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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여호수아 1:1-1:2
제 목 : 모세가 죽은 후에
0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0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 성경의 구조
주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대체로 오후 4시30분에서 5시 사이입니다. 여러분께서 귀가하신 이후에 교회 청소를 간단히 하고, 설교 동영상을 편집해서 카페에 올리고, 누림성경연구원 홈페이지에 본문 말씀 비교한 내용을 등록하고, 그날 들어온 헌금을 정리하고, 또 다음 주일 설교 개요를 대략적으로 정리한 이후에 집에 가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시간이 됩니다.
집에 도착하면 간단히 손발을 씻고, 어머니나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준 간식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이 시간에 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K-POP Star 시즌 4’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입니다. 가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국내 대형연예기획사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노래 실력을 펼치는 일종의 오디션 프로그램입니다. 출연자들의 노래 실력도 기존 가수 못지않게 출중하고, 그들이 전하는 노래의 감동도 참으로 대단하지만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요소가 바로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입니다.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공기 반, 소리 반을 섞어서 말하듯이 노래해야만 가장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고, 듣는 이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아주 유명한 심사평입니다. JYP라는 기획사의 대표이자 가수인 박진영이라는 친구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한 심사평 중에 또 하나 저의 귀를 아주 강하게 끌어당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로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들고 나온 출연자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인데, 비록 2~3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노래라고 하더라도 그 노래 속에는 반드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존 가수들의 곡을 노래하는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곡속에 담겨져 있는 기승전결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살려내야만 듣는 이들에게 그 노래의 의미와 감정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고, 감격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짧은 노랫말과 멜로디 속에도 기승전결이 있다는 그 심사위원의 이야기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통신 수단이 워낙 발달해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가족 혹은 친지들과 실시간으로 통화를 하거나 혹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얼굴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화상통화도 가능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3~4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가장 주된 통신 수단 중의 하나가 편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해외에 있는 가족, 군대에 간 아들, 혹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안부를 묻거나 마음을 전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 방법이 편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편지는 요즘의 이메일과는 아주 판이했습니다. 요즘 이메일은 거의 실시간소통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의 편지는 국내의 경우에도 주고받기까지 최소 10일 이상 걸렸던 것 같고, 국제 우편인 경우에는 거의 몇 달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또 많지는 않지만 돈까지 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편지지를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다시 새로운 편지지를 찾아 한 땀 한 땀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쓰게 됩니다. 한 자 한 자에 사랑이 들어가 있고, 한 자 한 자에 정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선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쓴 후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있는 헤어지는 인사를 씁니다. 또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쓸 때에도 아무렇게나 막 쓰지 않았습니다. 요즘 문자나 이메일은 아주 간단하게 용건만 대충 쓰고 말지만 그때에는 한 통의 편지 내용에도 격식과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틀을 갖추었거나, 기승전결의 틀을 갖추었거나, 혹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틀을 갖추어서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짧은 노래 한 곡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편지 한 통에도 정해진 형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렇게나 막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형식이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형식이나 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노래를 만드는 사람, 본인을 위한 것일까요? 편지를 쓰는 사람, 본인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편지를 읽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즉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듣는 대상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나온 게 서론-본론-결론, 기승전결 같은 형식이나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듣거나, 편지를 읽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그 형식이나 구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제대로 파악해야만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을 쉽게 찾아낼 수 있고, 전체적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을 성경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 권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셨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즉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읽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책입니다. 그럼 이 성경에 형식이나 구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보다 쉽게, 보다 간명하게,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형식과 구조를 갖추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셨고, 성경을 편집하셨습니다.
사람도 노래 한 곡을 만들고, 편지 한 통을 쓸 때에도 듣는 이, 읽는 이를 위해 배려의 정신을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배려가 차고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성경을 쓰시고, 아무렇게나 성경을 편집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사람을 위한 책이고, 그러기에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글쓴이, 즉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형식과 구조를 갖추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성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형식이나 구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론-본론-결론,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같은 틀이 있을 것이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말, 좋은 가르침이 나열된 경전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읽을 때나, 큐티를 하거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본문을 찾을 때에도 임의로 선정하거나 그저 운에 맡깁니다.
물론 기도는 한다고 말은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아무 계획 없이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성경을 펼치거나 성경을 읽어서는 성경의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본문을 찾아 설교를 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통해 성도를 양육하는데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강조하려는 게 뭐냐?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꼭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론-본론-결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혹은 기승전결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까지가 발단이고, 어디부터가 절정이며, 어떻게 결론을 맺는지 그 이해가 반드시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세세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가지고 있어야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을 몇 개나 암송하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안내를 하고, 찬양을 하고, 식당 봉사를 하는 등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고, 얼마나 많은 기부를 하고, 얼마나 많은 전도를 하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할 마음이 전혀 없어도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파악하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것, 내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도임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고, 찬양이고, 봉사고, 헌금이고, 기부고, 전도입니다. 즉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기도에 관하여
혹시 이렇게 이야기 할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기도가 나오는 것, 맞아요. 100% 동의해요. 그런데 제가 올해로 신앙생활만 40년째거든요. 들은 설교만 해도 수백 편, 아니 수천 편은 될 거에요. 그런 제가, 설마 하나님의 뜻을 모를까요?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바로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는 상태에서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기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서 가장 강조되는 게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기독교에서, 교회에서 모든 길은 기도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여쭈어 보겠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기도가 바른 기도입니까?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고 하도 말을 많이 들어서 기도는 하지만 막상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 의미 없는 신앙이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도에 관한 내용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그렇게 많이 강조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가 기독교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구하는 종교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성경에도 서론-본론-결론이 있고, 기승전결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형식과 구조 속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알려주시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 곁을 떠나 죄인 되었던 사람이 구원을 받아 성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였던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인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그 죄인을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주셔서 성도라는 존재로 다시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 성경이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죄인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라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곁을 떠나 죄인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건강을 잃고 중병에 걸렸을 때인가요? 아담과 하와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릴 때였나요?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부부간의 갈등이 심했을 때인가요? 아담과 하와가 다른 사람들과 시기와 다툼을 겪을 때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인이 되었을 때에는 창세 이래 가장 완벽한 환경에서 살아갈 때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 아무 부족한 게 없었고, 아무 걱정거리가 없었고, 아무 근심, 아무 염려거리가 없었을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바로 그때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는 바로 그때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저지른 죄의 원인이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상황이나 형편, 처지가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약 일 년여에 걸쳐 마가복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달라진 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이 되었나요? 이스라엘이 부자 나라가 되었나요? 이스라엘에서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과 형편은 특별히 나아진 게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가지고 세상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죄의 마음에서 해방되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 구원은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되었다는 것, 즉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상황, 형편, 처지가 개선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구원이 상황, 형편, 처지의 개선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셔도 되고, 굳이 죽으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시며 수시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시면 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시며 수시로 나병환자,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말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상황, 형편, 처지의 개선으로 사람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기도가 무슨 내용입니까? 대부분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개선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건강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물질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부부 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직장과 사업장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그 모든 문제를 해결 받으면 내가 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 받으면 내가 더 충성스럽게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 받으면 내가 더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 받으면 내가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더 많이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고, 그렇게 고백하는 게 오늘날 성도의 기도 아닌가요?
성경은 사람의 문제가 상황과 형편과 처지 때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오늘날 성도는 전부 다 자신의 환경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그러면 더 주를 위해 살 수 있다고 떼쓰고 있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에서도 그렇게 기도하도록 성도를 가르치며 언젠가는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성도에게 희망고문을 일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도의 기도, 성도의 신앙생활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찬양, 봉사, 헌신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그 일을 하셨고, 그 일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고, 그 일의 결과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바르게 알고, 그 바르게 안 내용을 현재의 내 삶 속에 적용하며,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여호수아의 배경
오늘부터 우리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배워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성경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꼭 기억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왜 그 일을 하시는지, 그 일이 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셔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알아가는 귀한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여호수아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먼저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그 가나안 땅에서 각 지파별로 땅을 배분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곁을 떠나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사로잡혀 불쌍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창조 때의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의 하나가 홍수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홍수사건을 겪고서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결국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 죄는 더 확산되어만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직접 가르쳐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비록 죄에 결박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갖게 되면 그 죄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고, 복을 주고,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주시기로 한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4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서 민족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채 가나안 땅을 뒤로 했고, 결국 애굽에서 삶의 터전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4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결국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세 가지 약속, 즉 땅을 주고, 복을 주고,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 중에서 두 가지를 애굽 땅에서 이루어 내셨습니다. 비록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제 살 길을 찾아 하나님 곁을 떠나는 존재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늘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약속은 한 가지 뿐입니다. 즉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들이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고된 노동으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도록 인도하셨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여놓기만 하면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시때때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 놓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에 대해 충분히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종
지금까지가 여호수아의 배경입니다.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여호수아 1:1-2]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표현이 1절, ‘여호와의 종 모세’라는 표현과 2절, ‘내 종 모세’라는 표현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또 하나님은 모세를 일컬어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십니까? 당연하다는 쪽이십니까? 아니면 이상하다는 쪽이십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마 이런 논리를 따를 것입니다. ‘맞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야.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에 대해 뭐라 할 수 있겠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되는 게 피조물의 운명이지. 종으로라도 여겨주시는 게 어디야? 이 세상 살아가게 해주시는 것만도 어디야? 하나님 눈 밖에 나면 안 되니까,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되니까 피조물답게, 종답게 하나님 잘 섬기며 살아야 해. 하나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그다지 크게 놀라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 취급하시면 되나? 종 삼으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나? 종이 다 만들어지니까 심히 좋아하셨나? 이해가 안 되네. 아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며? 그런 하나님께 왜 종이 필요하지? 또 하나님은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셨다며? 그런 하나님이 사람을 종 취급하면 되나? 도대체 알 수가 없네. 하여튼 기독교는 이상하다니까!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된다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당연한 쪽입니까? 이상한 쪽입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기독교 성도들은 당연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고, 반면 안티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왜? 우리는 주의 피조물이니까! 왜? 우리는 주의 종이니까! 아주 거룩하고, 아주 사명감 넘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반면 안티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니, 누가 지어 달랐대. 아니, 누가 구원해 달랐대. 왜 멋대로 지어놓고, 왜 멋대로 구원해 놓고 종노릇하래. 그게 창조주야? 그게 창조주라는 하나님이 할 일이야? 게다가, 종노릇 잘 하면 상주고, 종노릇 잘못하면 징계하고, 심판까지 한다며? 그런 하나님 왜 믿어? 안 믿고 속 편하게 사는 게 좋지. 하여튼 그런 하나님 믿는 기독교인들은 바보라니까!’ 예.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바보 맞습니다. 저 역시도 이런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습니다. 즉 안티 기독교인들의 이런 주장도 틀린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든, 안티 기독교인이든 우리가 혼동하는 게 ‘종’의 개념입니다. ‘종’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자유를 빼앗겨 부림을 받는 개인이나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그 개념으로 ‘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 ‘내 종 모세’도 모두 그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모세이고, 기독교 성도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종 모세’라고 할 때 그 ‘종’의 개념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 스스로도 ‘종’을 지배 받는 자, 부림 받는 자, 억눌림 받는 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기독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온갖 비판과 비난을 일삼는 안티 기독교인들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처음 만났을 때 누가 매달렸습니까? 나와 함께 일해 달라고 누가 애원했습니까? 제발 나를 믿어달라고 누가 부탁했습니까? 모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까 할 만한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을 다시 골라 보내라고 하나님께 엉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이시면서 설득하고, 애원하고, 매달려서 출애굽 사건을 이끌어 내셨던 것입니다. 위협, 없었습니다. 공갈, 없었습니다. 협박,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설득과 애원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일을 진행하시는 가운데에서도 강제가 없었습니다. 억지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원리를 가르쳐서 모세가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이끌어 내셨을 뿐입니다. 이런 모세가 하나님의 종인가요? 이런 모세가 여호와의 종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종 모세’라고 할 때 강조되는 점은 ‘종’이 아니라 그 반대 개념인 ‘주인’입니다. 주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모든 것을 경영하고, 관리하고,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즉 지시와 명령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책임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너와 더불어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도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나와 함께 한 너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요, 실패하면 그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아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너는 나만 믿고 따라 오거라.’ 예. 하나님의 주인 되심, 하나님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표현이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종’이라는 의미를 다 오해하고 있고, 왜곡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 오해와 왜곡의 절정이 무엇이냐? 바로 오늘날 목회자들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되는 게 무엇입니까? ‘종’이 아닙니다. ‘주’를 강조하고,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종이라고 다 같은 종인 줄 알아? 조그만 회사의 비서실장 하고, 대통령의 비서실장 하고 같은 줄 알아? 나는 주의 종이야!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야! 그러니 까불지 마라.’ 다 이런 의미로 사용합니다.
‘주’를 강조하고, ‘그리스도’를 강조하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듯이 신뢰를 주고, 책임을 지고, 정말 주인답게 하든가! ‘종’을 강조하려면 정말 섬기는 자답게, 낮은 자답게 그렇게 행동을 하든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종’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왜곡시켜서 스스로 ‘권위 있는 자’인양 행세하며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도모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종’의 의미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고, 기독교가 저급한 싸구려 종교로 둔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의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의 선언이고, 그 약속 가운데 사람은 부름 받은 자로서, 쓰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종’이라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여겨주시는 것은 지극히 감격스러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5. 모세가 죽은 후에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호수아에게 말씀 하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일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종노릇 시키면서 일을 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세라는 사람을 통하여 드러내시고, 확증하시면서 하나님 주도로 일을 해오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토록 해주셨습니다.
그랬던 하나님께서 이제 여호수아에게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시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일까요? 여호수아가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여호수아의 사명, 여호수아의 책무, 여호수아의 과업일까요?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여호수아를 종 삼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듯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너희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오래전 아브라함에게 했던 언약, 땅을 주고, 복을 주고,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어이 너희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 놓으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예. 여호수아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주인이 되어 여호수아를 돌보시고 책임지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케 하는 영광을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까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이 이루어 내야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이제 모세가 죽고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에 앞장섰던 모세,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모세가 죽고 없습니다. 이제 그 모세가 죽고 없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종삼아 하나님의 일을 이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드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놀라고, 두려워하고, 무서워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호수아의 오해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겪는 그런 오해와 착각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두 가지 정도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여름에 월드컵 축구경기가 있었습니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나라 대표 팀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예선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고 말았습니다. 그때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홍명보 감독과 박주영이라는 선수입니다.
홍명보 감독은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평소 공약과는 다르게 소속팀에서 별 활약도 하지 못하고 경기력도 현저히 떨어져 있는 박주영 선수를 선발했고, 이른바 황제 훈련이라는 조소까지 받으며 그를 특별 조련한 후에 주요 경기에 선발선수로 기용했습니다. 물론 결과가 좋았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고, 홍명보 감독과 박주영 선수는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일 년도 채 안된 상황에서 새로운 선수가 박주영 선수 자리에 신데렐라처럼 나타났습니다. 바로 얼마 전 끝난 호주 아시안컵 경기 대회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이정협 선수가 바로 그 선수입니다.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이정협 선수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골로, 도움으로 축구팬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박주영 선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박주영 선수만큼 뛰어난 원톱은 없다는 홍명보 감독의 말은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가 없으면 마치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가 죽으면 모든 역사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번 있었는데 일정 주기로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이슈가 되는 내용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는 기업인에 대한 사면 논쟁입니다. 그냥 과거에 그 기업인들로부터 신세를 많이 져서 조금 빨리 풀어주면 좋겠다고 말하기는 조금 민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갖다 붙이는 핑계가 기업 정상화를 통한 경제회복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려운 서민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업인의 사면이 불가피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말이 됩니까? 정치권의 그 논리가 이해가 되십니까? 언제부터 기업 하나가, 언제부터 한국 경제가 기업인 한 사람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지경이 되었지요? 정치인들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격입니다. 그럼 그 기업인이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요? 회사가 갑자기 망합니까? 한국경제가 갑자기 망합니까? 어느 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어느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자리를 대체해 줄 사람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사람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흔들림이 있을까요? 모세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중단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걱정을 한다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는 걱정을 하고 있다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가나안 땅으로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대로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 아니야? 어떻게 하지?’ 예. 사람들은 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입니다. ‘알아. 모세 죽은 것 나도 알아. 그런데 뭐? 너희가 왜 모세 죽은 것을 걱정해. 왜 너희가 너희 일을 염려해. 걱정하지 마. 너희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놓는 이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아니라 나야. 나 여호와의 일이야. 나 하나님의 일이야. 내가 계획했고, 내가 지금까지 진행했고, 내가 성취할 것이고, 또 내가 책임질 나의 일이야. 아무 염려 마. 아무 걱정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 하나 죽었다고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 하나 죽었다고 지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 하나가 자리를 비웠다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사람으로 인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해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 하십니까? 하나님의 존귀를 위해 일 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온전함과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아무 흔들림 없이 아무 요동함 없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아름답게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 다누림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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