실감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개척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때 아내의 한 마디 ‘확신이 있냐?’는 것이었다. 당신 안에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개척을 하냐는 것이었다. 그랬다. 내 안에 ‘지금인가? 또한 정말 개척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12월 9일 교회 사임을 하고 16일 그토록 사모했던 분당우리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고 위해 2시간 전에 출발하였는데 차가 막히지 않아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얼떨결에 줄을 섰는데 우리를 이어 끊임없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도 충격이었다. 무슨 맛집도 아니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최소 30분 이상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하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를 향한 간절함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과연 나는 예배를 이렇게 사모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다가오는 아픔.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만큼, 그 만큼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닌가? 성도들이 오직 은혜를 사모하여 이 불편한 예배당으로 모여드는데, 그 흔한 엘리베이터도 없고 주차도 너무 불편하고 식사는 꿈도 꾸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오직 은혜를 사모하여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그 만큼 이들이 예배드릴 건강한 교회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개척을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내가 이 시대의 과제를 짊어지겠다고 내가 이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겠다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나는 한 교회, 한 지역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 시대를 일깨울 수 있는 나아가 한반도 전체를 다시 그리스도의 계절로 돌려놓을 수 있는 교회를 세우고자 소원하였다.
2. 왜 인천과 청진인가?
사실 어렴풋하게 개척에 대해 생각할 때 처음 품었던 땅은 ‘별내’였다. 그래서 별내에는 세 번이나 들어가 땅을 살펴보았었다. 별내를 생각한 이유는 서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경기북부지역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쉐마드림스쿨을 하면서 서울의 역량 있는 인재들이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경기북부지역의 복음화를 새롭게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구 7만의 별내에 이미 대형교회의 지교회가 두 곳이나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교회에서 능히 이 지역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은평구였다. 서울 중심에서 밀리고 밀린 사람들 인구는 어느 도시보다 많지만 기반 시설의 부족으로 불평과 열등감이 많이 쌓인 사람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품게 하고 자신들이 있는 곳을 오히려 메인으로 세울 수 있음을 비전 안에서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음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김숙영권사님을 통해 듣게 된 인천송도. 국제도시로서 유엔기구가 들어오기로 확정되었고 열방을 향한 복음의 허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인천송도에 대해 인터넷으로 여러 자료를 들여다 보면서 나는 그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도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별내와 은평을 생각할 때는 한 지역 이상을 꿈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인천은 한반도 전체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인천을 생각할 때 한반도 전체의 심장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과연 심장에서 펌프질이 가해지면 발끝까지 피가 통하듯이 이곳 한반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혈류가 한반도 전체를 회복시킬 것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도시. 언젠가 아들에게 아빠는 북한의 청진에 교회를 세울 거야라고 말했던 그 ‘청진’이 새롭게 기억났다. 바로 그곳 청진까지 복음의 정복을 이어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현재 한반도 전체가 남이든 북이든 죄악과 교회의 무너짐으로 처참한 영적 실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6.25 때 대구와 부산 일부분만 남겨놓고 한반도 전체가 북한의 총칼에 짓밟힌 것처럼 현재 정말 몸부림치는 몇 몇 교회 외에 이 땅 교회가 다 무너지고 그로인해 세상에 죄가 관영함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선포하였다. 그 옛날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의 보급로를 끊고 단번에 남한 지역을 회복하여 북쪽으로 진군한 것처럼, 다시 한 번 영적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남한의 목회자와 교회를 회복시키고 빠르게 진군하여 함경도 청진까지 정진하고 싶었다.
북한은 이미 열렸어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이 열리지 않은 이유는 그 어떤 이유보다 교회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교회가 통일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기도하고 끝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이미 통일에 대한 모든 재정적 인재적 준비를 마쳤어야만 한다.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장벽 붕괴를 위한 첫발걸음이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시대의 상징물이었기에 그 만큼 그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예상치 못하게 무너지기 그 훨씬 전에 이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었다. 바로 동독의 니콜라이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무려 7년 동안 연 것이다.
이 기도회가 베를린 장벽 붕괴의 촉발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자들의 입에서 일반 사회 신문과 언론에서 하나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더구나 장벽이 무너지질 때까지 처참한 유혈 사태 한번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가 기적이라며 입을 모은다. 왜냐하면 충분히 유혈 사태의 가능성이 컸었기 때문이다.
기도회는 7년의 긴 시간을 이어가면서도 그 불꽃이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더 불타올랐다. 그래서 기도회가 점차 확대되면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이 기도회에 동참하게 되었다. 급기야 그 수가 7만 명에 이르게 되었고, 기도회는 평화시위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시위에 진압 경찰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그 7만 명 중에 단 한 사람도 욕설을 내뱉거나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이 성숙해서일까? 우리도 몇 년 전 평화시위 한답시고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나왔지 않은가? 그런데 그 시위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파괴적이며 폭력적이었는지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미국 쇠고기 수입으로 반대 시위를 벌일 때 찬성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고 침 뱉음과 온갖 욕설과 모욕을 받아야만 했다. 급기야 웃기지도 않게 시위를 하면서 맨홀 뚜껑을 훔쳐가는 사람까지 있지 않았는가? 물론 그 사람들은 촛불시위의 진정한 참여가 아닌 자기 욕심을 위해 그 기회를 이용한 것뿐이라고 참된 시위자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기도모임으로 촉발된 시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이 다만 미성숙해서 평화시위를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모이면 작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여 작은 일도 크게 번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이 미성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7만 명이 모이고도 평화시위를 했던 그 사건이 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사를 쓰고 또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정말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을까? 아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사건이었다. 무엇으로? 바로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이야기했듯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철저히 기도로 준비된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우리는 먼저 북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통일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통일로 말미암아 예상되어지는 혼란은 너무도 분명하다. 더욱 부과되어지는 세금으로 남한의 사람들은 버거워하며 불평할 것이고, 자본주의에 익숙지 않은 북한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하층민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며, 은근한 지역 차별과 지역 갈등은 극심해 질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코 정치가가 아니다. 세상의 멘토나 리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사람들만이 오직 기도의 사람들만이 이 일을 해결해 갈 수 있다. 예상되는 모든 우려와 문제가 그저 노파심으로만 끝나고 이 땅이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준비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먼저 그 땅에 교회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청진은 러시아에서 50년 동안 북한으로부터 개발권을 부여받은 상태이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어 그분의 선하심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청진의 교회 개척을 위해 재정과 인재를 모두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청진을 통하여 러시아와 유럽으로 복음의 통로를 뻗어갈 것이다.
또한 서쪽으로는 인천을 통하여 열방의 빛이 될 것이다. 중국 대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거리이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유엔기구의 영입으로 분명 복음의 허브 역할을 능히 감당하며 이 세대 안디옥교회가 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물댄동산교회의 개척은 인천과 청진의 개척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시작인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열방을 향한 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지역적 한계를 넘어 한반도 전체를 품을 수 있는가?
우리는 늘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우리가 지금 교회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전복을 꿈꾸는 것인가? 안티를 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이 없이 다만 부정에서 나오는 개척이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 부정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역시 건강함은 이야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확한 현실 직시는 부정적 시각과 탄식과 비판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결코 이로 끝을 내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과 이어있고 우리에게 역시 죄의 속성은 너무도 크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들 속에서 우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회개함이 절실하다. 그렇기에 반드시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섬기며 안타까움으로 끌어안고 기도함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를 향한 어떤 질타와 오해와 비난과 비죽거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품고 섬김으로 기도해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과 다른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변화되려는 것이다. 바로 교회와 목사의 성화에 밑거름이 되려는 것이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7-11).”
여기, 요한을 보라! 당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비판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다. 예수님 역시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안티’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 그 안티에서 사람을 세우고 회복시키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결코 비판 곧 안티 곧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비판하지 말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당대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지 않았는가? 당시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해 비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반대를 위한 안티를 하셨는가? 아니다. 요한도 예수님도 비판을 하였지만 그 비판은 그들을 세우고 회복시킴에 곧 회개케 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우리의 현실 직시는 여기에 그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적대세력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먼저 회개함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며 우리가 먼저 그 모습을 이루고자 온 힘을 다 기울여 살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이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닮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도 완벽하지 않다. 나도 인간이다. 나도 약하다’는 핑계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인천과 청진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 넘어 한반도 전체를 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마음과 함께 우리는 동시에 이 시대의 교회와 목회자들을 끌어안고 품으려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찾아가듯이 그들도 우리와 함께 회개하며 각성하여 변화하도록 돕고 시도하며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결코 안티 세력이 되고 싶지 않다. 우리 물댄동산교회가 교회의 안티가 되어 스스로 교만의 자리에 서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를 위해 눈물과 아픔으로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또한 우리 눈에 보여주신 교회의 아픔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시간과 마음과 구체적인 액션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땅의 목회자와 성도들을 바꿀 수 있을까? 사람의 변화 교회의 변화는 오직 말씀과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어떤 세미나도 어떤 컨퍼런스도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진정성을 다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야만 한다. 불가능한가? 다시 한 번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베를린장벽을 무너지게 한 니콜라이교회의 기도회를 생각하자! 기도에는 힘이 있다. 말씀에는 사람의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인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목회자 회개 운동을 일으킬 것이다. 발로 뛰며 찾아다니며 함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자복하자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교회를 위해 새롭게 시작하며 성화의 발걸음을 떼자 말할 것이다. 그러면 회개 운동에 많은 목회자가 동참할까? 아마도 안 올 것이다. 그럼에도 할 것이다. 그들이 와도 오지 않아도 이 운동 자체가 메시지가 됨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에 대해 비판을 하든 동참을 하든 이것은 분명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많지는 않더라도 분명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음에는 분명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우리 목회자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구체적으로 처절하게 나누고 이를 놓고 아파하며 기도할 것이다. 그때 우리 물댄동산교회 모든 성도들의 중보가 필요하다.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이 세대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처절하게 내려놓고 기도함에 대해 함께 아파 기도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이 회개 운동을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다시 일어나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내려간 그 자리에서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을 선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 성경연구 모임을 만들고 보다 효과적인 설교훈련을 시킬 것이며, 그럼으로써 모든 성도가 말씀 앞에 서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느헤미야 8장과 9장의 이어짐을 재현해야만 한다.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모세의 율법이 온 백성에게 들려지도록 낭독된다. 그렇게 그들은 몇 날 며칠을 말씀을 듣고 또 듣는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역동적으로 반응하여 9장의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 바로 이 땅의 온 성도들의 회개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복음이 들어온 곳이 바로 인천이고 제물포쪽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통로를 통하여 이 땅에 새롭게 복음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제물포 쪽에서 대 각성 집회를 준비할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역사로 이 나라를 일으키실 줄 믿는다.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가득한 죄악 용서하소서. 모든 우상들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지친 모든 영혼 주 예수 사랑 알게 하소서. 저들의 아픔과 눈물 씻는 주님의 보혈 이 땅 치유 하소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를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바람 이 땅에 불어오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과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4. 왜 물댄동산교회인가?
롬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함으로서 그 다양의 합력이 갈등과 다툼이 아니라 오직 선한 역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개인에게 주신 비전이 반드시 공동체의 비전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행 16:9-10절을 보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환상을 본 사람은 바울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환상을 통한 비전을 나누고 난 후에 그 비전은 바울 개인의 비전이 아니라 공동체의 ‘우리’의 비전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물댄동산교회의 비전은 개인의 비전이 아니라 ‘우리’의 비전이 되며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만 한다. 그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그 역사는 세계를 향한 영향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부르심을 입었을 때 나는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바로 아모스의 말씀 때문이었다.
암 8:11-13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당시 나는 대구 계명대학교 SFC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 속한 많은 간사들은 현대주의신학에 빠져 있었고, 그들이 주장하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전혀 관심이 없어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았다. 애써 후배들을 앉혀 놓고 가르쳤지만 도무지 실력도 안 되고 성장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우리는 파리하게 말라가고 정말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에 안타까워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도대체 나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탄식할 뿐이었고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의 말씀이 바로 욜 3:18절이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여호와의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샘이 그 갈한 땅 싯딤을 적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그러나 이 위로의 말씀을 듣고도 나는 또 다른 아픔에 가슴 시려해야만 했다. 분명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오는데, 그 생명수를 여전히 보지 못해 아니 볼 눈이 없어 그 생명수를 눈앞에 두고도 목마르다 소리치며 픽! 픽! 쓰러져가는 사람들... 갈하여 쓰러져가는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들마저도 갈하여 피곤으로 지쳐가는 상황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힘을 주신다. 렘 31:12-13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이 땅을 향한 회복의 약속을 주셨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 31:4)” 그리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샘을 보지 못하고 그 생명수 바로 앞에서 쓰러져가던 사람들 바로 그들의 심령에 생수의 강을 대어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분명 이 땅은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회복될 것이다. 다시 교회는 힘을 얻고 교회가 발하는 빛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주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성도의 회복이 있어야만 한다. 성도들이 여호와의 성전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생명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물 댄 동산으로 샘이 넘쳐야만 한다. 그렇게 ‘물 댄 동산교회’는 그 심령으로 말미암는 넘치는 생명수를 주변의 지역 확대와 남한과 북한으로 흘려보낼 것이다.
또 한 가지, 나는 송우교회에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갈렙이 되자고 외쳤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유다,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등등의 모든 지파들의 실패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쫓아내지 못하매...’ 그런데 끊임없는 실패의 기사 속에 유일한 승리의 기사가 한 줄 적혀 있다.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그렇다. 수많은 실패 속에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는 도전해보지 않은 줄 아냐고, 너 말고 다른 목회자는, 너희 말고 다른 교회는 아무 것도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냐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현실을 핑계대며 그 실패의 기사를 정당화 시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비전이 이 가슴에서 아직 꿈틀거리는데 어렵다고 힘들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여주려 한다. 그 수많은 실패의 기사 속에서도 바로 여기! 이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꿈꾸시던 바로 그 교회가 여기 있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수많은 실패의 기사 속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했던 교회가 있었음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그런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친 갈렙이지만 그가 앞장 서 그 땅을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아우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의 활약이었다. 그리고 옷니엘에게 갈렙은 약속대로 자신의 딸 악사를 주었다. 그때 악사는 자신의 아비 갈렙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천과 청진이 윗샘과 아랫샘이 되어 서로 그 샘이 이어지길 소원한다. 그래서 그 샘으로 이어지는 길에 그리스도의 푸르름이 다시 돋아나길 소원한다. 사실 대구에도 황희성 목사님이 개척하신 ‘물댄동산교회’가 있다. 그리고 황희성 목사님은 나에게 함께 개척할 것을 몇 번이고 권고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기에 답을 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분명 같은 이름으로 같은 목적 아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건강한 교회들을 세워 나갈 수 있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황희성 목사님 역시 이 땅의 목회자들을 일깨우길 원하고 특정 지역을 넘어선 가정과 교회의 회복을 꿈꾸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랫샘인 대구의 물댄동산교회와 윗샘인 인천의 물댄동산교회가 서로 이어진다면 그 사이 수많은 교회가 그 건강한 샘으로 말미암아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인천이 다시 아랫샘이 되고 청진이 윗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샘을 개척하여 주변을 확대시켜 윗샘과 아랫샘을 확장시켜 나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샘이 지나가는 곳마다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 회복의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야말로 생명과 회복과 축복의 통로가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비전은 개인의 비전이 아니다. 물댄동산교회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한 비전이다. 앞에서 바울이 개인적으로 환상을 보았으나, ‘우리’의 비전으로 선포한 것처럼 물댄동산교회를 향한 비전 역시 공동체의 비전이 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만약 김준형목사가 좋아서 김준형목사의 친분 때문에 이 개척에 동참하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 때문에 사람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고 또한 지역을 넘어선 한국 전체의 회복에 사용된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비전을 향해 자신을 불태울 사람들이 함께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게 이 땅에 무너진 한국교회를 섬기고 목회자를 회복시킬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일어날 때 마른 뼈에 생기가 더해져 주의 강한 군대로 이 나라가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돈도 없고 사실 함께 할 사람도 확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직 가진 것은 ‘비전’ 하나 밖에 없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청년들에게 선포한대로 오직 비전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할 기회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이 비전 안에 리더들을 세울 것이고, 재정을 부을 것이며, 함께할 동역자들을 붙여주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대하고 기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