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상(殘像)
윤상영
1994년 4월 O일(O요일)자 인도네시아 신문 콤파스(KOMPAS)가 한국 국적의 불법 체류자 고재영(남, 31세)이 족자카르타의 외곽 도로변에서 복부에 자상(刺傷)을 입고 빈사상태로 발견 되었으며 사건 현장 주변에는 피해자의 소유로 보이는 오토바이와 배낭과 장미화분 하나가 남아있었다고 보도했다.
나는 ‘쿵’하는 굉음에 눈을 떴다. 벌써 석양인 듯 방안이 침침했다. 혹시 폭탄이라도 터졌나? 놀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밖으로 나갔다. 하녀 둘이 주방 옆의 쪽방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비스듬히 열린 유리창 틀 사이로 보였다. 그들은 쪽방에서 뒤뜰을 가로질러 흰색 담장의 한 쪽 구석으로 갔다. 나도 거실 뒷문을 통과해서 그쪽으로 갔다. 그곳은 서쪽에 있는 정 지사장 방의 뒤쪽이었다. 굵은 파파야 나무가 몇 토막으로 부러져 흩어져 있고 큰 열매도 몇 개 떨어져 있다. 남아있는 나무 밑둥치 한쪽이 썩어 있고 속이 텅 빈 나무속에서 수액이 반짝였다. 나무가 굵은 열매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앞 뒤 뜰 사이의 담에 걸려 몇 토막으로 부러진 것이다. 나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스터 고, 걱정하지 마세요. 밑둥치에서 새싹이 금방 나올 거예요.” 눈이 크고 맑은 어린 하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눈앞에는 칼을 휘두르던 괴한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지난주 금요일 밤에 나는 정 지사장과 함께 술집 ‘뜰라가 인다’(아름다운 호수)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정 지사장과 내가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려는 순간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젊은 청년 둘이 잭나이프를 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정 지사장의 체격이 건장한 인도네시아인 운전기사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들을 막아서며 뭐라고 소리치자 그들 중 한 명이
“미스터 정, 밤길 조심하시오. 오늘은 운전기사를 봐서 그냥 갑니다.”하고 말하더니 나머지 한 사람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 지사장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나에게 어서 차에 타자고 말했다. 나와 정 지사장은 차를 타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 정 지사장의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정 지사장에게 괴한들이 누구이며 왜 습격을 했는지 물었지만 지사장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파야 나무가 저절로 넘어져 부러진 것이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배낭에 담기 시작했다. 방 한 구석에 있는 장미 화분을 바깥으로 옮기려고 할 때 갑자기 현관 쪽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중년의 건장한 인도네시아인 두 명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였다. 둘 중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나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나는 배낭에서 여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찰은 여권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검사를 하더니
“고재영 씨, 당신을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족자카르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 경찰은 나에게서 여권을 압수했다.
유치장 내부는 좁고 어두침침했다. 내가 쇠창살 문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이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낡은 마루 바닥에 앉아있던 서너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자기네들끼리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마루의 한 쪽 구석에 앉았다. 정 지사장에게 연락을 할까? 아니다. 지사장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주제에 갇힌 모습까지 보여주기는 싫었다. 차라리 교도소에 가든지 아니면 한국으로 추방되면 되었지 비참한 꼴을 그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아니다. 한국으로 추방되면 절대로 안 된다. 강수정이 있는 한국에 이런 거지꼴로 갈 수는 없다. 차라리 여기서 감옥살이를 하다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고 지루하고 비참한 도망자 생활을 끝내자. 나는 도무지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알고 지사장의 숙소를 덮쳤을까? 기껏 한국인 한 두 사람만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아무튼 한국인이 밀고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족자카르타에 한국인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코린 글러브’의 정찬선 지사장과 천정수 공장장 두 사람 뿐이다. 천 공장장은 내가 족자카르타 ‘코린 글러브’ 공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국으로 출국하였고 일주일이 지난 그제 족자카르타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 지사장이?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인도네시아인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칼을 들고 덤벼들었던 자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밀고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다. 아무튼 갑자기 당한 일이니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저녁참이 되었는지 나시 고랭(볶음밥)이 유치장 안으로 들어왔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손으로 허겁지겁 밥을 집어먹었지만 나는 식욕이 전혀 없어서 나시 고랭이 담긴 접시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밤새 유치장 마루 위에 누워 잠을 청했으나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 내 머릿속에서는 지난 일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깰 때마다 등 밑에서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한적한 강화도 해변이었다. 미색 바탕의 색동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은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멀리 보이는 섬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앉았다. 여자의 단발머리가 바닷바람에 살랑거렸다. ‘찰칵’ 검은 테 안경을 쓴 젊고 건장한 남자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여자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었고 그 때마다 남자는 계속 셔터를 눌렀다. 이윽고 촬영이 끝났는지 여자가 해맑게 웃으며 바위에서 일어섰다.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자 청바지를 입은 날씬한 다리와 흰색 구두를 신은 작은 발이 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바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나는 그들이 연인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모델과 사진사 관계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고요한 바닷가에서 이 화창한 봄날을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미웠다. 저렇게 앳되고 아름다운 여자가 저렇게 산적처럼 우악스런 남자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다. 참 아니꼽고 더러운 세상이다. 돌연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 해변을 떠나 공장 종업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노래자랑이 막 시작 되었다.
나는 ‘서울 글러브’ 춘계야유회에서 돌아온 후 봉재반(班) 엄지조(組)의 미싱사 강 수정을 새삼스럽게 눈여겨보았다. 그녀가 청바지를 즐겨 입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와 청초한 외모, 그리고 날씬한 체형 때문에 그녀는 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도 그녀를 속으로는 연모하면서도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해 왔다.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공장의 몇몇 바람둥이들이 그녀를 농락할 것만 같았다. 강화도에서 본 치마 밑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의 모습과 강 수정이 번갈아 가면서 꿈에 나타났다. 나는 밤마다 강수정이 그 놈들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놓아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 날 일이 끝난 저녁 시간에 그녀를 공장 앞 다방으로 불러냈다.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그녀는 봉재반장인 내 말에 의외로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나는 강수정과 만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우리는 지하 단칸방을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나는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보고르 서울 글러브’의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울 글러브’의 위기복 사장이 인도네시아 보고르로 공장을 이전한 것이다. 공장이 가동되고 반년 쯤 지났을 때 나에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즉시 휴가원을 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약혼녀 강수정이 집을 나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서울 글러브’가 납품하던 회사의 무역부 직원과 동거하고 있었다. 나는 깨끗이 그녀를 포기하고 빈방으로 남아있는 월세 방 보증금을 빼고 보고르로 돌아왔다.
‘보고르 서울 글러브’에 장갑 수출 오더가 밀려들었다. 젊은 위 사장은 공장이 어느 정도 가동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흘이 멀다 하고 보고르의 한국인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술을 마시고 인도네시아 여자들과 어울렸다. 언젠가부터 ‘보고르 서울 글러브’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합작 파트너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대로 몇 달이 흘러갔다. 내 눈에 회사 운영이 위태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잠시 자중하던 위 사장의 방탕은 다시 시작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 그가 돈을 빼 돌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파트너는 위 사장에게 결별을 선언했고 위 사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가족도 버리고 젊은 인도네시아인 여직원과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공장은 결국 채 삼 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나는 회사가 제공한 숙소에서 쫓겨났고 KITAS(외국인임시체류비자) 기간도 만료되었으나 기간 연장을 할 수 없어서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나는 얼마간 남은 돈으로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샀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카르타의 텡가랑 공장지대로 갔다. 어디든 일자리가 나면 들어갈 생각으로 스키 장갑 공장에 다니는 선배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몇 달 동안 기다렸으나 자리는 나지 않았다. 스포츠 장갑 공장의 숫자가 워낙 적은 데다 공장에서 쓰는 한국인 기술자는 기껏 한 명, 규모가 큰 공장도 서너 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취직이 녹록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마침내 자카르타를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고 여기저기 구인 정보를 수집한 끝에 중부 자바 북쪽의 항구도시 스마랑에 있는 중국인 장갑 공장 여사장을 찾아가서 만났다. 공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여사장은 나에게 일단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나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다. 결국 여사장은 나를 고용하지 않았다. 여사장은 현지인 종업원 월급의 열 배가 넘는 내 월급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여사장에게서 금일봉을 받고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남쪽 족자카르타로 향했다.
족자카르타의 ‘코린 글러브’ 천정수 공장장은 안면은 없지만 내 업계 선배이다. 내가 족자카르타에 도착한 후 천 공장장에게 연락하자 천 공장장은 흔쾌히 ‘코린 글러브’ 공장으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족자카르타 외곽 반뚤에 있는 공장으로 가서 천 공장장과 정 찬선 지사장을 만났고 그날 밤 나는 천 공장장을 따라서 ‘밤부 카페’에 갔다. 그곳은 작은 대나무 무더기를 끼고 있는 개울가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을 개조한 카페였다. 밴드에 맞춰 무대 위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은 넓은 마당의 대나무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천 공장장은 내 소식을 오래 전에 들었다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보고르 서울 글러브’가 망한 이야기를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천공장장은 며칠간이라도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말했으나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사양했다.
서너 명의 여자 종업원들은 녹색의 댓잎 밑에 빨간색으로 ‘BAMBOO CAFE'가 인쇄된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중에서 청바지를 입은 날씬하고 피부색이 하얀 여자 종업원이 눈에 확 띄었다. 머리에는 어린이 주먹 크기의 하얀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여자의 긴 생머리에서 유난히 윤기가 흘렀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입술이 도톰했다 게다가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로 보였다. 나는 그녀의 청순한 모습에 끌렸다. 다음날 혼자 그곳에 다시 갔다. 청바지를 입은 그 여자 종업원이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내 사진이 붙어있는 운전 면허증이었다. 전날 밤에 천공장장이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한다고 말했는데 그 때 내가 지갑에서 운전 면허증을 꺼내서 그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술에 만취해서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저절로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나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카린에게 점잖게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죠?”
“카린이에요.” 낭랑한 카린의 목소리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나, 난 고재영입니다.”
“알고 있어요. 한국인이죠? 미스터 고는 보고르에서 오셨나요?”
“네.”
여자는 나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눈이 슬프고 안타깝게 보여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여 서둘러 맥주를 마셨다.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슬픔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카린과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카페에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더 이상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카린,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당신과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가 카린에게 수첩을 내밀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전화번호를 내 수첩에 적어주었다.
나는 천 공장장과 한 번 더 ‘밤부 카페’에 갔다. 그러나 나는 카린을 멀리서 바라만 볼 뿐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했다. 카린은 그날 밤 무대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솜씨가 대단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달아올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일요일 오전에 나는 가슴을 졸이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마침내 용기를 내서 카린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고 그녀는 예상 외로 선선히 하숙집으로 오라고 하면서 주소를 알려주었다. 하숙집은 ‘밤부 카페’ 근처에 있었다. 하숙집의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낮은 울타리 위로 장미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고 빨간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카린은 창문 앞의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맞았다. 내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따뜻한 차(茶)를 내왔다. 나와 카린은 창문 앞에 놓인 두 개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그녀는 칼리우랑 계곡에 가자고 했다. 나는 족자카르타에 와서 몇 번 칼리우랑 계곡에 대한 말은 들었지만 아직 가 본적이 없었다. 나는 기꺼이 그녀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칼리우랑 계곡으로 향했다. 남녀 쌍쌍이 탄 오토바이 행렬로 잘란(路) 칼리우랑이 막혔다가 뚫리기를 반복했다. 겨우 계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서히 안개가 끼기 시작했으며 계곡의 구비 구비마다 이미 수많은 청춘남녀들로 붐볐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랑비를 피해 식당으로 들어가서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나시 고랭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카린, 난 장갑 기술자이고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지 사 년이 되어갑니다. 족자카르타에는 아는 형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떤 장갑을 만드나요?”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요. 주로 골프장갑, 베팅장갑을 만들죠.”
내가 스포츠 장갑, 그 중에서도 골프 장갑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자 카린은 열심히 들었다. 그녀는 족자카르타에 한국인들이 꽤나 많이 살고 있는 줄로 안다면서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배워서 뭘 하려고요?” 하고 내가 되물었지만 카린은 한국어를 꼭 알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한글 자모 스물네 글자를 종이 위에 써서 보여주고 한 글자씩 소리 내서 읽어주었다. 여자는 나를 따라서 한 글자씩 읽고 썼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자기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렸다. 나는 다시 종이 위에 ‘사랑’이라고 쓰고 그 뜻을 인도네시아 말 ‘찐따’ (cinta)로 번역해 주었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물었다.
“미스터 고는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네. 물론 있지요. 그런데 카린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은 잠시 머무르다 결국은 저기 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어디론가 영원히 가버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죠.”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자 카린은 빙긋이 웃으면서
“하지만 사랑은 영원한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카린은 아련한 눈길로 비 내리는 계곡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계곡에는 옅은 안개가 서려 숲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도 계곡의 안개 속에 보이는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카린에게 물었다.
“‘살아 있는 한’이라고 했나요?”
“네, 저는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사랑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이나 공기나 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하는가는 모두 중요하지만 살아남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카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살아남는 일이 우선이라, 당신은 보기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군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은 모든 일이 맘먹은 대로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카린에게 어려운 일도 있나요?” 내 농담 섞인 말에 카린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그녀의 미소를 본 순간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순진한 이 여자와 여기까지 왔을까? 카린이 바보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사실상 거지나 다름없는 도망자인 나를 만나주었다. 솔직히 그녀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낯 선 한국인 남자를 선뜻 만나주었다는 사실이 아까부터 계속해서 꺼림칙하기는 했다. 한국인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럴듯한 겉모습만 보고 만나주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고 바보 같은 일이다. 뭔가 잘 못 되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것으로 되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제 카린에게 변명을 해야만 한다.
“카린, 나는……한국에서 당신처럼 청바지를 즐겨 입던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했어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온 몸이 떨리더군요. 오늘 만나줘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술기운이 올라온 카린은 아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미스터 고, 저도 당신을 본 순간 헤어진 남자친구가 생각났답니다. 당신처럼 잘 생기고 좋은 남자였어요.”
그녀는 그 남자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남자의 마음씨가 착했다고 말했다. 그 남자가 카린에게 끈질기게 육체관계를 요구했으나 카린이 끝까지 들어주지 않자 화를 내고 떠났다고 말했다.
“사랑할 때는 누구나 아름다운 꿈을 꾸지요. 그러나 꿈은 언젠가는 스러지고 마음은 가면을 벗게 되죠.”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는 언젠가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린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눈길이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다. 카린을 잡아끌고 식당에서 나오자 빨리 이 여자를 하숙집에 데려다 주고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생각에 오토바이의 속도를 최고로 높여 이리저리 구부러진 내리막길을 미친듯이 달렸다. 카린이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나의 허리를 잔뜩 껴안았다 .마침내 족자카르타 시 외곽에 있는 카린의 하숙집 근처에 도착했다. 길가에 꽃집이 보였다. 카린이 잠깐 꽃집에 들르자고 말했다. 꽃집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카린은 그 중에서 빨간 장미 몇 송이가 꽃망울을 맺고 있는 화분을 골랐다. 내가 지갑을 꺼내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가게 주인에게 지불했다. 그녀는 장미 화분을 안고 오토바이에 탔다. 카린의 하숙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다음에 언제든지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카린에게 손을 내밀고
“잘 있어요, 카린.”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세요. 미스터 고. 장미 화분은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가지고 가세요.” 내 손을 잡은 카린은 쓸쓸히 웃었다. 나는 장미 화분을 오토바이에 싣고 족자카르타를 떠났다.
보요랄리는 족자카르타에서 북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았다. 내 수첩에 적힌 몇 줄의 목록에 이제 내가 찾아 갈 곳은 보요랄리와 수라바야에 있는 몇 개의 장갑공장만 남아있었다. 보요랄리, 그리고 수라바야,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지? 바다가 있다. 그리고 바다를 벗어나면 하늘과 그 하늘 너머에 또 다른 하늘이 있고 끝없는 우주가 있다.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이, 지상의 모든 사람, 모든 것들이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몇 시간 전에 사랑을 이야기 하던 카린이, 결혼을 약속했던 강수정이 그리고 연분홍색 치마 밑에 청바지를 입은 강화도의 여자가 제각기 아득히 먼 우주의 어느 구석에 아직도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보요랄리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장갑 공장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천정수 공장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가 족자카르타의 ‘밤부 카페’에서 천 공장장에게 보요랄리로 갈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천 공장장이 기억을 해서 용케 연락이 된 것이다. 천 공장장은 모친상을 당하여 며칠간 공장을 비우게 되었으니 그 동안만 공장 일을 봐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족자카르타 ‘코린 글러브’ 공장으로 갔을 때 천 공장장은 벌써 한국에 가고 없었다. 나는 정 지사장의 안내로 바로 공장에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둘러 본 뒤에 천공장장이 미처 손을 대지 못한 샘플 제작에 매달렸다. 퇴근 시간이 되자 정 지사장은 나를 데리고 자신의 숙소로 갔다. 지사장은 독신으로 지내고 있고 빈방이 있다면서 내가 그 방에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코린 글로브’ 공장에서 일을 거든지 일주일 만에 천 공장장이 한국에서 돌아오자 나는 족자카르타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정 지사장이 숙소에 좀 더 있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은근한 만류로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날 밤 ‘뜰라가 인다’에서 지사장과 술을 마셨고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숙소의 뒷마당에 서있던 파파야 나무가 제풀에 넘어져…… ‘철커덩’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싸늘하고 딱딱한 마루바닥이 등짝을 밀어대고 있었다.
“미스터 고! 나오시오!”하는 우렁찬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느덧 유치장의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었다. 경찰을 따라서 사무실에 들어가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작달막하고 머리카락이 짧고 거무스레한 피부에 각진 얼굴을 한 사람이 와 있었다.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 비에스 리 가멘트, 디렉터, 이복수’, 봉재공장 사장이었다.
“나 이복수요.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이복수 사장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은 나에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이사장은 나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벤쯔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한참 후에 승용차 기사는 어떤 저택 앞에 차를 세웠다. 이사장의 집인 것 같았다. 그의 한국인 부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여자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이복수는 나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응접실의 소파에 앉자마자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사장님, 처음 뵙는 분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머리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이복수는 오른손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 이복수가 족자카르타 경찰은 꽉 잡고 있으니 고재영씨는 이제부터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경찰에게는 고형을 내가 고용할 거라고 했으니까.”
“사장님, 전 장갑 기술자입니다. 의류 봉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말했다.
이 복수는 봉재 공장안에 조만간 장갑 파트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 좀 도와주시오. 고형에게 KITAS를 만들어 주고 공장장급의 월급을 주겠소.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예? 조건이라면……?”
이 사장은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두꺼운 성경책과 찬송가책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에 이 사장이 카메라를 들고 나오면서 말했다.
“‘코린 글러브’ 정 지사장 집에서 지내고 있지요? 그 사람은 문제가 많아요. 고형이 할 일은 그 사람의 뒤를 캐는 거요.”
“정 지사장님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코린 글러브’는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합작법인입니다. 그런데 정찬선이가 한국 측 오너를 배신하고 인도네시아 측 오너 편에 붙어버렸단 말이오. 지금 그 사람은 오더를 빼돌리려고 바이어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어요. 오더 꽂는 문제만 결론이 나면 그 사람은 바로 새 공장을 만들 거요. 돈은 물론 인도네시아 오너가 대겠지만. 그리되면 ‘코린 글러브’의 한국 측 오너는 하루아침에 닭 쫓던 개가 되는 거요. 나는 한국인으로서 그런 사태를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소. 반드시 막을 겁니다. 고형은 지금 그 사람 집에서 살고 있으니까 아주 좋은 기회예요. 뭐든 그 친구의 약점을 찾아보세요. 특히 여자관계를 캐 봐요. 한국에 연락해서 아예 집안을 박살내 버릴 생각이요. 서울에 있는 정찬선이 집 전화번호도 이미 알아냈으니까 남은 것은 결정적인 증거뿐이요.”
“하지만 그것은 ‘코린 글러브’ 내부 문제 아닙니까? 그런 문제에 사장님이 꼭 개입하셔야 하나요? 그리고 지사장님이 한국 측 오너를 배신했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정 지사장님의 말을 직접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지, 이것은 내부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지. 국가적인 손실이고 한국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지사장 그 사람이 오너와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 말대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 사람이 한국 측 오너를 배신한다면 결과적으로 매국노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요? 그러니 그 사람 말은 들어 볼 필요도 없어요. 나는 이곳 족자카르타에서 오 년도 넘게 살았소. 나로서는 그런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단 말이오.”
“사장님, 전 이런 일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제가 비록 못나서 쫓기는 몸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가 그분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매국노의 반역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도 반역행위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야? 씨팔! 그럼 좋아. 당신은 지금 재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거야. 당신은 내 말 한마디에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구속될 수 있어!” 그는 날카로운 눈에 힘을 주어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사실 나는 정 지사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나는 지사장의 집에서 며칠간 지내는 동안에도 지사장과는 사업에 관련된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사장이 한국 오너와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그의 새로운 사업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한국 오너를 배신하고 인도네시아 오너에게 붙는다면 이 복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내가 지사장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지사장이 원해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다시 경찰에 구속이 되면 빠져 나갈 방법이 없다. 이 복수 사장은 족자카르타 경찰과 아주 친해 보이는데 그의 비위를 거슬러서 앞일을 애써 망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보자. 마침내 마음을 돌린 나는 슬며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잘 생각한 거야. 이 카메라에 증거를 담으라고. 하루 빨리 그런 인간은 족자카르타에서 치워버려야 하지 않겠어?”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띤 이 복수 사장이 나에게 카메라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이복수는 운전기사를 시켜서 나를 지사장 숙소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숙소로 가는 도중 술집 ‘뜰라가 인다’ 앞의 테러미수 사건이 떠올랐다. 그 사건의 배후 인물이 이 복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복수는 왜 정 지사장의 뒤통수를 치려고 할까? 이복수의 말대로 ‘매국노’를 처단하려는 애국심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다. 다른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
저녁 때 정 지사장이 숙소로 퇴근했다. 정 지사장은 나를 보자마자 응접실 소파에 불러 앉혔다.
“고재영씨, 어제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녀가 알려줘서 고형이 경찰에 끌려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제 하청 공장 사람들이 와서 늦게까지 접대를 하느라 경찰서에 가보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제가 사실은 불체자라서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복수 사장님이 빼주더군요.” 나는 정 지사장의 눈길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음, 그랬군요. 그 사람 못하는 일이 없군. 병 주고 약 주고……. 고생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합디까?” 정 지사장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뭐 별로, 그냥 앞으로 조심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튼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건 고형은 신경 쓰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지사장님, 전 아무래도 족자카르타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한국인들끼리 싸우는 것도 보기가 그렇고 제가 거기에 말려드는 것도 싫습니다.”
“한국인들끼리 싸운다? 이 복수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보군.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요.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그 사람은 족자카르타 한인 사회에서 평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고의적으로 부도를 내고 거액을 챙겨서 도망 온 사람이에요. 조폭 출신이라는 설도 있어요. 한인들은 모두 알고 있어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사람이지요. 고재영씨도 칼잡이들을 봤지요? 이복수가 고용한 사람들이에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이 사장님은 지사장님에게 왜 그럽니까?”
“차차 알게 될 겁니다만 내가 처음 이곳에 부임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점점 본색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내가 거리를 두었지요.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나에게 감정을 품고 이런 저런 모략을 하고 있어요.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고형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리고 천공장장에게서 고형의 딱한 사정은 이미 들었어요. 누구나 살다보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지요. 그 문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내일 족자카르타 경찰 서장을 직접 만나서 따질 생각이오. 경찰이 한인회장 집에 무단 침입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느냔 말이오.”
정 지사장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사장 앞에서 온몸이 점점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였다. 떠나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갈 곳이 없었다. 설사 지금 어디로 간다 해도 이 복수 사장에게 당할 지도 모르는 보복이 두려웠다. 그 사람은 인도네시아 어디라도 끝까지 찾아와서 해코지를 할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복수와 정 지사장의 입장이 대립되어 있다. 어느 쪽을 따를지 당장은 판단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어느 쪽이 됐건 나를 고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서 성공을 한 후에 돌아가야 한다. 절대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뇌리에 강수정의 모습이 휙 지나갔다. 나는 마음을 돌렸다. 당분간 지사장의 집에 머물면서 추이를 지켜보자.
“네, 알겠습니다. 지사장님.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천 공장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만나자고 하자 천 공장장은 교회에 가야한다면서 만나기를 거절했다.
“공장장님, 혹시 이 복수 사장님도 교회에 나갑니까?”하고 내가 묻자 천 공장장은 잠시 말이 없더니
“나가제. 한인 교회 집사랑께. 근디 그런 것은 왜 물어보는 것이여?”하고 반문했다. 천 공장장은 나에게 어떻게 이 사장을 아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나와 이사장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가 모두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천 공장장은 이복수 사장과 교회를 통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이 사장은 천 공장장을 통해서 ‘코린 글러브’ 공장의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불체자라는 사실도, 그리고 정 지사장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천공장장의 입에서 누설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천 공장장은 왜 직속 상급자인 정 지사장에게 등을 돌리고 적대관계인 이 사장에게 붙었을까? 이 복수 사장의 말에 의하면 ‘코린 글러브’의 한국측 오너는 정 지사장을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오너가 천 공장장이 지사장에게 반기를 들도록 부추겼을 지도 모른다. 천 공장장은 한국 측 오너의 손에 놀아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천 공장장의 속을 떠 보았다.
“지사장님이 따로 공장을 차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공장장님은 아시는지요?”
“안 그래도 그것 땜시 족자카르타 한인들 사이에 말들이 많단다. 서울의 우리 사장님도 다 알고 계신다. 지사장 지가 생각을 잘 못한 것이여. 야튼 간에 재영이 너도 조심해사 써.”
“예. 그렇지만 왜 이복수 사장님이 남의 회사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겁니까?”
“관심을 보인다고? 오매! 고것이 뭔 소리여?”
“공장장님, 실은 제가 이 사장님에게서 지사장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지사장님이 몰래 바이어를 만나고 있다고 하던데요. 하여튼 ’코린 글러브’ 사정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야? 이 집사님이 그러는 건, 나도 잘 모르것다마는, 한인회 때문일 것이다.”
“한인회 때문이라고요?”
“한인회장 자리를 정 지사장이 뺏어 뿌렀단다.”
“뺏다니요? 한인회장은 한인들이 뽑았을 텐데 누가 뺏고 빼앗기고 할 수 있나요?”
“아따,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너는 뭣 땜시 고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냐? 기왕에 말이 나왔응께 말이지만, 고것이 얼마 전 일이다. 족자카르타 한인들이 모여서 회장 선거를 했는디 여제껏 회장을 해묵은 이 집사님이 지사장에게 큰 차이로 져 뿌렀다. 정 지사장은 여기 온지 기껏 이 년도 안 될 것이다. 그라니 삼 년 동안 한인회장을 해묵은 이 사장이 열 받은 것이여. 한인 회장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들 쌌는지 나도 모르겄다.”
족자카르타에서 오 년도 넘게 산 터주 대감이 한인회 회장 자리를 뺏겼다면 뺏긴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고 그까짓 게 뭐가 대단하다고 뺏은 사람도 잘 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사장의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 이곳에 있는지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서 공장에 나가면 천 공장장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내색을 했다. 내 처지가 점점 이상하게 되었고 결국 나는 지사장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외출을 하거나 방으로 들어가 지사장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정 지사장이 공장을 새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고 그 정보를 지사장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다. 또한 공장을 세운다 해도 공장장 자리를 나에게 준다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지사장이 나를 은근히 붙잡았기 때문에 공장장을 시킬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사장은 항상 체격이 건장한 운전기사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몇 번 지사장의 차를 미행해보았다. 헬멧을 쓰고 많은 오토바이 행렬에 끼어있는 나를 지사장이 쉽게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사장이 한국인들과 함께 골프장에 가거나 하녀들을 데리고 마트에 쇼핑을 가기는 했지만 여자를 만나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한 번은 지사장이 골프 라운딩을 끝내고 한국인들과 함께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미행하고 혹시나 하고 밖에서 밤늦게까지 몰래 지켜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 동안에도 몇 번이나 이복수 사장에게서 독촉 전화가 걸려 왔다. 나도 어서 빨리 임무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는 버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요일 낮이었다. 정 지사장은 운전기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나갔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지사장의 차를 미행했다. 지사장의 차는 홀리데이 인 호텔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정 지사장이 호텔 앞마당에 주차를 하고나서 출입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나는 호텔 프런트에 가서 지사장이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 호텔 로비의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는 척 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 때 커다란 통유리 창을 통해서 파란색 택시 한 대가 들어와 호텔 앞에 서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로비 출입문이 열리고 미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카린이었다.
“카린!” 나는 그녀를 본 순간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본 순간 주춤했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 굳어져 있었고 내가 별로 반갑지 않아 보였다.
“카린,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내가 묻자 카린은 잠시 머뭇거린 후에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 왔어요.”
카린의 대답은 어딘지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정 지사장을 만나러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카린은 서둘러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곧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나는 멍하게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정 지사장은 커피숍으로 갔는데 카린은 바로 객실로 올라갔다. 어쩌면 정 지사장이 잠시 후에 객실로 올라갈 지도 모른다. 벽 한 쪽에 장미 꽃 그림이 보였다. 나는 그림 쪽으로 다가갔다. 그림 속의 장미꽃들을 마구 밟아버리고 싶었다. 한참을 장미 그림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으나 커피숍에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비에서 나와 호텔 앞 대로변에서 로비 출입문을 주시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정지사장과 서양인 남자가 로비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가서 승용차에 타고 호텔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쯤 지나자 이복수 사장이 나오고 그 뒤에 카린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피가 머리끝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복수가 먼저 주차장으로 가서 승용차에 타고 이어서 카린이 그 차에 탔다.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잠시 후에 차는 호텔을 빠져나갔다.
승용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 나는 한참동안 심장이 날카로운 비수로 찔리는 아픔을 느꼈다. 아름답고 순진한 카린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순결을 지키려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카린의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 카린이 호텔에서 이복수를 뒤따라 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불륜을 저지르던, 반역 모의를 하던 이전투구를 하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복수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정 지사장을 감시하고 미행한 것은 비열한 이복수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했다.
나는 카린이 선선히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칼리우랑에 동행한 이유가 궁금했었다. 어쩌면 카린은 그날 나를 성매매의 대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순진한 카린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떠났다. 떠나던 날 카린은 나에게 장미 화분을 사주었다. 그 장미 화분은 무슨 의미였을까? 과연 어느 것이 카린의 본 모습인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뒤죽박죽 뒤섞인 수많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호텔 앞 대로변 보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듯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뜨겁던 열대의 열기도 식어있었다.
나는 필름 현상소에 가서 속성으로 사진 몇 장을 뽑은 다음 카린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카린이 태연하게 나를 맞았다. 그녀는 밤부 카페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름답고 순진해 보였다. 그녀는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나에게 방으로 들어가자고 청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카린은 전기 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켰다. 나는 그녀의 침착하고 순진한 모습이 추악한 위선과 가식으로 보여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카린을 침대로 끌고 갔다.
나와 카린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채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진공상태의 무중력 공간에서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정신은 초롱초롱했다. 한 순간의 쾌감, 이것이 카린의 실체였던가?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내가 물었다.
“카린, 당신들의 정체가 뭐지요?”
“네? 당신들이라니, 누구 말이죠?”
“당신처럼 예쁜 여자들.”
카린은 손으로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몰라요.”
“아니,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속에 그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요.”
“…………”
카린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비로소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생각이 났다. 카린을 이용해서 이복수를 제압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사진을 주려고 왔는데 우발적으로 사고를 치고 말았다. 비열하고 비겁한 데다 경솔한 내가 미웠다.
“미안해요, 카린. 하지만 당신이 나라면 참을 수 있었을까요?”
“참을 수 없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스터 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요.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무서웠어요. 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게 있나요?”
“나는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니, 됐어요. 지금 이곳 족자카르타에서 한국인들끼리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난 호텔에 갔던 거구요.” 내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카린이 쉿쉿 소리를 내며 김이 나오고 있는 포트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인들이라뇨?”
“비에스 리 가멘트 이복수 사장과 코린 글러브 정찬선 지사장입니다.” 이복수 사장 이름이 나오자 카린은 잠자코 있었다.
어디선가 우렁찬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아잔 소리였다.
‘라 일라하 일랄라 무하마드루 마수룰라’
나는 벌떡 일어나 바지를 추슬러 입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는 카린의 청바지를 집어 들고 말했다.
“카린, 이 청바지를 내가 가져가도 될까요?”
카린도 일어나서 포트의 전기 스위치를 끈 다음 옷장에서 치마를 꺼내 입으면서 말했다.
“네. 가져가세요. 저도 카페에 나가야 해요. 미스터 리를 조심 하세요. 그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니까요.”
나는 청바지를 둘둘 말아서 들고 카린의 방에서 나와 오토바이를 탔다. 파파야 나무가 서있는 돌담 모퉁이에서 돌아보니 카린이 문 밖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