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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 [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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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983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11대 중종의 후궁(後宮)이며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의 신도비와 묘가 있는 곳이다. 신도비는 1683년(숙종 9)에 세워졌으며 전체 높이가 3m 정도이고 비신(碑身)은 사각으로 특색이 있다. 창빈은 1499년(연산군 5)에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始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질과 용모가 뛰어나 1507년(중종 2)에 궁녀로 들어갔다. 행동이 정숙하고 단정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후의로 31세에 숙원(淑媛), 이어서 숙용(淑容)에 올랐으며 자비로운 성품으로 덕망이 높았다. 중종과의 사이에 영양군(永陽君)과 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두었다. 1549년(명종 4)에 죽었는데 처음에는 양주(楊州) 장흥(長興)에 예장하였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선조로 왕위에 오르자 1577년(선조 10)에 창빈으로 추존되고 천묘한 곳의 지명에 따라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으며 숙종 때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碑文)은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신정(申晸 : 1628~1687)이 지었으며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간 이정영(李正英 : 1616~1686)이 썼다. |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 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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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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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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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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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1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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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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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9년(16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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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基), 전체 높이 312㎝, 비신 높이 204㎝, 너비 6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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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좌 높이 38㎝, 개석 높이 70㎝ | ||||
▒ | 재 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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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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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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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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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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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44-7 국립묘지 내 | ||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창빈안씨의 세계(世系)는 안산(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연산군 5년(1499) 7월 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중종 13년(1518)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 이거(李 )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된 이초(李 )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종 4년(1549)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8년 덕흥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선조 10년(1577)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제향되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숙종 9년(1683)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묘소에는 담장이 둘려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ㆍ석등ㆍ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호국지장사(地藏寺) 소재지 : 서울 동작구 동작동 280 국립현충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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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사는 670년에 창건되었으며 당시의 명칭은 화장사(華藏寺)로 불리다가 1549년(명종 4)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 묘를 이곳에 두면서 이 묘의 조포사가 되었다. 1984년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을 기원하는 뜻으로 호국지장사로 개칭되었다.
국립묘지 경내에 있는 이 절은 고려 공민왕 때 보인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현재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조선시대 화장사라고 했는데 호국영령의 명복을 기원하는 국가의 사찰이 되면서 호국지장사라 개칭했다. 선조가 이곳에 조모인 창빈안씨를 장사하면서 이 절을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아 중수하고 갈궁사라고 하였으며 그 후 운담, 경해, 원웅, 명진 등이 여러차례 중수 보전해왔다. 6·25동란 후 국립묘지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이 절을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드리는 국가의 원찰로 삼았다. 이 곳에는 대웅전, 능인전, 삼성각, 석탑 등이 있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5호인 철불좌상이 능인보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1999년 괘불 등 8점의 탱화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상은 고려초의 철불로 백여년전 어부의 꿈에 빛을 보게 해달라 호소하여 한강가에 모셨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선조대의 재상인 이항복과 이덕형이 소년시절 이곳에서 공부했는데 측신(뒷간귀신)이 음경을 움켜쥐고 ‘대감’이라 불러 대감이 될 것을 알아보았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선조의 외증조인 안탄대의 묘이다.
그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이다. 창빈은 영양군·덕흥군의 생모이며, 덕흥군은 선조의 생부이므로 그가 선조의 외증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실상 부원군(府院君:왕비의 친아버지)의 위치에 있었지만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죽은 후에는 우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
묘는 부인 황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비는 효종 7년(1656) 외손 계열인 신최가 짓고, 신승이 글씨를 쓴 것이다.
이곳은 조선(朝鮮) 제11대 중종(中宗)의 빙장(聘丈)이며 제14대 선조(宣祖)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안탄대(安坦大)선생의 묘(墓)이다. 안탄대선생의 딸인 창빈안씨(昌嬪安氏)는 중종 2년(1507)에 중종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출산(出産)하였으니 장남은 영양군(永陽君) 거(거)이고 2남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따라서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선조 이후 16대왕은 창빈의 혈손(血孫)이 되니 안탄대선생의 외손(外孫)으로 계승되었다. 선생은 생존시 종7품(從七品)인 유순부위(油順府尉)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실상 부원군(府院君)의 위치에 있었는데도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사양하고 검소와 겸손으로 생애를 바쳤으며 사후에 조정에서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서(追敍)했다.
--->안산안씨
시조는 안자유(安子由). 고려 충목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세계나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안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18(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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