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의 양복
황지형
강물을 옷이라 부를래
유행을 따르지 않는 물빛에 기대어
손과 발이 있으면
지상의 축제가 시작 되는 곳
노을빛 물무늬 단추를 열며
감추지 않는 구름 그늘아래
유채꽃커퍼스를 옷깃에 매달래
시퍼런 댓잎 초대장을 보낼래
그러면 나는 바지의 끝단을 접어
강둑을 거닐고
와이셔츠가 푹 넓은 어깨에 꼭 맞는
한 명의 신사처럼 쉼을 몰아쉴래
하늘과 땅이 만나
쏴아아 함성이 터지게 만드는
굵직한 강물을 한번 입고
싶다, 말할래
태화강
강봉덕
태화강은 오래된 편지다
수 천 년 전해온 글자
흘림체로 쓴 연서
우체부는 언제쯤 다녀 간 것일까
아무도 모르게 펼쳐진 편지지엔
꽃잎 같은 밀어 가득하다
해독하지 못한 사연은
바람처럼 사라질 뿐
침 묻혀 쓴 꾸불꾸불한 편지
때때로
구름과 바람과 철새가 읽지만
답장 한 번 없다
썼다 지웠다
수신자도 발신자도 없이
계절마다 배달되는
태화강 편지
십리대숲
이강하
대나무는 수천 물의 곡절을 안고 산다
부러지지 않는 무기한의 광야
매일매일 하늘을 쓸어내리며 윤회를 경험한다
기나긴 역사, 마디마디의 공명
깊고 아득하여라, 연어가 회귀하는 강
소년의 어제가 흰 구름으로 떠 있는 시간
잃어버린 사랑, 아침이 되어 돌아올 때
누구든 스치어라, 무작정 스치어라
아픈 어제는 내가 다 지워 줄 터이니
서걱거리는 댓잎처럼 마음 비우며 스치어라
태화강변
한영채
백년 만에 대나무 꽃이 배달되었다
줄무늬 노랑나비 나풀거리며 초대장을 날랐다
태화강은 노을빛이 찬란하다고 했다
아침나절엔 강변에 튀는 숭어의 노래도 있다고 했다
수레국화 보리밭을 가로질러 합창 한다고 했다
말티즈가 치마 입은 그녀를 따라 나서는,
징검다리 아래 물풀들 푸르게 머릴 풀어헤친다고 했다
밀밭 길, 붉은 양산 쓴 칠월 개양귀비가 오고 가고
보리도 고개 숙여 누렇게 익어간다고 했다
비오는 날
박 장 희
빗방울은 연잎을
맘껏 두드렸지만
그의 얼굴
더 영롱하게 빛낸다
나도 누구를
맘껏 두드리더라도
상처 없이
영롱하게 할 수 있을까?
연잎 빗방울에
흠씬 얻어맞았지만
그의 얼굴
더 영롱하게 빛난다
나도 누구에게
흠씬 얻어맞더라도
상처 없이
영롱하게 빛날 수 있을까?
디스코텍
권기만
박새 꽃기린 괭이눈 노루귀 제비동자
기생풀 홀아비바람꽃 애기똥풀 흰각시붓꽃
각시취 며느리밑씻개 미나리아재비 노인장대
춤판, 제멋대로 벌여놓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은근슬쩍 입술을 내민다
바람의 엉덩이가 된다
첫사랑
엄계옥
은행나무 가지 끝에
잡티하나 없이 걸린 허공
그 위에 비행기 두 대
나란히 간다
검푸른 심연에
비행기 두 대가
긋고 간 두 줄기
평행선 길
그 길 사무친 지점에
낮달 희미하다
급한 볼일
김감우
맙소사!
장미가 저리 붉어졌네요
내가 어리석게도 오월을
달력 속에 가둬 둔 거였네요
달이 차올랐다 다시 몸 풀어
저 장미를 송이송이 낳을 때
내 목소리에 내가 잠겨있느라
아는 척 한 번 못 했네요
초승달 그림처럼 떠 있는 하늘
그래도 서운한 티 없이
풍경에 열중하네요
나를 가르치네요
얼른 태화강에 가서
물소리 만나야겠어요
더 늦기 전에요
초록비
박산하
십리대밭 길을 걸으면
내 몸은 초록
대나무와 대 사이, 부서지는 그 초록가시
몸에 돋는다
분광된 초록,
주둥이 벌리고 먹이 낚아채는 새끼
바큇살 자전거
빛바랜 운동화콧등
깔깔거린, 앵글 속 이빨들
그리고
마주 잡은 손바닥엔
강바람이 대숲을 밀자
우우우 빗소리
맛있는 들판
박정옥
하루 두 번씩 찾아도
질리지 않는 태화벌은
잘 차려진 메뉴
오색들판을 버무려낸
에피타이저 전채前菜요리
아이도 어른도 편애하는
통통한 식욕이 뛰어 온다
가끔 시든 꽃이거나
느티나무, 대나무의 내력에
슬쩍! 슬픔을 버무려 넣으면
아마 여기 어디쯤 깊은 맛 일게다
이것은 오늘만 하는 이야기
그러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가마솥에 푹 쪄 내는
둥근 밥상으로 와!와!
태화강에서
신혜경
산은 바다의 안부가 궁금해 강을 만든다
바다는 구름 되어 그 산에 다시 오르고
잊은 듯 살아가기엔 산과 바다가 너무 가깝다
태화강
문송산
초심을 잃고
무작정 바다로 가고싶은 태화강
놀란 바람은 대밭에서 달려나와
와락 강물의 어깨 감싸며 타이른다
"돌아가자, 농사는 누가 지을끼고"
완고한 강물에 비친 바람은
우울한 대숲으로 몸을 숨기고
강물은 은빛고기 비늘치듯 잠깐 역류하더니
태화루 그림자 깊은 용금소에서
마침내 물구나무서기로 한바퀴 멀미를 한다
온갖 상념에 젖은 태화강
초심을 새기며
둥둥 바다를 향해 몸을 누인다
식물이라면
김루
종일 내리는 오늘의 비는 집착이에요
이해되고
이해하고 싶은 기분이 자라 비가 되는
태화강에서
바람의 귀를 잡고 속삭이는 기도가 위태롭지 않기를
꽃의 이름으로 봉헌 할래요
봄 방향으로 몸 기울어지는 빗줄기
가볍고 환해지기에 충분한 나는 양귀비
위로의 꽃말로 붉은, 식물이에요
자스민
이 현
질긴 종이에 담기고 싶었습니다 나는
휘어진 줄기 끝에 둥근 손톱 열렸습니다
바스러질 듯 눈물을 베어 문 것도 여럿입니다
숨에 취한 바람은 뿌리를 서성입니다
빼앗긴 자리가 손가락보다 길쭉해진 그늘입니다
금 긋지 않아도 바닥칠 줄 아는 춤
찢긴 마음엔 떡잎이 쌓입니다
연꽃처럼
덕진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일도
쉴 틈 공간 있어야지
자비 실천 큰 사랑도
텅 빈 공간
여유로움 있어야지
해야 할 일 걱정이나 지난 일 후회도
지워가는 공간 있어야지
연뿌리 연줄기가 숭숭한 구멍으로
속 비워 고운 꽃 피우듯이
알찬 열매 영글 듯이
여유로운 호흡 막힘없는 소통
싱싱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