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고 하니
요한9:1-41 / 2014-03-30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적을 두고서 논쟁이 더 전개됩니다.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란 게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안하도록 당시 유대교에서는 철저히 단속을 했습니다. 안식일에 이런 이적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사람은 율법을 어기고 있으니, 모순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도 이러저러한 혼란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혼란스러움을 어떻게든지 정리하려고 애쓰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어려운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애쓰다가 망하는 일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나의 수준이 이를 이해할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혹은 우리 환경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데, 억지로 시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분명히 우리가 정리해야 할 일인데도, 회피하고 지나가는 것도 바른 길이 아닙니다.
제주의 교회는 오랫동안 4.3사건에 대한 언급을 피해 왔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체 지나온 세월이, 이제 두 세대를 넘어서, 66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 올해에는 4.3추념일이 지정되는 일이 성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약속을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걸었습니다. 취임 이후, 많은 약속이 무시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있기에, 이 공약도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최소한도, 공약이 실천에 옮겨졌다는 점에서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 올해 추모식에 참석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최종결정이 났다는 보도는 아직 없습니다. 참석하면, 오히려, 불편함은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경호의 문제로, 많은 유족들은 식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멀리서 지켜보아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후보 시절에는 찾아와서 분향하고 해결하는 데 큰 힘을 보탤 것처럼 해서 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당선된 이후에는 이러저러한 핑계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국가원수가 이 추모식을 직접 방문했던 것은 단 한 번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때도 유족들은 퍽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합니다. 혹여 갑자기 잘못된 일이 발생할까, 조심해야 하는 경호책임자의 입장에서는, 미리 조사하고, 검색하고, 제한하였습니다. 그래서, 추모식의 주인이 되어햐 할 유족들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찾아 오셨다는 상징적인 배려, 위로의 뜻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만은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4.3추념일 지정과 관련하여, 인터넷 뉴스들을 보면, 불만으로 가득찬 의견들이 수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마음으로부터 가장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서는, 반대한다, 탄핵한다, 심지어는 역적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4.3을 두고 진실공방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 무장대의 만행을 열거하며 규탄하는 글들도 수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 혹은 역사나 정치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읽은 시각장애인, 그의 병고침 받음을 두고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장애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뿌리가 깊은 논쟁이 벌어집니다. 고침 받은 다음에도 파장은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그 부모조차도, 이제 당사자가 성인이 되었으니, 직접 물어보라고, 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습니다. 죄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명기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반면, 죄의 개인적인 책임을 더 중시하는 에스겔 18장의 입장도 택하지 않습니다. 그 대립을 뛰어넘어서 다른 시각을 가질 것을 권유합니다. 예수님을 괴롭히고자 했던 많은 질문에 대해서, 그는 직접 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도, 탁월한 지혜로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주님의 솜씨를 볼 수 있는 한 장면입니다.
과거사 정리, 진상규명, 이는 끝이 안 보이는 게임입니다. 역사가들은 혹은 역사에 관심을 가진 호사가들은 늘 약자의 관점에서 뒤집어보기를 좋아합니다. 그 논쟁은 반복되며, 확산됩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과 사마광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패배자였습니다. 그들은 현실 정치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역사서술을 통해서 풀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새로운 제안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소모적인 논쟁을 그만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일에 사활을 걸며, 물러서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소 귀에 경읽기가 될 것입니다.
나이 드신 할머니들 중에는 직접 그 난리를 겪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그 이후에야 태어났고, 4.3이라는 말을 이해한 것도 퍽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가끔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서 4.3사건은 저에게는 “사슴싹언 때”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상상하기를, 매우 추웠던 어느 겨울에 사슴과 노루도 다 얼어 죽었는데, 그 난리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폭도에게 대창에 찔렸다든지, 총살당하는 현장에서 살아난 이야기였지만, 제대로 꿰어지지 못한 채, 부스러기 이야기들로 기억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순경 3명과 공비 3명이 강을 건너는 수수께끼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교감선생님이 수학을 그리고 윤리를 가르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공비의 숫자가 순경보다 많은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건너가는 방법을 생각해내라는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학생 누구도 공비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모르나?” 어처구니 없다는 듯 선생님은 폭도라 설명했습니다. 그건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해, 친구 중 한 사람이 또렷하게, 4.3사건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듣고, 아, 4월 3일에 일어난 난리였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간행되는 수많은 자료와 해석들, 우리교회에도 꽤 많습니다. 이러저러한 입장에 따라 정리된 책들이 있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상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여명의 눈동자> 27회부터 30회까지 4회를 몇 주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조금씩 볼 생각입니다. 다음 주 오후에는 나들이순서를 <지슬>의 역사현장에 가 볼 계획입니다. 조만간 신화역사공원이 조성된다 하니, 올해가 그래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마을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어음리 다 올라간 곳에 자리왓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그때 떠난 사람들이 그곳을 복구하는 대신, 아랫마을에 정착하였고, 신명동을 이루었습니다. 자리왓에 신명서당이 있었는데 신명이라는 이름을 이곳에 부쳤다고 짐작합니다.
저의 가족들도 이에 관련된 어려운 때가 있었다는 얘기를, 올해 들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막내 고모는 1930년경에 태어났는데, 50년전에 결핵으로 돌아가셨어요. 성장기에는 총명한 재원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난리 중에, 지역 서북청년단 대장이 그 딸을 달라고 청했는데, 할아버지가 응낙하지 않고, 거절했답니다. 논밭도 꽤 있고, 쉽게 넘보지 못할 집안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모랑 더불어서 집안의 남자 3인을 데려갔다 합니다. 3일만에 더 큰 어려움 당하지 않은채, 돌아왔다는 얘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시각장애인이 되는 세상, 아직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아픔의 역사와 현실을 두고서 아직도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 옳은 길입니까? 다행히, 근자에 들어와서 희생자 유족들과 당시 경찰 혹은 그 유족이나 관련자들이 만나기도 하고, 서로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흐뭇합니다. 하귀리에서는 어느 쪽 할 것 없이 함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원을 조성하여, 영모원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화해와 상생의 모범사례가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4.3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아직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나 글들을 읽고 파악하는 중에 있습니다. 어서 제 생각이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남의 얘기는 듣지 않고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도전하고 싶습니다. 난 제대로 보고 있다고 자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죄가 그대로 있다.
첫댓글 자리왓에 가서야, 우리 교회 안에도 그때의 일로 고통을 안고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선석 장로님의 아버지가 그 근처로 끌려가 총살당한 사람들 중에 있었다 하구요, 김수생 권사님은 대림에서 자라나서 자리왓으로 시집 왔는데, 소개작전에 의해 마을이 없어질 때, 신명동에 내려와 정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