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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槐山 1863生 公威 掌堂공위(公威) 위당(韋堂) |
1894甲午式年試진사(進士) 節義士 忠貞 自決殉國 공훈 건국훈장 애국장 |
1派25世찬성공파友良 |
생졸년 1863 (철종 14) - 1910 (융희 4)
시대 조선 말기
활동분야 충효열 > 의열
안숙(安潚)에 대하여
1863년(철종 14) 7월 9일∼1910년(융희 4) 10월 4일. 조선 말기 절의사(節義士). 본적은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이다.
유림(儒林) 출신이다. 전통 학문에 조예가 깊었지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신학문(新學問)에도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에 대처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상설(李相卨)과 교분이 있어서 성균관(成均館)에서 직강(直講)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행되자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였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의 자결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한 제문(祭文)을 작성하여 충정(忠貞)의 뜻을 나타내었다.
1910년(융희 4)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로 망국의 통한을 풀고자 하였다. 주위에서 만류를 하였으나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하는 것은 유학(儒學)의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며 충청북도 괴산군에 위치한 오랑강(五浪江)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공훈사료관포상자공적조서
유공자명(한글)
안숙
유공자명(한자)
安潚
호적명
이명
생존여부
사망>자결
성별
남
생년월일
(양)1863년 07월 09일
사망년월일
(양)1910년 10월 04일
본적
1. 충청북도 괴산 七星 栗院 122
독립운동당시 주소
忠北 槐山 七星 栗院 122
관리번호
9686
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5
운동계열
국내항일
소속 및 지위
독립운동기간
활동지역
忠北 槐山
수형년수
복역년수
공적개요
1905年 乙巳條約時 自決殉國한 閔泳煥을 곡하여 그의 영전에 고하는 祭文을 썼고, 1910年 한일합병이 단행되자 이에 대한 울분으로 同年 10월 4日 忠北 槐山의 五浪江에 투신 殉國하여 절의를 지킨 사실이 확인됨.
경술국치 순국열사 안숙, 그 삶과 저항의 서시 ‘선비 안숙’
2010년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이고 선비 위당(韋堂) 안숙(安潚)이 자결 보국(報國)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위당이 순국한 날인 1910년 음력 10월 4일은 양력 11월 1일 토요일이었다. 바로 그 순국의 날에 맞추어서 '위당유고'의 전문(全文)을 완역한 [선비 안숙 日誌 ― 그 삶과 저항의 서시 ‘위당유고(韋堂遺稿)’]가 나왔다. 원전인 '위당유고'의 영인본을 합쳐 632쪽에 달하는 중량감 나는 책이다.
안숙은 재야 지식인(선비)의 몸으로 나라가 기울어지던 대한제국 말의 암울한 시대를 온 정신으로 부딪치다 온몸을 던져서 순절한 순국선열(건국훈장 애국장)이다. 그는 계곡이 깊고 물 맑은 괴산 오랑강가에서 향리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면서 청백하게 살다가, 시대의 역행에 통분하여 정면으로 간(諫)하고자 스스로 오랑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진유(眞儒)의 문인이요 실학 계열의 개화파 사상가이다.
멸하지 않는 애국의 참뜻을 고하다
이제 우리는 애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애국은 멸하지 않는 본질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의 전국시대에 조국 초나라를 위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로써 간(諫)한 시인 굴원(屈原)은 여전히 불멸의 상징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은 카자흐 기병대장 불리바가 우크라이나 대초원의 고향을 등지고 적국 폴란드로 넘어간 아들 안드레이를 전장에서 찾아내어 손수 총살하는 비장한 장면을 그려서 애국의 본질이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다. 결국 애국은 단순히 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애국은 자기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뿌리를 수호하며 정체(正體)를 유지하려는 강렬한 정신이기에 보편성을 띄게 된다. 선비 안숙은 그런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것이다.
“아아, 오랑강에 빠져 죽은 강렬하고 멸하지 않는 영혼은 세차게 흐르는 강물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 일을 두고서 나는 새삼 죽은 것은 영예롭고 사는 것은 치욕이라 여기게 되니, 이에 다시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한말 일제하 진천의 강화학파 지사(志士)인 학산 정인표(鄭寅杓)가 [성균진사 안군 묘지명(成均進士安君墓地銘)]의 결론으로 쓴 대목이다.(342쪽)
역사적 성실성을 획득한 개인사
따라서 우리는[선비 안숙 日誌 ― 그 삶과 저항의 서시 ‘위당유고(韋堂遺稿)’]가 갖는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안숙이라는 한 개인이 동아시아의 격동기 속 대한제국의 애국계몽기에 온몸으로 쌓아올린 역사적 성실성을 이 책은 온전하게 운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있는데 [선비 안숙 日誌]는 기록된 역사 가운데 개인사(個人史)의 기록 작품이다.
선비로서의 청빈한 삶, 교우의 희로애락, 인간의 연분을 읊다
저자 위당의 뛰어난 필체를 동시대의 평자는 이렇게 썼다. “충후하며 애달픈 말과 변아(變雅: 쇠퇴한 시대의 시가)에 대한 작자의 뜻이 유래가 있고, 간결 고풍(古風)의 온화 윤택한 글과 노두(老杜, 두보)의 시사(詩史)의 규칙이 진실로 거기에 들어 있다.”(344쪽) 그는 매화를 가리켜 “아마 그대 전신은 자(字)가 옥진(玉眞, 당 명황의 귀비) 선녀인가” 했고(135쪽), 대나무를 가리켜 “속 비운 곧은 성질 자연을 품수 받고”라고 묘사한다(135쪽).
그는 호미를 씻으며 괴산 율리(栗里) 농가의 소박한 삶을 받아들이고, 선비인 매형의 죽음에 눈물로 이별하고, 나뭇잎이 지고 마을 모습 쓸쓸한데 서재에서 조용히 시를 읊고, 대궐이 내린 [규장전운](규장각이 간행한 운서)에 감격하고, 어머니 은혜를 한 치 풀 같은 아들을 비추는 봄볕 같다고 묘사하고, 가장 친한 벗인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이 문득 그리워 “아름다운 명예를 잘 가지면 청사에 빛나노라” 하고 운을 띄운다. 삶의 인연과 작별, 슬픔과 탄식의 정감이 위당 시문의 전편에 가득하다.
(안숙 지음/안태식 엮음/이충구 옮김/632쪽)
'경술국치 순국열사' 위당의 충절과 사상을 엿보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안숙 '절명시'에서)
경술국치 순국열사인 위당(韋堂) 안숙(安潚ㆍ1863~1910)의 유고를 완역한 <선비 안숙 일지(日誌)>(김영사 발행)가 출간됐다. 충북 괴산 출생인 위당은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직강으로 일했던 유학자로, 1910년 8월 국치 소식을 듣고 그 해 11월 1일 괴산 오랑강에 투신해 순국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선비 안숙 일지>는 이충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우리말로 옮긴 <위당유고>(1975년 영인)와 연구자료, 신문과 잡지의 관련 기사들을 묶었다. 위당은 시와 기(記), 설(說) 등 문장에서 당시 지배층을 향한 질타와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위당의 100주기 기일인 1일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위당의 손자인 언론인 안병찬씨, 이수성 전 국무총리, 신낙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비 안숙 일지> 발간기념회가 열렸다.
부(父)
안우량(安友良)
1派24世-찬성공파
생원(生員)
사마방목(司馬榜目)
[생원진사시] 고종(高宗) 11년 (187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二等) 3위
생년 경진(庚辰) 1820년
거주지 경(京)
[부] 성명 : 안정두(安廷斗) 관직 : 학생(學生)
안숙(安潚)안소
25世
생원(生員)진사(進士)
사마방목(司馬榜目)
[생원진사시] 고종(高宗) 31년 (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899위
字 공위(公威)
생년 갑술(甲戌) 1874년-->계해(癸亥)生1863(철종哲宗14)
거주지 괴산(槐山)
[부] 성명 : 안우량(安友良) 타과 : 생원(生員)
[형] 안왕(安汪)
<순국 100주년 안숙..그 삶과 저항의 서시>
그 삶과 저항의 서시 <위당유고(韋堂遺稿)>
100주기 맞춰 '선비 안숙일지' 유고집 출간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2010년 11월1일은 대한제국말 순국열사인 위당(韋堂) 안숙(安潚.1863∼1910)이 경술국치의 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안숙은 1910년 48세의 나이에 충북 괴산의 오랑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100주기에 맞춰 그의 유고집 '선비 안숙일지(日誌)'가 김영사에서 출간됐다.
안숙은 유림 선비로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정오품인 직강(直講)이 됐다.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가졌던 그는 새 학문과 해외 유학에 관심이 많았던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실학파 문인이자 개화사상가였다.
시문을 통해 강렬한 현실 비판과 주체의식, 애국사상을 설파했고 1905년 을사늑약을 애통해하다 민영환이 자결순국한 소식을 접하고 절명시(絶命詩) 같은 제문을 올리기도 했다.
'선비안숙일지'는 위당의 기(記)와 설(說), 시(詩), 서(序)를 편집한 '위당유고'의 완역본으로, 33편의 정론(正論)과 산문, 218편의 절구와 율시가 실렸다.
인간의 연분, 교우, 청빈한 삶의 희로애락과 부패하고 매국하는 권력지배층을 향한 매서운 질타, 왜적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엿볼 수 있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안숙의 묘비에 새겨진 '절명시'의 한 구절이다. 그의 글은 이처럼 비장하면서도 추상같은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그는 실용적 개화파로서 부국강병에도 관심이 많아 네 편의 '병제론(兵制論)'을 남겼다. 불랑서(佛郞西.프랑스)와 일이만(日耳曼.독일), 보로사(普盧士.프러시아) 왕국의 신식 군대와 징병제도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불랑서 사리왕 제7(査里王 제7.샤를 7세)은 상비병을 창건할 때 불랑서 궁대(弓隊)를 나누어 32공반니(公班尼.컴퍼니.중대)로 하고 공반니마다 500인을 두었는데 지금 천하가 모두 이 제도를 보존한다."
위당의 손자 안병찬은 들어가는 말에 "'위당유고'는 100년을 기다려 나온 것으로 한 가문만의 책일 수 없다. 현재를 사는 이들이 100년의 역사로서 읽고 의미를 새기는 춘추서가 될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는다"고 썼다.
안태식 엮음. 이충구 옮김. 632쪽.
애국지사 위당(韋堂) 안숙(安潚) 경술국치 순국 100주년 기념 출간!위당의 결연한 충절과 순국의지, 깊고 넓은 사상과 철학, 아름다운 감성과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순한문 모필본 [위당유고(韋堂遺稿)]의 완역본!대한제국말 순국열사인 위당 안숙의 수많은 기(記)와 설(說), 시(詩)와 서(序)를 편집한 『위당유고(韋堂遺稿)』의 완역본.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출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작성자 컴북스
전진할 때는 선봉 부대와, 후퇴할 때는 최후미 부대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기자다. 그래서 그 위치는 항상 위험하다. '당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장기영,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안병찬 기자는 그 험난한 리얼리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현장기자이다. 1975년 사이공 함락과 미국 패퇴의 아수라 현장을 엄정한 현장의 시각과 현장의 논리와 현장의 정서로 기술하고 있다.(김 훈, 기자, 소설가)"사태는 심상치 않다. 힘껏 뛰고 만유감 없이 기사를 써라. 그러나 이것과 네 목숨은 바꾸지 말아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목격한 안 특파원은 다행히 사선을 넘어 살아서 우리한테 돌아왔다.(조세형, 한국일보 논설의원)월남 패망 7시간 전까지, 그러니까 사이공 시가 함락되는 바로 4월 30일 새벽까지 역사의 현장 거기에 있었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취재 의욕과 '도덕적'인 것이 얽힌 기자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조순환,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외신부장)'현장은 문체를 만든다.' '글이 화려해야' 기자로서 성공한다는 말은 적어도 그의 칼칼한 기사문장을 볼 때면 절반도 못 되는 진실임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관찰력이고, 역사에 대한 시각이며,거창한 말로 춘추필법과 같은 '정신'에 있는 것이다.(정달영, 전 한국일보 주필)이 사진을 보면 우리는 안 형을 한국의 빛나는 대기자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공을 탈출하여 밀러호선상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안 형의 사진에 나타나는 안 형 특유의 기질을 잊지 마시고 빛나는 커리어를 보내시길 바란다.(이득렬, 전 문화방송 대표이사사장)[출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작성자 컴북스
거사 100주년, 현장을 가보았다
안 병 찬 (충북 진천생, 1937)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 ‘언론인권’(격월간) 발행인
정치언론학 박사
뉴시스 · 내일신문 칼럼니스트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사단법인 한국비디오저널리스트협회 회장
서울대학교 총동창회보 논설위원
한국언론학회 · 관훈클럽 회원
△ 학력
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정치언론학 전공(정치언론학 박사)
1975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신문학 전공(문학 석사)
1960 한국해양대학 항해학과 졸업(이학사)
1976.9-1977.9 홍콩대학교 어언연습소 중문고급과정(2년) 수료
1977.10-12 홍콩 중문대학교 신아중국어문연습소 이수
△ 논문
1999 ‘신문 발행인의 게이트키핑 특성에 관한 연구-한국일보 창간인 장기영의 사례를 중심으로,’ 정치언론학 박사학위 논문
1975 ‘외신의 GATEKEEPING 과정에 작용하는 요인 분석-한국일보사 편집국을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 문학석사학위 논문
△ 상벌
1975.6.19 한국일보 공로패 수상(사이공의 최후 보도)
1975.12.9 서울시 문화상 언론 부문 수상(월남 최후에 관한 현장보도 및 저작)
△ 경력
1. 일간·시사주간지
1962-1965, 1968-1989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주월특파원·외신부장·편집부국장 겸 주불특파원·논설위원
1965-1968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1989-1996, 2000-2004 시사저널: 편집주간·편집인 겸 주필·발행인, 상임고문
2. 방송 저널리즘
1996.10-1998.4 문화방송: 객원해설위원 겸 시사토론 ‘안병찬의 일요광장’ 고정사회
2000. 3-2003.5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제1심의위원회 위원장
1987 관훈클럽 대선후보 토론회 패널: 김영삼, 노태우 후보
1998 한국일보 및 서울방송 주관 대선후보 토론회 패널: 김대중, 김종필, 이수성, 이한동 후보
3. 관훈클럽 및 단체
1988 관훈클럽 제35대 총무
1992-1998 신영연구기금 이사
1995- 서울대학교 총동창회보 논설위원
2000-현재 사단법인 한국비디오저널리스트협회 회장
2008.1-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제3대 이사장
4. 대학
1996-2005 경원대학교 법정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대학신문 및 방송주간교수·중앙도서관장·행정대학원장·초빙교수
1998-1999 전국대학신문주간교수 협의회 이사
2000-2002 전국행정대학원장협의회 이사
출강
1992-2000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1996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1996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1994-1996 한국언론연구원 수습기자 기본 연수과정
5. 특종 및 특파원 활동(한국일보)
1962.11 서울 해방촌 모자 살해사건: 경찰 수사본부에 앞선 사건해결로 특종
1968 서울 한남나루터 여인 피살사건: 경찰수사본부에 ‘치열흔’ 감식수사 방법을 제안, 사건해결로 특종
1971.11-1973.6 주월 특파원
1972.3 주월한국군 시리즈 중 ‘민간부문’ 13회 연재
1972 북베트남 춘계대공세 ‘동하 최전선’ 현장 특종
1972 주월한국군 맹호사단 안케 전투 발발 특종 및 638고지 종군
1974.9 호놀룰루 한·미 국방상 회담 취재 특파
1975.3-5 인도차이나 기동 특파-남부 베트남 붕괴 현장 취재: ‘안병찬 특파원 탈출수기-현장에서 본 월남의 최후’ 10회 연재(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간행)
1975.6.10-12 창간 21주년 기념 ‘사이공 최후’ 목격 월남보고회(서울, 부산, 광주)
1976.6-7 아프리카 10개국 60일 순회: 케냐·말라위·남아공·로디지아·레소토·스와질랜드·자이레·코트디브와르·나이제리아·세네갈 순회 취재: ‘아프리카의 화맥’ 14회 연재
1978. 1-2 ‘홍콩 창구에 비친 중국-‘대륙 만화경' 16회 연재
1978. 2-3 최은희·신상옥 홍콩 납북사건 특파 취재: ‘香港’ 8회 연재
1978.12-1979.2 한국일보 창간기획 ‘한국일보 필진 세계를 가다’ 특파: 대만·홍콩·태국·말레이시아·버마·인도네시아 등 동남아편 24회 연재
1979.1 대만 특파 취재: ‘미·중 수교 충격의 현장’ 3회 연재
1979.1 태국·캄보디아 국경 특파 취재
1982.5-1985.5 주불특파원
1982.11 중동 베이루트 특파 취재: 시리아 베카 계곡 단독 르포
1989.4-5 통일 베트남 특파 취재: ‘사이공 최후 취재 안병찬 특파원, 공산화 4년-다시 가본 베트남’ 9회 연재(르포르타주 『베트남, 오늘의 베트남』간행)
6. 기명 칼럼
1) 한국일보:
1986-1987 기명칼럼 ‘메아리’ 연재 1년
1986-1989 칼럼 지평선 및 사설 집필 3년
2) 시사저널:
1990-1996, 2000-2003 ‘시론’ 집필 9년
3) 한국 언론연구원:
1997.1-1998.7 신문과 방송 ‘신문평’ 연재 1년 6개월
4) 서울경제:
1999.4-2002.12 ‘경제수필’ 연재 3년 8개월
5) 내일신문:
2000.1- ‘신문로 칼럼’ 및 ‘안병찬 칼럼’ 집필 7년째
7.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저술 활동
2005.4 제1편『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사이공 최후의 새벽』증보판) 출간
2006.5-6 내일신문 문화현장 기획 ‘안병찬의 트렌드 추적-한국인의 미 래 지표 16인’ 16회 연재
2006.8 제2편『한국의 미래 지표 16인』(가제) 출간예정(관훈클럽 저술 지원/ ‘기분좋은 트렌드하우스 QX’ 기획)
8. 저서
1975 『사이공 최후의 새벽』(문조사)
1978 『중공·중공인·중공사회』( )
1986 『신문기자가 되려면』( )
1989 『베트남, 오늘의 베트남』(한국일로)
1993 『신문・방송 기자가 되는 길』(증보판)
1999 『신문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장기영의 부챗살 소통망 연구』(도서출판 나남)
2005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삶에 미치는 16가지 기술』(한국일보)
2008 『안병찬-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한국의 널리스트)』(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부자가 함께 지은책-나에게 반하다』(도서출판 도요새)
9. 교재 출간
1999 『저널리즘 강의』(도서출판 나남)
2001 『뉴스 저널리즘 실무특강』(도서출판 양지)
2002 『미디어와 사회』(도서출판 양지)
10. 역서
①1974 『비화 워터게이트』(루이스 체스터 원저)
②1980 『로널드 레이건』(헬렌 펀댐 원저)
11. 기타 논문 및 발제문
1978.9 ‘표음 한자에의 길- 중국의 간화, 병음화, 보통화 운동을 통해 본 변혁의 과도상‘, 한양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제14차 정기 연구회 발표논문(중국
문제」Ⅲ-2호, 한양대학교)
1991 ‘전환기의 한국정치와 유권자 책임 : 언론의 선거보도기능을 중심으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주최 대화모임 발제
1996 ‘취재체계의 문제점 진단’,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제11회 언론취재보도 관행의 개선을 위한 워크샵 주제발표 논문
1996 ‘언론윤리 강령에 관한 현역 언론인 의식조사’, 한국언론학회 주최 언론윤리강령국제심포지움 ‘한국언론의 자율규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 논문 발표
1996 ‘한중관계와 언론의 역할’, 관훈클럽 및 언론학회 주최 제8회 최병우 기자 기념 심포지움 주제발표 논문(중국 상하이 후탄대학)
1996 ‘3 TV의 동시간대 선거예측방송 오보 정도 비교분석-4. 11 총선예측 보도 사례
연구’, 신문연구 1996년 가을호 (관훈클럽)
1996 ‘신문 방송기사문장, 기획 · 심층ㆍ고발ㆍ르포-신문’, 한국언론연구원 총서 20
1998 ‘각고면려의 기자 작업관과 대학생들의 반응에 관한 Q연구’: 한국언론학보, 제42-4호, 1998년 여름호
12. 예정 프로젝트
작가주의 ‘오퇴르(auteur)’ 분석
르포르타주 역사서 강의록
인터뷰 방법론
생텍쥐페리 소고
[안병찬의 영상 르포르타주] 110년 전 괴산 마을의 모습
【청주=뉴시스】‘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세론(經世論)’ 주제의 역사 토론회가 15일충북대학교에서 열렸다. 사진은 선비 안숙의 토지와 가옥 소유 현황을 밝히는 자료. (사진=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제공) photo@newsis.com 2011-10-17
【청주=뉴시스】<기자 49년차 안병찬의 영상 르포르타주-역사 연구의 힘>
우리는 사실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영상(影像)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는 걸핏하면 대량 복제술을 이용한 블록버스터로 가짜 영상 세계를 펼쳐 보인다. 대하 역사 드라마도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하게 역사의 전경(全景)을 그려 놓는다. 모두 가짜 복제품이고 허상이다.
충북역사학회장 신영우교수와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역사 학술대회는 충청북도 산간에 있는 괴산지방의 생활사 전체 모습을 입체적인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었다. 110년 전 마을들의 모습이 마치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하듯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진정한 역사적 전경(全景)이어서 가짜로 치장한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실감났다.
‘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세론(經世論)’이라는 주제로 역사 토론회가 열린 것은 10월15일이다.
◇역사 속 괴산 마을 시뮬레이션
역사가는 사료로 말한다. 역사연구는 사료를 탐사하고 정리하고 해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실증적인 동시에 해석적이다.
중원문화연구소 역사연구가들은 110년 전 괴산 지방에서 마을들은 어떤 모양으로 구성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 새롭게 입체적으로 밝혀냈다. 일찍이 지역민의 삶을 이처럼 구조적으로 자세히 연구한 사례는 없었으므로, 이번 역사 연구는 한국사의 획기적 연구로 평가받는다. 군 단위의 광역을 연구대상으로 잡아서 수십만 개의 자료를 입력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결과물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청주=뉴시스】15일 충북대에서 열린 ‘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세론(經世論)’ 역사 토론회에서 괴산일대 토지 소유와 거주 실태를 입체적으로 밝힌 강은경 교수. (사진=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제공) photo@newsis.com 2011-10-17
사료는 양안(量案)이다. 양안은 1900년에 대한제국이 작성한 토지대장의 이름이다.
‘괴산 일대 순흥 안씨의 토지소유와 주거실태’를 발표한 강은경 교수(중원문화연구소)는 괴산 일대(12개 면 중 8개 면의 양안만 존재한다)에 분포한 순흥 안씨의 집거지들을 찾아내 소상하게 전경을 보여주었다.
강 교수는 다행히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 위당 안숙이 살았던 마을의 토지대장도 남아있어 그가 살던 둔율 마을의 모습과 토지 소유실태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선비 안숙의 토지 실태
강 교수가 제시한 ‘안숙의 토지와 가옥 소유 현황’은 안숙이 4.04정보(1만2126.26평, 당시 표기 단위로 26필지, 3만7061척, 2369결)를 소유하여 어느 정도 안정된 경제력을 소유한 선비였던 것을 보여준다.
강 교수는 1년에 걸친 컴퓨터 정밀 통계분석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실증하고 그것이 얼마나 입체적인지 보여주었다. 각 마을의 토지와 가옥 소유자 현황이 자번(지번)·종류·등급·면적·결수·시주(지주)·시작(소작)·가옥·호·칸으로 구분하여 소상히 드러난다.
강 교수와 함께 ‘능촌리의 마을구조와 토지소유’를 연구한 김의환 교수(충북대학교 전임
【청주=뉴시스】‘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세론(經世論)’ 주제의 역사 토론회가 15일 충북대에서 열렸다. 사진은 안숙이 살던 괴산 율리 마을의 토지와 가옥 현황 자료. (사진=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제공) photo@newsis.com 2011-10-17
강사)는 안동 김씨 동족 마을의 실태(주민 구성, 주거 환경, 토지 소유와 경영)를 실제적
으로 보여주었다.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손자인 안병찬(언론인)씨
◇위당의 자정순국(自靖殉國)
제3주제 발표자인 박걸순 교수(충북대학교)는 ‘위당 안숙의 경세론과 자정순국(自靖殉國)’에서 선비 안숙의 가계와 학문을 밝히고,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경세론, 경술국치를 당해 투강 순국을 결행한 경과를 기술한 후, 그는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인물인데 “오늘에야 그의 생애와 고뇌를 살펴본 것은 만시지탄"이라고 했다.
선비 위당(韋堂) 안숙(安潚·1863∼1910)은 순흥 안씨 1파 25세,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정5품 직강(直講)이 되었다. 그는 신학문과 해외 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실학파 문인이자 개화사상가였으나 경술국치의 분노로 고향인 충북 괴산의 오랑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1995년 8·15 기념식전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2묘역에 잠들어 있다. 필자는 위당의 손자로 《선비 안숙일지》유고집(2010년)을 기획 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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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괴산 사람들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사硏 등 세미나 광작농 거의 없고 머슴·날품팔이 상당수 큰 江 존재하지 않아 유통경제 안 일어나 3칸 초가 대부분· 최고부자 홍명희 조부 조혁연 cho3748@nate.com
1백년전 충북 괴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학술대회가 충북대에서 열렸다.
한국사연구회(회장 권태억)와 충북사학회가 지난 15일 공동으로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 안숙(安潚)의 경세론'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가졌다.
이날 학술대회는 1900~1905년의 대한제국기에 작성된 광무 양안(量案·일종의 토지대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광무양안에는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 지명, 가옥 위치와 크기, 관청, 물레방아, 주막 등 당시 사회·문화상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망라적으로 담겨져 있다.
현재 충북에는 충주, 진천, 괴산, 음성, 연풍, 청안, 회인, 문의, 영춘 등 9개 군현의 광무양안이 남아 있어, 1백년전 역사를 복원하는데 최고의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충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날 세미나에서 충대 김의환 교수는 '괴산군 능촌리의 마을구조와 토지소유', 강은경 연구원은 '괴산 일대 순흥안씨의 토지소유와 주거실태' 제목의 논문을 각각 발표했다.
두 발표자의 내용을 종합한 결과, 1백년 전 괴산 사회는 △광작농이 전혀 없었고 △무전농민이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전답의 토지 비옥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농업사 이론상 2결(대략 6천평) 이상의 경영형 부농은 '광작농', 직접 경작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토지를 대여한 농민은 '병작지주'로 분류하고 있다. 이밖에 소유한 토지가 없어 머슴이나 날품팔이(일명 雇工)를 하는 농민은 '무전농민', 다른 지역에 거주하면서 마름(일명 夜音)을 두고 토지를 관리하던 지주는 '부재지주'라고 일컫고 있다.
- 괴산에도 강이 존재하고 있으나 강폭이 높고 낮아 조선후기 곡물유통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목도강 황포 모습. 이와 관련, 김교수는 "지금의 괴산읍 능촌리에는 광작농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광무양안에 나타난다"며 "이는 괴산이 서울서 멀고, 또 괴강의 폭이 좁고 낮아 유통 농업경제의 실현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반면 광무양안에 나타난 충주에 대해서는 "남한강가에 위치하면서 조운선 왕래로 유통경제가 발달, 광작농과 부재지주가 많이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괴산 능촌리의 무전농민에 대해서도 언급, "전체 주민의 37% 정도가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했다"며 "이는 충주의 24%에 비해 현저히 높은 것으로, 대한제국기 괴산지역이 크게 빈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강연구원은 괴산지역의 당시 토지 비옥도에 대해 언급, "밭은 41%가 4등급, 논은 48%가 3등급으로 각각 가장 많았다"며 "이는 요즘으로 치면 공시지가를 의미하기 때문에 당시 괴산지역의 전답 가격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가옥 형태에 대해 "3칸짜리 집이 가장 많은 전체 51%를 차지했고, 반면 가장 넓고 화려한 집에 살았던 인물은 홍승목(홍명희 조부)으로 초가 15칸+기와집 15칸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충대 신영우(사학과) 교수의 사회 속에 종합토론이 오후 6시 가까이 진행됐다. 박걸순 교수의 발표도 있었으나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http://www.inews36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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