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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4일 KGB의장 유리 안드로포프와 소련군 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특수 부대의 파견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산당 정치국에 제출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혁명평의회 의장 겸 중앙위원회 서기장 아민은 자신의 관저를 경호하기 위하여 소련군의 카불 진주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500명의 GRU(참모본부 정보총국) 소속의 특수부대를 위장시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아민이 요구한 병력은 아프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활동 중인 반군을 제압하는데 필요한 소련군 1개 연대와 경찰 병력이었다. 그 악명높은 소련의 "스페츠나츠(Spetsnaz)"가 아니었다.
12월 12일 오후 크렘린 궁전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는 아프간과 아민 정권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이로서 오랫동안 소련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끝없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민 정권에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소련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음날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투르케스탄 군관구 사령관 유리 막시모프 대장은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제5, 제108 자동화 저격사단(Motor Rifle Zimovniki Division, 기계화 보병사단)에 훈련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5만명의 예비군이 소집되었다. 침공부대를 지휘할 제40군이 조직되었다. 원래 제40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키에프 전투를 비롯하여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발칸 전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역전의 부대로서 전쟁이 끝난 뒤 해체되었다. 이제 새로운 임무를 위하여 부활한 것이다. 12월 25일까지 4개 자동화 저격사단, 제103 공수 사단, 제2 대공 미사일 여단, 포병 여단 등 약 1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소련-아프간 국경에 집결을 완료하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 이미 출동해 있던 KGB와 GRU 소속의 특수부대원들은 카불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간의 상황은 이미 찻잔 속의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준비 기간은 매우 짧았고 병력과 물자의 동원도 여전히 불충분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급작스럽게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낙관하고 있었다. 목표는 아민 한 사람의 제거였지, 아프간의 정복이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지 얼마되지 않은 아민 정권은 매우 취약한데다 군대와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소련군이 그를 제거한다고 해서 아프간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여러 동구권 국가들을 호되게 다룬 경험이 있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등. 이들은 소련군에게 무모한 저항을 하는 대신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희생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도부가 제거되고 충성스러운 친소 정권이 들어서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프간 역시 마찬가지가 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한가지 빼놓은 사실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땅덩이에 도시화와 교통이 잘 발달되어 기계화 부대가 활동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아프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세계이며 그 안에는 매우 거칠고 호전적인 부족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영국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 하여 중앙 아시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끝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아프간이 두 나라의 완충지대가 된 점도 있지만 정복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은둔의 나라는 그야말로 "침략자의 무덤"이었다. 65만㎢의 면적은 폴란드의 두배, 한반도의 세배 크기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은 5500km에 달하고 동과 남으로는 파키스탄, 서로는 이란, 북으로는 카자스흐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구 소련 시절의 공화국들과 접하고 있는 내륙 국가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과 연결되어 마치 나뭇잎을 가로지르는 잎맥처럼 힌두쿠시 산맥과 지맥이 아프간 중심부를 관통한다. 따라서 국토의 대부분은 해발 고도 1~3천m에 달하며 수도 카불만 해도 한라산보다 조금 낮은 1800m의 높이에 있다. 특히 동북부 지방은 해발 5천m가 넘는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즐비하며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아북극 기후이다. 서남부는 메마른 사막이다. 그야말로 국토 대부분이 극한 지대라 할 만 하다. 그나마 북부 국경 지대에만 비교적 농경에 유리한 평야지대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지형적인 험준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결코 외부와 단절된 곳이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하면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교차로이자 문명이 오가는 큰 길이기도 했다. 이른바 "실크로드", 오래 전 중국과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아프간을 통과하면서 동서 무역을 하였고 아프간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동시에 야심 많은 정복자들이 반드시 지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징기스칸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복자들이 아프간을 침공하였다. 따라서 아프간 사람들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외세의 위협에 항상 대비해야 했다.
지리적으로 정복자와 상인의 통로였던 아프간은 자연스레 수많은 민족들이 유입되었다. 오늘날 아프간 사람의 약 절반은 파슈툰 족이고 1/4은 타지크 족, 10%는 하자라족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있다. 이들은 광대한 공간에 뿔뿔히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면서 때로는 공존을, 때로는 부족간의 처절한 항쟁을 벌였다. 전통적으로 아프간 남성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1919년 영국의 보호국에서 독립한 이래 아프가니스탄은 자히르 샤가 국왕으로서 통치했지만 근대적인 왕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왕의 권위는 매우 취약했고 아프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부족장들이 실권자였다. 국왕 역시 부족 회의인 로야 지르가(파슈툰어로 '평의회'라는 뜻)에서 선출되었다. 1973년 수상 무함마드 다우드의 쿠테타로 왕정이 끝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지만 냉전 기간 동안 아프간은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국가로서 미, 소와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에 필요한 많은 원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간의 안정은 1978년 4월 27일 압둘 카디르 대령의 쿠테타로 깨졌다. 다우드와 그의 가족들은 대통령궁에 쳐들어온 반란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친소 공산주의 정당인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무함마드 타라키가 혁명 평의회 의장 겸 수상, 바브락 카르말이 부수상, 하피줄라 아민이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 혁명 정부는 대대적인 토지 개혁과 봉건주의 타도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아프간의 전통 사회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었다.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 없이 의욕만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에 나선 들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리 없다. 각지에서 격렬한 반발과 폭동이 일어났다.
혁명 정부는 무력으로 반발을 가차없이 진압하는 한편 소련과의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아프간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숫자가 날로 늘어났고 소련제 장갑차, 무장 헬기가 제공되었다. 그만큼 소련의 영향력과 여기에 기대려는 타라키 정권의 의존성 또한 나날이 커졌다. 이 또한 독립성이 강하고 외세의 지배에 심한 거부감을 가진 아프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혁명 정부는 자기들끼리도 파벌을 형성하고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스스로의 힘을 깎아 먹고 있었다. 아프간의 봉건성을 타도하겠다면서 막상 그들 자신도 봉건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1979년 3월 중국, 파키스탄과 인접한 동북부의 누리스탄(Nuristan) 주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무장 반란이 시작되면서 아프간의 상황은 거의 내전 상태에 직면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프간에 체류 중이던 소련 기술자들이 현지인들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소련 지도부로서는 아프간의 상황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타라키 정권은 자국군대를 신뢰하지 못했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소련군을 카불로 불러들이려 하였다. 아민은 1979년 1월 탱크와 포병을 포함하는 2천여명 규모의 소련군 지상부대와 공수부대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반응은 단호한 거부였다. 소련군 참모총장인 오가르코프는 카불 주재 소련군사고문단에게 "더 이상 아민과 이따위 대화를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핵무기의 감축을 놓고 한창 협상중이었고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아프간 때문에 좋은 분위기에 굳이 초를 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라키는 그 후로도 소련군의 출동을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카불 주재 소련 군사고문단도 카불 공항과 바그람 공군 기지 등 주요 시설과 현지에 체류 중인 소련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실전 부대의 투입에는 선을 그었지만 시설 경비 등을 명목으로 아프간으로 파견되는 소련군 병력은 점차 늘어났다.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아프간의 수렁에 발을 담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민이 쿠테타를 일으키기 직전인 1979년 8월만 해도 아프간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과연 소련군의 출동이 필요한가. 그 정도로 반란군의 세력이 강한가. 카불에 주재하는 소련 군사고문단조차도 반란군은 겨우 수백명에 불과하여 카불을 점령하기에는 어림도 없으며 이들을 진압하기에는 아프간 정부군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고하였다.
문제는 카불 밖의 반란군이 아니라 카불 내부에 있었다. 점차 격화되는 타라킨과 아민의 권력 투쟁에서 아민을 이길 수 없었던 타라킨은 소련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모스크바가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사이 결국 상황을 급반전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9년 9월 14일 아민이 쿠테타로 타라키를 내쫓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최악이었다. 이 날 새벽 타라키의 호출을 받아서 인민궁전을 방문한 아민은 입구에 들어오던 도중 총격을 받았다. 아민은 재빨리 피했지만 그의 부관이 사살당했다.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그는 즉각 수도에 주둔 중인 제8보병사단과 제4, 제15 기갑 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쿠테타군은 신속하게 카불 전역을 장악하고 전투기로 인민궁전을 폭격하였다. 타라키는 저항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지만 구금당하였다. 결국 한달도 되지 않은 10월 9일 자신의 침실에서 자던 중 아민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베개로 짓눌려진 채 살해당하고 말았고 그의 가족들 모두 피살당하였다.
과연 타라키는 아민을 제거할 생각이었나. 총격전 자체가 쿠테타의 명분이 필요했던 아민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암살에 실패했을 때 아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음에도 타라키가 무방비 상태로 당한 점이나 사건 직후 아민이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움직인 걸로 보아서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느 쪽이건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아프간의 정권 교체와 타라키의 암살은 소련 지도부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타라키에 비하여 아민은 훨씬 과격하면서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전 동안 미국과 소련은 과거 러시아와 영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아프간을 자기 편으로 만드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아프간 정부는 그 가운데에 서서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특히 외무장관이었던 아민은 소련을 상대로 "지금보다 더 많이 내놓지 않으면 우리는 미국을 선택하겠다"라는 식으로 압박을 가하였다. 물론 강대국들의 완충지대에 있는 약소국이 그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하면서 엄포와 벼랑끝 전술로 최대한의 실리를 취하려는 것은 흔한 전술이다. 하지만 자립하려는 의지 없이 이쪽 저쪽 오가면서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짓인가.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일 뿐더러, 상대 역시 농간에 놀아날만큼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투자한 돈을 그저 허공에 날리기를 원하는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달콤함에 취하는 사이 결국에는 제 발등을 찍게 된다.
공산 정권이 정권을 잡은 지 1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고 미국의 세력은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 대가로 아민은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약속받았지만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프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소련 지도부는 그동안 아민이 보여준 행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민은 친소파였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이념적으로도 모호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 소련을 등에 업고 미국을 쫓아낸 그가 여차하면 그 반대로도 행동할 수 있지 않은가. 소련은 이 별볼일 없는 나라의 지도자에게 언제까지 휘둘려야 하는가.
하지만 지도부 내부에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민이 타라킨을 쫓아낸 것은 친소 정책을 수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두 사람의 권력 투쟁이었다. 또한 그의 양다리 외교는 약소국이 소련에게 더 많은 원조를 얻으려는 상투적인 압박 전술일 뿐, 그렇다고 정말로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을 선택할만한 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민은 아프간의 내전이 점점 격화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자 더욱 소련에 의지하려 들었다. 이런 자가 과연 소련을 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민의 제거는 아프간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할지 판단하는 쪽은 어차피 카불에서 수천km 떨어진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이었다.
10월 9일 타라키가 참혹하게 암살되고 14일에는 카불을 경비하는 제7보병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부대는 타라키의 측근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였다. 역쿠테타로 아민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반란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아민 정권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은 소련 지도부를 자극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아민이 모스크바로 보내온 도전장"이라고 여겼다.
10월 19일에는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려 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물론 그것이 곧 소련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민의 진짜 속셈이 무엇이든 간에 소련은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말 안듣는 아이는 혼줄을 내 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스탈린 시절 이래 소련의 방식이 아니던가. 강경파인 KGB 의장 안드로포프와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의 주도로 아프간 정책은 근본적으로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아민의 제거를 결심한 것이다. 아민을 대신하여 점찍은 인물은 전 부수상이었던 카르말이었다. 그는 타라키, 아민과 함께 다우드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했지만 그 직후에 벌어진 권력 투쟁에 밀려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한 후 소련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양국의 관계는 빠르게 급랭하였다. 하지만 아민은 소련의 신용은 금새 회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실제로 겉으로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련의 원조는 유지되었다. 아민은 소련 군사고문단의 협조를 얻어서 소련이 제공한 무기로 북부의 반란군을 점차 진압해 나갔다. 아프간 정국이 회복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심지어 카불 주재 소련 대사관조차 본국으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소련 지도부는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국경에는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었지만 아민은 자신을 도우러 오는 군대라고 굳게 믿었다. 소련이 뒷통수를 날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도 돌아온 월맹군님처럼 연재를 할까 합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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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카페가 더욱 유익해지겠군요 ㅎㅎ
역시 소련의 심장은 시커멓고 공산아프간도 남베트남급의 병신유사국가로군요 ㅉㅉㅉ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