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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와 시인이란 무엇인가
김동원
(1) 시란 무엇인가
파블로 네루다의「詩」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의 물음과 해답에 가장 근접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시인이 어떻게 우주적 영감에 홀렸는지, 그 때, 그 순간, 그 자리의 비밀이, 고스란히 시 행간 속에 살아있는 천하절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詩」(정현종 옮김) 전문
1945년 3월, 상원의원에 당선된 파블로 네루다(1904~1973년)는 가브리엘 곤살제스 비델라 페루 대통령을 탄핵한다. 그 사건에 연루되어 1948년 체포영장이 발부돼 망명길에 오른다. 지중해의 작은 섬 ‘이슬라 네그라’라는 해변의 돌집에서 쓴 그의 시집『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년)은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詩」는 그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다. 훗날 그의 망명생활을 다룬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그 원작을 바탕으로「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로 제작돼 전 세계인에게‘시의 진실과 은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시처럼 그려내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마리오’가 사랑한 여자‘베아뜨리체’에게 시처럼 취했듯, 네루다는「詩」속에서 우주의 율동을 한 편의 시로 느낀다. 삼라만상은 그에게 시로 된 음악이었다. 그의 시는 섬광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사라진 음표이다. 그의 시는 천지만물과 접신된 찰나이며 자연의 비밀을 푼 열쇠이다. 그의 시는 “목소리”도 “말”도 “침묵”도 아니다. 그의 시는 “밤의 가지에서 /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부른다. 그의 시는 시퍼런 작두날 위에 올라선 무녀의 중얼거림이자 신들린 예언이다.
네루다는 시를 언어로 표현 했을 뿐, 길을 걷다 홀연히 들었다. 그의 시는 “격렬한 불 속”에서 그 시대의 순수한 소명의 불꽃을 밝혔다. 그의 시는 “이름들을 도무지 / 대지 못했고, / 눈은 멀었으며,”황홀한 환시였다. 그의 시의 느낌은 깜박 잊어먹은 기억을 광대무변의 시간에서 다시 찾아내, ‘아! 그것’ 하며 탄성을 지르는 무량의 공간을 밟는 촉감이라고나 할까. 그의 시는 또 “어렴풋한, / 뭔지 모를, / 순전한 / 넌센스,”요, 기어이 그것을 깨부수고 다시 짓는 우주의 혼돈과 창조에 비견된다.
그러다 네루다는 “문득” 본다. “풀리고 / 열린 / 하늘,”속에서, 무릎을 칠만한 천하명시를 얻는다. 그에게 있어 시의 자리는 “구멍 뚫린 그림자, / 화살과 불과 꽃들로 / 들쑤셔진 그림자,”이다. 오로지 그 시적 영감을 놓치면, 영원히 그 때, 그 순간, 그 자리에 두 번 다시 시가 찾아오지 않음을 그는「詩」에서 직관했다. 하여, 네루다는 “虛空에 취해, / 신비의 / 모습에 취해,”그 자신이 우주 심연의“일부임”을 온 심장으로 느낀다.
이승주는 ‘시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고 했다. “당신은 왜 사는가, 라고 물으면 당신은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그 때, 오랜 고민과 방황, 사색 끝에 내가 얻은 그래도 가장 위안이 되었던 말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의 내가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말 ‘그저 살아있으니까’였다. 내가 절실할 때 그 수많은 인생과 처세에 대한 잠언과 교훈서는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2%의 결핍으로 절실함에 닿지 않았다. 당신은 왜 사는가? 당신은 그저 살아 있으니까? 당신은 시는 왜 쓰는가? 그저 쓰고 싶어서? 그렇다. 그저 쓰고 싶어서 쓸 수밖에 없을 때, 내 몸에서 절로 시가 되어 흘러나오니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을 때, 시의 맛은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그만큼 깊어진다.” (『현대시창작백과』, 이승주) 그는 또 “체험과 사색이 곧 그 작품의 깊이요, 넓이다. 그러나 체험은 많되 사색이 없으면 시의 깊이가 얕고, 사색은 깊되 체험이 없으면 울림이 공허하다. 그러므로 다양한 체험과 깊은 사색이 함께 할 때 좋은 시가 된다.”라고 말했다.
(2) 시인이란 존재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처음 보는 길 캄캄한 길 되돌아올 수 없는 길
누군 뭐 다 알고 가나, 가다 보면 알겠지
그렇게 가다 보면 달빛도 나오겠지,
안 나와도 못 갈 것 없지
길 없으면,
길 보일 때까지 눌러앉아 쉬면 되거든,
무작정 쉬는 재미 세상사
깜박 다 잊고
구름에 기대 쉬는 재미
여자 꽁무니도 한 번 따라가 보는 거야
모든 게 그 계곡서 흘렀으니,
혹, 그 길 보일지 누가
아나,
올라도 타 보는 거야, 그 상상력의 쾌미 속에, 그러다 안 되면
산도 들이받아 보고, 그 아래
처박혀도 보고
한밤중 술병을 들고 신 앞에 나서
버둥거려도 보고,
그래도그래도 풀리지 않거든,
그 이른 첫새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꺼이꺼이 해를 안고
다 타도록 울면 되지, 이제 알겠지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김동원,「시인」전문
시를 사랑하는 이는 다 그렇듯 나 역시 ‘시와 시인이란 무엇일까?’ 늘상 골똘히 생각해 오면서, 행여 그것을 놓쳐 버릴까 조바심과 몸부림 속에 여태껏 시작에 매달려 왔다. 2시집『구멍』(2002년, 그루) 속에 수록되어 있는 졸시「시인」은 그 때까지 내가 시를 쓰면서 겯고틀며 사유한 ‘시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라고나 할까. 소년기는 한껏 고향바다의 좁은 심미안에 혼을 빼앗겨 시의 씨앗을 품은 시기였다면, 도시에서 자란 청소년기는 새로운 사물에 대한 인식과 교우 관계,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져 한동안 술과 사랑, 시 외적 변두리 몸짓에 탐닉한 맹목적 혼란기였다. 차츰 여러 가닥으로 꼬여 있는 사회 안팎을 들춰보면서, 어느 날 문득 길을 가다 내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읊조렸던 몇 구절 시구가 그대로 가슴속 새겨져 시를 사랑하는 한 청년이 되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잡다한 도시 골목길을 벗어나 인근 숲 속을 방황하던 몽롱한 상태의 정신 소유자로 바뀌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면 잘 꼬인 운명쯤으로 여긴다. 문청시절 난, 나름의 한국 서정과 사회적 의식이 저변에 깔린 시관을 형성하면서, 시인 소월을 기점으로 만해, 청마, 목월, 백석, 미당, 김춘수, 박재삼, 송수권, 김수영, 신경림, 고은, 김지하, 김남주 시인 등 한국 문단이 낳은 대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을 밤새워 탐독했다. 특히, 스물 중반에서 불혹까지 몰입한 이백, 보들레르, 미당, 릴케의 시세계에 덧대, 두 번의 수술과 죽음에 맞먹는 병고(病苦)의 체험은 시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그 무수한 번뇌와 살기위한 몸부림 속에서, 미당의 시와 그 분의 산문「시인의 자세」는, 내가 ‘시와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뼈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시인이나 작가(作家)가 되려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써야 할 것이 있느니, 그것은 즉 정신(精神)의 완전(完全)한 자유(自由)다. 어떤 개인(個人)이나 단체(團體)의 강제(强制)에도 얽매이는 일이 없이, 또 사상사(思想史) 속의 어떤 유파(流波)나 개인에게도 편승(便乘)하는 일이 없이, 먼저 하늘만큼 훤출한 자기자유의 능동적(能動的)인 관찰력(觀察力)과 자기류(自己流)의 독자적(獨自的)인 느낌을 가지고 사상의 선택(選擇)과 그 수립(樹立)을 전담(全擔)하라.” (서정주:『문학을 공부하는 젊은 친구들에게』중, 「시인의 자세(姿勢)」. 1993, 민음사)
(3) 시인과 시의 경계
그렇다. “시인이란 제1언어(言語)의 사랑놀이를 평생(平生)토록 지속(持續)하는 사람이다. 그때그때의 낱말선택에서 딴 것으로 대체(代替)될 수 없는 유일자(唯一者)를 찾아내야 하는 시인은 개개 낱말에 대한 낭만적(浪漫的) 사랑을 평생 고질(痼疾)로 앓고 있는 충직(忠直)한 사람이다.(유종호)” 아래 글은 이진흥의「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과 시’의 철학적, 예술적 경계를 아주 세밀하게 담론한 명문이기에 소개한다.
㉠. 시인(詩人)은 시인(視人)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가>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따른다면 시의 근원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무엇인가를 해명하여야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골의 말처럼 <그 가슴에 심각한 고민을 품고 탄식과 흐느낌을 마치 아름다운 노래같이 부르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일까? 독일어의 시인(Dichter)이 의미하듯이 신의 뜻을 인간에게 번역해서 전하고 인간의 바램을 신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일까? 그도 아니라면 곳프리드 벤의 말처럼 <언어의 수공업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까? 모두 다 그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는 정의라고 여겨지지만 여기서 나는 릴케의 시인(詩人=Dichter)은 시인(視人=sehnder Mann)이라는 말을 논의의 단서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시인이 <보는 사람>이라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말은 대상을 포착함인데 이때 대상이란 다름 아닌 존재의 진리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란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면 거짓이므로 존재의 진리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것이 아닌 그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에 있어서 그것을 그것으로 보지 못하고 종종 다른 것(거짓)으로 본다. 그 까닭은 우리가 여러 가지 욕망이나 잘못된 선입견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참으로) 보지 못하고 왜곡시켜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욕망과 선입견을 버리고 순수하게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나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 사물을 효용성으로 보지 말 것.
'장미꽃 뿌리는 파이프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바실라르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장미꽃 뿌리를 파이프(효용성)로 본다.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우리를 위한 사물(Ding fur uns)'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의 진리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날 때(존재의 진리가 보일 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 아닌 다른 것(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아름답지 않다. 예컨대 순수한 대지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대지로 보지 않고 부동산(효용성)으로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다. 나무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목재로 볼 때 그것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꽃을 꽃으로 보면 아름답지만 그것을 돈(상품)으로 볼 때 꽃의 아름다움(참모습, 진리)은 증발한다. 따라서 참으로 보기 위해서라면 사물을 이용대상(효용성)으로 보지 말고 순수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꽃에 대한 테니슨과 바쇼의 태도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 일상성의 파기 혹은 낯설게 하기
1917년 뉴욕 앙데팡당전에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하나 구입하여 라고 서명을 하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품했다가 거부당했다. 그 때 뒤샹은 <일용품을 선택해서 새로운 타이틀과 시점에 의해 그 유용성을 상실하도록 그것을 배치시킴으로써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思考)를 창조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늘 통념적으로 생각해 온 변기라는 사물을 화장실에서 화랑으로 장소를 이동시킴으로 해서 변기라는 '도구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변기가 아니라 순수한 대상(오브제)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우리는 사물을 대개 우리를 위한 사물로 보는데 일상화되어 있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통념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상성을 파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롭게 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낯설게 하기'이다. 러시아의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브스키는 예술이란 실생활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일그러뜨려 낯설게 함(defamiliarization)으로써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 낯설음이란 결국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것이며 그것을 만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늘 기존의 관념의 틀 속에서 사물을 보면 그것의 참모습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때때로 꾸기거나 일그러뜨리거나 관점을 바꾸어 봄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감추어져 있는 존재의 진리를 발견하여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제 2의 창조자 또는 신화를 만드는 사람
시(詩)는 '言 + 持'라고 한다. 이때 持의 손을 의미하는 手는 무엇을 만든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그 手 대신 말을 뜻하는 言이 들어가서 '말로 만든다'는 뜻이 된다. 또한 영어의 poetry도 '행하여 만들다'라는 뜻의 희랍어 poiesis에서 나온 말이므로 이 시라는 명칭은 결국 '만들다, 창조하다'는 뜻이 되고 시인(poet)은 '만드는 사람(maker)',즉 '창조자'가 된다. 그리하여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를 제 1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그 창조된 사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주는 사람인 시인은 제 2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시인이 된다. 횔덜린의 말처럼 인간은 본래 지상에 시인으로서 살며 사물의 참모습을 보고 이름을 붙여 의미(신화)를 창조한다.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올림프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살게 하겠는가?'라고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묻는다. 올림프스라는 신화의 동산을 꾸며 신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의미의 세계를 마련하는 일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신화(의미의 세계)가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바로 동물의 생존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동물적인 생존에서 벗어나도록 삶의 의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 그리하여 시인은 신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다.
릴케의 아름다운 산문 '사랑스런 신에 관한 이야기'에 보면 '돌에 귀를 기울이는 사나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 등장하는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갇혀서 신음하며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끌과 망치로 돌을 쪼아서 신의 형상을 드러내 줌으로 해서 신을 해방시켜준다. 결국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 있는 신을 해방시키는 일인 것이다. 시인이란 바로 이런 조각가이다. 그러므로 신은 시인에게 의존한다.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신이여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만일 내가 죽는다면? 나는 그대를 담고 있는 항아리인데, 만일 내가 깨어진다면?' 이렇게 신을 해방시키며 신의 존재를 받쳐주는 엄청난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첫댓글 공부 잘하고 갑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