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늙어가고 있다
늙음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이 쌓여서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가는 것이면 죽어 가는 것이다.
죽음은 이 생명이 다 한 뒤에 오는 것만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은 삶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죽음은 괴로운 것이고 늙어감도 괴로운 것이다. 늙어가고 죽어감을 피할 수 있
는 방법은 어디에고 없고 그러한 방법은 오직 부처님만 알고 계시다.
물속에 들어가서 숨어 잇어도 죽음의 신은 찾아내고 산에 올라가 있어도 죽음의 신은
따라오며 허공에 있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복잡한 거리로 숨어 다녀도 죽음 신은 용케도 찾아내는 것이다.
늙음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있는한 늙지 않을 수 없고 늙음을 피할 수도 없다.
「꽃은 피어도 곹 지고
사람은 나도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 있는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말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도덕(바른생활)교과서에서
『젊은 시절의 석가』라는 제목 가운데 실려 있던 시다. 생명있는 것은 반드시 이 무상한
법칙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삶이란 높은 곳에서 내리구르는 돌과 같고 폭포수에 떨어지는 물과도 같다.
화살보다 빠를 뿐만 아니라 광파(光波)보다도 빠른 것 같다
사람의 삶은 시간을 역행하리만치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금 현재는 삶이라 기뻐할지 모르지만 이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죽음의 준비는 해 두어야 한다.
그럭저럭 살다다 죽음을 맞이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연이 아니다.
새도 저 죽을 자리를 알고 죽을 때를 안다고 하는데, 인간이 저 자신의 죽음에 대비
하지 않아서야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우습니 아니한가.
야운(野雲)스님은 그의 저서 자경문(自警文)에서 이러한 시를 읊고 있다.
『옥토끼 뜨고 지니 늙음은 잠깐
금까마귀 들락날락 세월만 가네
명예와 재물은 아침의 이슬
영화롭고 괴로운 일 저녁 연기라.
간절히 도 닭기를 권하노니
어서어서 부처되어 중생 건지라
이생에 나의 말을 믿지 않으면
오는생에 반드시 한탄하리라.』
옥토끼는 달을 가르키고 금까마귀는 해를 가리킨다.
낮과 밤이 번갈아 지나가니 세월이 흐르고 늙음이 잠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무상한 가운데 명예와재산을 탐내고 영화를 누리고 고통에 신음하지만
이 모두가 아침이슬이요 저녁에 사라지는 연기처럼 덧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상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체달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않는다면 반드시 부질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야운스님은 이러한 말을 믿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 않으며,
또 닦기를 주저하는 자들(사실은 자기 자신을 경책하는 말이지만)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리석어 안 배우면 교만만 늘고
어둔마음 닦잖으니 <너>와<나>만 크네
빈 속에 뜻만 크니 주린 범 같고
앎 없이 방탕함은 미친 원숭이다.
삿된 말 나쁜 소리 곧 잘 들으면서
성현들의 가르침은 모른 체하니
착한 일에 인연 없어 누가 건지랴
나쁜세상 헤매면서 고생할 밖에.』
심장의 정곡을 찌르는 간절한 금언이다다.
이것은 야운스님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자비의 소리다.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문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며 양심을 배우고 도를 배우며 제중심(濟衆心)을 배운다.
이 말은 어느 개인 특정의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지극한 자비의 소리다.
잘난 체 해서 배우지 않고 주먹만 믿고 세상을 살면 권력에 의해 자신을 저버리며
명예와 재물만 믿고 다른 이를 멸시 한다면, 그리고 지식만 믿고 순박하고 무지한 사람을
얕잡아 본다면 죽음 준비는 아직 먼 것이다.
앞에는 죽음 강이 자로 놓였고 뒤에는 늙음의 맹수가 추격해 온다. 의지할 바 없는 허허벌판에 우물이 있다.우물 속에는 등나무 넝쿨이 드리워져 있다. 우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요, 등나무 넝쿨은 우리의 생명선이다.
우물 속에는 온갖 뱀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뱀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다.
위에서 늙음의 맹수는 지켜보고 있는데 희 쥐와 검은 쥐가 어디에선가 나타나 잡고 있는 생명선의 등나무 넝쿨을 쓸기 시작한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다. 세월이 흐르면 생명선이 점점 끊기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등나무 넝쿨에 벌집이 있고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재물과 명예와 여자와(여자에게는 남자) 음식과 수면등이 물방울인 쾌락인 것이다.
이 말은 대집경에 나오는 말인데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
『능엄경』제 5권에서는 <육해일망(육해일망)>이라는 말을 들어 말씀하시는데, 가령 수건 하난가 여기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 수건을 차례대로 여섯개의 매듭을 묶는다고 하자. 이 여섯개의
매듭을 푸는 것은 묶은 곳을 잡아서 풀어야 하고 하나를 풀면 그와 같이 차례로 풀 수 있다고 하신다. 이 여섯개의 매듭이 풀리고 나면 매듭이라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등의 여섯가지 감각기관도 이 여섯 개의 매듭을 풀듯이 같은 방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에 대비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며 진리를 탐구하고 도를 닦는다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가운데 일어나는 인생 일대의온갖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배워야 한다.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나면서 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눍어가는 존재임과 동시에 배우는 존재이며 성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한 늙음은 잡시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하기에 앞서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며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도 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