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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토요일,
이번만큼은 전 날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 세 시에 끝나는 짐 싸기를 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하며 4일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출발 항공편 시간도 밤 9시 20분이라, 출발일엔 더욱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여유로운 시간을... 나는.....
덥고 습한 여름에, 빨래통에서 일주일이나 빨래가 묵는 게 싫었던 나는(여행에 가지고 가고 싶은 옷도 한 두 개 섞여 있긴 했다.) 세탁기 돌리기, 옥상에 널기, 여행에 필요한 물건 몇 개 더 사러 나갔다가 소나기 맞고 들어와서 옥상에서 젖은 채 늘어져 있는 빨래 걷기, 다시 세탁기에 빨래 돌리기, 비싼 건조기능까지 돌리기, 총 3시간 57분 기다려 빨래 꺼내 놓고(건조 기능 돌린 후에 오래 두면 드럼통 자체가 다리미 기능을 하는 바람에 빨래가 완전 구겨진다) 대충 손으로 펴 놓기 등으로 소진해야 했다. 개기는 생략했다. 개야할 시점에 이미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다.
유진이는 친구 서연이와 함께 스마트폰 중독에 관한 '과학탐구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오전부터 내내 컴퓨터에 붙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유진이가 서연이에게 오늘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와, 좋겠다. 태국 가면 망고스틴 꼭 먹어!
아, 그리고 바나나를 고구마처럼 구운 것도 완전 맛있어"
라고 했다.
서연이가 태국에 다녀 왔을 순 있지만,
저렇게 가장 맛있었던 음식(아이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열대과일 이름까지)을 곧바로 떠올리며
친구에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특별해 보였다. 알고보니 서연이는 공부도 제법 잘하고, 꽤 줏대있는 캐릭터였다.
문제는 자질구레한 장보기며, 빨래를 두 번씩이나 돌리느라 피로도가 급상승한 나였다.
과학보고서를 끝내고도 컴퓨터를 가지고 한참 노닥거리는 딸냄과 그의 친구 덕분에 나의 분노 게이지는
이빠이! 상승했다.
기홍씨가 오자마자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빨리 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다.
유진이는 나오다가 뭔가를 두고 나왔다며 동네 골목길에 우릴 세워두고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왔는데.. 뭐였을까나?
암튼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기홍씨는 마냥 해피할 뿐이고, -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황급히 물건을 찾아 다시 나온 유진이가 택시 안에서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나한테 화났어?"
이럴 수가...
나는 그저 누군가 내 감정을 알아주기만을 바란 것이었던가.
유진이의 그 질문에 온갖 피로와 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는 거 같았다.
"응, 엄마가 좀 지쳐서 그래.
오늘 $%$&* 사러 나갔다가 소나기가 오길래, 빨래를 @#$%#%^& 하느라 힘들었거든.
유진이한테 화난 건 아니야.(사실은 네가 컴 앞에 오래 붙어 앉아 있어서 그 피곤한 화로에 기름을 부었단다~.~)"
롯데호텔 앞에서 출발하는 공항 버스는 잠실에서 곧바로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까지 논스톱으로 주행한다기에 일부러 호텔 앞까지 택시를 타고 왔더니, 세상에나~ KAL 리무진이라 요금이 2배 가까이 됐다. 토요일이라 교통 체증도 염려될 뿐 아니라 하다못해 사고라도 나면 복구 시간도 늦어질 테고.. 공항에 가서 미리 예약해 둔 태국 현지용 심카드도 받아야 되고.. 오늘은 특별히 항공사 라운지에서 저녁 먹을 계획까지 세웠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냥 타자.
일주일 뒤 월요일 아침에 다시 돌아올 때는 오전 6시 반 인천 도착이니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기홍씨에게도 촉박한 시간이다. 올때도 논스톱으로 오는 게 낫겠다 싶어 내쳐 왕복으로 끊었더니만 -왕복이면 5%인가, 할인된다고 티켓판매원이 유인하기도 했다.- 세 사람 리무진 버스 요금만 87,000원이었나보다. 꿰엨~ 그러나, 롯데월드 건너편으로 다시 짐을 끌고 가기에 날씨는 너무 덥고,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다음부터는 일찌감치 나와서 보다 저렴한 일반 공항버스를 타리라.
우리 딸 아주 다부지게 나왔구려~
타이항공 티켓팅을 알려주는 카운터 위쪽에 달린 모니터에 달린 보라색은 여전히 반갑다.
나는 입술이 왜 저렇게 하얄까..
젊었을 때 진한 립스틱 많이 발라서 피부를 상하게 한 적도 없는데, 입술 색이 참 허얘..
이런 생각을 이십년 간 하고 지냈는데, 알고보니 백반증 때문이었다. ㅠ.ㅠ
***
어쩌면 세 시간 전부터 공항에 일찍 나오려고 하는 이유는
공항에 있는 시간이 우리를 그 시간 내내 흥분시키기 때문인 거 같다.
어디론가 떠날 예정을 두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설레임과,
입국 수속과 보안 심사대를 지나가는 과정 역시 별 거 아닌 듯해도 매번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을 이륙한다는 해방감.
보딩 게이트 앞에서 창밖에 있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긴장과 설레임을 오가면서 미처 다 준비하지 못한 여행에 대한 세세한 계획들까지 머릿 속에 뒤죽박죽이 되면
사실은 세 시간이 아니라 한 나절을 보낸다 해도 공항에서의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뿐인가. 공항에서는 늘 매번 어떤 실수가 일어난다.
직업적인 이유가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비행기를 탈까 말까 하니,
탈 때마다 치르는 일이라 해도 매번 새롭고, 매번 뭔가 헷갈린다.
물론 그것도 사람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6년 전, 기홍씨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나던 2007년 10월 3일 밤,
인천 공항의 어떤 라운지가 너무나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뷔페에 가까운 음식과 음료, 심지어 몇 종류의 맥주와 와인도 있고,
편안한 소파와 읽을 거리, 컴퓨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샤워시설까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신부화장은 물론이고, 실핀이 200개는 꽂혀 있을 거 같은 단정한 올림 머리를 풀고
그 라운지에서 샤워까지 하고 나와 11시간의 비행에 오를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기홍씨가 사용하던 하나카드에서 추가 발행되는 PRIORITY 카드를 이용하면
동반1인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우리는 그 카드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꼭 쓰리라! 하고.
요번 태국행 비행기가 마침 밤에 출발하니,
올해에는 반드시 일찍 도착해서 그 라운지를 찾아 맛있는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여행계획을 다시 검토하다 비행기를 타리라 하고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항상 계획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미흡한 준비성~
어느 라운지로 찾아가야 하는지를 미리 알아놓지 않았다.
보안검색까지 마치고, 별 관심없는 면세점을 휙휙 패쓰하고 안내 데스크로 가서
프리아러티 카드를 이용하려면 어느 라운지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생각해보니 질문 방식부터 이상했다. 하긴 어쩔 수 없다. 나로서는 준비도 없이 6년만에 사용하려니.
안내원은 항공사 계열별로 두 개의 라운지가 있으니 타이항공은 대한한공의 허브 라운지를 이용하라고 했다.
라운지로 올라가 안쪽을 힐끗 들여다보니, 6년 전에 갔던 그 멋진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다른 라운지가 또 있냐고 물었더니, 터미널 동에 하나 더 있다며, 그쪽으로 미리 가서 여유있게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유진이는 너무 배가 고팠고, 이미 7월부터 수시로 위장 장애가 있어서, 음식 선택에 제한이 있었다. '아이가 위장이 예민해서 죽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음식 종류가 어디가 더 다양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담 그냥 그곳을 이용하라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라운지는 과거에 이용했던 그 넓고 쾌적하며 고급스런 분위기 전혀 아니었고 그냥 휴게실 분위기였다.
우리가 사용했던 공간은 없어지고 새로 생긴 건가. 근데 왜 더 나쁘게 만들어놨지?
음식 종류가 적다고 할 순 없지만.. 글쎄.. 유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와 잡채가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모르겠다, 이미 들어온데다 애는 배가 고프다 하고~
그냥 먹기로 했다. 유진이는 컵라면 하나까지 접수해가면서.
나중에 셔틀 트레인을 타고 보딩 게이트 근처에서 다시 찾아보니, 6년 전 우리가 이용했던 라운지보다 더 넓고 멋진 곳이 터미널 동 중간쯤에 있었다. 사람도 거의 없고(아까 면세점 위층에 있던 라운지는 돗대기 시장 같았다) 음식도 깔끔하게 잘 배치되어 있고.. 굳이 따지면 한식은 거의 없고, 주로 양식이라는 게 달랐다.(그래서 안내직원이 아까 그곳을 추천했나보다.. ㅠ.ㅠ) 역시 어디엔가 큰 돈을 쓰려면 미리 좀 알아보고 써야 한다. 똑같이 돈 쓰면서(심지어 하나카드 동반1인 무료 제도는 할인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속상할 수가..
고로, 오늘의 또 하나의 뼈아픈 결론, 항공사 라운지는 반드시 터미널 동을 이용한다.
그리고 기홍씨의 국민카드 이용(동반 2인까지 40% 할인 -이건 나중에 여행 다녀와서 알았다.)
뭐, 그런 크고 작은 일로 끌탕을 해도 비행기는 뜬다.
그리고 우리는 떠날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타이항공의 와인 잔. 와인 맛도 썩 좋았다.
모든 이에게 추천할 만한 가이드 북, '프렌즈 태국' 매우 두꺼워서 분책해 가지고 왔다.
12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인데, 얼굴 상당히 멀쩡하게 나왔네~ 역시 좋은 카메라의 성능이란~
타이항공은 베트남항공 수준을 예상했던 나의 기대와 달리 여러모로 훌륭했다.
하긴 인구의 80퍼센트가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나라의 대표 항공사이니, 그럴 만도 하다.
기내식도 아주 맛있고 훌륭했다.
아스파라거스와 카레 맛 닭가슴살은 이제까지 먹어본 기내식 중에 손꼽을 정도였다.
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방콕의 쑤완나폼 공항의 수하물 찾는 곳.
공항에서는 이래저래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아서 초조해지기도 쉽다. 워낙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짐들이 오가는 곳이니 혹시나 내 짐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혹시 내가 검색대에 걸리진 않겠지, 매번 그런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재작년 보라카이 가는 길에 내렸던 필리핀의 깔리보공항은 에어콘도 나오지 않고, 입국수속은 물론이고, 짐 찾는데도 세월아네월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줄도 안선 채 우왕좌왕하니 줄이 짧아지는 것 같지도 않아서 아수라장같았다. 그나마 우리 가족은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부채 부쳐주기 게임을 하면서 기다렸다. 덕분에, 그 덥고 좁은 시골 공항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이 택시 타는 방법도 특이했는데, 저녁 준비 하러 오늘은 이만~
커밍 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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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타는 곳에 가면 공항의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목적지를 묻고, 택시 기사를 지정해준다.
택시기사는 요금이 얼마인지 말해주고, 목적지가 적힌 메모를 받고는 우리를 태운다.
바가지 택시요금 때문에 콜을 하네, 어쩌네 말들이 많았지만,
이정도 시스템을 놔두고 왜 3배 가까운 돈 들여서 콜을 부르는지 이해가 잘 안됐다.
택시비는 톨비 포함 500바트.
새벽 2-3시에 방콕 거리는 불야성을 이룬다.
많은 곳에 훤히 불이 밝혀 있고, 사람들이 놀고 있었다.
저렇게 새벽까지 놀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지? 가게는 몇 시부터 영업을 할까..
주로 뭘 하면서 노는 걸까.. 다 젊은 사람들인가.. 그런 질문들이 스치기도 하지만..
어두운 이국의 밤 거리에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일단 긴장감 때문에 어떤 생각이든지 오래 할 수가 없다.
공항에서 한 40분 걸려 드디어 숙소 가까이에 왔다.
1키로는 될 거 같은 람부뜨리 로드의 동쪽 끝에서 숙소를 찾는 바람에
정 반대쪽 끝에 있는 우리 숙소에는 제일 끝에서야 도착했다. "뉴 씨암 3"의 3307호.
뉴 씨암은 2가 제일 좋고, 뉴 씨암은 너무 오래 돼서 비추하는 분위기였다.
1층 접수대. 별 특색은 없지만, 비교적 친절하다. 생수를 세 병 매일매일 준다.
3명이 쓰기에 좁을 수도 있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트리플 룸은 훌륭했다.
천장에 돌아가는 팬도 맘에 들고, 침구도 깨끗했다.
가장 중요한 욕실도 깨끗하니 맘에 들었다.
수압이 낮아서 샤월할 때 좀 불편하긴 하지만, 깨끗하니까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뉴씨암3 트리플룸의 가격은 1박에 1150바트. 우리 돈으로 56,000원쯤.
첫 날은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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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국아, 기다려라. 이번 주만 지나면 내가 널 다시 기억해주마.
2주 만에 쓰는 거로군. 하루 만에 다 쓰려고 했는데.. 크엌~
ㅎㅎㅎ 느무느무 생동감 넘치는 후기, 그날의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다시 한 번 여행길에 오르는 듯해요~!!
아 이 얼마만의 커밍 쑨인가~!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ㅎㅎ
굴국이 가져다 준 선물~ >.<
ㅎㅎㅎㅎ 고마워요~! ㅎㅎ
여행수첩에 이렇게 써 있네요~
- 공항버스 : 4시 40분 버스 탑승, 6시 5분 도착!
- 비행기 : 9시 20분 출발, 1시 10분 도착 예정(총 5시간 50분 소요)
- 기내는 매우 건조! 인공누액, 립밤, 미스트 반드시 지참할 것.
수첩에 반드시 여분의 안경을 준비할 것! 반드시!!! 안경 다룰 때 특히 주의할 것!이라고도 써 있습니다.
물론 그 옆에 작은 당신 글씨로 '나와 인연이 깊은 초록 안경'이라고도 써 있네요~.~
안경과 관련된 작은 사고가 있었던 것 같죠?
여행 도중 안경에 문제 생길 걸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 그러므로 여분의 안경을!
공항에서 후시딘을 자그마치 7천원이나 주고 샀다! 흐미.. 미리 다 챙긴다고 챙겼는데.. 아주 조금 남은 것 하나만 가지고 오는 바람에, 돌아와보니 집에 방방마다 후시딘이 있다. ㅠ.ㅠ
ㅎㅎ 파란색 젤 타입 후시딘이었죠. 유진이 지금도 귀 소독할 때 잘 쓰고 있고요~ㅎㅎ
암튼 공항 약국은 엄청난 인파 만큼 엄청난 가격~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