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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월) 아침 모임장소인 인천공항 3층 M카운터로 가니 벌써 여러 명이 모여 있다. 이번 참가인원은 모두 41명이다. 준비팀에서 나누어준 신흥무관학교 모자를 하나씩 받아들고 입국장에 들어섰다. 아시아나 비행기가 이륙한지 곧 점심이 나오고 얼마 안 되어 흑룡강성 만주벌판이 내려다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푸른 평원에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 군데군데 보인다. 과연 듣던 대로 넓은 땅이다.
1. 안중근의사 기념관
할빈역사 주출입구에서 왼편으로 이어진 건물 사이에 상아색으로 칠해진 단층건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보인다. 간판 위 벽에는 시계가 9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데 안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을 저격한 시각을 가리킨다고 한다. 원래 월요일은 휴관일인데 현지 여행사를 통해 특별히 입장을 부탁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양쪽 벽에 안의사의 약력과 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아담한 흉상이 세워져 있다. 안쪽 끝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데 할빈역 승강장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승강장 바닥에 안의사가 저격할 당시의 위치(세모 표시)와 이또히로부미가 총을 맞고 쓰러진 장소(네모 표시)가 표시되어 있다. 기념관이 다소 협소하여 관련 유품 등 자료가 적어서 좀 아쉽다. 그나마 이 작은 기념관이나마 만들어진 것도 늦었지만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안의사의 뜻을 기리고 중국과의 협의를 통해서 좀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2. 정율성 기념관
할빈 시내 중심지 송화강변 근처 러시아풍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대로변에 있는 규모가 꽤 큰 기념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행진곡풍의 힘찬 노래가 화면과 함께 울려나온다. 정율성선생이 작곡한 ‘8로군대합창’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이다. 군인들의 행진동작이 절도 있고 우렁찬 함성이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뛰게 한다. 정율성선생은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상해를 거쳐 남경에 있는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후 항일혁명전사로 합창곡, 행진곡, 군가, 가곡, 가극 등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여 중국인민들이 우러러 받드는 음악영웅이 되었다. 우리나라 광주에서도 기념음악회가 열리고 있다고 하나, 다른 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분단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우리 겨레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제대로 배우고 보편적인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남북한 화해협력과 평화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기념관을 나와 송화강 쪽으로 가니 강을 따라 가로수길이 뻗어 있고, 사람들이 강바람을 맞으며 삼삼오오 산책을 하고 있다. 겨울에는 이곳 송화강변에 유명한 얼음조각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시내구경을 나갔다. 조림거리에 있는 러시아풍으로 지어진 소피아성당은 날이 어두워 대강의 모습만 보인다. 성당 앞에 제법 큰 광장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우리 일행은 광장 옆 노천식당에서 맥주와 꼬치구이로 뒤풀이 담화를 나누었다.
3. 신민부 본부터 등
이틑날(7/28) 아침에 호텔에서 나와 신민부 본부터가 있었던 尙志市 石頭河子로 향했다. 가는 동안 버스에서 답사안내책자 뒤편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함께 불러 보았다. 100여 년 전 우리의 선열들이 부르던 힘찬 합창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924년 7월에 吉林에서 남만주지역을 통괄하는 정의부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1925년 3월 寧安縣 寧安市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어 본부를 石頭河子에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본부가 있었다는 터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고속도로 인근 石頭河子로 가는 길목에 들러서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계속적인 역사탐구를 통하여 정확한 위치를 발견하고 기념표식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黑龍江省 海林市 해랑로에 있는 ‘韓中友誼公園’은 넓은 광장 안쪽으로 길다란 큰 건물에 김좌진장군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의 항일투쟁활동과 한인동포들의 이주역사, 일제의 침략상, 한중 연합 무장투쟁 그리고 1992년 한중수교 후 한중 교류관련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어 山市에 있는 김좌진장군 순국지를 둘러 보았다. 장군이 말년에 운영하던 방앗간과 몇 가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白冶 김좌진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1907년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권장하였고 1913년에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17년에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 북로군정서사령관이 되어 1920년 홍범도장군과 더불어 청산리 독립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저녁 무렵에 흑룡강성 동남부에 위치한 목단강시로 갔다. 목단강이 시내를 유유히 흐르고 강변으로 나무가 즐비하고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4. 발해유적지, 圖們, 명동학교 등
셋째 날(7/29 수요일) 목단강시 남쪽에 있는 寧安市 寧安驛에 들렀다. 신민부가 결성될 당시 이곳 영안역에 모여서 인근으로 옮겨 신민부를 조직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정확인 지점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잠시 기념촬영을 하고 인근 渤海鎭에 있는 발해유적지에 갔다. 발해가 海東盛國으로서 한창 번창하던 시기에 도읍을 두었던 곳으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長安城 다음으로 제일 큰 도시였다고 한다. 넓은 벌판에 외성의 유적지가 있는데 장방형의 평지성으로 외성의 길이가 16km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인근에 당.발해유적박물관이 있고 옛 성터에는 당시의 주춧돌 몇 개와 석축 무더기가 보인다. 渤海上京이라는 표지석 뒤로 성내 중심도로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길 흔적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다. 내성유적지는 현지 사정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고 해서 보지 못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흑룡강성을 떠나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있는 圖們으로 향했다. 길림성에 들어서니 간판에 한글이 보인다. 길림성에서는 모든 간판과 표지에 한글을 위에 적고 중문을 아래에 표시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고 한다. 도문 두만강나루터에 서니 두만강 건너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인다. 분단된 조국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시로 드나드는데 정작 같은 동포인 우리는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온다.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왼편은 자동차 등이 다니는 다리이고 오른편은 기찻길 철교이다. 철교 중간이 국경인 모양인데 중국 쪽은 다리에 검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데 북한 쪽은 페인트가 벗겨졌는지 군데군데 녹슨 자국이 보인다. 일행 중 여럿이 신발을 벗고 두만강 물속으로 들어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두만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한참을 달려 길림성 龍井市로 향했다. 지금은 용정중학교인 옛 大 成중학교는 1921년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산실로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건물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인데 건물 앞에는 윤동주시인의 序詩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한글과 중문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에는 용정중학교 및 윤동주시인과 관련된 여러 자료와 당시 용정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의 생활모습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 1층 한쪽 방에는 당시 교실이 옛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고 윤동주시인의 흉상이 책상위에 놓여 있다. 인근 용정시 명동촌에는 1907년에 설립한 ‘서전서숙’의 전통을 이어받아 민족교육을 실시한 명동학교(1910년 3월 설립)가 있고 그 인근에는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가보지 못하였다. 언젠가 다시 와서 明東학교가 있는 명동촌에 꼭 들러볼 생각이다. 버스가 한참을 달려 저녁 늦게 백두산 자락인 二道白河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약 5백km 정도를 이동했다.
5. 백두산 천지
넷째 날(7/30) 아침 일찍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6시경에 백두산 입구를 향해 떠났다. 한여름인데도 이곳은 선선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백두산지역 관광시설을 연변자치주에서 관할하면서 대부분 우리 동포인 조선족들이 운영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관할을 흑룡강성으로 옮겨 가서 이제는 한족들이 대부분의 시설을 맡고 있다고 한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곧 비가 내릴 기세이다. 백두산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여 수시로 변한다고 하니 곧 맑은 하늘이 보이길 기대해 본다. 울창한 숲 사이로 길이 쭉 뻗어 있는데 양옆으로 나무가 무성하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 곧게 뻗은 소나무, 잣나무들 사이로 싱싱한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주목이 보인다. 곧고 힘차게 뻗은 가지가 백두산의 영험한 기상을 뿜어내는 듯하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나무로 지어진 맞배지붕 모양의 큰 건물이 나오는데 백두산매표소이다. 전면에 長白山이라고 쓰여 있고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이드가 사온 입장표를 들고 입구를 통과하니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버스에 나눠 타고 숲속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두 번째 입구가 나온다. 가이드가 준 다른 입장표를 들고 한참동안 줄을 따라 들어가니 이제는 자그마한 봉고차가 사람들을 연신 태워 나르고 있다. 봉고차에는 10여명 정도가 타는데 이제는 제법 경사가 있는 산길을 굽이쳐 올라간다. 경사가 심한 커브길을 거침없이 달리는데 핸들을 돌릴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이 악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중국 운전기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앞만 보고 달린다.
한참을 올라가니 해발 2천m 표지가 보인다. 이어서 2,500m 표지가 나오고 아래를 보니 까마득하다. 이윽고 백두산 정상 공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할 수없이 비옷을 30위안을 주고 샀다.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천지를 조망하는 곳까지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줄을 지어 올라가야 하는데 입구에서 들어가는 인원수를 조절한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하는 수없이 비를 맞으며 천지로 올라갔다. 구름안개가 천지를 덮고 있어서 대강의 위치를 짐작만 할뿐 옆에 서 있는 사람들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天池표지석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봉고차를 타고 내려와서 장백폭포(우리는 백두폭포라고 한다)를 보러 갔다. 멀리 두 줄기 흰 물줄기가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천지 북쪽에 있는 결구를 통해 1천여m의 긴 협곡을 흐르다가 폭포가 되었는데 높이가 68m이고 송화강의 원류로서 중국동북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이다. 폭포가 시작하는 곳에 牛郞渡라고 하는 큰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물을 두 갈래로 나누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갈래 玉帶로 보인다고 한다. 안내 현판에는 장백폭포를 설명하는 내용과 함께 멋진 8행의 7언 절구가 쓰여져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碧水懸涯萬古流 푸른 빛 폭포물이 깎아지른 절벽을 억만년을 두고 흐른다’. 폭포로 가는 길 주변에 야생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다. 이곳에는 온도가 70도 가량이 되는 뜨거운 온천이 주변 1천평방미터에 47개가 있다고 한다. 폭포 올라가는 입구 왼쪽에 있는 聚龍泉에는 더운 김이 올라오고 있고 한 쪽에서는 온천물에 계란과 옥수수를 삶아서 팔고 있다. 백두산을 내려와서 연변의 중심도시인 연길로 가서 짐을 풀었다.
6. 마지막 날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 잠을 푹 자고 늦은 아침을 먹었다. 연길 시내를 흐르는 강 이름이 ‘부르하통하’란 만주 말인데 ‘버드나무가 있는 강’이란 뜻이라고 한다. 강변으로 아담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풍광이 아름다운 도시 延吉은 연변의 중심도시로 조선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4박5일 동안 선조들의 항일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며 각오를 새롭게 하고 견문도 넓히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답사 동지들과 서로를 더 가깝게 알게 되었고 특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들은 재미난 강좌가 좋았고 저녁시간을 활용한 뒷풀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이번 답사여행을 준비하고 수고해주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과 답사여행을 같이 하신 여러 동지들께 감사를 드린다.
김희국 씀
첫댓글 그날의 감동과 흥분이 느껴지는 답사기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답사기 감사합니다. 각 답사지마다 대표적인 사진 1장씩 첨부해 주시면 답사감흥이 더 살아날 것 같습니다. ^^
함께 할 수 있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날이 다시 온것 같아요 ㅎㅎ
글과 관련된 사진을 몇장 올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당!
기억이 새록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