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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1. 옥황상제님(玉皇上帝)께서 도력(道曆) 기원전(紀元前) 십사년(十四年),을미(己未) 십이월(十二月) 사일(四日) 양력(陽曆) 익년(翌年) 이듬해 일월(一月) 십구일(十九日) 미시(未時)에 경상도(慶尙道) 칠원현(七原縣) 서면(西面) 회문리(會文里)에 강세(降世)하시니 성(姓)은 조(趙), 본관은 함안(咸安), 휘(諱)는 철제(哲濟), 자(字)는 정보(定普), 호는 정산(鼎山)이시니라.
2. 상제(上帝)의 신격위(神格位)는 태극주 옥황상제(太極主 玉皇上帝)시며 인격위(人格位)는 무극신(无極神) 대도덕(大道德) 봉천명(奉天命) 봉신교(奉神敎) 태극도주(太極道主) 조성정산상제(趙聖鼎山上帝)시니 삼계(三界) 최고위이신 태극도주(太極道主) 옥황조성상제(玉皇趙聖上帝)로서 구천상제(九天上帝) 와 이도일체(以道)시니라.
3. 회문리(會文里)는 동방(東方)의 영산(靈山) 백두(白頭) 금강(金剛) 지리(智異)의 연맥(連脈)이 다시 태백산맥(太白山脈)의 남단(南端) 부산(釜山)을 향(向)하여 동(東)으로 기복 연면 (起伏 連綿)하다가 여항(餘航) 광려(匡廬) 무학(舞鶴)의 산군(山郡) 이루고 그 연맥(連脈)인 자고산(紫皐山)의 주봉(主峰)이 동(東)으로 힘차게 뻗은 구릉(丘陵) 끝에 봉소형(鳳巢形)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니라. 그 주위(周圍)를 천주(天柱) 작대(爵大) 무릉(武陵) 안국(安國) 대곤(大鵾)의 명산(名山)이 환요(環繞)둘러싸고 인근(隣近)에 천계(天界) 안기(安基) 신산(新山) 무릉(武陵) 구성(龜成) 유원(柳原) 등(等)의 마을이 있느니라.
4. 상제(上帝)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주(父主)의 휘(諱)는 용모(鏞模), 자는 순필(舜弼), 도호(道號)는 복우도장(復宇道丈)이시니 도기전(道紀前) 삼십이년(三十二年) 정축생(丁丑生)이시며 품성(品性)이 관후 인자(寬厚 仁慈)하시고 문장(文章)이 수일(秀逸)하시니라.
선조(先祖)로부터 전승(傳承)한 가풍(家風)에 따라 충렬(忠烈)의 정신(精神)이 투철(透徹)하시더니 을사년(乙巳年)에 부주(父主) 취당공(聚堂公)께서 순국(殉國)하신 후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더욱 열렬(熱烈)하셨으나 국운(國運)이 비색(비塞)하여 내지(內地)에서의 구국활동(九國活動)이 불가능(不可能)하므로 계씨(季氏) 용의(鏞懿), 용서(鏞瑞)와 함께 만주(滿洲)로 솔가망명(率家亡命)하셔서 김혁(金赫), 이석대(李碩大) 등과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展開)하시다가 옥고(獄苦)까지 치르시고 만년(晩年)에 귀국(歸國)하셔서 상제(上帝)의 창도 사업(創道事業)을 보좌(補佐)하시니라.
5. 모주(母主)께서는 밀양군(密陽郡) 하남면(河南面) 파서리(巴西里)의 명문(名門) 여흥(驪興) 민씨(閔氏) 중호(仲鎬)의 따님으로서 도기전(道紀前) 십칠년(十七年)에 복우도장(復宇道丈)과 결혼(結婚)하시니 휘(諱)는 영명(泳明), 도호(道號)는 숭덕부인(崇德夫人)이시니라.
천성(天性)이 활달(濶達)하시고혜식(慧識)이 영민(英敏)하시며 체격(體格)이 건장(健壯)하셔서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이시니라.
6. 조부주(祖父主)의 휘(諱)는 영규(瑩奎), 자(字)는 태견(泰見) 호(號)는 취당(聚堂)이 시니 성정(性情)이 순정(純情)하시고 재화(才華)가 초절(超絶)하셔서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로 명성(名聲)을 떨치시니라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셔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지춘추관(知春秋館) 기사관(記事官)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등(等) 관직(官職)에 계시며 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등(等)과 교유(交遊)하시더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체결(締結) 단계(段階)에 그 부당(不當)을 극간(極諫)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심화병(心火病)으로 환향(還鄕後)후 토혈(吐血)하시며 서거(逝去)하시니라.
조모주(祖母主)는 의성(義城) 김씨(金氏)로서 승정원(承政院) 정자(正字) 구락(龜洛)의 따님이시니라.
7. 상제(上帝) 인신(人身) 선조(先祖)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라 하며 이십팔대조(二十八代祖) 휘(諱) 정(鼎) 시(諡) 충장(忠壯)은 고려(高麗) 개국(開國) 벽상공신(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시며 십구대조(十九代祖) 휘(諱) 열(悅)은 여말(麗末)의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여조(麗朝)가 망(亡)하매 함안(咸安)으로 낙향(落鄕)하여 신조(新朝)의 부름에 불응(不應)하시니 이후(爾後) 후손(後孫)이 함안(咸安)에서 세거(世居)하니라. 십칠대조(十七代朝) 휘(諱) 여(旅) 호(號) 어계(漁溪), 시(諡) 정절(貞節)은 단종조(端種朝)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시며 십삼대조(十三代祖) 휘(諱) 방(房) 호(號) 두암(斗巖)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의거(義擧) 전공(戰功)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니라.
십일대조(十日代祖) 휘(諱) 함익(咸益) 호(號) 임계(林溪)는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이 높으셨으며 고조부(高祖父) 휘(諱) 화식(華植) 호(號) 죽헌(竹軒)은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서 내린 정려(旌閭)의 명(命)을 받으시니라.
증조부(曾祖父) 휘(諱) 성의(性義) 호(號) 벽봉(碧峯)은 도학(道學)과 신망(信望)으로 향리사림(鄕里士林)마을의 사표(師表)가 되셨으며 증조모(曾祖母)는 진양(晉陽) 강씨(姜氏)시니 상제(上帝) 인신(人身)의 세계(世系)는 십일대조(十日代祖) 임계공(林溪公)의 종손(宗孫)이시니라.
8. 복우도장(復宇道丈)께서 숭덕부인(崇德夫人)과 성혼(成婚) 삼년후(三年後) 빙택(聘宅)처가에 머무르시던 을미년(乙未年) 정월(正月) 초삼일(初三日) 밤 꿈에 천지(天地)가 별안간 밝아지며 천상옥경(天上玉京)에서 오색 채운(五色 彩雲)을 탄 일위 선관(一位 仙官)이 좌우(左右)에 시종(侍從)을 거느리고 유유(悠悠)히 내려와서 두 분께 경배(敬拜)하며 사뢰기를『저는 천제(天帝)님의 명(命)에 따라 진멸지경(殄滅之境)의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기 위(爲)하여 이 동토(東土)에 인신(人身)으로 강세(降世)하고자 하오니 어여삐 받아 주옵소서.』하며 부인(夫人)의 품에 안기니라. 부인(夫人)께서 일어나 옆의 부군(夫君)을 깨우셔서 이 몽사(夢事)를 말씀하시니 도장(道丈)께서도 『나도 이제 그와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는 필시 (必是) 태몽(胎夢)이며 천기(天機)에 속(屬)한 대몽(大夢)이라. 천의(天意)에 어긋남이 없도록 함이 옳으리다.』 하시니라. 이때 방(房)안에는 향기(香氣)가 만당(滿堂)하고 밖에는 서광(瑞光)이 충천(衝天)하니라.
9. 이무렵 취당공(聚堂公)은 한양(漢陽)에 계시며 자부(子婦)의 태기소식(胎氣消息)을 고대(苦待)하시던 차 이날 같은 시각(時刻)에 꿈을 꾸시니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함께 천지(天地)가 진동(震動)하고 불이 이글거리는 철주(鐵柱)가 사방(四方)을 휩쓰는데 바닷물이 넘쳐 흘러 불을 뒤덮어 끄고 암흑천지(暗黑天地)를 이루더니 이윽고 하늘이 갈라지며 찬란(燦爛)히 솟아난 태양(太陽)이 자부(子婦)의 품에 안기니라. 이는 대인(大人)을 얻을 가문(家門)의 길몽(吉夢)이라 생각하시고 도장내외(道丈內外)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르시기를『우리 가문(家門)에 천명(天命)에 따른 경서(慶瑞)가 임하리니 성(誠) 과 경(敬)을 다하여 천의(天意)를 받들 준비(準備)를 하라.』하시니라.
10. 그 후십두삭(後十二朔)만의 출산(出産)에 즈음하여 숭덕부인(崇德夫人)께서 난산(難産)으로 산통(産痛)이 극심(極甚)하셔서 삼일간(三日間)이나 신음(呻吟)하시더니 전 가족(全 家族)의 극진(極盡)한 조산(助産)과 구호(救護)에도 불구(不拘)하고 기가 쇠핍(衰乏)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함에 이르시니라. 이때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갑작이 산실(産室)히 밝아지며 옥적(玉笛)소리와 함께 천상(天上)에서 손에 약탕기(藥湯器)를 든 일위 선녀(一位 仙女)가 채홍(彩虹)을 타고 내려와서 부인(夫人)께 경배(敬拜)하며 말하기를『소녀(小女)는 천존상제(天尊上帝)님의 명(命)을 받들었사온 바 지금(只今) 탄생(誕生)하시는 옥동자(玉童子)께서는 천제(天帝)님의 명(命)에 따라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실 진주(眞主)이심을 전(傳) 하옵고 조산(助産)하고자 시름을 놓으시고 이 약(藥)을 드시옵소서.』하며 약탕기(藥湯器)를 기울여 입에 드리우니라. 부인(夫人)께서 혼미중(昏迷中)에 정신(精神)이 쇄락(灑落)하고 산통이 진정되며 드디어 옥동자(玉童子)를 낳으시니라. 선녀(仙女)는 하직인사(下直人事)를 올린 다음 천상(天上)으로 올라가고 산실(産室)에는 향기(香氣)와 서광(瑞光)이 가득하니라.
11. 이날 회문리(會文里) 일대(一帶)에 삼일간(三日間) 계속(繼續)되던 강설(降雪)이 그치고 심(甚)한 운무(雲霧)로 지척(咫尺)을 분간(分揀)하기 어렵더니 강세(降世)하신 미시(未時)에 일기(日氣)가 청명(淸明)하니라. 한편 산실(産室) 지붕으로부터 백홍(白虹)이 충천(衝天)하여 칠일간(七日間)이나 걷히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오직 그 지붕에는 일점설(一點雪)도 없으니라.
12. 상제(上帝)께서는 강세(降世) 초(初)부터 기골(氣骨)이 장건(壯健)하시고 기상(氣象)이 준수(俊秀)하시더니 차츰 장성(長成)하시매 전신(全身)에서 후광(後光)을 발(發)하시고 천중천정(天中天庭)이 광대(廣大)하시며 일월각(日月角)이 풍륭(豊隆)하시고 봉안(鳳眼)에 안광(眼光)이 찬연(燦然)하시며 용준용안(龍俊龍顔) 학경귀배(鶴頸龜背)시니라. 배면(背面)에 칠성문(七星文) 우고(右股)에 삼적자(三赤子), 좌고(左股)에 칠십이적자(七十二赤子), 양족장(兩足掌)에 각각(各各) 삼적자(三赤子)가 완연(宛然)하시고 이하(頤下)에는 용수(龍鬚) 수족(手足)에는 용조(龍爪)를 지니셨으며 음성(音聲)은 뇌고(雷鼓)같은 용성(龍聲)을 지니시니라.
13. 강세(降世) 후(後)에 밤마다 너무 우시는데 그 울음이 아기 음성(音聲)같지 않게 크시며 하늘을 향(向)하여 호소(呼訴)하듯 하시니라.
대부인(大夫人)께서 달래셔도 그치지 않으시므로 왕대부인(王大夫人)과 고모(姑母) 등(等)이 밤을 새워 보살피시더니 삼칠일(三七日)이 지나서야 울음을 멈추시니라.
14. 강세(降世) 육개월(六個月)에 걸음과 말을 익히시고 첫 돌에 이미 총명(聰明) 영특(英特)하셔서 보고 듣는 일을 잊지 않으실뿐 아니라 사리(事理)를 채문(採問)하시므로 어른들은 그 응답(應答)에 노심(勞心)하니라. 또 한 가지를 배우시면 많은 일을 깨달으시니 주위(周圍)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인출현(神人出現)이라고 찬탄(讚嘆)이 자자(藉藉)하니라.
15. 삼 사세(三 四歲)의 유시(幼時)부터 한 번(番) 옳다고 생각하신 일이나 하고자 하신 일은 반드시 실행(實行)에 옮기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始作)하신 일은 반드시 실행(實行)에 옮기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끝내시며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서 곤충(昆蟲)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훼상(毁傷)함이 없으시니라.
16. 오 육세(五 六歲)에 벌써 대인(大人)의 풍도(風度)로 심성(心性)이 활달(豁達) 명석(明晳)하시며 어떤 일에도 침착(沈着) 조밀(稠密)하시니라. 가축(家畜)을 좋아하셔서 어른들이 그사육(飼育)에 등한(等閑)히 하면 일일(一一)이 참견(參見)하시니라.
17. 칠세(七歲)되시던 신축년(辛丑年) 봄에 한문서숙(漢文書塾)에 입학(入學)하시니 천종(天縱)의 재질(才質)로 하루에 수항(數行)을 배우시나 수십장(數十張)을 배우셔도 다음 날 강(講)의에 막힘이 없으시니라.
18. 이해 가을 어느날에는 홀로 육갑(六甲)과 월력(月曆)의 구성법(構成法)을 고안(考案)하시고 스스로 그 신이(神異)함을 기뻐하시며 이를 훈장(訓長)에게 말씀하시니 훈장(訓長)은 이 것이 비록 세간(世間)에서 이미 사용(使用)되는 역서(曆書)와 같으나 칠세(七歲) 소년(少年)으로 누구의 교시(敎示)도 없이 창안(創案)하심에 경탄(驚歎)하니라. 불과(不過) 수년(數年)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섭렵(涉獵)하시고 홀로 궁리진성(窮理盡性)에 작심(作心)하실 뿐 훈장(訓長)과는 대응(對應)하지 않으시므로 도장(道丈)께서 다른 서숙(書塾)으로 전학(轉學)시키거나 다른 훈장(訓長)을 환갱(換更)하셔도 별(別) 공효(功效)가 없으시니라.
19. 숭덕부인(崇德夫人)께서는 성격(性格)이 준열(峻烈)하실 뿐더러 엄격(嚴格)한 집안 가규 (家規)에 따라 상봉하솔(上奉下率)에 빈틈이 없으신 중(中)에도 상제(上帝)께는 비범(非凡)하신 재덕(才德)의 탁마(琢磨)를 위(爲)하여 엄훈(嚴訓)으로 하시되 상제(上帝)의 효성(孝誠) 또한 지극(至極)하셔서 모자간(母子間)에는 항상(恒常) 화애(和愛)가 넘치시니라.
20. 도장댁(道丈宅)은 대대(代代)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숭상(崇尙)하는 유가(儒家)의 가풍으로서 삼사대(三四代)가 단란(團欒)한 대가족(大家族)이니라. 상제(上帝)께서는 종손(宗孫)이시며 독자(獨子)이신 귀공자(貴公子)로서 총애(寵愛)를 받으셨으나 평소(平素)에 말씀하시기를『안빈낙도(安貧樂道)는 처신(處身)의 의방(義方)이요, 검소존절(儉素존節)은 접물(接物)의 요결(要訣)이며 호의호식은 망신(亡身)의 천습(賤習)이요 이기해인(利己 害人)은 오명(汚名)의 만행(蠻行)이라. 군자(君子)는 오직 의방(義方)과 요결(要訣)을 취(取)함이 마땅하니라.』하시며 솔선궁행(率先躬行) 하시니라.
21. 서숙(書塾)에서는 비범(非凡)하신 언행(言行)으로 훈장(訓長)의 칭송(稱頌)을 받으시고 출중(出衆)하신 총명(聰明)으로 동접(同接)의 선망(羨望)을 얻으셨으나 자긍(自矜)하지 않으시고 항상(恒常) 겸양(謙讓)하시니라.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도보통학(塗步通學)으로 동상(凍傷)에 걸리셔도 인내(忍耐)하시고 말씀하지 않으시므로 아무도 모르되 오직 대부인(大夫人)만 아시고 몰래 치료(治療)하여 주시니라.
22. 계묘년(癸卯年) 십이월(十二月) 어느날 서숙(書塾)에서 독서(讀書) 중(中) 서상(書床)에 의지(依支)하여 잠시(暫時) 오수(午睡)에 드셨는데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한 선비가 나타나서 공손(恭遜)한 태도(態度)로 상제(上帝)께 사배(四拜)를 올리므로『선비는 누구시뇨.』하시니『저는 천제(天帝)님의 하명(下命)으로 진인(眞人)을 알현(謁見)함이옵나이다.』 하니라. 후(後)에도 심신(心身)이 미령(靡寧)하실 때면 이 선비가 나타나 호좌(護佐)하니라.
23. 을사년(乙巳年) 가을에 취당공(聚堂公)께서는 왜구(倭寇)의 강압(强壓)으로 인(因)한 한일보호조약(韓日保護條約)이 극간(極諫)에도 불구(不拘)하고 체결(締結)됨에 이르자 그 동안 동지(同志)들과 도모(禱某)하시던 구국운동(九國運動)이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만회책(挽回策)마저 없으므로 그 통분(痛憤)으로 인(因)한 심화병(心火病)의 증세(症勢)가 더욱 악화(惡化)되시니라. 이에 관직(官職)을 사퇴(辭退)하시고 활동(活動)하시던 개성(開城)에서 자진(自盡)하려 하셨으나 동지(同志)들의 만류(挽留)로 못하시고 와병(臥病)하시던 중(中) 백골(白骨)이라도 선영하(先塋下)에 묻히고자 환고(還故)하시다가 선죽교(善竹橋)를 지나실 때에는 토혈(吐血)까지 하시니라. 귀향(歸鄕)하셔서는 본댁(本宅)에도 들르지 않으시고 대곤산(大鵾山)의 선영하(先塋下)로 직행(直行)하셔서 기진혼절(氣盡昏絶)하셨다가 일어나 통곡 후(痛哭後)에 다시 자결(自決)하려 하셨으나 시종(侍從)들의 만류(挽留)로 이루지 못하시니라.
24. 상제(上帝)께서 이 소식(消息)에 접(接)하시고 가족(家族)들과 함께 선영하(先塋下)로 달려가시다가 증왕대부인(曾王大夫人)께서『아들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으리라.』 하시며 벗너머 절벽(絶壁)쪽으로 향(向)함을 보시고 급(急)히 쫒아가셔서 만류(挽留)하신 후(後) 함께 집으로 돌아오시니라. 증왕대부인(曾王大夫人)은 취당공(聚堂公)이 이십세시(二十歲時)에 가군(家君)을 여의고 과거(寡居)하시면서 유자(幼子)를 길러 등과(登科) 사환(仕宦)시키셨으므로 가문(家門)의 영화(榮華)를 기대(期待)하셨더니 이와 같은 비보(悲報)에 접(接)하여 엄준(嚴峻)하신 성정(性情)을 억제(抑制)하지 못하고 자진(自進)하려 하심이니라.
25. 본저(本邸)로 돌아오신 취당공(聚堂公)의 병환(病患)은 원근명의(原根名醫)들의 극진(極盡)한 치료(治療)와 가족(家族)들의 정성(精誠)에도 보람없이 우중(尤中)하시니라. 이해 십월 (十月) 초일일(初一日) 사시(巳時)에 자제(子弟)들에게 유언(遺言)하시기를『내 나이 사십유오(四十有五)에 이제까지 한 가지 사업(事業)도 성취(成就)함이 없이 국사(國事)조차 실패(失敗)하므로써 망국유민(亡國遺民)이 되고 또한 노모(老母)께 앞서 가는 불효(不孝)가 되도다.
나 죽은 후(後)에라도 너희들은 부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우국애민(憂國愛民)에 힘써 나의 망국유한(亡國遺恨)을 풀어주기 바라노라.』 이어서 상제(上帝)께는 따로 유촉(遺囑)하시기를『내 나이 사십유오(四十有五) 이제까지 한 가지 사업도 성취함이 없이 국사조차 실패(失敗)하므로써 너의 재질(才質)이 영명(英明)하므로 너로 인(因)한 노후(老後)의 영화(榮華)를 보려 하였더니 실(實)로 한(恨)이로다.
부디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을 닦아 선조(先祖) 정절공(貞節公)과 같이 위국충절(爲國忠節)로 가문(家門)을 빛내도록 하라.
또 남 모르는 공부(工夫)와 남 잘되게 하는 공부(工夫)로써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되라.』 하시고 다시 가족(家族)들에게 부촉(咐囑)하시기를『이 아이는 일찍 태몽(胎夢)을 얻은 바와 같이 범상(凡常)한 인물(人物)이 아니니라.
후일(後日) 도덕(道德)으로 널리 사람을 구(救)하며 가문(家門)을 일으켜 대성(大成)하리니 부디 공부(工夫)를 잘 시키라.』하시고 운명(殞命)하시니라.
26. 상제(上帝)께서 조부상(祖父喪) 임(臨)하셔서 십일세(十一歲)의 소년(少年)답지 않게 너무 애통(哀痛)하시고 또한 증왕대부인(曾王大夫人)께서 다시 자진(自盡)하지 않으실까 염려(念慮)하셔서 항상(恒常) 그 곁을 떠나지 않으시며『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오직 하늘이 하시는 법도(法度)이오니 할머님은 너무 상심(喪心) 마옵소서.』 하고 위안(慰安)하시니라.
밤에도 치마끈을 손목에 감고 주무시므로 증왕대부인(曾王大夫人)께서도 비통(悲痛)한 표정(表情)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시고 도리어 위안(慰安)하시니라.
27. 이때 상제(上帝)께서는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제절(朔望諸節) 등(等)에 빠짐 없이 참석하셔서 가족(家族)들을 감동(感動)하게 하시더니 십이월(十二月) 이십일(二十日)에 거행(擧行)된 장례시(葬禮時)에도 여법(如法)에 맞게 하시므로 장지(葬地)까지 수십리(數十里)에 이은 조객(弔客)들이 상제(上帝)의 비범(非凡)하신 범절(凡節)을 칭송(稱頌)하니라.
28. 병오년(丙午年) 가을 어느날 상제(上帝)께서 집앞 감나무의 홍시(紅柿)를 따시려고 꼭대기까지 오르셨다가 밟으신 가지가 부러져서 사오장(四五丈) 아래 칼돌이 날카롭게 솟은 곳에 떨어지셨으나 아무 상처(傷處)가 없으시니라.
29. 이해 십월(十月)에 상제(上帝)께서 신산공(晨山公)의 안내(案內)로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소재(咸安郡 郡北面 下林里 所在) 십팔대조(十八代祖) 휘 안(安)의 산소(山所)에 참배(參拜)하시니라. 이 산소(山所)는 정절공(貞節公)의 친산(親山)으로서 정절공(貞節公)께서 묘역(墓域) 주위(周圍)를 석축(石築)으로 봉쇄(封鎖)하시고 후손(後孫)의 묘역(墓域) 내(內) 참배(參拜)를 금(禁)하시더니 그 후에 과연(果然) 역내(域內)에서 참배(參拜)한 후 손이 급사(急死)하는 일이 수차(數次) 일어나니라.
이날 상제(上帝)께서는 신산공(晨山公)의 만류(挽留)를 불청(不聽)하시고 묘역내(墓域內)에서 참배(參拜)하셔도 무탈(無頉)하시니라.
이 소식(消息)을 들은 족숙(族叔)척 용우(鏞禹)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근사십년(近四十年)이 지난 갑신년(甲申年) 추석(秋夕)에 안심(安心)하고 참배(參拜)하였더니 급병(急病)이 나서 위독(危篤)하니라.
상제(上帝)께서 문병(問病)하시고『내가 풀어 드리리다.』하시니 곧 쾌유(快瘉)하니라.
30. 상제(上帝)께서는 왕대인(王大人) 취당공(聚堂公)께서 유촉(遺囑)하신 위국충성(爲國忠誠)과 남 모르는 공부(工夫)를 항상(恒常) 염원하시더니 13세되시던 1907년(丁未年)부터는 그런 생각으로 학문(學問)에 소홀(疎忽)하시니라. 도장(道丈)께서 학문(學問)에 전념(專念)할 것을 엄훈(嚴訓)히 가르치시니 말씀드리시기를『소자(小子) 감(敢)히 아버님 말씀을 거역(拒逆)하지 못하오나 소자(小子)의 생각으로는 학문(學問)은 도시 문자 공부(都是 文字 工夫)에 불과(不過)하온바 문자(文字)는 전대(前代)의 성현군자(聖賢君子)나 문장재사(文章才士)들의 생각에 불과(不過)하오니 이로써 어찌 할아버님의 유명(遺命)이신 구국제민(救國濟民)의 큰 뜻을 이루오리까. 공부(工夫)는 남 모르는 공부(工夫)라야 한다. 하심을 소자(小子) 깨닫지 못하옵다가 이제는 확연(確然)한 심증(心證)을 얻었사옵기에 앞으로는 남모르는 공부(工夫)에 전념(專念)하려 하오니 하찰(下察)하옵소서.』하시니라. 도장(道丈)께서는 겨우 십삼세(十三歲)의 소년(少年)이 너무 의표(意表)밖의 말을 하므로 놀라움과 함께 판단(判斷)이 쉽지 않아 여부(與否)를 말씀하지 못하시니라.
31. 이때부터 상제(上帝)께서는 대청(大廳) 건넛 방(房)에 경서(經書)와 제가서(諸家書)를 비치(備置)하신 다음 방 문(房 門)을 잠그신 채 바깥 출입(出入)을 않으시고 조석찬식(朝夕餐食)식사도 방(房)에서 하시니라. 도장(道丈)께서 걱정하셔서 누누(屢屢)이 물으셔도『전일(前日) 말씀드린대로 남 모르는 공부(工夫)를 하는 중(中)이오니 하념(下念)하지 마옵소서.』하시는 말씀이 너무 진지(眞摯)하고 근엄(謹嚴)하시므로 다시 더 채문(採問)하지 않으시니라.
32. 도장(道丈)께서는 사남매(四男妹) 중(中) 맏이시고 그 큰 아우의 휘(諱)는 용의(鏞懿), 자(字) 는 은필(殷弼), 호는 서산(曙山)이시며 중방(中房)어른으로 호칭하고 계씨(季氏)의 휘(諱)는 용서(鏞瑞), 자는 윤필(允弼), 호는 신산(晨山)이신데 양동(陽洞) 어른으로 호칭(呼稱)하며 매씨(妹氏)는 여동생은 창녕(昌寧) 성태호(成泰浩)에게 출가(出家)하시니라.
도장(道丈)의 천성(天性)은 선비의 풍도(風度)이셨으나 두 아우는 성정(性情)이 강하고 담대(膽大)하셔서 무사(武士)의 기질(氣質)이시니라.
33. 삼형제(三兄弟)분은 선대(先代)부터 몸에 배인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왜(倭)라면 무조건(無條件) 혐오(嫌惡)하시더니 이때 마산(馬山)에서 산본(山本)이란 일본인이 금광업(金鑛業)과 고리대 금업(高利貸 金業)으로 한인재산(韓人財産)을 착취(搾取)한다는 소문(所聞)을 들으시고 그를 도산(倒産)시켜 그 자금(資金)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여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사용할 계책(計策)을 세우시니라.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서산공(曙山公)께서 먼저 그에게 접근(接近)하여 신용(信用)을 얻으신 다음 이듬해에는 춘궁기(春窮期)에 돈을 빌려 추수 후에 배로 돌려주는 소위(所謂) 농사장려금(農事獎勵金) 을 얻기로 하시니라.
처음에는 사양(辭讓)하는 듯 하시다가 드디어 삼형제(三兄弟)분의 가산(家産) 전부를 담보로하여 삼칠 일대(三七 一帶) 주민(住民)이 넉넉히 쓸만한 정도(程度)의 거금(巨金)으로 제의(提議)하여 그의 재산(財産)보다 더 많은 오천원(五天圓)을 차금(借金)하시니 이는 상답가장 (上畓가장) 좋은 논 수십만평(數十萬坪)에 상당(相當)하는 거금(巨金)이니라.
34. 삼형제(三兄弟)분은 이 거금(巨金)으로써 당초(當初)의 계획(計劃)에 따라 장차(將次) 거사시(擧事時)에 사용(使用)할 화승총(火繩銃)의 구입(購入)을 탐색(探索)하시는 한편(便) 칠원(七原) 도덕곡(道德谷) 깊은 곳에 공장(工場)을 차려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시다가 일본 헌병에 밀고되어 중단하시고 은신(隱身)하며 다른 방도(方途)를 모색(摸索)하시니라.
35. 이때 상제(上帝)님께서 은신처(隱身處)로 찾아가 진언(進言)하시기를『저도 이제는 머지않아 호패(號牌)를 찰 연령(年齡)이옵고 세상 물정(世上 物情)도 다소(多少)나마 짐작(斟酌)하므로 어른들의 대사도모(大事圖謨)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사옵니다.
저의 요량(料量)으로는 이번(番)에 거금(巨金)을 얻으심은 실(實)로 천의(天意)의 감응(感應)이오며, 선령(先靈)의 감호(感護)보살핌이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추진(推進)하심에는 때가 늦사옵고 국외(國外)에서가 아니면 불가능(不可能)할 듯 하오며 지금(只今) 만주(滿洲)의 간도(間島) 지방에는 우국지사(憂國志士)가 많이 망명(亡命) 중 이오니 활동(活動)의 적지(適地)한 곳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이 기회(機會)에 아버님께서는 둘째 아버님과 함께 간도(間島)로 가셔서 근거지(根據地)를 정하시고 이어 전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대사도모(大事圖謀)에 보좌(補佐)하도록 하심이 좋은 양책(良策)이 겠나이다.』하시니라.
도장(道丈)께서는 상제(上帝)님의 사리(事理)에 타당하고 시기에 적합한 생각을 들으시고 감동하셔 서 즉석에서 결정하시고 우선 도장(道丈),서산 두 분이 다음날 간도로 가시니라.
36. 두 분께서는 만주(滿洲)에 도착(到着) 후(後) 서간도(西間島) 요령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의 수둔구(水屯溝)를 정착지(定着地)로 택(擇)하시고 전답(田畓) 약간(若干)과 개간(開墾)할만한 황무지(荒蕪地) 십여만평(十餘萬坪)을 매수(買收)하여 이를 인근(隣近) 의 가난한 동포(同胞)들에게 분할(分割) 대여(貸與)하여 개간(開墾) 경작(耕作)하게 하시니라.
또 전 가족(家族)이 거주(居住)할 집을 건조(建造)한 다음 도장(道丈)께서 가족을 데려오기 위(爲)하여 다 음해 삼월(三月)에 귀향(歸鄕)하시니라.
37. 도장(道丈), 서산(曙山) 두 분께서 거금(巨金)을 가지고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신 소문(所聞)을 들은 일본인 산본(山本)은 회문리(會文里)에 와서 남은 가족(家族)에게 행패(行悖)하며 추수(秋收) 후(後)에는 담보(擔保)로 잡았던 전(全) 가산(家産)을 강제압류(强制押留)하고 일본헌병의 도움을 받아 더욱 횡포(橫暴)하므로 가족(家族)들은 근일년간(近一年間) 혹심(酷甚)한 고초(苦楚)를 겪으시던 중(中) 때마침 돌아오신 도장(道丈)을 따라 만주(滿洲)로 떠나게 되시니라.
38. 도기(道紀) 원년(元年) 1909년(己酉年) 사월(四月) 이십일(二十日), 새벽에 전(全) 가족(家族)이 도장(道丈)의 인솔하(引率下)에 헌병의 감시(監視)를 피(避)하여 창원역(昌原驛)에서 기차(汽車)로 망명(亡命)길에 오르시니 일행(一行)은 십여명(十餘名)이며 간단(簡單)한 옷과 식기(食器) 등을 가지고 신의주(新義州)로 가셔서 압록강(鴨綠江)을 선편(船便)으로 건너 마차로 수둔구(水屯溝)에 무사히 도착하시니라.
39. 상제(上帝)께서는 창원역(昌原驛)을 출발(出發)하신 후(後) 처음에는 망명준비(亡命準備)의 과로(過勞)로 피곤(疲困)하셨으나 미시경(未時頃) 대전부근(大田附近)에 임(臨)하셔서는 정신(精神)이 맑아지시고 기운(氣運)이 충천(衝天)하신 중(中)에 마음공부(工夫)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일광(日光) 같은 모습에 황금색 용포(黃金色 龍袍)의 신인(神人) 한 분이 나타나셔서 우뢰(雨雷)같은 음성(音聲)으로 말씀하시기를『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眞主)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그대가 나의 도통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成就)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 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號)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하시니라.
상제(上帝)께서는 이 말씀에 정신(精神)이 더욱 활연(豁然)환해지셔서 이 신인(神人)이 바로 진리(眞理)의 당체(當體)이신 구천상제(九天上帝)님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同時 奉天命)의 도열(道悅)속에 몸소 태극진주(太極眞主)임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고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실 각오(覺悟)를 심서(心誓)하시니라.
40. 가족(家族)들은 이역(異域) 만주(滿洲)에서 망명생활(亡命生活)의 고난(苦難) 속에서도 구국(救國)의 집념(執念)으로 고국(古國)에 있는 동포들의 망명(亡命)길을 돕기도 하고 만주 각처(滿洲 各處)에 망명(亡命) 중(中)인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하심에 일체(一切)의 경용(經用)을 전담(專擔)할 뿐 아니라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동포(同胞)들에게 가택(家宅)과 식량(食糧)을 분급(分給) 정착(定着)시키시니 불과 수년(不過 數年)에 수둔구(秀屯溝)는 한인집단촌(韓人集團村)으로 화(化)변하니라.
41. 상제(上帝)께서 망명생활(亡命生活) 중(中) 낮에는 가족(家族)들과 함께 농사(農事)에 임(臨)하시고 밤에는 공부(工夫)에 정려(精勵)하시다가 이해 추수 후(秋收 後)에는 도장(道丈)께 말씀드리시기를 『이는 천기(天機)이므로 아버님께만 은밀(隱密)히 말씀드리옵는바 저는 지난 사월(四月) 이십일(二十日) 망명(亡命)길에서 십오(十五)에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주(定眞主)의 도수와 치천하(治天下)의 도수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라시는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모셨나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공부(工夫)만으로는 유부족(猶不足)이오므로 이제부터 상제(上帝)님의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노고산(老姑山)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眞法度數工夫)에만 전념(專念)하려 하오니 주무(綢繆)준비하여 주시옵소서.』하시니 도장(道丈)께서 쾌히 승낙(承諾)하시고 노고산(老姑山)의 조용한 곳에 공부처(工夫處)를 마련하여 주시니라.
42. 상제(上帝)께서 즉일(卽日)로 입산(入山)하셔서 남 모르는 공부(工夫)는 홀로 하여야 하므로 시종(侍從)도 물리시고 손수 취사(炊事)와 난방(暖房) 등(等) 잡무(雜務)를 하시면서 근(近)이년간(二年間)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며 불철주야(不撤晝夜) 공부(工夫)에 정진(精進)하시니라.
43. 경술년(庚戌年)에 들어 왜구(倭寇)의 침략(侵略)이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드디어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조인(調印)되므로써 한국(韓國)은 완전(完全)히 왜구(倭寇)의 식민지화(植民地化)되니라. 이러한 망국(亡國)의 한(限)을 풀길이 없으니 도장가족(道丈家族)들은 삼일간(三日間)을 통곡(痛哭)하며 항일투쟁(抗日鬪爭)의 결의(決意)를 더욱 굳게 다짐하시니라. 도장(道丈)께서는 한인(韓人)들이 갹출(醵出)한 성금(誠金)을 군관 김혁(軍官 金赫) 이석대 (李碩大) 등(等)을 통(通)하여 독립군(獨立軍)에 원납(願納) 전달하셨으며 서산공(曙山公)은 수차(數次)에 걸쳐 만주(滿洲)사람으로 변장(變裝)하고 만주(滿洲) 각지(各地)의 동지(同志)와 연락(連絡)을 취(取)하시며 적정(敵情)을 염탐(廉探)하여 독립군(獨立軍)에 제보(提報)하시니라.
44. 수둔구(水屯溝)에서는 황무지 개간(荒蕪地 開墾) 이년(二年)동안 정성(精誠)으로 경작(耕作)한 결과(結果) 풍작(豊作)을 이루니 전지주(前地主) 만인(滿人)들은 자기(自己)들의 땅을 기만(欺瞞) 당(當)하였다고 원가환매(原價還買)를 요구(要求)하며 쟁의(爭議)를 일으켜 수십명씩(數十名式) 작당행패(作黨行悖) 하니라. 이에 한인촌(韓人村)에서는 도장(道丈)을 중심으로 일치단결(團結)하여 격퇴(擊退)시키니 만인(滿人)들은 도리어 한인(韓人)들이 먼저 폭동(暴動)을 일으켰다고 관서(官署)에 제소하였으나 한인(韓人)들은 단결(團結)과 기지(機智) 하여 슬기롭게 이에 대항(對抗) 승소(勝訴)하니라. 이 사건(事件)으로 도장(道丈)께서는 한인(韓人)들의 추앙(推仰)과 만인(滿人)들의 신망(信望)이 높아지셔서 촌장(村長)으로 추대(推戴)되시고 그때 근친차(勤親次) 하산(下山)하셨다가 사건(事件)에 헌공(獻功)하신 상제(上帝)를 당총각(堂總角)으로 추앙(推仰)하니라. 이로부터 한인촌(韓人村)의 단결(團結)은 더욱 굳어지고 명성(名聲)이 전파(傳播)되어 만인(滿人)들의 횡포(橫暴)는 근절(根絶)되고 서간도(西間島) 일대(一帶)의 망명지사(亡命志士)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그 연락처(連絡處)가 되니라.
45. 신해년(辛亥年) 사월(四月)에 도장(道丈)께서는 과거(過去) 취당공(聚堂公)과 함께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하던 이 동녕(李 東寧) 등(等)이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에 망명(亡命)하여 독립군(獨立軍)을 양성(養成) 중(中)이라는 소식(消息)을 들으시고 서산공(曙山公)을 보내셨더니 자금(資金)이 부족(不足)하여 곤경(困境)이라 하므로 수차(數次) 자금(資金)을 마련하여 원조(援助)하시니라. 한 번(番)은 중도(中途) 여사(旅舍)에서 왜헌(倭憲)의 습격(襲擊)을 당(當)하셨으나 목침(木枕)으로 일당(一堂)을 격퇴(擊退) 하시고 자금(資金)을 무사(無事)히 전달(傳達)하시니라.
46. 상제(上帝)께서 이해 구월(九月)에 이년간(二年間)의 공부(工夫)를 마치시고 하산(下山)하시니 도장(道丈)께서 여러 매처(媒處) 가운데 청도 출신(靑道 出身)으로 만주 동풍현(滿洲 東風縣)에 망명 거주(亡命 居住)하시는 지사 의흥 (義興) 예씨(芮氏) 한기(漢基)의 장녀를 간택(揀擇)하셔서 십월(十月) 십오일(十五日)에 성혼(成婚)을 시키시니라.
신부(新婦)는 선비 가문(家門)에서 성장(成長)한 규수(閨秀)로서 후덕(厚德)한 성정(性情)에 용모(容貌)와 재예(才藝)가 출중(出衆)하시니 휘(諱)는 종린(鍾麟), 도호(道號)는 숭도부인(崇道夫人)이시니라.
47. 상제(上帝)께서 부명(父命)의 따라 성혼(成婚)하시고 다시 노고산(老姑山) 공부처(工夫處)로 임어(臨御)하셔서 시종(侍從)도 없이 홀로 공부(工夫)하시다가 다음해 삼월(三月)에 하산(下山)하시니라.
48. 임자년(壬子年) 봄에 도장(道丈)께서는 아우들과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골몰(汨沒)하시더니 중국(中國)의 집권자 원세개(袁世凱)의 관헌(官憲)에 의(依)하여 청조(淸朝)의 복구(復舊)를 도모(圖謀)하는 보황당(保皇黨)과 동류(同流)라는 같은 무리라는 혐의(嫌疑)로 끌려 가시어 요령성도(遼寧省道) 심양(瀋陽)에서 극형(極刑)을 선고받게 되시니라. 상제(上帝)께서는 심양(瀋陽)까지 도장(道丈)을 수행(隨行)하셔서 모시고 가셔서 그곳 관헌(官憲)에 교섭(交涉)하셨으나 해결(解決)되지 않으므로 도장(道丈)의 명의(名儀)로『우리는 한국인(韓國人)으로서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일념(一念) 뿐이니 하가(何暇) 귀국사(貴國事)에 간여(干與)하리요.』 하는 요지(要旨)의 진정서(陳情書)를 북경(北京)의 원 세개(袁 世凱)에게 직접(直接) 전(傳)하셨더니 원(袁)이 받아보고 그 문장(文章)과 충정(忠情)에 감탄(感嘆)하며 급(急)히 심양(瀋陽)에 명령(命令)하여 도장(道丈)을 무죄방면(無罪放免)하고 사과(謝過)하며 본댁(本宅)까지 호송(護送)하여드리니라.
49. 상제(上帝)께서 보황당(保皇黨) 사건(事件)으로 심양(瀋陽)에 임어(臨御)하셨다가 그 도명(都名)이 근년(近年)에 봉천(奉天)으로 개칭(開稱)된 사실(事實)을 비로소 확인(確認)하셨으며 또 북경(北京)에서는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웅대(雄大)한 산천(山川)과 화려(華麗)한 문물(文物)을 돌아보시고 이곳이 바로 평소(平素)에 바라시던 공부 처임을 감지하시고 이곳에서 대중화도수(大中華度數)를 공부(工夫)하기로 결심(決心)하시니라. 귀가(歸家)하셔서 근친(覲親)을 뵌 즉시(卽時) 이와 같은 사유(事由)를 허락(許諾)을 받으시고 공부차(工夫次) 행장(行裝)을 수습(收拾)하여 다시 홀로 중국본토(中國本土)로 떠나시니라.
50. 이때 밀양(密陽)서 망명(亡命) 중(中)이던 외숙(外叔) 민영하(閔泳夏)는 상제(上帝)께서 정진(精進)하시는 공부(工夫)가 신이(神異)하고 비상(非常)하심을 알므로 자기(自己)도 중국본토(中國本土) 공부(工夫)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일체(一切)의 경용(經用)을 자담(自擔)하기로 은밀(隱密)히 부탁(付託)하니『제가 하는 일은 남이 알거나 간섭(干涉)하여도 아니되고 스스로 하는 공부(工夫)며 이는 어느 한 사람을 위(爲)한 공부(工夫)가 아닌 사해창생(四海蒼生)을 위(爲)하는 삼계(三界)의 공부(工夫)이므로 외숙(外叔)의 사사(私私)로운 부탁(付託)은 들어드릴 수 없나이다.』하시니라.
51. 이해 오월(五月)에 상제(上帝)께서 중국(中國)에 임어(臨御)하셔서 북경(北京) 일대(一帶)의 산천(山川)과 문물(文物)을 감(鑑)하시고 산동지방(山東地方)으로 순행(巡幸)하시며 태산(泰山)의 공자묘(孔子廟)를 비롯한 명산대천(明山大川)에서 공부(工夫)하시고 도수(度數)를 보시니라.
다시 하남(河南)의 남경(南京), 상해(上海)를 거쳐 서방(西方)의 성도(成都) 장안(長安)으로 순행(巡幸)하시며 공부(工夫)하시는 동안 하남(河南) 고현(苦縣)의 노자묘(老子廟),등봉(登封)의 소림사(少林寺), 산서(山西) 운성(運城)의 관왕묘(關王廟) 등(等) 유명(有名)한 산천(山川)묘우(廟宇) 사찰(寺刹)을 편력(遍歷)하시고 육개월(六個月)만에 돌아오셔서 노고산(老姑山)에서 공부(工夫)를 속행(續行)하시니라.
52. 신해년(辛亥年)에서 계축년(癸丑年)까지 삼년간(三年間) 간도(間島) 일대(一帶)에는 한발(旱魃)이 심(甚)하여 농황(農況)이 대흉(大凶)크게 다행(多幸)히 수둔구(水屯溝)만은 풍작(豊作)이 되어 도장댁(道丈宅)의 생계(生計)에는 지장(支障)이 없으니라.
그동안 상제(上帝)님께서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치성(致誠) 수도(修道)와 도수공부(度數工夫)에 집중(執中)하시고 도장(道丈) 형제(兄弟) 분은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관여(關與)하여 분망무가(奔忙無暇)하시니라.
53. 서산공(曙山公)은 계축년(癸丑年) 십월(十月)에 상처(喪妻)하고 다음해 십일월(十日月)에 귀향(歸鄕)하여 재혼(再婚)한 후(後) 다시 만주(滿洲)로 돌아와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전념(專念)하시니라.
을유년(乙酉年) 이월(二月)에는 오랫만에 댁(宅)에서 유(留)지내시더니 새벽에 급습(急襲)한 왜헌(倭憲)에게 체포(逮捕)되어 가혹(苛酷)한 고문(拷問)을 당(當)하여 신해년(辛亥年)에 용정(龍井)서 목침(木枕)으로 왜헌(倭憲)을 체포(逮捕)되어 격퇴(擊退) 사실(事實)까지 탄로(綻露)되어 결국(結局)은 삼년징역(三年懲役)을 선고받아 안동형무소(安東刑務所)에서 복역(服役)하시고 병진년(丙辰年) 삼월(三月)에 감형(減刑)으로 출옥(出獄)하시니라.
54. 서산공(曙山公)이 구금(拘禁)되시자 상제(上帝)께서는 도장(道丈)과 함께 당국(當局)에 교섭(交涉)하셔서 극형(極刑)을 면(免)하게 하시고 복역 중(服役 中)에는 자주 형무소(刑務所)에 임(臨)하셔서 옥고(獄苦)를 위로(慰勞)하시니라.
그 후(後) 서산공(曙山公)의 출옥(出獄) 귀가시(歸嫁時)에는 통자강(通子江)의 빙판(氷板)을 건너시다가 얼음에 빠지심을 상제(上帝)께서 발견(發見)하시고 행인(行人)을 불러 맞구멍을 뚫으셔서 구출(救出)하시니라.
55. 도장(道丈)께서는 구국운동(救國運動)의 동지(同志)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等)이 간도지방(間島地方)의 흉년(凶年)과 왜헌(倭憲)의 횡포(橫暴)로 활동(活動)이 불여의(不如意)하므로 계축년(癸丑年)에 상해(上海)로 이주(移住)하여 동지(同志)들과 함께 활동 중(活動 中)이나 자금(資金)이 부족(不足)하여 난관(難關)을 겪고 있다는 전갈(傳喝)을 받으시고 병진년(丙辰年) 팔월(八月)에 자금(資金)을 마련하여 상해(上海)로 향발(向發)하시니라.
이때 상제(上帝)께서도 수행(隨行)하셔서 자금(資金)을 전달(傳達)하신 후(後) 도장(道丈)께서는 귀가(歸家)하셨으나 홀로 남으셔서 임자년(壬子年)에 미필(未畢)하신 대중화도수공부(大中華度數工夫)를 속행(續行)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