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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7-0001-02
pp.9-37
이 논문을 쓰면서 미국지성사를 연구하는 이형대 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나타나는 어떠한 오류도 필자의 책임이다.
People often regard Americans as the most secular and worldly people in the world
Nevertheless they are very religious if we take off their superficial ()utlook. Although various ethnic groups live with diverse beliefs, a common characteristic appears in their religious livers. The evangelical Protestantism sets its main tone. Nevertheless, various religious orders. sects, and churches coexist with each other, each maintaining its own religious creeds. Americans traditionally would not allow any particular religion to be Public or· national. However, a valve idea of civil religion or CIVIC faith 7f'feral ? religiOUS hon7ing tO Connect them anti t? inspire them to be good citizens.
Thls article analyEes why and how these particular characteristics are formed It traces the development of American religiOn dividing itS Wh71e Process into five Periods. First, in the colonial Period three religious forces are founded They are Congregational, Presbyterian, and the Anglican Churches. From the 17슨Os evangelical churches rose and the Baptist and Methodist
churches expanded to become the largest religious orders by 7he turn of the twentieth century.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great influx of Catholics and various Eastern European churches added diversity to American religious life. Slavery issues broke each of the maior Protestant churches into the Northern and Southern organizations. Religion revived after the Civil War The late nineteenth century saw the rise of Social Darwinism and, simultaneously Social Gospel. In the earlier Part of the twentieth century, religion became secularized an? the number of church going People decreased. To counter this , fundamentalism appeared
In the post World War Two period, the strong ansi-communism mood of the nation united all kinds of Christian orders, such as the 7atholics, Protestants, and Judaism. As a result, the Americans elected the Catholic President Kennedy. The counter culture of the 1960's weakened religious zeal, however, Americans turned atwain to be religious since 1980s. Fundamentalism revived after redressing itself with revival meetings and T ? Prayers, They put forward the movement opposing abortion, homosexuality and Pornography and to support school prayer Programs. Yet church goers number reaches no more than 40% of the total Population,
Nowadays conservative Christians advocate to establish the common religion for Americans to unite then그 into the one spiritual force. N「o doubt. Christian ethics are the centers of civiI virtues of Anlericans and the evangelical Protestantism is their main religion. Stil1. Americans mostly ohject to establish a national or public religion. They agree that religion remains in the private sector depending on the personal choice.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라고 흔히 여겨진다. 그 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선입견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들은 가장 종교적인 국 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미국인들은 가장 물질적이면서도 종교적 이다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미국인들의 이러한 이중성은 그들의 종교 에 바탕을 둔 건국신화와 더불어. 또한 그들이 현대 산업화의 선두주자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건국이 종교적 박해를 벗어나 진정한 신의 도시 City Upon a Hill를 세우려한 퓨리턴 신화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가장 물질적 이고 타락한 나라로 보여지는 것은 그 나라가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의 고 도 산업화의 선두주자로서 그에 따르는 세속화를 다른 나라보다 일찍이 겪 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는 그 부산물로 도시화와 이에 따른 빈곤과 범죄, 그리고 청소년 의 탈선과 같은 일상생활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다른 어떠한 나라들 보다 고도의 산업화와 더불어 오는 이러한 문제들을 일찍이 겪었다. 그 후 산업화의 세계적 전파와 더불어, 다른 나라들도 미국과 비슷한 문제들을 겪 게된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이를 산업화의 결과로 보지 않고 미국의 해 악이 다른 나라에 감염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산업화와 미국화를 혼돈하게되고, 미국은 곧 물질과 돈과 향락. 그리고 세계적 지배권을 추구하는 가장 세속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표상은 월스트리트와 헐리웃 그리고 팍스 로마나 의 횡포를 휘두르는 위싱턴의 밀실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내 부에 잠재해 있는 핵심적 실체는 미국인들이 아직도 건국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퓨리턴 정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리하여 사회적 위기감을 느낄 때마다, 자신들이 미국의 건 국신화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라고 거듭해서 반문한다. 믿을만한 여론조 사에 의하면 20세기 후반에 미국인 열 명중에서 아홉 명은 신을 믿었고. 일 곱은 종교단체에 자발적으로 가입하였으며. 네 명은 지난주에 교회에 갔다 고 말하였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국민이라고 정의를 내 린다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1)
이 논문에서는 미국 종교의 여러 가지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 어떻게 하여 미국 국민들은 아직도 종교적인 시민으로서 남아있는가? 미국의 종교는 어떻게 발달, 변천해 왔는가? 미국 종교의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영향을 그 지역과 세계의 문화에 미쳤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이 장에서 살 펴보려 한다.
미국의 종교 중에는 유태교나 그 외의 다른 종교도 있으나 기독교가 절 대 다수 이며, 그 중에서도 개신교가 그 중심이 된다. 미국은 여러 다른 나 라에서 이민들이 와서 이루어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종교가 다양 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에는 개신교의 각 종파와 더불어, 로 마 가톨릭, 아프리카 감리교회. 그리스 정교회, 영국 성공회, 아르미니아 사도회 등 무수한 교회들이 있다. 1980년대에 발간된 The Year Book of American and Canadian Churches에 의하면, 미국 내에서 약 219개의 각기 다른 기독교 교단이 142,172,138명의 신도를 갖고있었다. 이들 대부 분은 개신교 교회 였다. 그러나 The 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 에 의하면, 비기독교, 사교 집단, 미미한 종교 단체 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 는 1,200 개가 넘었다. 2)
이렇게 다양한 인종이 다양한 종교와 신조를 갖고 모여 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하나의 통일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 구심점은 복음주의적 개신교로 모아진다. 이렇듯 다양한 환경에서 도 어떻게 통일적인 종교관이 수립되어왔을까? 여러 종류의 종교 교단, 교 회, 교파의 설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종교적 관점을 통합시키는 요인은 무 엇일까?
미국에서는 건국 초부터 헌법의 수정조항 제1조를 세워서 정교분리의 원 칙을 수립하면서 어떠한 특정한 종교를 선택해서 국가의 종교로 세우기를 금하였다. 미국에서 국가는 교회에 어떠한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고 교회의 재정은 자발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인의 깊은 종교적 감성은 교회의 재산에 대하여는 세금을 면제하여 줌으로 서 교회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종교는 원칙 적으로 "자발적 체제" voluntary system위에 기초한 사적인 영역 private affairs 인 것이다. 3)
정교분리의 원칙을 믿던 미국의 건국시조들은 미국에서,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회가 아니라. 시민 누구나가 자기가 선택한 종교를 구애 없이 믿을 수 있는 시민 사회 civil society를 구현하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이 시민 사회는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했 다. 미국에 이주한 유럽의 이민들은 유럽이 종교개혁에 휩싸여서 피비린내 나는 분쟁을 계속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시민들의 다양한 종 교생활을 보장하는 것만이 나라의 평안을 유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 여 종교의 자유는 미국민의 기본권들 중에서 중심에 위치하였으며, 미국에서 종교는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사적인 영역으로 남아있다.
유럽인 들이 미국을 방문하며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미국인들의 종교 관은 다양한 신앙생활 속에서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통일적 가치를 추구한 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동일한 가치체계와 질 서 속에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미국인들도 이렇게 하나임을 향해 달리는 특성이 있으나 미국에서 그것은 특이하게 정치적 감각으로 표현된다. 미국 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 사회가 제대로 그 기능을 펴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에서 공동의 종교가 있어야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일찍이 다양한 문화적 인종적 배경을 갖고있는 미국 국민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공적종교 Publick Religion가 있어야 된다 고 주장하였다. 이 공적종교는 다름 아닌 기독교를 의미하였는데, 말하자면 미국적인 기독교를 지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보다 효율적인 사회를 세 우기 위해 공적 종교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어떠한 특정한 종교를 정부가 지원한다거나 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유를 중히 여기는 미국의 지도이념에 위배된다고 변함없이 믿고, 끊임없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믿음을 수호하여왔다. 특정 종교를 국가 의 또는 공적인 종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던 건국시조들도 전부가 종교적 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들 중 종교에 있어서 가장 과격하다고 볼 수 있는 제퍼슨마저도 이신론자이었으며, 그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 었다. 건국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국인들은 변함없이 미국이 신과의 약속에 의 해 이루어진 나라, 신의 계시에 의해 세워지고, 신에 의해 인도되고, 신이 주 신 사명을 이 땅에 실현할 나라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은 바로 미국의 운명이라는 다분히 중세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다. 4)
미국인들은 이렇게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사 회에서 공동의 종교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여러 사회학자나 역사가들이 '시민의 믿음' civic faith, '공화국의 종교' a religion of the republic '시민의 종교' civiI religion를 세워야 된다고 역설하곤 했다. 여러 가지 애매한 어휘로서 이들이 염원하는 미국민 공동의 종교란 프랭클린이 역설했던 공적인 종교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동의 종교, 또는 시민의 종교란 다양한 미 국국민에게 연대감을 줄 수 있는 시민적 덕성 civil virtue을 길러주는 도 덕적 체계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의 도덕적 체계가 종교적 이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았다. 5)
그러면 어떻게 다양한 인종. 문화, 신념과 종교의 기원을 갖고, 게다가 더욱 다양한 이민이 계속 유입되는 미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생 활에 연대감을 주는 교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여 그들 은 오늘날 특색 있는 미국 기독교 문화를 이루었는가를 식민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이전에는 원주민들이 자연의 존재물로 표출되는 신성과 교류하며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 나 유럽인 들이 이주하면서 부터 북아메리카는 기독교생활권으로 편입되었 다. 유럽인 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스페인 개척자들은 원주민에게 천주교 를 전파하면서 16세기 동안 북유럽대륙을 독점하였으나 점차 영국의 이주 민이 늘어나면서 북아메리카는 개신교가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탈바꿈하 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계안에서도 다양한 종교집단이 그들의 식민지를 각각 세우면 서, 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주하는 비 영국계 사람들이 그들 고유의 종교 를 가져오면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들에서는 개신교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종교 단체들이 수립, 번창하였다. 1607년에는 버지니아의 제임스 타 운에 최초의 영국식민지가 건설되면서 성공회가 수립된 것에 뒤이어 매사추 세츠에 청교도들이 이주하였다. 그후 화란과 스웨덴에서 온 이민들이 뉴욕과 뉴저지에, 천주교도가 메릴랜드에 정착하였다. 펜실바니아에서는 퀘이커교도 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이루었는데 그곳에는 종교적 관용정책 덕분에 동유 럽의 여러 가지 신비주의 집단들이 이주해왔다.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유 태교도들도 1650년대부터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고, 흑인들도 1619년부터 강제적으로 버지니아에 정착하면서 아프리카적 전통이 많이 가미된 그들만의 독특한 기독교를 수립하여 나아갔다.
이렇게 식민시대의 이주민들은 출신지역이 다양했으나. 그 중 영국계 이 민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미국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1790년의 인구통계 를 보면, 83.5%가 영국계였다. 1800년에는 약 5백만의 백인이 미국에 살 고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개신교도였으며 가톨릭 신자는 약 일만 명 정도 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식민시대 동안 미국인이 주로 믿었던 종교도 교파는 다를 수 있어도 개신교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식민지에서는 3대 교파가 형성되었다, 첫째는 뉴잉글랜드지방에 세 워진 조합교회(회중교회라고도 함) Congregational Church 였다. 이 교 단은 신의 도시를 세우기 위해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정착한 청교도 후예들 이 세운 것으로 점차 퓨리턴 그룹들을 흡수하면서 뉴욕과 중서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퓨리턴들은 교회지도자들이 정치를 담당하는 정교일치체제를 수립하며 번창하여 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럽에서 종교 문제로 박해를 받 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에 건너왔으나. 일단 그들의 식민지를 세운 후에는 엄격한 교리를 확립하면서 비청교도 들에게 불관용의 정책을 썼다. 이단자들을 추방하고 마녀재판을 한 것으로 퓨리턴들은 비난받기도 하지 만. 이들이 미국 종교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 그 교단은 사회에서 교회 의 지도력을 강화하고, 신학적 체계를 세우고, 교인들에게 세계적 사명감을 가져다주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조합교회의 신도들은 뉴잉글랜드의 모델에 따라 타운을 세우면서 아메리 카 대륙을 개척해 나갔다. 그들은 타운의 중심에 교회를 세웠고 교회는 타 운의 모든 행정과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것은 법정의 역할도 하였고 마을의 사소한 일마저 정하는 타운회의 장소였다. 자연히 교회는 마을 생활의 중심 이 되어서 종교 이외의 영역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매사추세츠 식민 지가 세워진지 6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식민지 주민들은 하버드 대학을 수 립하여서 그들의 종교에 신학적 체계를 세우고, 종교적 지도자를 배출하려 고 하였다. 6)
여기에서 잠시 미국의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합 교회의 퓨리턴 지도자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선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는 1730-40년대에 매사추세츠의 노담턴에서 부흥회를 열며 설 교를 함으로써 미국 종교사에서 대각성 시대를 열었다. 체닝 William Ellery Channing은 조합교회 내에서 싹이 튼 진보세력 중의 하나로서 삼 위일체설을 믿지 않는 유니테리언교를 창시하였다. 이 교단은 이성적 교회 를 세우려는 운동 하에 1815년에 조직되었으며.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 을 일으키는 힘이라던가 신격에 대한 예찬보다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강조 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 양심을 키워나갈 것을 주장했다. 하버드 대학과 보스턴은 이러한 지적 종교 운동의 중심이었다. 7)
조합교회는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며 예수의 신격을 믿었다. 교회의 지도 자들은 이러한 교리를 신봉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엄격한 칼뱅주의와 퓨리턴 신앙의 다른 많은 부분에 대해 불편해하며 반발 하였다. 이러한 반란세력은 예일대학에서 신학자들이 테일러 Nathaniel William Taylor(1786-1858)의 지도하에 뭉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과 저주가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의 완고한 부 분을 유연하게 수정했다. 이러한 수정과 타협은 부흥회 전도사들이 포교를 하면서 이미 실천해 왔던 바였으나, 예일의 신학자들은 이를 신학체계의 정 설로 세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심할 때 회개하는 행위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예전의 칼뱅주의자 들이 믿었던 것보다,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가꾸어나갈 수 있는 힘이 더 많 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테일러는 유니테리언교도의 도전에 저항하면서 결국 은 구식의 조합교회적 신학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원죄로 타 락한 후에도. 인간의 의지력이나 능력 또는 자유로운 기능의 모든 것이 사라 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8)
코네티컷주 하트포드 교회의 목사 부쉬 넬 Horace Bushnel1 (1802-76) 은 조합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19세기 중엽에 배출해낸 미국기독교 사상의 거 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칠은 변경인 들을 걱정스레 보았고, 가톨릭교를 미국의 동질성을 저해하는 집단으로 여겼으며 부흥회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오도하며 개종시킨다고 개탄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기독교적 계발은 감정적으 로 오도되지 않고도 보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은총과 도덕적 수련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9)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퓨리턴 지도자는 비처 Lyman Beecher (1776-1863)로서 그에게서는 뉴잉글랜드의 구식과 신식 종교가 혼합된 양상이 나타난다. 때로는 조합교회 목사로서 때로는 장로교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 용감한 뉴잉글랜드 목사는 유니테리언교에 대항하며 퓨리 턴의 신학체계를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그가 발견한 해결책은 서부로의 진 출이었고, 거기로 가서 그는 신시내티 신학교를 세웠다. 그는 부쉬넬과 마 찬가지로 야만적 변경인과 신앙심이 없는 자 들은 물론이고, 노예소유주와 가톨릭교도 들도 중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적들이 서부를 점령하기 전에, 부흥회를 열면서 서부로 진출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10)
퓨리턴들은 그들이야 말로 신의 계시에 의해 올바른 나라를 세우도록 선 택된 자들이라는 소명감과 이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투철 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조합교회들은 l810-20년대에 벌써 그리스도와 아메리카 Christ and America 라는 선교단을 조직하여 샌드위치 섬과 세 계의 여러 곳에 파견하였다. 선교활동과 더불어 그들은 그들의 사상, 제도, 교육기관 등 여러 가지 문명의 요소들을 전파시켰다. 퓨리턴들의 이러한 종 교적 신념은 미국인 후세들의 정신에 면면히 전해져 내려와 미국 건국이념 의 뿌리가 되었다. 나아가 20세기에 다다라서는 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소명감은, 비록 그것이 제3국가들에게는 부담이 될지라도, 미국인들이 세 계에 대하여 갖는 사명감의 근원이 되었다.
식민시대의 삼대종교 중 두번째 것은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였 다. 장로교도들은 영국계 이민의 뒤를 이어 펜실바니아나 뉴저지의 아팔라치 아 산록에 이주한 스카치아이리쉬 Scottich-Irish계 인들로 주로 이루어졌 다. 이들은 18세기 중반부터 구서부의 변경지대를 휩쓰는 부흥회의 물결을 지지하면서, 그 당시 조합교회가 세를 잃어갈 때도 교세를 계속 확장해갔다. 장로교도들도 프린스턴 대학을 세우며 종교적 지도자를 육성하였다. 장로교 회에는 조합교회와 마찬가지로 사명감을 가진 평신도와 교단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바로 미국과 영국에 지부를 갖고 둘을 연결하여 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들은 성서와 복음의 팜플렛을 보급하고 주일학교를 세 우며 주민들의 도덕적 개혁에 힘쓰면서 선교황동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임명 받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사명감에 충만하여 개혁적으로 복음주의적 개신교 의 천국을 미국에 이루려고 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원동력이 된 것은 그들이 종래에 갖고 있었던 천년왕국의 사상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천년왕국의 도래 를 위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루었다고 믿었으며, 이 점에서 그들은 후천년 왕국 post-millenialism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들과 교회가 사람 들을 개종시키고 세계를 개혁하여 올바로 일으켜 세운 후에 예수님이 실제 로 강림하여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발적인 사명감은 미 국의 동질성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1)
셋째는 성공회 Episcopal Church이다. 성공회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공 식적 종교로서 메릴랜드에서도 많은 신도를 확보하였다. 대개 남부의 영향 력 있고 부유한 계층의 종교로서 남부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 삼 대종교는 차이가 있어도 모두 개신교라는 특징을 갖고. 종교적 관용을 18 세기 중엽에는 이루어갔으며, 신의 소명에 의하여 신세계를 건설한다는 공 통된 이상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12)
미국의 종교는 1740년경 시작되는 대각성 Great Awakening기에 접어 들면서 판도의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미국인들은 새로운 신앙형 태인 부흥회를 통하여 감정적이고 체험적으로 종교를 믿게 되었고, 이는 그 들의 종교생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을 뿐 만 아니라 교파간의 세력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부흥회의 물결은 지역적으로 자꾸만 팽창해 가는 미국의 특수한 여건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 즈음 미국은 아팔라치아 산록의 서쪽으 로 자꾸만 뻗어 나갔으나, 변경지대에 새로이 정착한 주민들에게 기성교회는 제대로 신앙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그런 지역에서 교 회나 목사의 수는 압도적으로 모자랐다. 그리하여 변경의 주민들은 대체로 비종교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에 주기적으로 못 가는 것은 물론. 성경책 이라고는 가져보지도 못한 가구도 꽤 많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목사들과 때로는 교리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전도사들이 변경의 오지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였다.
순회전도사들은 변경의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종교적 구원은 더 이상 어려 운 교리를 지적으로 이해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서의 계율을 신봉하고 회 개하는 영적인 교류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설교하였다. 이 시기부터 미국의 기독교는 성경 중에서도 신약, 그 중에서도 특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 음서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는 복음주의 Evangelism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 게되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순회전도사들이 설교를 하는 곳에는 대규모의 부 홍회가 노천에서 몇일을 텐트를 치고 열렸고 이 부흥회에 한 지역의 주민들 은 교파를 초월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들으며 회개하고 성령으로 충만된 체험을 그곳에 모인 이들과 더불어 하게되었다. 여기에서 신도들은 교파와 연령의 차이를 초월하여, 때로는 인종 마저 초월 하여 정신적 교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파의 차이가 희석되었으며. 신 도들이 기성의 교단을 떠나 새로운 교단으로 편입되기도 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도 하면서 교세의 새로운 지도가 형성되었다. 대각성기의 체험은 참여 자들에게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여 주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미국에 이주하는 기독교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하여 주었다. 13)
기성의 교단에게 이러한 복음주의적 새로운 신앙의 형태는 하나의 도전 으로 다가왔다. 많은 논란을 거듭한 끝에 교단들은 그들의 입지를 정하였 다. 식민시대의 3대종교 중에서 장로교만은 부흥회를 통한 복음의 전파를 상당히 지지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합교회나 성공회는 부흥회 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 결과 점차 이 두 교단은 부흥회와 더불어 확장되는 감리교와 침례교에 그 세력이 밀리게 되었다. 그 러나 획일적으로 모든 교회가 교단이 움직이는 대세에 따라 반대나 찬성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 따라, 또 목사에 따라 새로운 대각성의 신사조를 따르기도 하였고 거부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합교회는 교회의 조 직과 운영을 지방자치제적으로 해 나갔기 때문에 그러할 소지가 더욱 많았다.
침례교는 조합교회에서 솟아난 하나의 지류로서 시작하였으며, 이미 퓨 리턴들 사이에 있어왔던 개혁적인 교리를 많이 받아들여 개혁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면 퓨리턴들이 믿고 있었던 엄격한 칼뱅의 예정설 대신에, 인간도 복음서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간 적인 측면을 종교에 부여하였다. 개혁적인 이들은 교회 신도의 질을 높이려 는 의도에서 성인이 되어 다시 한번 침례를 치르려 했기 때문에 침례교도라 고 불리었다. 이들은 재세례파나 아르미니아교와는 무관한 퓨리턴의 개혁 세력이었다. 한편, 존 웨슬리가 영국에서 개혁을 시작하여 미국에 대대적으 로 퍼지게 되는 감리교는 아르미니아교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들은 신비주의적인 면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으나, 참된 신앙생활은 구원으 로 직결된다는 면에서 침례교와 비슷한 교리를 갖고있었다. 14)
이 두 새 교단은 그 뿌리와 발단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신도와 성령의 직접적인 교류를 믿고, 확고한 믿음으로 복음서의 교리에 따라서 살면 구원 이 가능하다는 기독교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에 그 공통점이 있다. 지나치게 형식적인 면으로 기울어서 교리수업이 신앙생활에 오히려 거추장 스럽게 된 것에 비판적이었던 새로운 신앙은 그 대신에 신도들에게 믿음과 올바른 행동을 강조하는 실천적 종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침례교 와 감리교단은 많은 수의 순회전도사들을 변경의 곳곳으로 파견하였다. 이 들 중 많은 이들이 엄격한 교리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의 수련 도 겪지 않은 채 신앙심만 충만한 미혼의 젊은이였다. 이 두 교단은 교세 확장을 위하여 이들을 우대하였기 때문에 기성 목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 았으며, 교단에서는 이들의 자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 무튼 이 전도사 들이야 말로 신앙심이 퇴색해가던 변경의 주민들을 종교적 으로 재무장한 장본인들이었다. 전도사들은 변경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참 된 믿음 하나로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설교하며, 회개를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유지한다면 지옥의 불길에 떨어진다는 쉬운 말로서 변경인 들에게 영적인 교류의 물꼬를 터 주었다. 15)
침례, 감리 양 교단의 포교활동은 특히 성공회가 몰락한 남부에서 그 경 쟁이 치열하였다. 성공회는 미국에서 독립혁명이 일어나자 교회 지도자들 이 영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8 세기 말 성공회가 다시 부흥하려고 움직이기 전 까지, 이 빈자리를 침례교 와 감리교가 메꾸어 갔다. 그 결과 소위 성경지대. the Bible Belt가 남부 의 북쪽지대 the Upper South에 형성되었다. 우리 나라에 선교활동을 조 선 말기부터 하러왔던 선교사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성경지대 출신이다. 복 음주의는 점차 신앙의 본고장인 동부에도 다시 전파되었다. 북부에서는 장 로교나 조합교회 또는 군소 기성의 교회들이 새로 팽창해 가는 감리. 침례 교회와 함께 복음주의적 신앙의 전파를 맡고 있었다. 16)
교회세력권 변화를 숫자로 가늠해보면, 건국시기인 1770년대에 조합교 회는 약 750개의 교회를 세우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하였다. 그 다음이 장로교로서 약 500개의 교회조직을 가졌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성공회가 400개의 교회를 거느리면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식민시 대의 삼대종교는 이렇게 조합교회, 장로교, 성공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와중에서 1780년대에는 침례교회가 500개의 교회로 확장되면서 남부에서 성공회의 자리를 밀치고 들어서게 되었다. 루터교라던가 독일과 화란의 개혁교회들과 같은 비 영국계 교회도 이 때쯤 미국에서 발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가톨릭교는 식민지 전체에 서 60개도 채 못되는 교회를 가질 뿐이어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그들은 뉴 잉글랜드나 남부에는 전혀 없었으며 대부분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에 집중 해 있었다. 17)
대각성기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새로운 종교판도는, 더욱 다양해진 종교 세력들이 미국의 기독교사회를 형성하는, 19세기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완 성된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이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 더욱 다양 한 이민이 다양한 종교를 갖고 온 것, 교통혁명과 더불어 미국이 서부로 팽 창해 가면서 복음주의적 신앙이 강화된 것, 또한 미국 교회와 신도 또 지식 인들 자체 내에서 개혁과 개선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서북부 유럽에서 이민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가톨 릭교회와 루터교가 급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가톨릭교 회도 서부의 변경으로 진출하면서 부흥회적 스타일을 개신교로부터 받아들이 며 팽창하였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1840년대에 들어온 이민들은 가톨릭 세 력을 강화하여서, 19세기 중엽 쯤에는 카톨릭교는 미국에서 단일 교단으로는 신도 수를 가장 많이 갖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반가톨릭 감정이 미국 에 팽배하였다. 개신교가 중심이 되어 종교적 이상을 공통적으로 수립하려는 미국사회에 가톨릭 세력의 확대는 하나의 위협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개신교 도들은 이들을 교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비미국적 세력으로 보았다. 그들을 도시의 슬럼 가에 많이 모여 살면서 과음을 일삼고 부패한 정치 패거리에 야 합하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미 국을 지배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폭도들은 보스턴 근처 찰 스타운에 있는 수녀원 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필라델피아에서는 폭동으 로 카톨릭 교도들이 죽기까지 했다. 18)
루터교도 들은 독일계 이민들이 중심이 되어 중서부에 퍼져나갔다. 미국 인들이 그들을 교리적으로 수용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화 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외국어를 쓰며 그들의 교구학교에 아이들 을 보냈고 맥주를 마셨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마르틴 루터의 뒤를 잊는 개 신교의 종주인양 여겼다. 이러한 모든 것이 앵를로 색슨계 미국인들에게 곱 게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루터교도 부흥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 았으나 부흥회적인 방법으로 포교하며 성장하였다. 19)
종교에 있어서의 변화와 발전은 이민의 유입 뿐만이 아니라 미국 종교인 들의 창의성과 개선책에도 힘입었다. 그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개혁적 기독교가 미국에 나타났다. 리 Mother Ann Lee는 성 령을 받으면 몸을 부들 부들 떨며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예배하는 쉐이커교 단을 창립하였다. 그들은 성적으로 금욕생활을 하면서 탈기독교적, 탈정통 적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뉴욕의 농촌 청년이던 스미스 Josheph Smith 는 계시를 받은 후, 신도들을 서부로 이끌고 가서 1830년에 유타 식민지를 세우고 몰몬교를 창시하였다. 밀러와 화이트 William Miller and Ellen Gould White는 1863년에 천년왕국설에 안식일에 대한 강조를 하며 제7 일 안식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식생활 개선과 여성 의복의 개량등 실생활에 서의 개선책을 수립하였다. 러셀 Charles Taze Russel1은 여호와의 증인 을 창시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말엽에는 에디 Mary Baker Eddy는 신앙 의 힘으로 병을 회복한 후, 신의 치료능력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 Church of Christ, Scientist를 수립하였다. 이들은 모두 미국종교에 다양 성을 더 해주었으며 현재 수십만 내지 수백만에 이르는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큰 교단으로 커나갔다. 20)
이 시기에는 심지어 뉴하모니 New Harmony나 오네이다 Oneida와 같 은 유사 기독교공동체 Communes도 출현하였다. 전자는 종교적 회의론자 인 오웬 Robert Owen이 세운 비기독교 혹은 반기독교적인 사회주의 공동 체였다. 후자는 이단적 기독교 공동체로서 카리스마적인 교주 노예스 John Humphrey Noyes가 자유연애를 주창하였다. 이런 것들은 적은 공동체에 불과하지만 언론은 이를 기독교적 사회와 가정에 대한 위협 요소로 보고 과 대 포장하여 보도하였다. 실제로. 보다 더 큰 지적 도전은 유니테리언 좌파 나 보스턴의 지식층에 유행하던 초월주의에서 나왔다.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나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은 성경에서 주장하는 신격과는 틀린 자연 속에 내재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들 모두가 오래된 종교적 일체감을 거부하고 새로운 그 무엇을 찾으려한 것이었고 이 는 미국종교의 다양화에 이바지 하였다. 21)
미국 원주민은 그들의 자연숭배적 종교관을 유지함으로서 거의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초월주의의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 다. 한편 강제로 미국 땅에 끌려와 살게된 흑인들은 19세기 전반에는 거의 기독교도 들이 되어있었다. 흑인들을 개종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 름으로서 기성의 교단은 용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각성기 때부터 특히 침례 감리 양 교단이 흑인에 대한 전도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흑인 과 노예들은 대대적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부흥회에 백인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흑인이 순회 전도사로 임명되어 흑백이 통합된 신도 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1816년에 흑인들은 그들만의 독립적인 흑인감리 감독교회 African Methodist Episcopalian Church 교회를 세웠다. 루이 지애나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침례교회는 자유흑인 월리스 Joseph Willis 가 1814년 치코 바이유에 세운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보이지 않는 교회” invisible church라는 노예들만의 기도회를 깜깜한 밤중에 깊숙한 숲 속에 서 백인의 눈을 피해 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프리카의 주술적 전 통을 기독교에 가미하여 성령이 내려와 종교적 황홀경에서 실신할 때까지 밤새 노래하고 춤추며 예배하였다. 흑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개 문맹이었 음으로 그들은 구전적 능력으로 설교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흑인의 예배양 식에 많이 전하여 내려온다. 22)
종교에 있어서 다양화의 추세는 드디어 1833년에 매사추세츠주에서 앞 으로는 어떠한 특정한 종교를 지원하지 않기로 하는 법의 수립을 보았다. 이로서 미국전체에서 특정종교를 지원하는 모든 법률이 지방적 차원에서도 일소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화 속에서도. 영국계 미국인의 주도권 은 무너지지 않았다.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교회에서 보여졌던 뚜렷 한 변화 중의 하나는 침례교가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교단은 앞으로 1세기간을 감리교와 우위를 다투면서 경쟁을 하게 된다. 예 를 들면 1820년대부터 일세기 동안은 감리교가 침례교를 능가하면서 제 일위의 교단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침례교가 다시 제일의 개신교단 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장로교도들은 19세기부터는 더욱 더 발달되는 교통망을 따라 아팔래치아 산맥 넘어 서부로 전진했다. 이 교단은 팽창해 가는 이 지역에서 사회적 지도 자를 배출하면서 변경사회에 일종의 질서를 가져다주는데 기여하였다. 반면, 18세기에는 원래의 퓨리턴 그룹들을 하나 하나 흡수하면서 그 교세가 커갔었 던 조합교회가 19세기에 들어서자 약화되었다. 장로교와 조합교회는 1801 년에 통합안 the Plan of Union을 세움으로써 합치려는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은 장로교의 교세 확장에만 이익을 줌으로서 1837년에는 깨어져 버렸 다. 한편 1827년에 장로교회와 조합교회가 혼합하여 예수의 사도들 the Disciples of Christ이라는 교단을 수립하고 주로 성공회, 그러나 감리, 침 례교도들도 흡수하며 성장하여갔다. 그러나 후에 이들은 장로교로 재편성되 었다. 이렇게 19세기 전반에는 감리, 침례, 예수의 사도들 같은 변경의 종교 가 미국의 3대종교로서 새롭게 자리를 굳혀 갔다. 23)
이 시기를 마감하는 종교의 특징은 종교권이 노예제도의 논쟁에 휘말려 들어 남북으로 분열된 것이다. 미국 영토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미시시 피강을 넘어 태평양에 다다르게 된다.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남북부의 대 결은 표면화되었다. 자유노동을 근거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북부와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농업경제체제 하에 있었던 남부 지역은 서로 다른 생 활양식을 키워갔었다. 이 두 지역은 새로이 확장되어 가는 미국의 영토에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으며 이는 결국 전쟁을 몰고 왔다. 두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심리적 갈등은 교회마저 분열시켰다. 감리 침례 양 교회가 1844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남북교회로 각각 분열하였고. 장로교는 1837 년에 분열의 위기를 넘겼으나 결국 1861년에 완전히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성공회에도 지역갈등의 문제가 있었으나 분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24)
북부교회에서는 노예제도를 비판의 눈길로 보는데 반해, 남부의 교회들 은 성경에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라는 구절은 한 마디도 없다고 탄탄히 맞 섰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을 자자 구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근본 주의적 경향을 남부에서 심화시키는 바탕을 마련하여 주었다. 또한 노예주 들은 온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노동자들을 경제적 이해타산의 눈으로만 보 는 북부의 사업가들 보다 기독교적 덕목을 더 많이 실천한다고 남부인 들은 주장하였다. 분열된 교회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다시 통일되지 못하다가, 감리교가 1939년에 통합되었고, 장로교는 1980년대에 가서야 분열의 상처가 아물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끝내 통합을 못 이룬 채, 남침 례교는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세력이 됨은 물론,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이 되었다. 25)
지역갈등으로 한때 침체되었던 기독교는 남북전쟁을 치루고서 일차대전 이 일어날 때까지 다시 번성하였다. 19세기 후반은 도시화, 산업화의 시대 로서 노동조합과 근대적 대학들이 등장했던 때이다. 유럽에서 이러한 시기 는 반기독교적 시대로 특징 지워진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도시가 자라 남과 더불어 교회도 커졌다. 중요한 원인은 이민의 유입에 있다. 이 시기에 는 동남부 유럽에서 이민이 많이 들어와서 가톨릭 교세가 확장되었다. 기본 James Gibbon신부의 지도하에서 가톨릭교는 미국 사회가 밟고 있는 다양 화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가톨릭교도 들은 스페인 전쟁과, 일차대전 의 참전을 찬성하며 애국심을 입증하였다. 또한 노동계층을 지지해 주면서 미국의 노동운동이 반기독교적으로 되는 것을 저지하는데 공헌했다. 이 시기 에 미국의 가톨릭은 진보적 경향을 띄게 되어서 교황청은 1908년에 미국 가 톨릭교회를 신앙(수도)선교회 the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산하에서 제명하고 그것은 더 이상 가톨릭 신앙전파의 사명이 부여된 교회 mission가 아니라고 선포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 가톨릭교 회는 충분히 성장하여 세계의 교회권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었다. 26)
소수민족들이 세운 다른 하나의 교단은 동방정교였다. 미국이 알라스카 를 매입함과 함께 러시아정교회가 미국에 수립된 이래, 이민의 유입으로 다 양한 동유럽교회들이 세워졌다. 어떤 이 들은 이들이 개신교, 가톨릭. 유대 교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제4의 종교세력 이라고도 말한다.
또 하나의 눈부신 성장을 한 교회는 흑인들의 교회였다. 흑백격리주의는 이 시대의 흑인들을 다스리던 제도였다. 교회도 흑백 분리되어 운영되었으 며, 흑인들은 핍박 속에서 그들만의 교회를 일구어 나갔다. 특히 일차대전 당시 북부의 도시로 대거 이주하였던 흑인들은 도시에서 교회의 팽창을 가 져왔으며 흑인교회들은 대학과 함께 흑인지도자들을 키워나갔다. 교회는 흑인들의 생활과 정신의 터전이었다.
한편, 대기업의 독점시대에 기독교는 기업 총수들을 신에 의해 선택된 자, 그들의 선행과 능력에 의해 성공한 자로 찬양하는 사회다윈주의 Social Darwinism를 수용하였다. 노예폐지에 열렬하였던 리만 비처의 아들, 헨리 워드 비처 Henry Ward Beecher 목사는 이제 기업가들을 예찬하였다. 27)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기독교는 새로이 나타나는 빈곤층의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복음운 Social Gospel 도 대두되었다. 라우센부시 Walter Rauschenbusch 교수나 글래든 Washington Gladden 목사는 정부의 독점기업에 대한 규제와 사회복지정책을 교회세력이 지원해 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호소에 감리교가 먼저 응하였고, 1908년에는 개신교들이 교회연합위원회 Federal Council of Churches를 수립하여서 교파 간의 협력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강 조하였다. 이 조직은 순수히 복음주의적인 것에 대한 추구보다도, 도시의 위생, 빈곤, 노동자와 농민들의 소외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흑인, 여성, 음주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1차대전 후의 호황과 "정상으 로의 복귀" Normalcy는 사회복음주의를 침체시켰다. 28)
이렇게 종교판도가 더욱 다양해진 19세기 후반에도 개신교는 미국 기독 교의 중심이었다. 1906년의 통계를 보면, 가톨릭이 10,658,066명인데 비 해. 감리교와 침례교신도들이 각각 5백만을 넘었으며, 게다가 흑인 침례교 를 더하면 그 숫자가 더 커졌다. 장로교와 루터교는 각각 2백만이 넘었다. 장로교와 루터교는 1900년까지 비슷한 강세로 성장하였으나, 그때부터 유 럽이민의 증가와 더불어 루터교도가 늘어나서 현재 그 수는 장로교도의 배 가 된다. 그 뒤를 이어 교세가 큰 차례로 나열하면. 예수의 사도들, 성공회, 조합교회, 몰몬교, 그리고 소수의 개혁교회와 퀘이커교도 들이 개신교를 구 성하고있었다. 29)
19세기 말에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유럽의 사조가 미국으로 유 입되어 성경의 진위에 대하여 고증적 역사적 연구가 유행하게되었다. 게다 가 다윈의 진화론은 성경에 대한 비판을 가중했다. 1차 대전을 겪으면서 부 유하게된 미국은 세속화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현대의 기술문명이 가져 다주는 풍요 속에서 현대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가깝게 살게되었다. 종 교생활마저도 변화하였다. 특히 라디오 출현은 이제 교회를 주일에 정기적 으로 가지 않고도,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종교를 세속 화 시켰다. 사람들은 성경책 대신에 프로이드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게되었 고, 종교가 가르치던 도덕적 억제 대신에 본능을 예찬하며, 그것은 결코 죄 악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하여가고 있었다. 자동차의 출현은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 단위로 치르던 마을의 행사를 타 지역으로 확대하였고, 젊은 이들은 이제 다른 마을이나 도시로 가서 해방을 맛보았다. 스포츠, 영화, 재즈등 대중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이에 반해 교회의 신도 수와 출석 율은 떨어져 갔다. 30)
이러한 종교적 진보주의, 근대화, 세속화에 대하여 개신교에서는 보수적 반응이 일어났다. 사회복음주의에 대항해서 보수파들은 전천년왕국설 pre-millenialism을 주장하였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 까지 이 세상 은 더욱 험악해져 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회복지는 부질없다는 것이다. 성 경비판과 진화론에 대해서는 프린스턴을 중심으로 하여 성경은 절대 그릇될 수 없다는 성경무오설 Infallibility of the Bible이 퍼져나갔다. 1차대전 후 에는 세계기독교근본주의협회 World Christian Fundamentalist Association가 19l9년 조직되어 로우즈 Curtis Lee Laws같은 침례교 지 도자와 매킨 J. Gresham Machen과 같은 장로교, 또 브라이언 William Janings Bryan과 같은 평화주의자들이 성경무오설을 믿는 근본주의 Fundamentalism의 대열에 합세하였다. 31)
이들은 사라져 가는 미국 본래의 모습, 농촌적이며 신과 함께 하는 앵글 로 색슨적 이상향을 그리워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모든 산업, 도시, 기술 문명을 유발한 주범으로서 과학의 발달에 반감을 가지게되고, 결국 다윈주 의 Darwinism를 과학의 전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스코프 원숭이 재판 Scopes Trial에서 과학에 대항하여 성경책을 가지고 맛 서게 되었다. 또한 외국인은 가톨릭이거나 사회주의자 아니면 무정부주의자로서 미국사 회에 백해무익하다고 여기면서 가톨릭, 흑인, 유태인들을 혐오하였다. 이렇 게 이시기에 미국의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산업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풀 어가려는 노력을 하며 사회개혁 세력의 밑바탕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미 국의 근본적 동질성을 다시 찾기 위해 보수 배타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러나 보수진영과 싸우기에는 다른 관심사 들이 많았다. 그들은 금주운동이나 1928년 가톨릭 대통령 후보를 제어하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뉴딜 시대에 가톨릭은 뉴딜에 대한 찬반 양 진영으로 나뉘어졌었고, 1차 대전 중 개신교 지도자들은 평화주의자와 참여주자 나뉘어졌다. 참여주의는 니버 Reinhold Nibuhr같은 이들의 나치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 때에 미국인들은 거의 대부분 추축국을 응징하는 것에 찬성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적 합의라기 보다는 시민적 종교나 미국인 동일성의 표현이었다. 32)
전후 아이젠하워 시대는 미국의 황금기였고 미국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 적으로나 만족하고 있었다. 우방에 무상원조를 지원하였던 미국은 세계적 인 주도권을 행사하며 청교도적 사명감을 세계로 확대하였다. 이제는 신대 륙 뿐 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지상낙원을 세워야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였고 그것을 격파하기 위해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다 시 결속하였다. 기독교는 다시 부활되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산층이 퍼 져나가던 교외에서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깔끔히 치장하고 전 가족이 우아 하게 교회에 나가는 것이 생활습관으로 자리잡았다. 33)
중도파나 우파의 개신교도들, 그리고 거의 모든 가톨릭교도는 반공이념 을 지지하였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교파와 교단의 벽을 넘어 연계되었다. 1951년에는 전국교회위원회 National Council of Churches가 형성되어 초교파적으로 기독교인의 유대를 공고히 다졌고, 제2차 바티칸회의 (1962-65)에서도 교황 요한 13세는 기독교인의 연대감을 강조하였다. 또 한 전국기독교-유대인회의 the National Conference of Christians and Jews도 수립되었다. 이렇게 종교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바로 가톨릭교도인 케네디를 19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던 밑거름이 되었다. 킹목사 Martin Luther King는 기독교 정신 위에서는 인종마저 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학자 허벅 Will Herberg은 미국에서 개신교-가톨릭-유대교가 연대하여 미국민의 생활과 종교에 하나의 공통적 양식을 세우는 것이 바람 직하다고 주장했다. 34)
1960년대에 접어들자 그러나 미국 사회에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교외에 서 풍요롭게 자라나던 '베이비 붐' Baby Boom세대가 성년에 다다르려하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획일적으로 사는 중산층 문화에 반발하게된다. 그들은 경제공황을 겪으면 서,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부모들의 가치관을 냉소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버이들 이 존중하는 현실적 사회체제를 부정적 눈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 은 머리를 기르고 록켄롤 음악을 듣고 이국적인 것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소외계층과 빈곤층, 특히 흑인과 소수민족들의 문제에 눈길을 돌리고, 냉전 의 가치체계를 의심하며 베트남전쟁 반전운동을 하였다. 35)
그 결과, 1970년대 경에는 문화다원주의 Multiculturalism가 미국의 사회에 퍼져갔다. 이 신 사조에 영향을 준 것은 더욱 다양해진 제3차 이민 의 물결이었다.1963년 이민의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스페인계와 아시아계 이민이 몰려들었다. 같은 해에 학교에서는 기도시간이 폐지되었다. 성해방 의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고 이혼율이 높아 갔다. 선불교나 요가 초월적 명 상등과 같은 신흥종교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대두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전통적 기독교는 극심히 약화되었다.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비 기독교적 문화가 당당히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정기적으로 교회를 가는 사람이 소수 로 떨어졌다. 가톨릭교회의 신도 수도 적어졌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미 국의 일체감에 도전하고 있었다. 36)
미국의 영화는 그러나 1973년의 기름파동 Oil Shock으로 한풀 꺾이기 시작하였다. 1970-80년의 스테그플레이션 Stagfaltion의 경제적 침체를 겪으면서 위대한 사회를 이루려는 꿈은 요원하게 보였고 미국인들은 다시 금 미국의 이상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되었다. 1976년 카터의 당선 을 도운 것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었으나. 그는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 러나 4년 후 그의 뒤를 이었던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이 보수주의로 회기 함을 의미하였다. 그 동안 진보적 기독교와 문화다원주의의 물결에 억 눌려 기세를 못 펴던 미국의 보수파들은 이제 다시 전면에 나타났다. 1925 년 이후 잠잠했던 근본주의가 보다 온건한 복음주의적 부흥회를 열며 재조 직되었다. 그레험 Billy Graham 목사나 병을 고치는 로버츠 Oral Roberts는 대규모의 신도들을 모았다. 이들과 함께 또 남부 빈민층에서 시작한 방언으로 성령과 교류한다고 믿는 오순절파가 중산층에게로 확산되었다. 이들 보수진영은 텔레비전으로 복음주의 예배를 전파하면서 시청자들 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7)
이들 종교적 신우파는 미국시민들이 도덕성을 회복하여야한다고 부르짖 으며 자신들은 숫적으로는 소수이지만, 도덕적으로는 다수라는 의미에서 도덕적 다수 Moral Majority로 뭉쳤다. 이제 지난 시대의 그릇된 가치관, 마약과 성적 문란, 도덕적 붕괴로부터 일어서서, 미국인은 다시 기독교인으 로 태어나야한다는 새로 태어나기 Born Again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외친다. 이 운동을 이 끄는 것은 신보수주의의 세 축인 근본주의, 복음주의, 오순절파이다. 이 보 수진영은 개신교가 주축이 되었으나 가톨릭 세력도 가담하였다. 그들은 낙 태반대, 포르노의 금지, 동성연애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런 이슈들에서 미국민들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 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도덕성을 한 꺼풀 제켜보면, 낙태의 문제 는 저소득 노동계층 여성들의 생계문제와 직결된다. 미국에서는 많은 홀어 머니 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부담을 안고 있으며, 그들에게 출산의 선택권이 없다면 전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경제적 현실이 낙태반대를 단순한 도덕적 차원에서만 볼 수 없게 만든다. 이에 따라 이 문제는 미국 내 소득 계층간의 갈등이나 이민족 구성원 간의 갈등의 문제로 확대된다. 또한 포르 노의 문제도. 어디에서 포르노와 예술을 구분하는 선을 긋느냐는 오래된 쟁 점과, 어떻게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이 없이 사회적 윤리체계를 세 우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동성애 문제 또한 복잡한 양상을 내 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들의 결혼의 요구 등을 관습적인 감정이나 도덕율로서 단순히 무시해 버리기에는, 재산상속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차 지하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우선권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재산권이 침해 당할 수 있다. 한편, 동성애자의 개인적 권익보호를 위해 군대나 그와 유사 한 조직에서 그들을 수용하기에는 조직의 기강혼란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외에도 보수주의자들은 학교 기도시간의 재수립, 군비확장,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 등에 성원을 보내며 극우적인 기독교인들은 낙태전문병원을 폭파하는 등 테러행위 까지도 전개하고 있다. 38)
1990년대 현재 미국에서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은 시민 공동의 종교를 외치면서 미국이 다시 하나의 정신적 세력으로 뭉치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다원주의가 미국의 가치체계를 재편성한 후에 미국이 예전과 같은 일원적 세계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보인다. 보수주의로의 회귀 후에는 교회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람의 수가 훨씬 늘어서 다시금 종교가 부활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아직도 40%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종교적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출생과 사망을 그리고 대부분의 결혼도 기독교 예식으로 치루고, 어린이들의 교육 에도 기독교적 덕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생활양식에는 기독교적 덕목들이 시민적 덕목의 근원으로서 변함없이 들어있다. 미국의 주된 종교가 복음주의적 개신교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미국인은 특정한 한 종교를 미국의 공식적 종교로서 세우는데는 여전히 반대하며, 종교는 개인적 선택에 달려 있다는 데는 거의 누구나가 동의하고 있다.
1) Masrtin Marty. "North America." in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Christianity. ed., by Johr McManners (Oxford Univ. P., 1990). 384.
2) Marty. "North America." 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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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arty. "North America."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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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hlstrom. A Religion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265-279.
12) Ahlstrom. A Religion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214-219.
13) Hudson. Religion in America. 59-82.
14) W. W. Sweet. ed., Religion on the Frontier: The Baptists 1783-1830 (Cooper Square Publisher. 1964 [1931]): Religion on the Frontier: the Methodists. 1783-1840 (Cooper Square Publisher. 1964 [1946]).
15) Christine Leigh Heyrman. Southern Cross: The Beginnings of the Bible Belt (Univ. of North Carolina P., 1997). 77-116.
16) Heyrman. Southern C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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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52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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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Marty. "North America." 408.
30) Onlly Yesterday: An Informal History of the 1920's (John Willey & Sons. Inc., 1997 [1931]).
31)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Macmillan Co., 1923): George F. Mardson. 박용 규 역<근본주의와 미국문화> The Shapping of Twentieth 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 (생명의 말씀사, 1997). 110-124.
32) 니버에 대해서는 David F. Wells편, 박용규 역, <남부개혁주의 전통고 신정통신학> Reformed Theology and Neoorthodoxy. ( 도서출판 엠마오. 1992). 159-224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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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주형. 김형인 외 공저, 『미국현대사』 (비봉출판사. 1996). 17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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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Gaustad. A Documentary History of Religion. vol. 2. 576-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