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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 編 歷 史
第 1 節 沿 革
1. 大靑面의 沿革
大靑面은 白翎島에서 南쪽으로 30里 동경 124˚44', 북위 37˚ 51'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大靑島와 小靑島 등 2개의 有人島와 無人島인 甲竹島로 구성되어 있다.
大靑島와 小靑島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웃인 白翎島에는 先史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면 우리 大靑島와 小靑島에도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그것에 따르는 遺蹟과 遺物의 考證資料가 없어 確認하기는 어렵다. 다만 大靑島에서 發見된 金銅如來立像3軀(大靑里 산219 一 4에서 崔鳳祚氏가 發見) 와 枾추陶器(天目) 1黑占이 現在 中央博物館遺物課에 保管되어 있는데 金銅如來立像1軀외 시추도기 1점은 統一新羅時代 遺物이요 金銅如來立像2軀는 高麗時代遺物로 記錄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高麗 新羅時代부터 住民이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大靑島와 小靑島라는 地名이 나오기는 高麗顯宗9年(1018)에 白翎島에 鎭將을 배치하고 大靑島와 小靑島를 附屬 島嶼로 두었다고 한 것으로 부터 정확한 기록이 나온다. 또한 宋나라 ‘余兢이(‘二宗1年 1023) 高麗로 오는 路程에서 大靑嶼 小靑嶼 地名에 대한 由來를 기록한 것 등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大靑面지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각축속에 놓였을 것인데 대체로 고구려의 세력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는 漢州 瀑池郡(海州)의 관할아래 편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고대의 大靑面 지역은 중국과의 해상교통로 상에서 白翎島와 함께 중요한 연결선상에 놓여 있었다. 신라 眞聖女王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白翎島에 기항하였다든지 후삼국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태조 15년(932) 10월에 후백제 甄萱의 해군장군 尙哀 둥이 大牛島를 침공하자 白翎島에 귀양 와 있던 庾黔弼이 白翎島와 包乙島의 장정을 뽑아 군대에 충원하고 전선을 수리하여 이들을 방어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大東地志》에서도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싸움에 대해 기록하면서 庾黔弼이 군사를 증발한 包乙島를 靑島라고 하였다. 만일 이것이 정확하다면 포을도는 大靑, 小靑島의 가장 오래된 이름일 것이다. 한편 찬자와 연대는 미상이지만 大靑島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한 글<有山有水有水有魚之格> 에는 大靑島를 고려시대에 岩島라 하였다는데 확실치 못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大靑面지역이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宣和奉使高麗圖經>에 사신 徐兢이 宋에서 고려로 오는 노정을 적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大靑嶼 ◀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과 같다 해서 고려인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날 오각에 매가 이곳을 지나갔다.
▶ 小靑嶼 ◀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이 많을 뿐이다. 신시초에 배가 지났는데 비가 세게 쏟아졌다.
위에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徐兢(1091∼1153) 이 宋나라 微宗에 의해 고려에 파견된 고려 仁宗1년(1123) 인 고려 전기까지도 大靑島와 小靑島가 중국과의 해상교통로의 연결선상에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大靑島와 小靑島라는 지명이 늦어도 고려 仁宗1년(1123)에는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大, 小靑島를 막론하고 靑島라는 지명이 생긴 이유가 섬을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山林이 마치 검푸른 눈썹먹색깔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태조15년(932)후백 제가 大牛島를 침공하자 庾黔弼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 장정을 모집한 包乙島가 靑島라고 비정한《大東地志》의 해석이 타당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포을도는 푸른섬이라는 것을 소리나는대로 漢字化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푸른 섬이라고 한 것을 그 음에 따라 한자화한 것이 包乙島이고 그 뜻에 따라 한자화한 것이 靑島일 것이다. 그런데 包乙島란 이름은 고려초기까지만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大靑島와 小靑島는 白翎鎭에 소속되어 있었다.《高麗史地理志》에 의하면 고려때 鵠島를 白翎으로 개명하여 鎭을 설치하였고 현종9년(1018) 에는 이곳에 鎭將을 배치하였으며 大靑島와 小靑島를 부속도서로 두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大靑島는 고려후기 몽고 지배에 죄인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으며 元나라에서도 이곳을 유배지로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大靑島가 유배지로 고려와 元에 의해 이용도가 넓어지고 특히 元의 貴族 및 皇太子의 유배가 자주 있게 되자 大靑島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높아졌을 것이고 그와 함께 주민수도 증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元의 太子 安懼帖睦爾(陶于帖木兒)에 대한 白翎島誌에 의하면 官基洞, 鄕校洞, 驛里洞, 庫柱洞, 玉竹浦 長安 三角山 등의 地名과 宮闕터 및 太子를 따라 왔던 元의 貴族 洪德熙의 집터 등은 당시 大靑島에 상당수의 주민과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大靑島와 小靑島를 관할하던 백령진은 공민왕 6년(1357)에 文化縣 東村 加乙山 지역으로 옮겨 가게 된다. 그것은 왜구가 서해안까지 창궐하는 상황에서 白翎, 大靑島 등으로 통하는 水路가 험난하여 방어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自翎鎭의 官人 吏民奴婢들 뿐만 아니라 백령진 주민들까지도 내륙지방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에 따라 大靑島와 小靑島 주민들의 대규모 육지로 이주함에 따라 대청도와 소청도는 점차 황폐화되어 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같이 황폐일로에 있던 대청도와 소청도에 대해 趙云侘은 西海道者觀察使가 되어 장차 赴任하려 하매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좋은 미끼 아래에는 반드시 큰 고기가 있고 무거운 賞 아래에는 반드시 어진 장수가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虛惡을 행하여 實福을 받는다 하였으니 이 말이 지극한지라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마땅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內外가 근심이 없는 때에도 오히려 또한 위태함을 생각할 것이온데 하물며 우리 本朝에서는 바다로는 倭島가 가깝고 육지로는 胡地가 연하였으니 가히 근심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며 國界가 西海로부터 楊廣에 이르고 全羅에서 慶尙에 이르러 바닷길이 거의 二千餘里인 바 海中에 가히 살만한 州가 있으니 大靑, 小靑, 喬洞, 江華, 珍島, 絶影, 南海, 巨濟 등 큰 섬이 二十―이요 작은 섬은 이루다 헤아리지 못하오나이다 土地가 肥沃하여 魚鹽의 이익이 있거늘 이제 폐하여 調査하지 않으니 가히 탄식할 일입니다. 마땅히 五軍의 장수와 八道 軍官에 각각 虎符와 金牌를 주고 그 千戶 百戶에는 牌面을 주어 인하여 大小海島로써 그 食邑을 삼아 子孫에 傳하게 하면 오직 장수의 한 몸이 富할 뿐만 아니라 子孫萬世에 衣食이 남음이 있을 것이오니 사람마다 누가 각각 스스로 싸움을 하지 않으리요 사람 사람이 각각 스스로 싸우게 되면 單瑚監을 스스로 갖추고 兵糧을 스스로 싸가지고 遊兵이 될 것이오니 인하여 적의 뜻하지 않는 데에 나가서 치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백성이 얻어 풍족하며 번식하여서 煙火가 서로 이어지고 鷄大이 서로 들(聞)려서 백성이 魚鹽의 利를 얻고 나라가 漕轉하는 근심이 없어 祖宗의 土地가 다시 오늘에 온전하게 될 것이오니 원컨대 대신으로 더불어 묻고 의론하여 시행하옵소서 하니 禑王이 그 글을 都堂에 내리었다. 趙云仡이 州郡을 觀察하여 綱紀를 진흥하고 강함을 누르고 약함을 붙들어 법에 범하는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部內가 크게 다스려졌다. 辛昌 元年에 불러 簽書密直司事를 제배하고 곧 同知에 승진하였고 恭讓王 2年에 나가 鷄林府尹이 되고 本朝에 들어와 江陵大都護府使를 除授하였는데 조금 후에 병으로 사퇴하고 廣州別墅에 돌아갔다가 다시 檢校政當文學을 제배하였다. 檢校는 예로 祿을 받는데 趙云仡은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사람됨 이 뜻 세우기를 奇古하게 하고 跌宕 塊偉하여 소신대로 곧게 행하여 때를 따라 俯仰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차 죽게 되매 스스로 墓誌를 짓기를 趙云仡은 本貫이 豊壤人이며 高麗 太祖의 신하 乎章事 趙孟의 三十代孫이다. 恭愍王 때에 興安君 李仁復의 門下에서 登科하여 中外의 官職을 兼任하였으며 五州의 印을 찾고 四道의 풍속을 관찰하였으며 비록 큰 성적은 없었으나 또한 시속의 비루함은 없었다. 나이 七十三에 병으로 廣州古 垣城에서 마치니 아들은 없다. 日月로써 珠璣를 삼고 淸風明月로써 奠을 삼아 古楊州莪嵯山 南 摩詞耶의 孔子 杏壇 위 釋迦 雙樹 아래에 장사하였으니 古今으로 聖賢이 어찌 홀로 있있으리요 아 人生의 일을 마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와같은 趙云仡의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대청도와 소청도는 더욱 황폐화되었는데 주민입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서서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백령진이 혁파되고 모든 주민들을 육지로 옮긴 뒤 백 령도 대청도 소청도는 장연현에 소속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같은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태종 6년(1406)에 대청도와 소청도는 甕津縣에 편입 되었다가 16세기 경에는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게 되었다. 백령진이 폐지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대청, 소청도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화된 지역으로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백령도와 함께 관서 호서 호남 방면에서 한강하구로 들어오는 漕運船을 약탈하는 海賊의 소굴로 변하였다. 그러나 世宗 10년(1428)에 백령도에 주민이주가 시작되었고 대청도에도 소를 방목하는 牧牛場이 설치되는 등 대청도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증대되고 그에 따라 주민입주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光海君 1년(1608)에 백 령도를 비롯한 대청 소청도를 근거지로 출몰하는 해적토벌을 위해 백령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토벌한 이후 조운선을 습격하는 해적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募民耕作에 따라 백령도에는 점차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백령도 목장을 대청도로 옮기는가하면 백령도와 대청도에만 自生하는 桑寄生이란 약재의 채취와 보호에 주의를 기울였다. 1750년 경에 저술된 李重煥의 《擇里志》에는 長淵南쪽 큰 바다 한가운데 大靑, 小靑 두 섬이 있는데 지금 섬은 황폐하여 사람이 없고 수목만이 하늘을 가리웠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8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황폐화된 지역으로 버려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령진 설치후 주기적인 해적토벌에 따라 조운선을 습격하던 해적은 줄어들었지만 숙종 영조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荒唐船 漁採唐船이라 불리는 中國의 海賊船들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근해에서 불법 어로와 그에 따른 연해어민의 피해가 막대하였으며 심지어 黃海道沿岸과 멀리는 京畿 忠淸 全羅道까지 약탈행위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荒唐船의 追捕를 위해 襄津所江鎭을 水營으로 승격시키고 백 령진에 전선을 증가 배치하고 백령진 첨사의 경우는 부임한지 1년 안에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久任制를 실시하는 한편 황폐화되어 荒唐船의 좋은 근거지로 이용되고 있던 대청도와 소청도에 대해서도 주민 이주와 水軍배치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즉 정조 17년(1793) 좌참챤 鄭民始가 일찌기 고려 말에 대청 소청도 개발을 주장한 趙云仡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비옥한 토지와 漁鹽의 이익이 있는 대청도 소청도에 주민을 이주케 하여 토지를 경작케 하고 그 실천방법으로서 먼저 황해도 수사에게 그 타당성 여부를 조사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황해도 수군 절도사 李禹鉉에 의해 대청도와 소청도의 사정을 보고케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도는 東西길이 30리 南北길이 20리이며 北쪽으로 白翎鎭과 30리 東西쪽으로 長淵 舞龍浦와 130리 떨어져 있다. 섬은 內洞 庫舍洞 沙堰洞 板案仇味 등 4개의 큰 골짜기로 나누어져 있다. 內洞은 北쪽에 높은 봉우리 아래의 지역으로 지금도 기와조각이 나오는데 元順帝의 舊址라고 전해 온다. 그 아래는 玉竹浦이다. 길이가 10리에 폭이 200여보에 이르는 좁고 긴 지역으로 그 윗부분의 토질은 매마른 자갈밭인데 그 사이에 간간히 밭이 있고 그 아래는 토질이 좋아 개간할 만하다. 庫舍洞은 길이 3리 폭 200여 보에 이르는 지역 인데 그 윗부분은 層巖亂石으로 경작할만한 땅이 없으나 그 아래의 지세는 대체로 평탄하고 土色은 흙색이며 개간을 일으킬 만하다. 그러나 庫舍洞 골짜기 입구는 해안에 연결되는데 제방이 있지만 돌무더기가 무너저내려 밀물 때면 짠물이 스며들어 온다. 沙堰洞은 하나의 긴 골짜기인데 절벽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 바다로 통하지만 경작할 만한 곳이 없다. 板案仇味는 지세가 沙堰洞과 같은데 골짜기가 끝나는 부분은 평탄하여 100여두의 곡식을 거둘만 하다. 대체로 4개동 가운데 내동이 농사에 가장 적합하고 그 나머지 지역은 고개 골짜기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에 소나무 느름나무 뽕나무 상수리나무 개암나무 오동나무 떨갈나무 개오동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다. 四面海岸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漁箭을 설치할만한 곳이 없으며 소금을 구을만한 곳도 적다.
小靑島, 大靑島에서 南쪽으로 30리 떨어저 마주보고 있다. 南北길이 10여리 동서길이 5리이며 北쪽으로 白翎鎭과 60리 동쪽으로 所江行營과 180리 東北쪽으로 長淵 舞龍浦와 150리 떨어져 있다. 섬에 東北쪽에는 寺垈仇味 鯨生洞 茅田仇味 塔洞 등 4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작할 만한 곳이 조금도 없다. 南쪽에는 能洞 倭津洞이 있는데 모두 해안가에 붙어 있다. 西쪽에는 牛毛津 竹田峴 內津 등 3곳이 있는데 모두 지대가 높아 경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섬에 西南쪽은 토질이 비옥하여 경작지로 삼을 만하다. 섬에는 나무가 울창한데 冬栢과 春栢이 그 가운데 7∼8할을 점한다.
이와같은 황해도 수사의 보고와 함께 備邊司에서도 대청, 소청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출하였다. 大靑, 小靑 두 섬의 면적이 넓으니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케 허락하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한 海防과 관련하여 말씀드리면 荒唐船이 출몰하여 漁採하는 불법행위가 매년 무수히 자행되고 있는 이때 大靑, 小靑島에 백성을 거주케 하면서 荒唐船을 追捕하고 沿海諸處에 정찰을 하게 한다면 변방통치에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師臣에게 명령하여 백성을 모아 경작케 하고 農牛와 씨앗을 대어주며 섬 안에 나무를 베어 그것을 팔아서 정착에 따른 경비로 충당하게 할 것을 청하옵니다.
좌참찬 鄭民始 요청에 따른 황해도 수사의 보고와 備邊司의 재청에 의해 正祖 17년(1793)에 대청 소청도에 주민입주와 경작이 허락되고 아울러 대청도와 소청도에 각각 屯을 설치하여 임시로 別將을 두었다. 그러나 오랜동안 황폐화된 이곳에 대한 개발이 쉽사리 이루어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입주를 허락한 1년후 황해도 水軍節度使 李海愚가 대청도와 소청도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대청도는 면적이 넓고 경작할만한 토지가 있지만 잡초와 수목이 우거져서 돌을 들어내고 평탄하게 경작지루 만들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26戶의 주민이 산비탈에 土幕을 짓고 살고 있는데 모두들 육지로 나가고자 하나 官에서 엄금한 일입니다. 소청도는 산세가 경사지고 마을이 협소하여 비록 경작할 토지가 있다고 하지만 끝내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닙니다. 현재 22戶가 살고 있는데 형편이 대청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청, 소청 주민들은 모두 唐船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곳은 唐船이 드나드는 길목입니다.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애석할 뿐입니다. 이른바 섬에 들어오려는 자들은 하나같이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도 없는 그저 아침에 모였다가 저녘에 흩어지는 것과 같은 流移民들 입니다. 현재와 같이 그들을 구속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도 않겠지만 이로 인해 섬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때 없이 섬을 드나들면서 수목은 도벌하는 자들도 그대로 둔다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唐船은 많을 때는 30여척 적을 때는 10∼20척 이 예외없이 대청, 소청도에 배를 대고 어로와 밀무역을 하여 왔는데 우리 백성들이 살고부터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마땅히 토벌하고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명의 군사는 필요합니다. 또한 군사의 경비조달과 주민의 생활안정을 위한 시책이 필요함과 아울러 주민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화근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황해도 수사의 보고에 따라 大靑島와 小靑島에 대한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正祖23년(1799)에 대청도와 소청도를 水原府로 편입시키고 道臣 申命守의 건의에 따라 두 섬에 각각 鎭을 설치하였다.
鎭將은 自膵(上官이 자기재량으로 하급관리를 자유로히 임명하는 것)하도록 하여 水原府의 장교 가운데서 1년씩 번갈아 가며 임명되었다. 고종 30년(1893) 수원유수가 議政府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旗牌官과 別武士가운데 1명 씩 돌아가며 임명되었다고 한다.
대청도 진장은 실제 매년 한번씩 교체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해산물과 농산물의 이익을 거두어 급료로 충당하고 해마다 正鐵 500斤을 水原府에 보내어 修繕하는 비용에 보태도록 하였다. 大靑島와 小靑島의 鎭將은 唐船의 출몰 지역인 湖西의 乎薪과 湖南 群山 앞바다까지 그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小靑鎭에 대하여는 1799년 (正祖23년)度 大靑島와 小靑島에 各各 鎭을 設置한 言己錄이 있을 뿐 小靑島에 대한 확실한 考證資料가 없고 또한 物證도 없어 小靑鎭의 沿革을 알 수 없어서나 1808년도 金海金氏 萬福 氏가 小靑鎭의 軍官으로 發令을 받고 小靑島로 入島한 事實과 當時 巾占紙의 白翎島에서 發行한 帳籍 따라서 1859年度에는 金萬福氏의 長孫이 신 金常集氏가 小靑鎭에 傳令으로 받은 帖紙등을 考察하오면 小靑鎭에 대한 考證이 된다. 千萬多睾한 일이다. 小靑島에는 金萬福氏와 그의 子富成氏 孫子인 金常集氏의 墓所가 있으며 尙集의 子 允玉氏는 現在 白翎鎭村里에 居住하고 있는 金元善(일명七星)氏의 父親이시고 金萬福 氏는 元善氏의 五代祖가 된다. 蘆花洞에 金順汝 金順寬 金俊善氏등은 金萬福氏의 後孫이다. 金萬福氏와 金常集氏의 戶籍과 帖紙를 傳述한다.
哲宗 12년 (1861) 64代 大靑鎭將으로 파견된 林芝馨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土地는 버려져 황무지가 되었고 주민은 질병에 시달리며 오로지 藿(미역), 鰒(전복), 海蔘, 蛤(조개)을 陸地로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라고 하여 주민 생활도 극도로 곤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주한 주민수는 1798년에 48戶에서 100년 가까이 지난 1893년 경에도 100戶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鎭將이 배치된 大靑鎭과 小靑鎭은 朝鮮왕조 말기까지 존속한다. 白翎略誌에 의하면 高宗 31년(1894)에 폐진되고 따라서 1895년에는 鎭將 대신 島長으로 行政 체제를 바뀌어졌다. 당시 첫번째 島長은 金永俊(金興連氏曾祖父) 다음 島長은 金明河(金奉哲氏祖父) 小靑島 島長은 金元汝(金泰京氏의 祖父) 先生이시다. 소속도 水原府에서 長淵府로 바뀌었다. 그러나 島長의 권한은 鎭將 권한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으며 軍權은 없고 行政 司法을 주관하였는데 중한 죄인은 상부로 보냈다고 한다. 대청진과 소청진이 폐지되던 시기는 이른바 甲午 改革의 일환으로 8道制가 23府制로 개편되던 조선왕조의 지방제도가 일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島長 중심의 행정체제는 1909년∼1910년 양차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에도 변화가 없었는데 1912년에 개편된 대청, 소청 行政區域은 다음과 같다.
大靑島 ― 船津洞 玉竹浦 內洞 沙灘同 庫柱洞
小靑島 ㅡ 禮洞 蘆花洞
그러나 島長制는 곧 面長制로 바뀌었고 따라서 大靑, 小靑島는 신설된 白翎面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1913년에 시행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청도의 船津洞 王竹洞 內洞 沙洞 庫柱洞을 합쳐 大靑里로 하고 小靑島에 禮洞 蘆花洞을 합쳐 小靑里로 개편하였다.
이와같은 행정구역은 큰 변화가 없이 유지되어 오다가 1942년 백령면 대청출장소를 대청도 선진포에 설치하였으며 해방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大靑出張所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것을 1962년 6월 14일 裴津郡 條例 제17호로 백령면 대청출장소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리고 1974년 7월 1일 대통령제 716호에 의해 백령면 대청출장소가 大靑面으로 승격되었으며 1975년 5월 20일 옹진군 조례 제341호에 의하여 大靑面 小靑出張所가 禮洞에 設置되었다.
그후 또다시 行政區域改編에 의하여 1995년 3월 1일자로 甕津郡이 仁川廣域市로 編入되었다.
【大靑島】
대청도는 경기도 옹진군 대청면에 속한 섬 옹진반도 북서쪽 약 40km 해상에 자리잡고 있다. 동경 124˚44' 북위 3751'에 위치하며 면적 12.61.k㎡ 해안선 길이 26km이다. 가구수 423호 인구 1,893명 (1985년 현재)이나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백령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 등과 함께 서해 5도의 하나이며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섬 전체는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부의 삼각산(三角山343m) 이 최고봉이고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200m 이상의 높은 지역이 존재한다. 1월평균기온 -4℃ 8월평균기온 24℃ 연강우량 665.3mm 연강설량 65mm이다. 경지면적은 논 0.247k㎡, 밭 0.925k㎡이며 농산물로는 약간의 쌀과 감자가 생산된다. 근해는 좋은 어장으로서 홍어, 까나리, 멸치 등이 많이 잡힌다. 동백나무숲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 동백은 국내에서 최북단에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사탄분교까지 합하여 국민학교 3개교이고 大靑中高等學校가 있다. 대청도는 본래 장연군을 거쳐 옹진군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경장 후에는 한 때 대청도 도장(島長)을 배치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다시 백령면하에 대청리 소청 리로 되었다가 광복 후에는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2개의 법정리 즉 대청리 소청리가 있고 7개의 행정리인 대청 9개리와 소청 2개리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청도에는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원나라에서 발라태자(芋刺太子)를 이곳에 귀양보냈다가 충숙왕 10년에 소환하였으며 충숙왕 17년에는 도우첩목하(陶于帖木兒)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후원년(後元年 1332)에 소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청도 내동에는 아직도 그들이 거처하던 집 터인 거택기 (居宅基)의 유지(遺趾)가 남아 있으며 깨진 기왓장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韓國地名要覽 (建設部國要覽 (建設部國立地理院 1983) 島嶼誌 (內務部 1985) < 金周煥 >
【소청도(小靑島)】
소청도는 경기도 옹진군 대청면에 속하는 섬 옹진반도로부터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으며 북서쪽으로 약 10km 지점에 대청도가 있다. 동경 124˚43' 북위 37°45' 에 위치하며 면적 2.29km 해안선 길이 14.2km 인구 493명 (1985년 현재) 이다. 동서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에 최고 높이 174m 의 산이 있다. 대리석의 기암총석(奇岩叢石)이 해안을 돌아가며 병품처럼 둘러싸고 있는 암석해안이 발달하고 있다. 1월평균기온=3.5℃ 8월평균기온 26.5 ℃ 연강우량 665.3Iml 연강설량 5㎙m이다. 경지면적은 밭 0.6㎢가 있을 뿐이며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작물로는 보리, 감자, 마늘이 생산된다. 근해는 서해의 주요어장으로 조기, 홍어, 까나리가 많이 잡히고 굴양식 업도 활발하다. 육지와의 교통은 대청도와 동시 운항되는 여객선이 3일에 한번씩 운행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 개교와 중학교분교 1개교가 있다.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 섬에 유배되었을 때 주악(酒樂)을 즐겼다고 하는 분바위(粉巖)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참고문헌》
韓國地名要覽 建設部國立士也理院 1983) 島嶼地(內務部 1985) (金淘煥)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와 중학교분교 1개교가 있다. 원나라
순제(∫'頂帝)가 이 섬 에 유배되었을 때 주악('酉樂)을 즐겼다고 하는 분
바위(粉巖)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 참고문헌》
韓國地名要覽 (建設部國立地理院 1983) 島嶼地 (內務部 1985) (金周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