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뉴스]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의 무술인생푸른잔디밭에 도복을 입은 세 사람이 섰다.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다. 사제간인 두 남자 중 머리가 벗겨진 사람과 여자는 부부다. 세 사람은 사진촬영을 위해 간단한 무술시범에 들어갔다.
먼저 부부간 시범. 남자가 여자를 향해 정권을 내지르자 여자가 주먹을 쳐내며 남자의 팔목을 꺾어버린다. 다음은 여자와 제자. 마주선 상태에서 여자가 기합소리와 함께 제자의 양 허벅지를 부여잡고 어깨로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마치 럭비의 태클 동작과 같다. ‘손쓸 겨를도 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부인은 기자를 상대로도 같은 시범을 보였는데, 허벅지를 압박하는 팔심이 무시무시했다. 천근 쇳덩어리가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 기사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로 부터 제공받은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현재 발매 중인 신동아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이어 스승과 제자의 시범. 약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스승이 제자를 향해 몸을 날린다. 허공으로 솟구친 후 두 발을 가위처럼 사용해 제자의 목을 휘감아 돌리자 제자는 옆으로 나동그라진다.
보는 이가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동작이다. 다음은 하단
돌려차기. 낮게 구부린 자세에서 스승의 발이 컴퍼스처럼 원을 그리자 다리에 타격을 입은 제자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진다. 돌아가는 발은 보이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 특공 무술 동영상 보러가기
● 족기(足技)의 달인과 내공 고수의 결합
● 태권도, 합기도, 유도, 복싱의 장점에 호흡법 가미
●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다”
● 장풍처럼 펼쳐지는 평수(平手)의 가공할 위력
●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내공무술
● ‘괴력의 미니스커트’와 해병대원의 맞짱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
시범을 보인 부부는 장수옥(57) 대한특공무술협회 총재와 ‘철선녀(鐵扇女)’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김단화(58)씨.
결혼 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무술을 연마했다. 장 총재의 무술이 외공이라면 철선녀의 무술은 내공이다. 장 총재는 25년간 청와대 경호실 무술사범을 지냈고, 철선녀는 처녀 시절 내공무술의 최고 실력자로 통했다.
특공무술은 바로 장 총재의 독자적인 외공과 철선녀가 수련한 내공이 합쳐져 완성된 것이다.
군 특수부대와 청와대 경호실을 중심으로 전파된 특공무술은 어떠한 무술보다 실전적인 무술로 평가받고 있다. 타격기를 중심으로 하되 잡기와 꺾기, 태클 등 실전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온갖 기술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전국에 200여 개의 도장이 있으며 정식과목으로 가르치는 대학도 늘고 있다. 군인을 포함해 그동안 특공무술을 배운 사람은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특공무술협회의 올해 주요 사업목표는 중국 진출. 지난 5월 중국 옌지에 도장을 세운 것이 그 신호탄이다. 앞으로 2년 안에 중국에 200개의 도장을 세운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오는 9월 장 총재가 직접 시범단을 이끌고 중국에 건너갈 예정이다.
1부 ‘족기(足技)의 달인’ 장수옥
△젊은 시절 고축차기(왼쪽)와 날아차기. |
무술인들이 대체로 그렇듯 장수옥 총재도 눈매가 날카롭고 눈썹이 짙은 강인한 풍모다.
자신의 무술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외공과 내공의 차이점부터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외공은 외적인 힘, 곧 근육의 힘에서 나오는 것으로 일반 격투기 무술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내공은 내적인 힘, 곧 기(氣)를 모아 발산하는 것이다. 내공은 겉으로는 상처를 입히지 않지만 속으로는 외공보다 더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다.
“모든 무술의 기본은 육상”
평수는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급소나 혈을 공격하는 것으로 장풍을 연상케 한다. 청와대 경호실 무술사범으로 재직시 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실기 위주로 직원들을 훈련시켰다.
경호실 직원들은 무술이라면 다들 한가락씩 한다. 밖에 나가면 누구라도 체육관 사범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실력자들을 가르치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시범을 보여야 한다.
△장수옥 총재는 고수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 둘 익힌 기술을
자신의 전공인 합기도에 접목했다. |
처음에 경호실 직원들은 특공무술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때껏 자신들이 연마해온 태권도나 합기도, 유도, 검도와 비교해 ‘뿌리가 없는 무술’이라며 얕잡아본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특공무술이 가진 실전성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특공무술의 전파자로 나서게 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북 김제. 4남1녀 중 둘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모든 무술의 기본은 육상입니다. 어떠한 운동도 달리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만큼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한다는 거죠. 내 경우 체력만큼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늘 1등을 했고, 제기를 차면 200m 트랙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한번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축구도 잘했고요. 또 싸움이 붙으면 먼저 때리고 재빨리 도망치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그래서 웬만해선 맞지 않았죠.”
처음 시작한 것은 태권도였다. 태권도를 어느 정도 배운 다음에는 합기도 도장에 다녔다.
집에 들어갈 때는 대문을 이용하지 않고 늘 담을 뛰어넘었다. 그의 발차기 기술 중 가장 돋보이는 고축차기는 이런 일상적인 훈련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그의 고축차기 최고 기록은 3m70cm.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이중 점프를 해 목표물을 발로 차는 고난도 기술이다.
그는 합기도 도장을 다닌 지 1년 만에 3단을 땄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는 수련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급성장했다. 방학 때면 대학생들이 도장에 와서 그에게 배우기도 했다. 3학년 때는 4단을 따고 정식으로 사범 임명장을 받았다.
몰매 맞으며 호신술 익혀학생 시절 누구나 그렇지만 운동을 하면 폼을 재게 마련이다. 익산 시내엔 깡패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명동에 해당하는 영정통이라는 번화가는 폭력조직의 주 활동무대였다. 날로 느는 운동실력에 호기가 발동한 그는 가방 밖으로 도복의 검은 띠를 늘어뜨린 채 영정통을 누비고 다녔다.
도장에서 익힌 실력을 실전에서 써먹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폭력조직과 충돌이 잦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1대 1의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폭력조직과의 싸움에서는 혼자 여러 명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졸업 후 그는 직접 도장을 차렸다.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소 한쪽을 빌려 만든 허름한 도장이었다.
무술 고수들을 찾아나서다
그가 천생배필인 철선녀를 알게 된 것은 익산시 송학동에 새로 체육관 문을 연 1970년 가을이다. 모 주간잡지에
인왕산에서 무술을 연마한 처녀가 이로 철사를 끊고 주먹으로 바윗돌을 부수는 괴력을 발휘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그 여자는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를 갖췄다고 했다. ‘최고의 무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여자와 겨루고 싶어 당장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장수옥이라는 이름은 무술계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특히 ‘족기(발차기 기술)에 관한 한 대한민국 최고’라는 평이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새로운 무술을 배우고 싶어 무술 고수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거의 다 찾아다니며 도전을 청했다.
고수들을 쫓아다니며 하나 둘씩 보고 익힌 기술을 자신의 전공인 합기도에 접목함으로써 전천후 종합무술인 특공무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장 총재가 안 해본 무술은 거의 없다. 유도와 레슬링, 태극권, 당랑권, 심지어 권투까지 익혔다. 권투에서는 빠른 발놀림을 배웠다.
당시 철선녀는 종로
단성사 근처 백궁빌딩에 있는 도장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익산에서 올라간 장 총재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철선녀 옆에는 내공무술의 대가인 청산거사가 있었다.
뒷날 국선도를 창시한 청산거사는 일본 TV에 출연하는 등 한창 유명세를 타는 철선녀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안 만나주는 데야 별수없었다. 장 총재는 철선녀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채 하릴없이 익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꿈’이 실현되는 데는 2년이 채 안 걸렸다. 어느 날 신문에 아르헨티나 무술 시범단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참가신청을 했다. 심사에 통과한 후 시범단 참가자 모임에 나가보니 거기에 철선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2부 ‘괴력의 미니스커트’ 철선녀철선녀 김단화씨는 2002년 남편 장수옥씨가 청와대 경호실 사범직을 그만둘 때까지 10년간 특공무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공직자이던 남편 대신 협회를 이끈 것이다. 남편이 돌아온 후로는 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괴력의 미니스커트’로 불리던 철선녀의 젊은 시절.
일본 TV에 출연해 내공 무술을 선보이고 있다. |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그가 왜 뭇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예쁘장한 얼굴에 군살이라곤 없는 날씬한 몸매.
게다가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가수 윤복희보다 먼저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정도로 멋을 낼 줄 아는 여자였다.
김씨의 고향은 대구. 대가족이었다. 6남4녀 중 셋째딸로, 전체 순서로는 여섯째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불교도 가까이 했다. 어릴 때부터 ‘부처님 오신 날’엔 꼭 절에 갔다.
생일이 초파일인 음력 4월8일이라는 기연 때문이었다.
“너는 공부 많이 하면 단명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소질을 나타낸 쪽은 음악과 무용이었다.
비록 가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음반 취입도 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남자들이 우선 가야 한다’는 부모의 방침에 따라 진학을 포기했다.
주역에 훤했던 부친은 “사주를 보면, 너는 공부를 많이 하면 단명한다”고 했다.
대학 꿈을 접은 그는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절을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청산거사를 알게 됐다. 북한산
도선사에 있는 청담스님을 통해서였다.
청산거사는, 절에 있긴 했지만 김씨의 표현대로라면 운수(雲水)하는 스님이었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운이
넘치는 철선녀 김단화씨가
태클 시범을 보이고 있다. |
김씨는 처음 ‘선생님(청산거사)’을 만날 때만 해도 운동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고 단전이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청산거사가 ‘하겠냐’ 물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출발이었다.
철선녀는 청산거사가 지어준 일종의 호다. 글자 그대로 ‘쇠부채를 펼치는 여자’라는 뜻이다. 남자 제자 둘은 각각 신력사(神力士), 태력사(太力士)로 불렸다. 철선녀가 어느 수준에 오르자 청산거사는 그를 무대에 세웠다. 예쁘장한 얼굴, 가냘픈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 철선녀가 등장하기만 하면 공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1970년 일본 TV방송사 관계자가 소문을 듣고 한국을 찾아와 철선녀를 만났다. 그는 철선녀의 묘기 몇 가지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 그의 주선으로 철선녀는 일본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기자는 철선녀를 인터뷰하기 전 특공무술협회 사무실에서 당시 방송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봤다.
7㎝ 두께 송판을 이마로 격파하기, 가슴에 징 박고 해머로 치기, 가슴에 세 겹으로 바윗덩어리 올리고 해머로 내리쳐 부수기, 양팔에 감은 광목을 서로 반대쪽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2대에 연결해 끌어당기기 등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버스 안의 무차별 구타그 시절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은 철선녀는 남자들과 많이 싸웠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때는 싸움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시비를 거는 남자가 있으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야, 이리 따라와 봐” 하고 소리를 질러 기선을 제압하거나 박치기로 혼내줬다.
미모에 무술을 겸비한 철선녀 주변엔 남자가 들끓었다. 하지만 콧대 높은 철선녀는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헨티나 무술 시범단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최종 선발된 사람은 그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 그중 한 남자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는데 그는 관심없다는 듯 묵묵히 연습에만 몰두했다. 시범단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는데, 특히 발차기가 일품이었다.
3부 세계 최강 특공무술의 탄생“만약 우리가 싸운다면 둘 중 하나가 죽거나 그 길로 부부생활이 끝날 거예요. 결혼할 때 이 사람에게 말했죠. ‘평생 내 얼굴에 손대지 말라’고. 그 약속을 이제껏 지켰어요.”(철선녀)
“지금도 집사람은 ‘당신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나한테 안 된다’고 해요. 내공의 위력이죠. 하지만 사정거리 밖에선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 관한 한 여간해선 내공이 외공을 당할 수 없죠.”(장수옥 총재)
1972년 아르헨티나 시범단 일원으로 만난 두 사람은 정작 아르헨티나에는 가지 않았다. 장 총재가 스물넷, 철선녀가 스물다섯. 목석인 줄만 알았던 두 무술인의 가슴에 연정이 싹텄다. 어느새 외국행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얘기처럼 철선녀를 아내로 받아들인 후 장 총재의 무술은 일취월장했다. 어떤 책에서 하루 중 새벽 1~3시가 가장 공기가 맑으며 그때 운동하면 효과가 높다는 글을 읽고 나서는 2년간 매일 그 시각에 철선녀가 가르쳐준 호흡법을 연마했다.
△장 총재의 하단 돌려차기에 상대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 오른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장 총재가 두 발로 상대의 목을 휘감아 돌리고 있다. |
내공으로 기를 모은 후 발차기를 하자 기술이 더욱 향상됐다. 특히 고축차기와 더불어 그의 2대 발차기인 회축차기가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마주선 상태에선 어느 누구도 그의 회축차기를 손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손이 올라가는 것보다 발이 돌아가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실로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는” 경지였다.
무술실력은 늘었지만, 생활은 초라했다. 시골에서 체육관을 운영해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자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힘쓰는 운동을 많이 한 철선녀는 고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돼지고기 한번 제대로 먹을 형편이 못했다. 아이를 낳자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뭔가 돌파구를 찾을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직업군인이 독일에 가서 광부를 하라고 권했다. 알선료를 주면 자신이 힘을 써서 독일행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장 총재 부부는 체육관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 대기하다가 비자가 나오는 대로 독일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소룡 후계자 될 뻔
1975년 가을,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독일행 약속은 사기였다. 간신히 알선자를 찾아내 돈은 거의 돌려받았지만 앞날이 막막했다.
그해 겨울, 한파가 몰아닥치자 수도관이 터졌다. 물이 없어 밥도 제대로 해먹지 못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딸아이가 뜨개질바늘에 목이 찔렸는데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술실력으로는 두 사람 다 어디 가도 대접받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 사람을 목사 만드는 게 어머님 꿈이었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성경 말씀을 꺼내며 남편을 설득했어요. 남편은 마지못해 신학교에 들어가긴 했는데 몹시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런데 야간 신학교를 다닌 지 한 달 만에 우리 가족에게 빛이 찾아들었어요. 606부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606부대는 청와대 경호실 소속 특수부대였다. 그때 606부대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장 총재는 어쩌면 홍콩에 건너가 영화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 606부대에 앞서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는 홍콩 영화제작사에서 그를 찾아와 카메라 테스트까지 했기 때문이다.
“우리 애들, 최강으로 만들어달라”베레모를 쓰고 찾아온 군인들은 그를 지프에 태워
김포공항 내 군부대로 데려갔다. 연병장에 도착하자 도복을 입은 군인 30명가량이 그를 에워쌌다. 606부대는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대테러 특수부대였다. 특전사에서 선발된 이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건장하고 무술실력이 뛰어났다.
△철선녀 김단화씨는 인왕산에서
청산거사에게 내공무술을 익혔다 |
부대장이 나타나 장 총재에게 가장 뛰어난 무술실력을 갖춘 부대원과의 대련을 요청했다.
정관수술 여파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장 총재는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고 대련을 받아들였다. 부대원이 돌려차기를 하는 순간 그의 명치를 향해 가볍게 평수를 날렸다. 부대원은 신음을 내며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박수가 터졌다. 부대장이 숨 가쁘게 말했다.
“내일부터 당장 우리 애들 훈련시켜 주시오. 훈련받다 몇 놈 죽어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최강으로 만들어주시오.”
그뒤 1년 더 장 총재는 606부대를 지도했다. 특공무술이 짧은 기간에 군내에 널리 보급된 데는 606부대 출신 군인들의 공이 컸다. 1980년 10월 장 총재는 경호실 무술사범으로 임명돼 청와대에 입성했다. 군 출신으로 평소 무술에 관심이 많던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자식들까지 특공무술을 배우게 했다.
특공무술은 태권도의 발차기, 유도의 낙법, 합기도의 꺾기, 호신술 등 여러 무술의 장점에 철선녀의 내공법을 가미한 것으로 기술과 대상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가 군 무술. 전장에서 써먹어야 하므로 실전적인 공격술, 즉 단기간에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기술이 중심이다.
둘째는 경호 무술. 경호의 기본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따라서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방어 기술이 주축이다. 잡기, 꺾기, 급소 가격 등 근접 제압기술이 발달해 있다.
셋째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체육관 무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 다양한 기술로 구성돼 있다. 군 무술과 경호 무술은 체육관 무술의 갖가지 기술 중 가장 실전적인 기술만 추린 셈이다.
그런데 특공무술의 장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철선녀가 전수한 내공 기술이다. 예컨대 주먹 지르기를 할 때 외공의 관점에서는 어깨와 팔의 근육을 단련시켜 그 힘으로 가격을 한다.
하지만 특공무술에서는 근육의 힘으로 주먹을 지르지 않는다. 다른 격투기와 달리 손끝이 아니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단전의 힘을 키우면 근육을 사용한 파괴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손끝에서 펼쳐진다. 장 총재가 즐기는 평수가 바로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치지만 내공이 실린 힘이므로 주먹으로 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내 나이 40만 돼도 천하를 죽이겠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도복을 입겠다”는
철선녀 부부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
장 총재는 기자의 끈질긴 요청에 협회 사무실에서 간단한 평수 시범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평수를 날렸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해달라”는 기자의 부탁을 감안해서인지 슬쩍 갖다대기만 했다. 그런데도 속이 꽝 울리는 듯한 묵직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이소룡의
절권도나
최영의의 극진가라테도 실전성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무술이다.
요즘 한창 인기인 이종격투기도 마찬가지다. 장 총재에게 “특공무술과 붙으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싸움은 상대적인 것이고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장 총재 부부는 중국에서 특공무술이 활성화되면 그곳에 무림원(武林院)을 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들이 구상하는 무림원은 각 유파의 원로 고수들이 거주하며 무예를 논하고 무술의 발전방안을 꾀하는 일종의 무술 아카데미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유동적이다. 여건이 되면 국내에 무림원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도복을 입겠다”고 입을 맞춘 듯 말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철선녀가 주먹을 쥐고 말했다.
“아유, 지금 내 나이 40만 돼도 천하를 죽이겠어.”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이 기사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로 부터 제공받은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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