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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일본 군국의 뿌리, 전쟁기계 양산한 육군유년학교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만주국① 사쿠라회와 천검당
일본이 만주와 중국 본토, 아시아를 공격하고 심지어 미국까지 공격한 것은 누가 봐도 자해 행위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이런 무차별 확전 배경을 이해하려면 1930년대부터 일본 정계와 군부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군부와 민간 파시스트들의 동향을 추적해야 한다.
일본육군중앙유년학교, 일본은 13~14세의 어린 소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유년학교 출신들이 일본을 군국으로 몰아가고 전 세계를 전화에 뒤덮이게 한다.
1930년 10월 1일 일단의 일본 정치군인들이 사쿠라회(櫻會:벚꽃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비밀조직을 결성한 핵심인물은 군 장성이 아니라 중좌에 불과한 하시모토 긴코로(橋本欣五郞:1890~1957)와 소좌인 초우 이사무(長勇:1895~1945) 등이었다.
하시모토 긴코로는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초우 이사무는 1945년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에게 쫓긴 끝에 동굴에서 할복하고 만다.이들의 인생 궤적을 이해하려면 어린이들을 전쟁기계로 만들었던 일본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를 주목해야 한다.
13~14세 어린아이들에게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시키던 비정상적인 교육시스템이 육군유년학교였다. 1870년(조선 고종 7년, 메이지 3년) 요코하마어학연구소(<6A2A>浜語學<7814>究所)를 오사카병학료(大阪兵學寮)에 편입시킨 것이 시초였으니 어린이 군사교육의 뿌리는 생각보다 꽤 깊다.
1887년 육군 유년학교 관제를 제정하고 청일전쟁 이후인 1896년에는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 외에 도쿄, 센다이(仙台),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 구마모토(熊本) 등지에도 육군지방유년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당 학생 수는 대략 50명 남짓으로 중앙유년학교는 14세부터 2년간, 지방유년학교는 13세부터 3년간 교육시켰다. 제복에 금성(金星) 마크를 달아서 ‘별의 생도(生徒)’라고 불렸다. 민간에서는 ‘육군중학교(陸軍中學校)’라고 별도로 취급했다.
1 하시모토 긴코로. 사쿠라회의 결성을 주도했다.2
오가와 슈메이. 일본 청년 장교들에게 쿠데타를부추긴 우익 사상가다.
일본 육군은 문부성 산하에서 자유교육을 받은 중학교 출신은 믿을 수 없다는 관념이 있었다.
당시 육군유년학교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례가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 때 헌병대위 아마카쓰 마치히코(甘粕正彦:1891~1945)에게 살해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1885~1923)다. 오스기 사카에는 군인이었던 부친 오스기 히카시(大杉東)의 권유로 열네 살 때인 1899년 나고야 육군지방유년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기질에 군사학교 분위기가 맞을 리가 없어서 학교 밖에 나가면 쾌활한 소년이었지만 학교에 돌아오면 흉포한 기분이 되었다고 전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육사 출신의 중견 장교들이 문민정치의 통제를 벗어나 만주사변 등을 도발하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오스기 사카에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니가타(新潟)현 시바타(新發田)의 자유로운 하늘을 본다’는 망상에 시달린 나머지 군의관으로부터 뇌신경질환이란 진단을 받기도 했다. 급기야 1901년 동급생과 칼부림 사건을 일으켜 퇴학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감수성을 모두 억제하고 전쟁기계로 변모해야 살아남을 수 있던 육군유년학교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극우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치히코도 같은 나고야 육군지방유년학교 출신이었다. 아마카스가 유명한 아니키스트 오스기 사카에가 한때 자신의 선배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오스기와 전쟁기계로 변모한 아마카스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시모토 긴코로와 초우 이사무는 모두 구마모토(熊本)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각각 일본 육사 23기(1911)와 28기(1916)로 졸업했다. 사쿠라회 결성 당시 도쿄 경비사령부 참모였던 히구치 기이치로(<6A0B>口季一郞)도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사를 졸업한 인물이었던 것처럼 사쿠라회의 주요 멤버 대부분이 육군유년학교 출신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13~14세 때부터 군인으로 길러졌던 이들이 이후 만주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전쟁기계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100여 명의 중견 장교로 결성된 사쿠라회는 회원 자격을 “현역 육군 장교 가운데서 중령 이하 계급자로서 국가개조(國家改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심 없이 노력한 사람에 한정한다”라고 규정했는데, 이들이 내건 ‘국가개조’의 다른 말이 소화유신(昭和維新)이다. 소화(昭和)는 일왕 히로히토(裕仁:재위 1926~1989)의 연호인데 소화육군(昭和陸軍)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화유신과 국가개조운동, 좋게 표현해서 청년장교운동은 동의어였다.
이들이 ‘천황봉대(天皇奉戴)’를 명분으로 각종 쿠데타를 기도하고 국가개조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군국(軍國)으로 만들어 만주와 중국,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고 끝내 진주만까지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것이 소화시대 일본의 내면이었다. 소화유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軍國)으로 일본을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소화유신의 또 다른 특징은 전쟁기계로 길러진 청년장교들에게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1886~1957), 기타 이키(北一輝:1883~1937) 같은 국가주의적 관점의 우익 사상가들이 정신적 세례를 주었다는 점이다.
청년 장교들이 군부 파시스트라면 이들 우익 사상가들은 민간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지금도 독도 문제를 도발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뿌리다. 오가와 슈메이는 전후 도쿄 전범(戰犯)재판 때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기소 당시 잠옷 차림으로 맨발에 게다를 신고 출정해서 전쟁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뒤통수를 여러 번 때린 일화로 유명하다. 미군 병원 주치의였던 우치무라 히로유키(<5185>村祐之)는 그를 ‘매독에 의한 정신질환’으로 판정했지만 석방되자마자 정신이 멀쩡해진 사이비 사상가이기도 하다.
우파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던 만철(滿鐵:만주철도) 조사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오가와는 서양에 맞서자는 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이들의 아시아주의는 아시아의 권익을 중시하자는 뜻이 아니라 일본이 전 아시아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통일’을 이루고 그 힘으로 서양과 맞서야 한다는 침략주의이자 호전(好戰)주의였다.
오가와 슈메이와 깊은 친분이 있던 기타 이키는 좌에서 우를 넘나든 민간 파시스트였다. 원래 기타 데루지로(北輝次<90CE>)였던 본명을 기타 이키(北一輝)로 바꾼 이유는 한때 중국 혁명에 참가해 중국 혁명가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중국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타 이키는 1936년 발생한 2·26 쿠데타 미수사건에 개입했다가 민간인으로서는 드물게 사형당한다. 이키가 1906년 출간한
그러나 이키는 1923년
2·26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사형당하는 또 한 명의 민간인이 니시다 미쓰지(西田稅:1901~1937)다. 니시다 미쓰지는 1918년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육사를 34기(1922)로 졸업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육사 졸업 후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기병대로 근무하기도 했던 이 전쟁기계는 24세인 1925년 늑막염으로 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군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니시다는 오가와 슈메이가 1924년 4월 도쿄 남청산(南<9752>山)에 설치한 행지사(行地社)의 부속 청년교육기관인 대학료를 맡아서 청년장교들에게 우익 국가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기관지
일본 청년장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니시다는 ‘시국이 중대한 국면에 이르렀다’면서 대개조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망국의 화근이 되고 있는 정당정치인, 재벌, 군벌(軍閥), 학벌(學閥)’에 대해서 모든 장소에서 폭동, 소란, 암살, 태업 등의 방법으로 절대혁명을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니시다는 1927년 9월 사림장에서 오오기시(大岸賴好), 후지이 히토시(藤井齊:1904~1932) 등 각 지역의 청년장교 71명으로 천검당(天劍黨)을 결성하려다가 헌병대의 사전 탐지로 실패한다.
그러나 사쿠라회와 천검당을 만들려던 이 세력들은 이후 일본을 군국의 길로 끌고 가는 핵심이 된다.
장작림 폭살한 관동군 처벌 유야무야 쿠데타 봇물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② 장작림 폭살과 3월 쿠데타
만주군벌이던 장작림이 폭살당한 황고둔 현장. 이 사건의 주모자인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군부의 ‘처벌 반대론’ 덕에 예비역 편입의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사진가 권태균]
1928년 6월 3일 20량짜리 귀빈열차가 북경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탄 열차였다. 장작림은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과 밀월관계였다. 1925년 6~7월 장작림은 휘하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한인취체에 대한 쌍방협정’,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었다.
그로부터 장작림 휘하의 만주 당국은 만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었다. 이에 반발한 김좌진은 신민부를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려 했을 정도로 장작림은 친일정권이었다. <만주의 삼부⑧ 북만주의 통합 바람 참조>
장작림은 일본군의 비호를 받게 되자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꺾고 전 중국의 패자가 되기를 바랐다. 1927년에는 북경을 수도로 삼는 북양정부(北洋政府:초대 총통은 원세개)의 총통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강한 기세로 북벌에 나서면서 장작림은 북벌군과 결전을 포기하고 만주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이에 관동군(關東軍)의 정치장교들은 장작림이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장작림을 제거하고 만주를 직접 지배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1 폭약은 장작림이 타고 있던 8량째 열차를 정확히 겨냥했다.
2 폭살사건 현장조사 장면.
3 장작림 폭살을 지휘한 관동군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열차는 6월 4일 새벽 심양(瀋陽)부근 황고둔(皇姑屯) 근처까지 왔는데, 경봉선(京奉線:북경∼심양)과 만주철도 연장선의 입체교차점 부근에서 시속 10㎞의 저속으로 뚝 떨어졌다. 장작림이 탄 8량이 교각을 지날 무렵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교각(橋脚)에 설치된 200㎏의 화약이 터지면서 열차는 대파되고 철교도 붕괴되었다.
마적에서 출발해 중원 통일제국을 꿈꿨던 만주군벌 장작림의 두 손과 두 발이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장작림은 현장에서 숨지기 직전 “일본군이 한 짓이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일제의 주구(走狗)가 일제에 의해 폭살당한 이 사건은 ‘장작림 폭살사건’ ‘황고둔사건’ 등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관동군의 소행이란 의혹이 일자 일본 정부는 장작림이란 이름 대신 ‘만주 모 중대사건(滿洲某重大事件)’이라고 부르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관동군은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두 명의 아편쟁이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의혹은 불식되지 않았다.
의혹의 눈길은 관동군으로 쏠렸다. 일본이 대한제국 소유였던 간도(間島)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대신 남만(南滿)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는 그 철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군대 주둔권을 확보한 것이 관동군의 시작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 최남단인 여순(旅順)과 대련(大連) 지역을 양도받아 관동주(關東州)를 설치했다. 관동(關東)은 원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뜻했다. 일본이 관동주에 군사령부를 두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을 관동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당초 1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1940년대에는 70만~80만 대군으로 늘어나게 된다.
전 세계가 장작림 폭살사건에 대해 크게 주목하자 일본은 봉천총영사관과 봉천경찰 측의 합동조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에 장작림의 군사고문 마치노 다케마(町野武馬:1875~1968) 예비역 대좌가 타고 있었지만 천진(天津)에서 하차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의문은 증폭되었다. 마치노는 그전부터 만주를 중국에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폭파에 사용된 전선이 일본군 초소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두 명의 시신도 관동군의 공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주둔군 기리하라(桐原貞壽) 중위를 신문한 결과 조선주둔군에서 200㎏의 화약을 불법 반출해 사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관동군의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1883~1955) 대좌의 지시에 따라 중대장 도우미야(東宮鐵男)가 현장을 지휘해 폭살을 단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모토는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사 15기(1903)로 졸업한 전쟁기계였다. 이 사실은 당시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보고되었다. 상해에서 의열단의 저격을 받고 겨우 살아난 육군대장 다나카는 1927년 4월부터 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사건 반년이 지난 12월 14일에야 일왕 히로히토(裕仁=昭和)에게 고모토의 소행임을 알리면서 엄벌에 처하겠다고 보고했으나 육군을 중심으로 처벌 반대론이 일어나자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1929년 5월 14일 고모토를 일본 본토로 전근시켰다가 예비역으로 편입시킨 것이 전부였다.
다나카는 일왕에게 ‘관동군은 장작림 폭살사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경비상의 감독 책임을 물어 전보시켰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히로히토가 “앞의 보고와 다르지 않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1929년 7월 내각 총사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나카는 두 달 후인 9월 28일 귀족원 의원 당선 축하연을 한 다음 날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히로히토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은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어도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면서 전후에 자신의 전쟁책임론을 부인하는 소재로 이용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은 관동군의 예상을 뒤엎고 1928년 12월 29일 오전 7시 만주 전역에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오색기(五色旗)를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로 일제히 바꾸어 다는 역치(易幟)를 단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일본이 이때 육군 형법에 따라 고모토를 사형시키고 군부의 정치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면 이후 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육군대장 출신 다나카가 총리로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사실상 군부정권이었다. 이 사건 이후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영관급 정치장교들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시모토(橋本欣五郞), 네모토 히로시(根本博) 등의 영관급 장교들은 1930년 10월 사쿠라회(櫻會:벚꽃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3월 군사 쿠데타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삼월사건(三月事件)’이다. 영관급 정치군인들이 육군 고위층 및 우익 민간 파시스트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1886~1957) 등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육군대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1868~1956)를 총리로 옹립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들이 육군대신 우가키를 옹립하려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가키는 육군유년학교가 생기기 전에 육군지원병으로 입대해 군조(軍曹:하사관) 때 육군사관학교 1기로 들어가 1890년 졸업한 인물이었다. 우가키는 1931년 1월 군 간부들에게 보내는 비밀훈시에서 군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국방을 책임지는 것이라면서 “국방은 정치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마치 군인이 국방이라는 미명하에 정치에도 관여할 수 있다는 투였다.
우가키는 1931년 1월 초 스기야마(杉山) 전 육군차관과 나중 조선총독(1942년 5월~1944년 7월)과 총리(1944년 7월~1945년 4월)를 역임하는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군무국장(軍務局長), 니노미야 하루시게(二宮治重) 참모차장 등 육군 수뇌부와 육군 과장급, 그리고 하시모토와 네모토 등의 사쿠라회 핵심 인물들을 관저로 불러들여 쿠데타를 논의했다.
민간인 파시스트 오카와 슈메이 등은 1만 명 이상의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후작(侯爵) 도쿠가와 요시치카(<5FB3>川義親)는 20만 엔의 거사 자금을 제공했다(10만 엔, 37만 엔, 50만 엔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개조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3월 20일 쿠데타를 일으켜 일왕을 옹립하고 정당정치를 종식시키려던 계획은 이틀 전에 중지되고 말았다. 군사과장 나가타 데쓰산(永田鐵山) 대좌 등을 중심으로 시기상조론 등이 등장하자 육군대신 우가키가 계획 중단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나가타나 오카무라(岡村寧次) 대좌 등이 시기상조론을 주장한 것은 쿠데타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만몽(滿蒙:만주·몽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쿠데타 결행론자들이 ‘쿠데타로 국내를 먼저 군부체제로 정비한 후 만몽을 침략하자’는 내선외후파(內先外後派)라면, 나가타 등은 ‘만몽(滿蒙)을 먼저 침략한 후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외선내후파(外先內後派)파였다. 비록 무위에 그쳤지만 3월사건은 이후 ‘소화동란사(昭和動亂史)’라고까지 불리는 잇따른 쿠데타와 테러의 시작이었다.
장작림 폭살사건과 3월사건이 아무런 처벌 없이 끝난 뒤 영관급 정치장교들은 잇따른 쿠데타와 테러에 나섰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1931년 10월 쿠데타 사건(10월사건), 1934년 11월 원로·중신들을 살해하려 한 육군사관학교사건, 1936년의 육군 쿠데타 사건(2·26사건) 등이 그것이다. 장작림 폭살사건과 3월사건의 주모자를 육군 형법에 따라 처벌하지 못한 데 따른 비극적 결과물들이었다.
‘세계 최종전쟁론’ 앞세워 대륙 침략한 이시하라 간지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③ 만주사변
9월 18일을 중국은 국치일(國恥日)로 기억한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점령을 시작한 날이다. 조어도(釣魚島:댜오위다오)와 독도 문제로 각각 반일의 목소리가 높았던 올해, 중국의 9월 18일에는 전역에서 반일시위가 열렸지만 우리의 국치일인 8월 29일은 조용했다.
우리는 과거를 잃은 나라인가?
유조호 사고 직후 현장. 관동군은 자신들이 철로를 끊어놓고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주를 침략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 9월 18일 밤 10시20분 무렵. 심양(瀋陽·옛 봉천) 북쪽 7.5㎞ 유조호(柳條湖) 부근 남만(南滿) 철도의 한 선로가 폭파되었다. 관동군사령부 조례 제3조에 따르면 남만철도가 끊기면 관동군이 출동할 수 있었다. 관동군은 즉각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면서 북대영(北大營)을 공격했다. 9·18사변, 즉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시작이었다. 선로 폭파 역시 장작림 폭살처럼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
만주사변의 특징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나 참모장 미야케 미쓰노리(三宅光治) 같은 관동군 수뇌부가 아니라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郞: 1885~1948, 훗날 육군대장, 도쿄 전범재판으로 사형) 대령과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령 같은 영관급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타가키와 이시하라는 모두 센다이(仙台) 육군지방유년학교에서 어린 시절부터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전쟁기계로 길러졌다. 이 중 ‘육군에는 이시하라가 있다’고 선전될 정도로 전략의 천재라고 불렸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 점령 계획을 입안했다.
이시하라는 육군유년학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육사 시절에는 350명 중에 3등이었지만 구대장(區隊長)에게 반항해 6등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육사 시절에는 전사(戰史)는 물론 철학과 사회과학에 몰두하고 휴일이면 사회 명사들을 방문했는데, 나중에는 법화종의 한 분파인 일련종(日蓮宗:니치렌종) 계열 국주회(國柱會)의 종말론에 심취해 ‘세계 최종전쟁론’을 고안했다. 이시하라 간지가 1931년 5월 작성한
1 유조호 사건 다음 날 일본은 심양(봉천)을 공격해 점령했다.
2 이타가키 세이지로. 만주사변을 총괄 기획한 관동군 참모였다.
3 이시하라 간지. 불교 일련종의 종말사상을 받아들여 세계 최종전쟁론을 만들었다
13세기의 승려 일련(日蓮:1222~1282:니치렌)은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란 불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말법 시대에 ‘전대미문의 대투쟁이 일어나 세계가 괴멸된 후 묘법의 조화를 이루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일련종은 19세기 다나카 지카구(田中知學:1861~1939)가 일본국체학(日本國體學)을 주창하면서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내셔널리즘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법화종의 한 종파인 일련종이 이시하라 같은 전쟁기계들이 열광할 수 있는 이론으로 변질되었다.
다나카 지카구의 강연을 듣고 국주회에 입회한 이시하라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소비에트연방, 미주, 유럽, 동아시아라는 4개 국가연합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4개 연합 사이에 일종의 준결승이 벌어져 소비에트와 유럽이 탈락하고 일본과 미국이 결승전을 벌인다는 것이 최종전쟁론이었다.
최종전의 결과 일본 아니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이시하라는 ‘세계전쟁의 준비가 덜 되었다’면서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반대하고, 1944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의 암살에도 관여해 전범 재판에서 제외되지만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자들의 행보는 그의 최종전쟁론을 실천한 셈이었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모든 전략과 국력은 최종전쟁에 맞춰져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만주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는 “재만(在滿) 3천만 민중(民衆)의 공동의 적인 군벌과 관료를 타도하는 것이 우리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궤변으로 만주침략을 정당화했지만 만주는 최종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침략자를 방어자로 둔갑시키는 정신병적인 집단 자의식이 있다. 이시하라도 “일본은 북쪽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고 남쪽 미·영의 해군력에 대항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러시아와 미·영의 침략 위협을 받는 국가인 것처럼 가정했다.
이시하라의 최종전쟁론에 육군유년학교 출신 전쟁기계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대던 차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든 대공황이 가세했으니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대공황 직전인 1929년 7월 들어선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行)의 입헌민정당 내각은 침체된 경제 소생을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입안했다. 하나는 국내 물가 인하와 수출 장려를 위해 통화량을 줄이고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긴축재정이고, 또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포기했던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는 고정환율제였다.
고정환율제는 국제무역과 투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29년 하반기 도매물가가 6% 하락하는 등 긴축재정이 성공을 거두자 1930년 1월에는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하락의 이점이 사라졌다. 금본위제에 의한 고정환율제는 엔화가치의 추가하락은 막았지만 엔화가치가 더 떨어졌다면 더 늘 수 있었을 수출 증가도 막았다.
일본의 금융자본, 즉 재벌은행들은 정부가 조만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엔화를 평가절하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대거 사들였는데 실제로 정부는 1931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절반으로 급락하자 재벌은행은 이미 매입한 달러로 엔화를 다시 사들여 엄청난 이득을 거두었다.
1930년대 초 실업자는 300만 명에 이르러 노동쟁의가 빈발하고 농촌 생활은 극도의 곤궁에 빠진 상황에서 금융자본가들은 거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청년장교들이 정당정치인과 재벌 등을 타도하고 일왕과 민중 중심의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한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1927년 9월 청년장교들과 비밀결사체인 천검당(天劍黨)을 결성하려던 오오기시(大岸賴好)가 ‘황군(皇軍)의 70%가 농민의 자제이자 일본의 토혼(土魂)’이라면서 “이런 농민 출신 병사가 귀향해서 농촌의 참상과 피폐를 보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오늘 같은 현상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과연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강한 군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그가 재벌과 그에 기생하는 정당 정치인들을 성토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국내 쿠데타를 먼저 일으키고 만주를 침략하자는 내선외후파(內先外後派)와 만주를 먼저 침략한 후 국내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외선내후파(外先內後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모두 만주 장악의 필요성에 동감한 것은 비단 이시하라의 세계 최종전쟁론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출하는 출구로도 만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타가키와 이시하라가 자작극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려 한 것은 비단 영관급 장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타가키는 1931년 7월 신임 관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혼조 시게로에게 “만약 충돌사건이 일어난다면 육군 중앙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어서 “육군 중앙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독단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는 답을 받았다. 8월 초 이타가키는 도쿄로 출장 가 니노미야(二宮治重) 참모차장, 니이소(小磯國昭) 군무국장, 다테가와(建川美次) 참모본부 1부장 등을 만나 ‘만주의 군사행동은 관동군에게 일임한다’는 내락도 받아냈다. 육군 수뇌부가 청년 장교들을 부추기는 셈이었다.
이때 관동군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봉천(奉天) 총영사가 외무성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시데하라(幣原喜重郞) 외상은 미나미 지로(南次郞:제3대 조선총독 역임) 육군대신에게 관동군을 자중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미나미는 다테가와 작전부장을 만주로 보내 자중하게 했다.
그러나 청년장교들의 침략을 지지하던 다테가와는 9월 15일 일부러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느릿느릿 만주로 향했다. 그 사이 사쿠라회를 만든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는 이타가키에게 “계획이 알려졌으니 즉시 실행하라”, “다테가와가 봉천(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결행하라”, “국내는 걱정 말고 즉각 결행하라”는 비밀 전보를 세 차례나 보냈다.
다테가와가 심양(봉천)역에 도착한 시간은 도쿄 출발 사흘 후인 9월 18일 오후 7시. 이타가키는 다테가와를 곧장 기쿠분이라는 요정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였다. 그 사이 심양 호석대(虎石台)에 주둔하는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의 고모토(河本末守) 중위가 하사관 고스기(小杉喜一)와 선로에 화약을 장착했다. 봉천 특무기관 보좌관 하나야 다다시(花谷正) 소좌와 장학량의 군사고문 보좌관 이마다 신타로(今田新太<90CE>) 대위도 깊숙이 개입했다.
드디어 오후 10시20분, 철로가 폭파되자 다테가와와 요정에서 술을 마시던 이타가키는 뛰어나가 “장학량 군대가 공격했다”면서 북대영을 공격하게 하고 다음 날 심양까지 점령하고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1883~1948, 훗날 육군대신, 도쿄 전범재판 때 사형)를 임시 시장으로 임명했다. 첩보공작이 전문이었던 도이하라는 만주국 건국과 화북(華北)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는 화북 분리공작에 나선다.
일본 승리의 서장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파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