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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소강(昭剛)이다.
부인은 운봉 박씨 종지의 딸로 딸 1명을 얻었고, 2명의 첩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해평 윤씨 연성의 아들인 사명에게 출가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전의 이씨 공전의 아들인 완에게 출가하여 6남 1녀를 낳았다.
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조용한 야산자락에 숨어, 안식을 누리던 묘역이 새로 뚫린 도로로 인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이곳은 만일 도로가 뚫리지 않았더라면 잊혀 가는 긴 세월만큼이나 사람들의 발자취가 쉽게 찾아들기 힘든 곳이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묘역은 조선조 태종의 후궁 중 한 명이었던 '선빈 안씨(?~1468년)'의 음택(陰宅)이다. 현재 서울시 중랑구 묵1동 200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묘역은 인근 주택가에 인접해 있지만 도로가 뚫리기 전까진 봉화산 끝자락 숲속에 자리하고 있던 조용한 곳이었다.
▲ 비석뒷면과 봉분 |
▲ 500여년 된 석등 |
▲ 선빈안씨 석등에 대한 유래 |
▲ 봉분을 지키는 석등과 비석 |
▲ 한마리 나비, 후궁의 넋일까? |
▲ 주택가쪽을 바라본 봉분 |
▲ 도로에서 바라본 묘역 |
서울시 중랑구 봉화산 기슭에 묻힌 선빈 안씨(태종 후궁 숙선옹주),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1422년, 56세에, 그녀는 1468년에 돌아갔으니
태종이 그의 말년에 후궁으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옹주묘다, 후궁묘다 하며 설왕설래)
좋으신 임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그녀의 삶을 보살펴주었나 보다.
묘 바로 옆으로 길이 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이곳,
전에는 아는 사람이나 아는 비밀스런 장소였다.
작은 석등엔 불이 켜진 흔적 없이 도시의 매연에 그을려가고..
양지바른 이 묘역에 가을 단풍이 화사하더니
봄에는 진달래가 벌써 곱다.
숙선옹주, 선빈으로 불리운
그녀의 모습과 삶도 이처럼 조신하고 고왔을까..
숙선옹주 선빈안씨(?~1468년)
태종의 후궁으로 처음엔 선빈로 칭하였으나 세종때 숙선옹주로 칭하였다.
세종2년 선빈 안씨는 숙선 옹주(淑善翁主)로 책봉하고, 그 아버지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 안의(安義)를 검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하였다. 1남 익녕군(益寧君 侈 1422~1464)과 소숙 옹주(昭淑翁主)와 경신 옹주(敬愼翁主)를 두었다.
숙선옹주는 성격이 단일하여 직소하기 좋아 하였다.
영평군 윤계동과 집터를 가지고 다툰일과 딸 경조옹주의 불효를 들어 녹봉을 거두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父親은 안의(安義)이며 墓는 서울시 중랑구 묵1동 200번지에 있다.
* 신빈 신씨[신녕궁주(信寧宮主)]의 장녀 정신 옹주(貞信翁主)의 남편인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과 집터를 가지고 다투다가 고소장을 사헌부에 제출하여 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 세종12년 이완(李椀)과 결혼한 친딸이 불효하자 세조14년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경신 옹주의 불효(不孝)를 송사(訟事)하여 녹봉을 거두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14년]
경신 옹주(敬愼翁主)는 전의군(全義君) 이완(李梡)의 아내인데, 그의 어미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아뢰기를, |
“노비(奴婢)는 이미 자녀(子女)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그러나 고르지 못한 것이 있는 까닭으로 다시 고르게 나누어 주고, 또 뒤에 분쟁(忿爭)이 있을까 염려하여 장례원 세계(掌隷院稅契)에 고(告)하였는데, 홀로 경신 옹주(敬愼翁主)만이 분원(憤怨)하여, 그 아들 이신충(李信忠)·이예충(李禮忠) 등과 거짓으로 꾸며서 억지로 변론하여 모녀(母女)가 서로 송사하니, 이치에 크게 어그러졌는데도 사평(司評) 남출(南沭)은 청하는 말을 편벽되게 듣고 엄연(淹延)하여 판결하지 않으니, 이것을 민망히 여깁니다.” |
하니, 명하여 이예충(李禮忠)·이신충(李信忠)과 그 노복(奴僕)의 일을 아는 자를 가두었는데, 숙선 옹주는 태종(太宗)의 후궁(後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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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14년]
처음에 경신 옹주(敬愼翁主)가 노비(奴婢)의 연고로써 그의 어미 숙선 옹주(淑善翁主)에게 거슬려, 숙선 옹주가 상서(上書)하여 경신 옹주의 불효를 호소하니,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그 아들과 노비의 일을 조금 아는 자를 다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명하여 경신 옹주의 녹봉(祿俸)을 빼앗고, 장자(長子) 이효충(李孝忠)의 고신(告身) 을 거두어 외방(外方)으로 귀양보내며, 종[婢] 소금(小金)은 장(杖) 1백 대를 때려서 관비(官婢)에 소속시키고, 경신 옹주의 거집 노비(據執奴婢) ·토전(土田)과 숨겼던 일찍이 준 문권(文券)은 모두 긁어 모아서 숙선 옹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
사신(史臣)이 이르기를, “숙선 옹주가 병(病)이 들었을 때를 당하여서는 경신 옹주가 늘 탕약(湯藥)을 모시었는데, 마침 병이 있어 집에 돌아가니, 그 형 익녕군(益寧君)의 아내 박씨(朴氏)가 홀로 모시었다. 경신 옹주가 사람을 보내어 병세를 물으면, 박씨는 번번이 꺼리고 싫어하여 병들지 않았다고 일컬었고, 숙선 옹주가 졸(卒)하게 되자 경신 옹주가 분상(奔喪)을 하니, 박씨는 문을 닫고 굳게 막았었다. 성복(成服) 하는 날에도 박씨는 또 최마복(衰麻服) 차림으로 경신 옹주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자부(姉夫)의 아들 황호(黃浩)·황휘(黃徽)가 의리를 들어 깨우친 연후에야 들어가게 하였다. 또 숙선 옹주가 평상시에는 경신 옹주가 불효하다고 일컫지 아니하였는데, 병이 위독하게 되어 죽게 되자, 갑자기 불효하다 일컫고 그 노비·토전을 빼앗아 박씨와 황호·황휘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뒤 황호·황휘가 관(官)에 바치고는, 또한 말하기를, ‘경신 옹주가 불효하다는 말을 외조모(外祖母) 숙선 옹주의 생전(生前)에는 일찍이 입밖에 내지 않았고, 또 성복(成服)할 때에 경신 옹주가 이르렀으나, 박씨가 막고서 들이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듣는 자가 많이 의심하였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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