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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딱지
올 한해도 시속 55KM로 달려왔고 종창 역에 다 달았다.
밖에 나와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려다 보니 온통 눈 꽃송이가 그들만의 자태로 뽐내고 있다.
친구가 자신의 종업원들과 메기 양식장을 보수하고 있는데. 하얀 설원에 사람과 포크레인 장비로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먹고 살려고 눈보라에 고생을 하지만 흡사 파괴자처럼 보였다.
문득 잘 조합이 댈 것 같이 않은 두 친구들을 떠 올리며 자판기를 두드린다.
두 사람은 15년전 내가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흔한 얘기로 껌 딱지라고나 할까 붙어 다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술 고래다. 다른 한 명은 나와 같이 술 한잔도 못한다.
한 친구는 승마 사냥 싸이클 수상 스키 축구 골프... 머리에 물도 들이고 언젠간 긴 머리를 묵고 다녔다.
다른 친구는 보수적이면서 바른 생활의 표본 중 한 사람이다. 그 친구를 처음 안 것은 고등 학교를 청주로 다니면서 알게 됐다. 부강에서 청주로 통학을 하는 데 부강 버스는 남자 애들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타질 않았다. 왜냐하면 부강은 매우 드셨고 잘못 걸리면 아침부터 얻어 터졌기에 신탄진 버스를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부강에서 청주로 나오는 버스는 좀 한량 했고 신탄진 버스는 매번 만원으로 아우성을 쳤다.
내가 그 친구의 모습을 떠 올리면 그때는 이해 못했던 30년의 긴 오해를 생각나게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가 지역 차이로 달랐고 그날도 버스 제일 뒷 자석으로 세광 고등학교 같은 학년이 끌려 들어가 양쪽에 두 사람이 팔을 잡은 상태로 얻어맞았다.
이유는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혹크도 열어 놓은 불량스런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고 맞는 것이다. 맞는 입장에서는 황당할 것이다.
같은 학교 선배도 아니고 같은 1학년들이 불량스런 자세를 빌미로 군기를 잡으니 처음에는 반항 했지만 매를 더 벌 뿐이다. 2~3 학년 선배들도 말리거나 창견 하는 일이 없었다.
그 친구는 부강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짱 이었다.
문제는 배경이 좋았다. 아버지는 샷시 공장을 했고 고무부가 중앙정보부에 계셨다.
웬만한 사고로 경찰서에 가면 고모부 전화 한 통화로 사건 종결이다. 그러니 무서운 게 없었다. 충북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은에 짱과 붙어는 데 발목을 불어 트려 퇴학 처분 됐고 대전에 충남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발목 부러트린 애는 럭비 선수인데 그 후로 럭비를 관 둘 수밖에 없었단다.
문제는 충남 고등학교로 전학 한 후 텃세로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결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다른 학교에서 결투 신청이 왔었단다. 싸움 장소에서 자신이 충남고로 오게 한 사건의 친구가 참관자로 나온 것이다. 반가워서 얀 마하면서 너 어쩐 일이야, 하니 그 친구가 안면 몰수를 하더란다. 처음엔 아직 분이 덜 풀려 그런가 했지만 순간 적으로 그도 짤려서 대전으로 온 같은 처지에 친근감이 오더란다.
그래서 야 누구야 하고 이름을 부르니 그가 난 “누구가” 아니다, 네가 부른 이름은 내 형이다. 발목 부러트린 쌍둥이 동생 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보은에서도 청주와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오게 됐는데 그 쌍둥이 동생이 그날 결투 하게 됄 학교에 짱 이었고 참관자로 나온 것이었다.
형을 아느냐‘ 자초지중을 듣고는 그날 결투는 없었고 그 후로 친한 친구가 됐단다.
그 사건 후로 누구도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짱 이었고 돈도 빽도 있는 부강 작은 지역에 황태자 였다.
선배들도 그를 경계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감히 어쩌지 못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그런 친구가 날개가 부러진 것은 부강 지역에 서원 대학 유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투자 브로커가 활개를 치고 많은 지역 사람이 대박을 꿈꾸며 모든 여력에 돈을 모아 투자를 했다, 내 아버지도 작은 아버지 퇴직금 까지 그때 돈 삼천만 원을 투자 했다가 때이고 25년이 지난 몇 년 전 서원 학원 측과 이천 만원에 사건 종결 합의에 서명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언젠가는 그 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교육 제단 돈 쉽게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때 보증 선 것으로 그 친구 아버지 공장을 처분하게 됐고 그도 실직자가 됐으며 보너스로 신용 불량자가 된 것이다.
남편이 실의에 빠지자 구원 투수로 집 사람이 미장원을 차렸고 20여년을 그는 직업이 없는 건달이 됐다. 부강 면 방범 대장, 그의 직함은 장대장이다. 봉사 활동으로 시작한 방범대에 17년 정도 활동 했으니 누가 뭐래도 인정 할 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랬다 .
조화롭지 못한 조합이 껌 딱지처럼 부터 다닌 게 그때 방범 활동에 관리 대상 1호가 처음 언급한 설원 파괴자 친구였을 것이다,
장 대장 그 친구는 45살에 직장을 얻었다.
지역 한나라당 위원장과 세종시 편입 반대 위원장으로 활동 했고 그 활동이 부용 공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10여년을 지내고 있다.
내가 그 친구를 오해 했다고 한 것은 50살이 지난 후 많은 시간 속에 그를 이해하고 삶에 빈 틈 없는 친구구나 더군다나 그는 보기드믄 효자다. 지금 그에 아버지가 신탄진 보은 병원에서 삼년동안 투병 생활을 하는데 매일 저녁 병원에 간다. 내 기억으로 거른 날이 없다.
참으로 대단한 친구다. 내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 효심이 지극 정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여자들에게 눈 돌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헛 튼 일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다.
바른 생활 어린이다.
껌 딱지가 된 계기가 내가 내 삶에 마지막 열정이 된 베드멘트 일 것이다.
그 친구들은 16~17년 전에 베드멘트 부강 대표로 전국을 석권했다. 그때 흘린 땀이 둘이 껌 딱지가 된 것이다.
내 사진이 카페에 올라 갈 때마다 배 나온 게 도마에 오른다.
몇 년 전에 87키로 일적만 해도 그리 흉하지는 않았는데 천식이 있은 후로 운동을 할 수 없고 약의 어느 성분 때문에 소화기에 문제가 되고 살이 찔 수박에 없는 악 순환이 계속 됐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생애 마지막 열정일 것이라 했다.
55년 삶
내 자랑 좀 하련다.
난 하루는 쉬고 하루는 놀고 이틀은 휴가고 삼일은 여가를 즐긴다.
애들 대학 보냈고 크게 빚지고 살진 않는다. 벌어 논 돈은 없다. 남들한테 얻어먹으면 한 끼 사면서 산다.
전선이 친구가 그라더라 시간 많은 사람이 제일 부자라고 그런 것 같다. 난 직원이 없음으로 월급 줄 걱정 없다. 사업 구상이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참으로 싱거운 인생을 살았다.
잡기라면 나만큼 하는 사람 드물 것이다.
바둑 아마 5단이고 장기는 길거리에서 내기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이길 정도이니, 그랬다. 초등학교 4 학년 때 장기를 처음 배웠고 고등학교 삼학년 때 하숙집에서 장기 프로 삼단에게 배웠기에 내 실력은 프로 실력인 것이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학교 다닐 때 난 탁구를 못 쳤다. 문학 동아리 공시적으로 회장 이었다, 원래 회장은 학점이 B 이 안되어 내 이름이 등제 되고 동아리 회장은 두 명이 된 것이다.
동아리 회원들이 탁구장을 가자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 갔다. 원래 다른 날에는 수업 마치면 당구장에 살았다 그때 삼백 쳤으니 알만 할 것이다
탁구장에서 웬만한 여자애들 한 테도 졌다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탁구장 주인이 공무원으로 정 년 퇴직하고 건물도 자신의 것이며 소일 걸이로 탁구장을 하고 있었다. 돈 때문으로 탁구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분은 몇몇 친구들이 장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하루는 회원들과 탁구장에 갔는데 주인어른한 분만 계셨다
탁구에 관심이 없었기에 어르신 한 테 장기 한수를 청 했다.
따분한 시간에 장기를 청하니 흔 쾐이 응 해 주셨다. 세 판 두면 6대 4 정도로 내가 우위를 차지했다. 난 외통에 남 다른 수를 알고 있다 장기 삼단 한 테 배운 탄탄한 실력이다
어르신은 친구들 중에 가장 고수였단다. 감히 자신을 이기는 실력자는 별로 만나보지 못했는데 새 파란 손자 벌 한 테 실력이 밀리니 자존심도 상하고 한편으로 대견해 하시는 것이다.
어르신은 내기를 걸었다 장기 세 판에서 자신을 이기면 탁구 비를 받지 않겠다는 타이틀이다.
그 후로 어르신은 탁구 비를 거의 반값이나 음료수 값만 받았다.
나와 장기를 둘 때면 다른 어르신들이 내 편을 들어준다. 자신들이 매일 졌던 분풀이를 내가 해 주었던 것이다.
동아리 회원들은 탁구장에 날 대리고 가려고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내가 가질 안아도 탁구 비를 반값으로 해 주신다는 것이다.
탁구를 배운 건 군대 GOP 6개월 반 동안 할 일이 탁구 칠일 박에 없었다, 군견 병 취사병 면접 병 포병 이들은 나와 같은 파견 병이다. 그들은 업무가 있는데 난 위생병으로 특별한 업무가 없다 자고 싶으면 자고 눈 뜨면 생리 현상 해결하고 시간 남는 취약 사병 찾아 탁구 치는 게 내 업무였다. 그 때 배워서 현대 자동차 다닐 때 전국 노동자 탁구대회 우승자와 어깨를 견줄 실력이 되었다.
고 스덮 훌라 포커 섯다, 승률 60%로 결산하면 득이 많다. 빠징고도 삼년 삼 개월 했다.
낚시, 바다낚시 15년 에이급으로 울산에서 삼년 반 코리아 낚시점을 했다. 전국 구석구석 고기 나온다면 다 돌아 다녔다, 내 눈에는 경치가 보이는 게 아니고 낚시 포인트만 보였다.
골프 입문 11개월에 싱글이고 2013년 세종시 챔피언 이었다.
세종시 챔피언 그리 할 수 있기 까지 얼마나 골프장을 빠댔으며 투자는 어느 정도 했을지 상상에 맡기겠다.
그 후에 예수님을 만났다.
복음을 믿고 진리를 알고 남들이 싫어하는 예수님 증거로 등 돌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성경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기독교가 개독교라 일컬어짐을 실감하며 산다.
장로 감리 성경 침례 순복음 .... 모두 배교로 지옥으로 가고 있다. 세상사람 기준에 그리스도인이 개독교인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제 난 죽음과 싸운다.
몸무게를 85키로 이하로 줄이는 게 내 목표다.
담배 끊기 힘든 것 난 한 번에 끊었다, 2002년 1월31일 .
열정에 인간 독종의 삶.
군대부터 휴가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죽어서 하나님 만나면 잘 쉬다 왔습니다. 해야 할 것 같다.
설원 파괴자 친구는 가끔 말한다.
젊어서 고생 쓰잘 대 없는 헛소리라고 자신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나라는 것이다.
베드멘트 목표는 몸무게 줄이는데 설정 되었다. 92킬로 천씩으로 백 미터 걷기도 싫어한 내가 한 시간씩 달라고 있다 지금 휴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장대장 그 친구가 나와 동급 몸무게 였는 데 매일 뒷산에 올라 지금 85키로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내가 저랬었다가 자랑이다.
내년 꽃피는 4월이면 나도 85키로가 돼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마지막 열정을 다이어트에 걸었다.
암 치료를 위해 염산을 마셔서 암은 치료 됐는데 장에 이상으로 죽으면 무엇을 한 것이냐고 장 대장 친구가 말한다. 무리한 런님으로 무릎에 통증이 있는데 조금 씩 걸으며 몸무게 줄이려 한다.
운동 할 수 있을지 걱정 했는데 천식도 내 열정에 길을 열어주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자랑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 때문에 세상에 아등바등 사는데. 예수의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타향이며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로 개죽음을 맞이한 유 병언은 세상도 돈도 사랑치 말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거짓 목사를 표본으로 보여준 것이다.
내 자랑만 싫 컷 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