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효자는 조선 말기에 전라도 순천도호부 여수면 학동(全羅道順天都護府呂水面鶴洞) 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효성과 우애로서 정려를 받았다.
*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사는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조선은 유교사회로, 충신, 효자, 열녀를 장려하였는데, 특히 효자와 열녀는 오상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약 임금님을 향하면 충성심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여 전국에서 효자와 열녀를 찾아내어 정려를 하사하였다.
* 오상(五常) :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도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정려를 받으면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고, 심지어 벼슬에도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너나없이 효자가 되고자 노력했고, 도가 지나치다보니 지금이면 범죄행위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여성학대가 일어나기도 했다.
비슷한 문서는 집집마다 매우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발의에서 시작하여 결과를 기록한 책과 첨부자료까지 전해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쌍효자는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연촌공 남원종회 참봉공파 22세
최창호(崔昌昊) 족보 이름 한호(翰昊) 자 문신(文臣)
최창민(崔昌旻) 족보 이름 한민(翰旻) 자 문호(文浩)
해동명신록에 수록된, 문종 때 예문관 직제학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선생의 17세손. 중종 때 이조참판 암계(巖溪) 최연손(崔連孫) 선생의 14세손.
연촌 선생은 사액서원인 녹동서원과 주암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녹동서원(鹿洞書院) :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1630년(인조 8) 존양사(存養祠)로 건립, 1713년(숙종 39) 사액.
주암서원(舟巖書院) : 전북문화재자료 제21호,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1774년(영조 50) 주암사(舟巖祠)로 건립되어 1777년(정조 1) 주암서원이 되었다.
현재 주암서원이 있는 자리는, 1460년 최연손 선생이 태어난 생가 터로 주암서원에는 최연손 선생도 배향되었다.
최연손 선생은 성종실록 성종 11년 2월 28일 : 처음에 생원은 최연손, 진사는 이오 등 각각 백 인이다(初生員崔連孫進士李鰲等各百人)
성종 11년(1480) 진사 3등(三等) 48위.
성종 20년(1489) 식년문과 병과 16위.
쌍효자의 선조는, 전라도 남원도호부 지사방 주암촌(全羅道南原都護府只沙坊舟巖村)에서 살았는데, 지금의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이다.
* 주암촌(舟巖村) : 최덕지 선생이 남원 부사 시절에 개척한 마을.
* 북창(北倉) : 최덕지 선생이 남원 부사 시절에 세운 군량미 창고.
* 최주(崔淍) : 최덕지 선생의 장남. 남원종회 입향조.
쌍효자의 증조부 최당(崔溏, 1773~?)이, 남원도호부 지사방 주암촌에서, 1800년 무렵에, 순천도호부 소안면(全羅道順天都護府蘇安面, 지금의 순천시 용당동 일대)으로 이사하였다.
어쩌다가 가문에 불행한 일이 닥쳐서 매우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멀리 이곳까지 흘러 들어와서 살고 있다(有何家禍之孔慘而流落於此土)
1840년(헌종 6), 쌍효자의 아버지, 최광수(崔光守)가 사망하였는데, 최창호는 15세, 최창민은 6세에 불과하여, 말하자면 고아로서 소년가장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호구단자에,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산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살림살이가 그다지 옹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쌍효자의 누님이 창원정씨와 혼인하여, 순천도호부 여수면 학동(全羅道順天都護府呂水面鶴洞)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쌍효자 형제는, 누님을 따라서 학동으로 이사하였다.
최창호는 학동에서 사망하고, 최창민은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全羅道光陽縣津下面莊峙里)로 이사하였는데, 지금의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장재마을이다.
주암보에, 할아버지 최성선(崔成善)의 묘소가, 광양현 진하면 망덕산 아래 동남향(墓光陽津下面望德山下亥坐)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 묘소를 지키기 위해, 이사를 한 것 같다.
* 주암보(舟巖譜) : 1859년(철종 10) 주암서원에서 간행한 암계공(巖溪公) 최연손(崔連孫) 후손 파보.
쌍효자 후손은 1970년대 이후까지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장재마을에서 살았으며, 지금은 대부분 객지에 나가서 살지만, 아직도 뿌리는 그곳에 두고 있다. 또한 뒷산에 선산이 조성되어 있고 앞에 쌍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帖行府使爲差定事座首差定爲遣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下幼學崔昌昊準此辛酉八月日
체지. 이것은 부사가 발령하는 인사명령서임. 좌수로서 합당한 사람을 임명하여 내려 보내니 임명장과 대조해보고 시행할 것. 이 체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 유학 최창호를 이와 같이 임명함. 1861년(철종 12) 8월 모일.
* 좌수(座首) : 지방자치기구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 유학(幼學) :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선비.
1861년(철종 12) 최창호는 38세 젊은 나이로 좌수가 되었다.
최창호는 순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컸던 것 같다.
15세에 고아가 되어 누님을 찾아 이사를 온 소년가장이 23년 만에 좌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