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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는
우리나라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에서
김해김씨(412만5000명), 밀양박씨(303만1000명)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주이씨는 260만989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5.7%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주이씨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 광평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 등이 번창했다.
전주이씨는 조선왕실 가문으로 유명한데,
그 시조는 신라 말에 사공(司功)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이한의 22세손이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조선은 총 27대(대한제국의 순종을 제외하면 26대) 왕을 배출했으며 500여년을 통치했다.
전주이씨 분파는 122개로 알려져 있는데, 크게 태조 이성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는 또다시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선대에서 갈라진 분파와,
이안사 이후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분파로 나뉜다.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德望)이 높고 문장(文章)이 탁월(卓越)하여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代代)로 신라(新羅)시대(時代)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世孫)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代代)로 전주(全州)에 살아온 호족(戶族)이었는데
새로 부임(赴任)한 지주의 탐학(貪虐)을 규탄(糾彈)하자
지주가 군사(軍事)를 휘둘러 보복(報復)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咸鏡道)를 거처
원(元)나라의 간동으로 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曾孫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李子春)의 아들,
즉(卽), 시조(始祖)의 22세손(世孫)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國政)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推戴)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건(創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이안사 이전의 분파로는
이한의 14대손인 이단신(李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
15대손 이거(李巨)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17대 이영습(李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이안사의 종손 이윤경(李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
이한의 21대손 이귀을(李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 등이 있다.
이안사 이후,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로는
이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 등의 5대군파와
이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 등 7대군파,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등 4대군파,
이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第)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가 있다.
전주이씨의 분파 중에서 가장 번성한 파는
세종의 열세번 째 아들 이침(李琛)을 파조로 하는 밀성군파(密城君派)이다.
그다음이 정종의 열 번째 아들 이후생(李厚生)을 파조로 하는 덕천군파(德泉君派)가 있고,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여(李璵)를 파조로 하는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가 번창한 가문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 후손의 분파로는 그 후손이 99파(고종까지 大君 25, 君 74명)로 알려져 있으나,
미혼으로 죽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 군이 20여명 되기 때문에 그 분파는 많이 줄어든다.
그래서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는 총 86개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각 본관의 시조 또는 파조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왕(임금)이 모든 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특정 성씨의 시조나 파조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를 시조로 하는 파가 없는 것이며,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대군이나 군파(君派)는 있어도
왕(임금)을 시조로 하는 본관(本貫)이나 파(派)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嫡)과 왕자군(王子君,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 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 三議政) 22명, 문형(文衡, 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 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 정2품 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 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여(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무생(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보(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 선생(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영성대군파(永城大君派)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의평군파(義平君派)
순평군파(順平君派)
선성군파(宣城君派)
종의군파(從義君派)
진남군파(鎭南君派)
수도군파(守道君派)
임언군파(林堰君派)
석보군파(石保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임성군파(任城君派)
도평군파(桃平君派)
장천군파(長川君派)
정석군파(貞石君派)
무림군파(茂林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경녕군파(敬寧君派)
함녕군파
온녕군파(溫寧君派)
근녕군파(謹寧君派)
혜녕군파(惠寧君派)
희녕군파(熙寧君派)
후녕군파(厚寧君派)
익녕군파(益寧君派)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화의군파(和義君派)
계양군파(桂陽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한남군파(漢南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수춘군파(壽春君派)
익현군파(翼峴君派)
영풍군파(永豊君派)
영해군파(寧海君派)
담양군파(潭陽君派)
덕원군파(德源君派)
창원군파(昌原君派)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계성군파(桂城君派)
안양군파(安陽君派)
완원군파(完原君派)
회산군파(檜山君派)
봉안군파(鳳安君派)
견성군파(甄城君派)
익양군파(益陽君派)
이성군파(利城君派)
경명군파(景明君派)
전성군파(全城君派)
무산군파(茂山君派)
영산군파(寧山君派)
운천군파(雲川君派)
양원군파(楊原君派)
복성군파(福城君派)
해안군파(海安君派)
금원군파(錦原君派)
영양군파(永陽君派)
덕양군파(德陽君派)
봉성군파(鳳城君派)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임해군파(臨海君派)
신성군파(信城君派)
순화군파(順和君派)
인성군파(仁城君派)
경창군파(慶昌君派)
경평군파(慶平君派)
인흥군파(仁興君派)
영성군파(寧城君派)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숭선군파(崇善君派)
낙선군파(樂善君派)
은언군파(恩彦君派)
은신군파(恩信君派)
은전군파(恩全君派)
<본관지>
전라북도 전주시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부(李溥, 1444 甲子生) : 문과(文科) 세조14년(1468)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목(李穆, 1471 辛卯生) : 문과(文科) 연산군1년(149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건(李楗, 1505 乙丑生) : 문과(文科) 중종37년(1542)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정빈(李廷賓, 1539 己亥生) : 문과(文科) 명종18년(1563)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호의(李好義,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선조30년(1597)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은로(李殷老, 1554 甲寅生) : 문과(文科) 선조38년(160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식립(李植立,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선조38년(1605)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민구(李敏求,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광해군4년(1612)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경석(李景奭,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인조4년(162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만(李曼, 1605 乙巳生) : 문과(文科) 인조6년(162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등등.. 모두 4331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785명, 무과 374명, 사마시 2719명, 역과 120명, 의과 70명, 음양과 77명, 율과 17명, 주학 169명)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