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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마가복음 1:1
제 목 :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성경의 필요성
성경은 구약 서른아홉 권, 신약 스물일곱 권, 모두 예순여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구단에서 [3 x 9 = 27]을 연상하시면 항상 잊지 않고 쉽게 기억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순여섯 권이라는 책의 권 수 자체가 아주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일주일에 책 한 권도 읽기가 버거운 이 시대에 성경 예순여섯 권은 너무 가혹한 숫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전체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 본 성도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 성경 한 번 읽기가 보통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주장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나님 열심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뜨겁게 기도하면서 살면 되지, 꼭 성경을 읽어야만 하나?’라고 반론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순종과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고 기도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얼핏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 같고, 정말로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한 삶,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오류이며 잘못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종과 기도, 그리고 목사가 말하는 순종과 기도의 의미가 서로 다른 경우가 허다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목사만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를 이렇게 만든 목사 탓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어쩌면 이런 분들의 신앙생활이 한국의 기독교를 후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가 꼭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목사가 바른 말을 하는지 그른 말을 하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만 하는데도 그런 과정은 모두 생략됩니다. ‘목사님이 설마 틀린 말 하겠어?’하며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립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설마 했던 바로 그 목사가 틀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아주 많이 하기도 합니다. 성도가 옳고 그름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좋지 않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도를 조정하며, 목사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도의 삶 자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19-20]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답변을 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대부분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내용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도 거처하실 마땅한 방 한 칸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셨습니다.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를 추구하며 영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물질에 연연하거나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보물은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이고, 그 하늘나라에 쌓아 둔 보물을 마음껏 누리며 영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성도에게 헌금을 강요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충성할 것을 권면합니다. 예. 이 말씀의 결론은 항상 헌금이나 충성으로 귀결됩니다. 아주 이따금씩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면서, 물질에 연연하면서 살지 말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헌금하며,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이 말씀의 참 의미는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나 돈 없다, 나를 따라다녀 봐야 너에게 아무 도움 될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서기관은 어떤 존재입니까? 당시 성전에서 율법을 필사하며 지식층으로, 부유층으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결코 현실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여러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한 교활한 서기관은 그 이적을 배워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다녀 봐야 돈 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라면 아예 따라다닐 꿈도 꾸지 말라’며 서기관의 생각을 우회적인 화법을 통해서 깨뜨려 주는 내용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스스로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가르쳐주시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 [마태복음 8장]을 꼼꼼하게 꼭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헌금하라는 내용인지 아니면 세상에 찌든 서기관을 훈계하는 내용인지 분별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고, 그 성경의 내용을 기준 삼아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성경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고, 소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은?
한국 기독교의 회복, 오로지 성경으로만 가능함을 믿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미래, 오로지 성경으로만 가능함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을 많이 읽어서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을 때 한국 기독교가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예. 우리는 언제나 성경 속 진리를 추구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물론 성경 전체를 읽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아주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예순여섯 권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전반적인 구성체계만 알고 있더라도 성경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쉬어집니다. 그리고 각 구성단계 별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즉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내용을 기술하시고 편집한 것인지를 알고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기도 훨씬 더 쉬워집니다. 오늘은 성경의 구성 체계, 그리고 각 구성단계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기술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사람에 대한 내용만 서술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측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죄인 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그리고 그 죄인을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책이고, 성경은 은혜의 책이고, 성경은 축복의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책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다보면 때때로 하나님께서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모습은 사람을 향한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죄의 세력을 향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따금씩 사람에 대해서도 심한 꾸중과 진노를 보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본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모습은 언제나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시며 일하시는 모습임을 늘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예. 하나님의 모습은 언제나 양떼를 지키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고, 포도원에서 일하시는 농부의 모습입니다. 결코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편의상 5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나누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여러 방법이 동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말씀 드렸듯이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는 5단계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혹시 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은 목차를 보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보다 이해하기가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1단계입니다. 1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단계로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없이 언제나 교통할 수 있었고,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단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아무 흠 없는 존재, 즉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사람끼리도 서로 떳떳한 존재였던 단계입니다.
2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어 죄인 된 사람이 죄의 결과를 당하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인이 됩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오로지 사람만의 기준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불쌍하고, 초라하고,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가 되어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11장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3단계는 죄인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수용해 주시는 단계입니다. 즉 죄인 된 사람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수고하고 애쓰시는 단계입니다. 2단계에서 노아의 홍수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사람에게 알려주시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려 하시지만 죄인 된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죄는 확산만 되어 갑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를 샘플로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구약성경 끝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3단계의 내용을 조금 더 세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3단계는 창세기 12장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여호수아까지를 한 묶음으로, 사사기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라고 해서 한 묶음으로, 그리고 욥기부터 아가까지를 시가서라고 해서 한 묶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를 예언서라고 해서 또 한 묶음으로, 모두 4개의 묶음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각 묶음 별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기회를 따로 마련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단계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람이 함께 사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측면에서 1단계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즉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이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단계의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닮은 아무 흠 없는 존재였지만, 4단계의 사람은 죄인입니다. 여전히 죄에 사로잡힌 자이고, 죄를 기준 삼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멸시하고 조롱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5단계는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가치로,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된 존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죄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성도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하고, 그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와 당당하게 맞서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복음서 이후 사도행전부터 서신서를 포함한 신약성경 끝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여기 5단계의 내용도 사도행전, 바울서신, 일반서신, 계시록으로 조금 더 세분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역시 나중에 기회를 따로 마련해서 자세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마가복음의 위치
제가 오늘 이처럼 성경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경을 쉽게 읽기 위하여 5단계로 구분을 해드리는 이유는 오늘 시작하는 마가복음 강해 설교가 보다 효과적으로 여러분들께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즉 전체적인 숲의 모습이나 환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그 숲을 구성하는 나무와 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성질이나 특징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숲은 가을 숲인데, 그 숲 속에서 새싹을 찾기 위해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을 숲에서는 결코 새싹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꽤 많이 했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독교 성도들은 참으로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이 자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 자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이 어떤 이유에서 기록된 것이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전체를 알고 있어야만 부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거의 모든 성도가 외우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에게 구원에 대하여 가르치는 대화중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과, 혹시라도 이 말씀에 대해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보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해석해 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 3:17-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심판은 없다고 하셨고, 믿지 않는 자는 그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대부분의 기독교 성도들은 여전히 심판이라는 단어에 짓눌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진리의 말씀 보다는 계시록에 기록된 환상에 더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의해, 목회자에 의해 기독교의 진리를 잘못 배웠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우리는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구약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그 성부 하나님의 유업을 성자 하나님,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계승하여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되심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6]에서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이십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장이나, 구약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모두 그릇 된 주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속하여 이어져 온 것이고, 앞으로도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영원무궁토록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사람과 함께 하여 주셨고, 지금 이 시간도 사람과 함께 동행 하고 계시고, 또한 앞으로도 영원까지 사람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질문을 해 오실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즉 예수님은 달라도 너무 다른지 않은가요?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면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신가요?’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는 질문 같습니다.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야고보서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동일한 하나님이 두 모습을 보이시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눈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한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이라는 존재가 변하니까 하나님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조금 전 성경을 5단계로 나누어 보면 읽기가 편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5단계로 나누는 기준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느냐에 따라 성경을 구분했던 것입니다.
2단계와 3단계에서 사람의 모습은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죄 지은 사람이 경찰만 보면 본능적으로 숨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에게는 경찰이 국민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체포하여 징계하고 심판하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이 부모님 보기가 무섭고 두려운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경찰과 부모는 그 모습 그대로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들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2, 3단계에서 사람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그리고 선지자를 통하여 아무리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가르쳐 주어도 절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사람이 결코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코 죄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실패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사람의 실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고, 땅을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약속의 성취를 통해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여전히 죄의 원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데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냥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죄에서 반드시, 기필코, 끝까지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4단계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4단계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죄인의 상태입니다.
그 죄인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두 손 들고 환영할까요?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를 드릴까요? 죄인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이제 만만하게 봅니다. 똑같은 사람끼리 무엇이 다르냐고 따지고 들며,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예. 사람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이런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마가복음에 과연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은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과 제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바리새인, 서기관들, 대제사장들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원리를 가르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되는지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죄인이기에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것입니다. 예. 이것이 마가복음의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입니다. 앞으로 연말까지 약 40여 차례에 걸쳐 마가복음 설교가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마가복음의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과 마가복음을 포함한 복음서 네 권이 성경상의 구분에서 4단계에 해당한다는 점을 기억하시면 훨씬 더 이해하시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4. 복음은?
다시 오늘 본문 말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 성부 하나님의 유업을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어가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먼저 몇 가지만 여쭈어 보겠습니다. 질문을 드리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긴장하시는 표정인데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주 쉬운 문제이고 게다가 객관식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안 받으셨습니까? 1번) 받았다. 2번) 안 받았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의인이십니까? 아니면 죄인이십니까? 1번) 의인이다. 2번) 죄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의인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특별히 행하신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1번) 있다. 2번) 없다. 예.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에 아주 쉽게 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은 존재이고, 의인이라 칭함 받은 존재이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존재가 변화되기까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을 당당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 우리가 아무 노력을 한 것도 없는데, 우리가 태어나 진 것같이, 우리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도 우리가 구원을 받아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 우리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피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것조차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즉 기쁜 소식입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행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100% 공짜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존재가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전제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려주고 나서 이제부터는 네가 할 탓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복을 주겠다는 것을 미끼로 해서 ‘이리하라, 저리하라. 그리하면 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 보려고 하니까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쓸 일이 있으면 그것은 결코 복음,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복음은 명령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라고 해서 들어보니까 복을 주었다는 명분으로 이제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리해야 한다. 저리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것 역시 복음이 아니라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우리는 위로와 소망, 자유와 안식을 누려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오히려 지켜야 할 것, 이루어 내야할 것, 순종해야할 계명들만 늘어놓습니다. 복음을 복음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힘들어 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복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복음으로 인한 변화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흔히 복음이라고 알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간단하게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복음이라고 하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들으면 감동이 막 밀려오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한없는 은혜가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감사가 느껴지십니까? 역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압축의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암송하지 않지만 사도신경을 기억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고난 받으시고 바로 죽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것인지,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주신 것인지, 도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영양을 미친 것인지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왜 암송하는지 그 이유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과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하시기도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그 사실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와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우리가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내게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알지 못하니까 복음의 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내게 어떤 이득이 왔는지를 알지 못하니까 복음의 참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었던 분만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 갔었던 분만큼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란 사람만큼 부모의 간절한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죽어가는 내게 건강을, 감옥에 있는 내게 자유와 해방을, 고아인 내게 부모를 찾아준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 공짜로 찾아준 것입니다.
복음의 참 기쁨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의 참 감격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죄인 되었던 때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불쌍하고,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가 되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스스로 몸부림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처절하게 경쟁하며 살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기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반칙도 주저하지 않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큰 욕심을 부리다가 추락을 경험하고,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랬던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인이 되어 지긋지긋한 지옥의 삶을 살아가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그 결과, 그리고 그 결과를 이루어 내신 하나님의 일하심, 그 모든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을 실감하면 기쁨이 넘쳐나야 합니다. 행복이 넘쳐나야 합니다. 변화된 자신이 정말로 신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이루어진 일들이 너무나 가슴 벅차서, 감당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와서,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누구에게나 나눠주고 싶어서, 그 소식을 가지고 저절로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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