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금 산 강원도 인제 출생 춘천사범학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강원일보에(1963,7,3) 「날개에 부쳐」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 시작 동시집 :『다람쥐 운동장』『하늘도 잠을 자야지』 『별씨 뿌리기』『그냥 두렴』『알수가 없다』 『저 주실래요』 시집 : 『낙엽 속의 호수』『내린천 서정』 『여울물 소리』 『어머니의 달걀』『겨울 바다를 팔아요』 『소리질러보고 싶은 날』 한국문인협회 위원, Pen문학 한국본부 회원, 한국동시문학회회원, 대전문인총연합회회원
대전광역시 문화상(문학부문) 한국문학시대 문학상 대상 수상 한정동 아동문학상 수상 E-mail : keumsan004@hanmail.net ☎ : 010-6405-5923 대전광역시 서구 벌곡로 1287번길 56 (가수원동) 표지화 : 오호 임양수 화백
시인의 말 소리 질러보고 싶은 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이유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듯한데 가슴 바닥에서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자꾸만 꿈틀거리는 날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가 인식되지 않을 때, 마음껏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어 진다. 그래서 시를 쓰는가 보다. 깊은 물속에서 공기 방울 하나라도 솟아오른다면 그것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집념으로 굳어질 때, 옹이로 박히고, 그로 인해 가슴을 앓는다. 이런 과정이 연속되는 날은 높은 곳으로 올라 또 소리를 질러보고 싶어 진다. 내 주변을 다듬을 필요도 없다. 이런 과정들이 내가 시를 써온 길이었을 것 같다. 나를 드러내는 것은 쑥스러운 내면들이 공개되어 부끄러운 일이지만 모아 온 것을 펴 본다. 2019년 가을 지은이 한 금 산
차례
1부 사진 한 장 1. 새끼손가락 2. 후진 못해요 3. 고향 4. 철드나 보다 5. 폐백 6. 해동 7. 사진 한 장 8. 햇살도 여문다 9. 아직 있을까 10. 바다는 나에게 11. 봉평에서 12. 옛길 13. 둔내 장터 14. 갈대 15. 여름밤 16. 눈 내리는 날에 17. 숯불 다리미 18. 영글지 못한 것 19. 앵두나무 20. 늦은 가을 들판에서 21. 소리 질러보고 싶은 날 22. 오두막 집 23. 바람이 고맙다 24. 풍접화 25. 폭포 아래 2부 그리고 끝이었다 26. 잊었는데 27. 제비꽃 28. 미안한 마음이 드는 날 29. 빗소리 30. 지우려 해도 31. 바람은 왜 부나 32. 안 된다 33. 떠나간 여인 34. 그때는 노을이다 35. 너만 알리 36. 떠난 자리 37. 바람이 남긴 것 38. 그 마음 39. 그리고 끝이었다 40. 가을 여인 41. 그리움처럼 42. 하얀 손수건 43. 복수초 44. 모래톱에서 45. 눈물 46. 깊은 곳 47. 노을 속 나뭇잎 48. 지나간 여름 49. 국화 50. 잎 지던 날 3부 가시 집 51. 학질 52. 붉어진다 53. 그 해 겨울 54. 산을 보며 55 후회 56. 불쌍한 놈 57. 노을 58. 나도 간다 59. 나대로 살자 60. 소 61. 내 무덤을 내가 만들리 62. 가시 집 63. 번데기 64. 이름 65. 선물 66. 홍수 지나면 67. 본전 68. 별 하나 나 하나 69. 감 씨 70. 해탈문 71. 배흘림기둥 72. 디딜방아 73. 빗소리 74. 달빛 75. 선인장 꽃 4부 소리의 무게 76. 술병 77. 소(沼) 78. 소리의 무게 79. 어둠의 저편 80. 새들의 경전 81. 빗방울의 힘 82. 나이테 83. 광주앝 84. 산사 풍경 85. 늘 채워지는 86. 배추벌레 87. 상감 88. 몽돌 89. 전지 90. 노을이 진다 91. 한 낮 92. 양곤의 밤 93. 하늘 열기 94. 음모 95. 봄 96. 환한 얼굴 97. 마지막 향기 98. 이슬 99. 구도로 100. 영(0)이라는 숫자
1부 사진 한 장
1 새끼손가락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아파서 정형외과에 갔다 사진을 보며 퇴행성관절염이란다
“손가락 힘쓰는 일 하셨어요?” “일은 했지만 새끼손가락이 무슨 힘을 쓰나요?” 새끼손가락도 같이 힘을 쓴단다 조수석에 탄 사람이 다리가 뻣뻣하도록 브레이크를 밟았다더니 이놈 역시 일도 안 하면서 왜 힘을 썼단 말인가 수술도 못하고 약도 없다면서 온수 찜질하고 더 아프면 소염진통제 사 먹으란다 형님들이 일하는데 따라서 힘쓰는 이 녀석 우애 한번 좋다 새끼손가락을 뻗고 힘껏 쥐어 봤다 역시 약하다 힘쓰는 새끼손가락
2 후진 못해요 비켜 갈 수 없는 좁은 길 대형 트럭과 마주쳤다 어느 쪽이든 한 참을 후진해야 한다.
차에서 내려 정중하게 “제가 초보라 후진을 못해요” 어쩌겠나 제까짓 게 안 비켜주고 배겨 오늘은 기분 좋게 대형 트럭을 후진시켰다 내 작은 차가
3 고향 고향을 떠난 것이 뭐 그리 서러울 것까지는 아니지만
비 내리거나 바람 부는 날 또는 꽃 피는 날이나 잎 떨어지는 날 문득 그 계집애 얼굴이 떠오르듯 아스라이 땅거미 기어들 듯 젖어지는 곳이다
4 철드나 보다 나이를 부풀려야 상대를 제압하는 줄 알았던 유치했던 젊은 날
젊어 보이고 싶어 나이를 줄이고 아직은 철이 덜 든 허세가 죽은 어스름 아물거리는 수평선처럼 지난날이 저기 하늘 끝에 섰는데 보이는 것이 다 어둡다 들리는 것이 다 소음이다 일러주는 이 없어도 이제야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나 보다.
5 폐백 조카가 장가를 가는데 폐백 절을 받으란다
절을 받으면 덕담을 해야 한다기에 “잘 살아라 라고 얘기들을 하는데 잘 살아서는 안 돼!” 신부가 눈이 동그래지며 쳐다본다 “그냥 잘 살면 안 되고 아주 잘 살아야 해” 신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6 해동 유난히도 추워 두껍게 얼었던 강물 슬며시 녹았으면 좋으련만
얼음덩이 꺾이며 사납게 흐르던 날 아! 올해는 격랑의 소용돌이로 어지러운 한 해 보내겠네 겨울을 되갚아 주겠네 살이 찢기는 아픔 겪으며 눈물 흘릴 틈도 없이 사나운 여름 오겠네 해동기의 얼음 풀림이 한 해를 점치고 있네
7 사진 한 장 어린 날 내 고향에는 조금 실성한 듯이 보이는 도인(?)이 있었다 항상 홀치기를 지고 다니며 동네를 배회하고 주문같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다녔다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늘 두리번거리고 다녔다 먹을 것이라도 주면 열 번도 더 절을 하며 홀치기에 담아가지고 갔다 받은 자리에서 먹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이 떼라도 쓰면 “홀치기가 우는 애 잡으러 온다” 그 순한 홀치기를 나쁜 이로 만들어 갔다 어디서 얻은 사과라도 생기면 아이 앞에 내밀었다 아이는 겁이 나서 울며 도망갔다 죄 없이 그는 나쁜 이력이 더해갔다 그러나 동네 개도 그를 보고 짖지 않았다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으려는 동네 처녀를 구하려 물에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에게 누명만 씌워졌다 처녀를 겁탈하려 했다고 그래도 대꾸도 변명도 안 했다 눈보라 치던 겨울날 어느 집 굴뚝 목에서 그는 연기처럼 저 세상으로 갔다 홀치기를 등에 진 채로 그 속에는 때 묻은 수건에 싸고 싸고, 또 싸고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검은 치마 흰 저고리 앳된 여자 사진 한 장이었다.
8 햇살도 여문다 매미소리가 볶아지고 나면 벼이삭이 물들고
고추잠자리가 휘저어놓은 하늘에는 구름이 거품으로 돈다 귀뚜라미 소리가 영글면 달빛도 살진다 모두가 익어가는 가을은 햇살도 여문다
9 아직 있을까 아직 있을까 지붕 위의 내 이빨
그놈을 찾아내어 앞니로 다시 끼워보면 그때가 되어 나를 그 날로 돌려줄지 모른다 찾고 싶다 그 이빨
10 바다는 나에게 가라앉을 듯 머릿속이 무겁던 날 바다를 찾았다
바다는 나에게 “돌아가라! 잊고 돌아가라” 한다 바람이 불어오며 파도도 나를 보고 돌아가라 한다 내려놓으면 될 것을 잊고 넘어가면 될 것을 넓게 품으면 될 것을 잠시 참으면 될 것을 바다는 나에게 돌아가라 한다 11 봉평에서
내 마음 달빛에 헹구어 바람에 걸면 메밀꽃 되려나
하얗게 씻겨진 돌 냇가에 깔린 곳 사라진 방앗간 터에 서면 너무 밝은 달빛이 나에게로 쏟아지려나 가슴속이 소금 뿌린 메밀꽃으로 젖는다.
12 옛길 조팝나무 흐드러진 길섶 향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굽이 길 비탈길 도는 고라니야 미안하다
내려다보이는 트인 가슴 펼쳐지는 골짜기 급히 터널로 숨는 차들의 행열 무엇에 그리 쫓을까? 어차피 종착지는 같은 곳인데 새잎 돋는 순한 연두 빛 옛사랑이듯 햇살에 붉히는 얼굴 되고 문득 겹쳐오는 도진 옛 가슴이 아지랑이 속에 구비 돈다 다시 걸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옛길
13 둔내 장터 영동 고속도로를 가다 둔내라는 안내판에 갑자기 소년이 된다.
태기산 아래 소류천 냇물이 얼면 하루를 살던 얼음썰매 티 밥 강정 한 덩어리에 장날을 기다리던 장터 뒷길 많이도 괴롭혀주었던 그 계집애 지금 쯤 만난다면 미안하다 할 텐데 터널을 다 지나도 앞에는 유년이 놀고 있다. 14 갈대
노을빛 물든 서녘 하늘 향해 흔드는 머리털 하얀 고운 얼굴의 하얀 손
언제 큰소리 한번 친 일 없이 조용조용 갈잎 비비며 살아온 날과 옆자리 내어주고 내어줘도 비좁은 터전을 탓한 일 없이 하얀 갈품마저 떠나도 가벼워진 손 흔들며 웃음 잃지 않는 피안으로 떠나는 이에게 차안의 손 흔들어주는 노 시인이 흔드는 야윈 손 15 여름밤
하루치의 햇살을 한 번에 내리꽂아 정수리 벗겨지도록 매미 소리 찢어졌다
뼈마디 물러나는 밤 사그라져가는 모깃불 이슬은 내려도 물소리는 높아지고 고단한 삶이 누르는 만큼 겨운 신음 높아진다. 아리도록 살았건만 달집 타듯 사라지는 기억 속에 굳은 발뒤꿈치가 뜯기는 가슴이다 멍석 위에 누워도 널브러지는 속이 뼈마디를 잡지 못하고 자꾸만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여름밤 개똥벌레 불빛으로 가는 바람에 흩어진다.
16 눈 내리는 날에 무엇을 찾고 싶기에 외등 밝은 곳에 하얗게 내리는가? 그것이 그리움인 줄 알고 오는 것인가
속마음까지 하얘서 그 빛만 따르는 줄 알아 찌릿찌릿 눈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속내까지 손가락 끝까지 신열이 끓는 내가 섰다 소리 없이 질러대는 저 소리 그 뜻을 몰라 내 이 아둔한 심장은 벌름거리고 발이 붙는다 눈 내리는 날에
17 숯불 다리미 달무리에서 내린 이슬 안개에 어머니의 무명치마는 정좌하고 주목나무 위에 앉아 다사로운 눈빛이 되며 순하게 정돈되어갔다
일사불란하게 평정을 해 나가는 군홧발 지나가듯 숨소리 죽이며 달구어진 세상을 만들고 가루보다 뽀얀 사그락 소리에 손이 델 듯 거친 증기를 내뿜으며 뿌듯한 보람을 짜고 있었다 무릎 세워 마주 잡은 내 손이 델까 어머니의 눈빛은 고수의 질주로 오차 없이 지나는데도 내 가슴은 늘 서늘했다 어머니의 그 사랑이 없이는 안 되는 정확한 숯불 다리미여
18 영글지 못한 것 들판은 노릇노릇 익어 웃음소리가 내음으로 번지고 하늘까지 영글어 찌르면 터질 듯 한 날
저녁노을이 물들 무렵에 어쩌다 싱그러운 기분이 되어 섰다. 새떼도 몰려서 가는데 너는 왜 홀로 섰느냐 물소리가 깔깔대며 지나지만 가슴속은 그냥 노을빛이다. 익어야 할 속마음은 아직도 푸른빛인데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다 영글었다 영글지 못한 것은 내 영혼뿐인 것 같다. 19 앵두나무 뜰 가에 심은 앵두나무 해마다 잘도 달리던 그 빨간 맛
올해도 흐드러지게 꽃은 피었지만 잎만 무성하고 눈 씻고 찾아봐도 앵두는 없었다. 할 일 못 한 나무라고 눈 밖에 나 한 여름을 대접받지 못하고 지났다 한 잎 두 잎 잎 지던 날 아, 거기 나뭇가지에서 새끼 치고 나간 새집 하나 그 어린 생명을 위해 훼방자의 접근을 막으려 열매마저 포기했었구나 맹하기 짝이 없었던 나 나무 가지에 가슴을 찔렸구나! 20 늦은 가을 들판에서
찬 이슬 마르지 않은 잎들이 스산하다 일렁이며 가슴을 흔드는 바람은 손톱 밑까지 파고들어 칼집을 내며 지나고
햇살도 배신을 하듯 한 여름의 폭을 접었다. 버리듯 흘러내린 물든 잎이 발아래로 모이면 내 머리는 더 무거워진다 느린 발걸음으로 남은 햇살을 주우며 그루만 남은 무논에 눈을 떼지 못한다.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21 소리 질러보고 싶은 날 돌아오지 않는 것 그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겨울이 가며 봄이 온다지만 그 봄이 어디 지나간 봄이던가? 떠난 사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할지 모른다는 차가운 생각이 들 때 겨울바다를 찾기보다 그 자리에 정지해 있고 싶은 마음 이 순간이 진정한 그리움이고 작지만 아주 큰 사랑이 되리라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슬픔보다 몰려오는 파도에 맞서 소리 질러보고 싶은 날 깊은 마음의 바닥까지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22 오두막 집
눈 덮인 산 밑 오두막 집 옆집과의 길도 뚫리지 않은 하얀 세상에 굴뚝에선 연기가 날린다.
소나무 가지 부러지며 눈가루 날리고 고라니가 멀리에서 처마 밑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지만 아직 먼 길이다. 맨드라미 피던 장독대도 눈 속에 잠자고 질화로 잿불에 삶은 옥수수를 다시 굽는 아이 눈이 길이 넘게 내렸다 별 총총한 하늘만 보고 말 곳 말 곳 눈망울 굴리는 따뜻한 가슴 날고구마 깎아먹던 긴 겨울 오두막집은 따뜻했다.
23 바람이 고맙다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낮춘다.
어렵지도 않은 일을 바람이 시켜야 한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꼿꼿했던 날들이 참 바보스러웠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 고맙다 복잡하던 무거운 머리를 왜 그리 높이 들려했을까? 만사가 이리 편한 것을 바람이 고맙다
24 풍접화 석양의 햇살을 받으면 환상적인 그의 품속에 아릿아릿하게 내가 자지러진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현실이 몽롱하다는 것을 느껴볼 새도 없이 와락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그 자리에 서고 내가 왜 이렇게 어리바리 해지는지조차 모르고 눈을 감는다.
25 폭포 아래 크고 먼 꿈이 흘러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다
흩어지며 죽은 혼이듯 물안개가 하늘로 오르고 하얗게 부서진 뼈가 자리를 잡으려 추스른다 내 눈은 혼을 따라 하늘로 뼈 가루를 따라 아래로 분주하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2부 그리고 끝이었다
26 잊었는데 잊을까? 잊어야지 잊었는데
장맛비 잠시 쉬고 구름 틈에 잠깐비치는 햇빛처럼 그 얼굴
27 제비꽃 하필이면 보랏빛으로 운명을 예언했나 눈빛 못 잊어 한 세월 참고 참아 사그는 눈언저리에 찾아드는 그 옛날 터지는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는 까만 눈물 빛 그리며 손짓만 아쉬운 너를 안은 그리움
28 미안한 마음이 드는 날 내가 관심이 없다는 데도 그렇게도 좋아라고 나를 따라다니던 그 계집애
까맣게 잊은 줄 알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생각이 날까? 내가 죄인이라도 된 듯한 이상한 기분까지 든다 하기야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 했으니 죄인 것은 맞다 ‘그때는 미안했다’ 이 말이라도 해 주고 싶다 조금이라도 죄가 가벼워지고 싶다
29 빗소리 가슴만 멍들 줄 알면서도 사립문 앞에서 기다리던 비 오는 날의 그 우산에 떨어지던 빗소리 심장 소리
바람과 함께 지금은 흩어져버린 타버린 재를 날리던 그 날이 나무의 둥치에 윙윙거리며 겨울을 참으려 그림자를 줍고 섰네 “다 그런 거야” 누군가가 네 곁을 지나며 던진 매서운 비수의 번득임도 아둔한 가슴은 그 빗소리에 혼을 못 찾네 핏줄이 파래지도록 가슴 동여매고 주저앉네.
30 지우려 해도 무시로 다가오는 그때 그 모습 지우려고 눈 감고 외면해도 꽃잎으로 남겨진다.
가슴 저미며 되살아나는 얼굴 화들짝 놀라게 하는 눈앞에 선 모습 출렁이는 물결이 바닥에 요동친다.
31 바람은 왜 부나 눈 마주치면 어쩌나 똑바로 못 보고
돌아서면 어쩌나 가슴만 콩닥콩닥 꽃잎 흔들리게 바람은 왜 부나 가슴 떨리게
32 안 된다 그립고 그립다
그래도 안 된다 순간 울컥 솟는 눈물에 손등이 젖어 얼룩진 얼굴 보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안 된다
33 떠나간 여인 한 여자에게 거절하여 상처를 남겨주고 또 한 여자를 버려 죄인이 되었다 나를 던져버리고 싶던 날이었다.
모두가 내 것이 아닌 가을 가랑잎 되어 떠나고 거기 차가운 달빛이 깔리는 둑 흐르는 물소리마저 차가웠다 낙엽 썩은 흔적마저 잃어버린 어느 날 되돌아보는 발소리가 무겁다 변명 아닌 해명을 하고 싶어도 흐려진 별빛처럼 기억조차 흐려진다. 진실을 묻어버린 그 무덤을 파보렴 서릿발 내리지 말아 그저 운명이니 악의 품은 계산이 아니었음은 지금도 같은 소리로 흐르는 여울물이다.
34 그때는 노을이다 사랑은 빠져야 한다 허우적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먹은 물 토해내듯 너의 치욕까지 뱉어낸 후 멀건 눈빛 희미한 정신 속에 지는 노을처럼 드리워지는 네 모습 그 얼굴을 찾아야 사랑이다
그때는 노을이다
35 너만 알리 하 웃다 번진 눈물 그 맑은 속을 너만 알리
상고대 그 냉철한 가슴에도 온기 흐르는 뜻을 너만 알리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36 떠난 자리 물빛 푸르던 날 손 흔들며 떠난 자리 다시 그 자리에 서도 그 물빛 아니다
분홍빛으로 남겨진 가슴에는 한 번 떠난 자리에 지워진 흔적도 달빛 숨소리 젖었던 흔적도 빛깔도 남겨두지 않았다 잊은 것을 찾는 마음이야 탓할 일 아니지만 골진 주름처럼 쌓여가는 그리움도 허허로운 빈 들녘이다 돌아서는 자리에는 늘 눈물처럼 흘려지는 하늘만 남는다
37 바람이 남긴 것 아픔이었다는 것을 잊은 지 오랜 그 자리에 물든 나뭇잎이 모여 노을을 가슴에 담고 있지요 바람은 머물던 곳을 하마 잊어버렸는데 흔들리던 의미를 퍼즐로 맞추며 왜 기다려야 하는지요. 이미 흙으로 변해버린 낙엽 같은 조각들을 머물던 그 자리에 돌아보며 왜 아쉬워하는지요. 당신이 솔베지가 된대도 페르퀸트를 가슴에 묻은 죄겠지요. 그것들이 다 바람이었대도 내가 안아야 할 무게이지요.
38 그 마음 어영 오라 반겨주던 그 겨울
봉당에서 발 벗고 구들에 들어서자 사그라지던 질화로 잿불에서 부젓가락으로 온기 전하듯 스며오던 그 마음 식을 줄 모른다.
39 그리고 끝이었다 장마 끝나고 하얗게 씻긴 돌 그 앞 깨끗한 모래밭에 별똥별이 떨어지던 날 그 계집애는 전학을 갔다
천둥 치고 번개 지나고 파란 가을 햇살에 뭉게구름 뜨던 날 바람처럼 소식 왔다 엄마가 되었다고 눈 내리고 칙칙한 겨울 하늘에 달빛도 없던 날 얼굴을 그려 본다며 낮은 목소리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40 가을 여인 왁자한 아낙들의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저 단풍잎들 바람보다 더 무서운 그 웃음소리 가을 든 여인들
41 그리움처럼 강물이 흐르는 까닭은 마음이 숨어 있어
냇가 조약돌이 깨끗한 것도 닳고 닳은 가슴이 둥글어지기 때문 끝없이 울어대는 여울도 사연이 진한 훈훈한 이야기가 흐르는 것 가을 햇살 속에 네 마음 섞여서 저토록 맑은 하늘의 흰 구름이 소리 없이 이야기를 엮고 잡은 손 놓고 싶지 않은 내가 그리는 이의 눈빛을 잊지 않겠다고 달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저 물소리 그리움이 흘러간다.
42 하얀 손수건 가슴 속을 닦아내던 서러운 손수건
바다에 헹구어 짜디짠 눈물을 풀어내면 하늘같이 파란색이 물드는 순백의 마음이 될 게다 하얀 손수건
43 복수초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아주겠는가? 알아주기를 바랐다면 두꺼운 얼음 속, 또 그 위에 쌓인 눈 어찌 이겨냈겠는가?
언 땅 뚫던 날 그 마음은 흐느낌보다 진한 눈물 같은 노란 미소 가슴 속에서 키워왔던 사랑이었다.
44 모래톱에서 한 다발 하얀 꽃송이를 마구 던져버리고 돌아서는 발자국
웃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부끼듯 흐르는 마음은 돌아서 가버린 그를 보내듯 가슴 바닥을 훑어낸다 백사장 감시초소의 망루 물러서라는 방송을 못 들어 어선의 불빛이 밝을 때까지 사나운 이빨은 먼 등대 불빛에 밀려 어둠 속에 묻히고 가버린 이도 모래처럼 사랑이 식어간다
45 눈물
속임을 모르는 문물도 때로는 변신을 한다지
지독한 계산 속에서 변색이 된다지 그래도 까무룩 믿어야지 맑은 물에서는 바닥의 조약돌이 보이듯 너무도 맑은 네 눈물이니까
46 깊은 곳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엔 맑은 물이 많고
두레박을 내려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물은 시원한 찬 물이다 그분의 속에서는 말은 적어도 깊은 생각이 나온다. 사랑하는 말은 깊은 뜻을 숨겨 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늘 깊은 곳에 있다.
47 노을 속 나뭇잎 모래알 밀어 올리며 솟아오르던 그 샘물
맑다 못해 파란 하늘이 잠기던 눈물 차라리 이별을 바라던 그 마음 허전하게 찾아오는 바래진 모습의 껍질들 그것마저 담아낼 수 없기에 하늘이 어둡다 흔들리는 잎 하늘거리는 아쉬움의 단풍 가슴 바닥까지 적시는 늦은 가을 노을 속 나뭇잎
48 지나간 여름 사립문에 걸어두고 기다리던 그리움 치렁하게 자란 단발머리도 그날을 이어주지는 못하는가?
햇살만큼 길던 그 여름 물방울로 부서지던 모래톱 발자국 속에 눈물만큼 고인 옛이야기 후벼도 후벼지지 않는 서러움으로 고인다 깊숙하게 숨겨두기만 했던 속내를 끝내 퍼 올리지 못해 화석으로 굳어진 가슴이 쓰리다 그날 그 바지랑대를 높이던 긴 치맛자락이 흐르는 물속에 일렁인다 뻗어도 손닿지 않는 지나간 여름
49 국화 죽어가면서도 버리지 않고 보듬은 꽃잎
같이 말라가면서도 그 지독한 사랑이 거기 있었구나! 가벼운 바람에도 꽃잎 다 떨어내는 벚꽃에게 하고픈 말 있겠지만 말라가면서도 숨기다 새어 나온 국화 향이 대신 말한다 지조 높은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50 잎 지던 날
물안개 덮인 듯 흐린 눈에 풀잎 흔들리는 소리로 흐르는 눈물지듯 떨어지는 오동잎 나를 사랑하지 않아 울도록 내버려 둔 달빛 속에 잎이 진다고 지는 잎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네가 변해서 다시 너를 찾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뒤에 떨구어 내는 그 속의 깊은 뿌리를 알 리 없어 죄인이 된 기분으로 하늘 보며 기둥 잡은 손을 내리지 못한다 벽오동 잎이 지던 날도
3부 가시 집
51 학질 장롱 속 돈 훔쳐 갔다고 누명을 썼어도 파들파들 떨던 내 심장에서 학질은 물고 늘어졌다
당산 위 큰 무덤 그 목에 식칼 꽂고 머리를 박고 재주 굴러 미명의 어둠에서 오싹거리던 내 핏줄 속에서 학질은 꼭꼭 숨어 있었다 부엌 뒷문으로 나가 앞대문으로 들어 왔어도 학질은 내 발목을 잡고 따라다녔다 아랫집 계집애의 얼굴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52 붉어진다 울음을 참고 또 참으면 얼굴이 붉어진다
너무 많이 울어도 얼굴이 붉어진다 울지 않고 한평생 산 이 어디 있으랴 한 삶 마무리 지으려니 얼굴이 붉어진다 울지 않고 참으려 얼굴이 붉어진다
53 그해 겨울 부엉이가 울면 부엌 대문 옆 늙은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던 눈이 떨어지는 깊어 가는 밤
부엉! 그 소리가 무섭게 들려 검정 광목 이불 속으로 기어들던 당집 아래 초가집 정월 보름날 동네에서 치성을 드리던 당제사에서 내 아름을 부르며 태워 올리던 수염 긴 노인의 축원 소리가 섬칫 피부를 스치듯 까슬까슬해 진다 묘 등에 아롱거리던 아지랑이로 오르는 소지 연기 눈 떨어지는 소리로 그해 겨울이 갔다.
54 산을 보며 여운이 남는 내 그림자의 저편에 작은 꽃씨 하나 심고 싶다
저 산의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람은 무슨 쏘삭질로 고집을 풀어내려 할까? 숨소리까지 숨긴 깊은 골짜기에 낯선 달빛이라도 잠자고 있다면 수런거리던 가슴도 물소리 잦아들겠지 네가 말이 없어도 품은 뜻 흘려내지 않는 까닭으로 꽃씨를 찾아내어 가슴 귀퉁이를 비워두고 싶다
55 후회 내가 한 일 죄 아닌 것이 있던가?
손 떨리던 몸짓 하나가 돌아보면 다 모래톱에 부딪히는 거품이었음을 알았을 때 눈빛이 흐려 있었고 새들의 부리가 겨냥한 곳은 한 마리 물고기였음을 이제야 알다니 하구에 멈추어서 잠잠한 저 물속 깊이와 그 무게를 감당할 힘은 느리기만 하다 또 다른 후회라도 없기를 깊은 물 속에 숨겨두고 싶다.
56 불쌍한 놈 무서웠다 골목길에서 오만 원 뺏겼다. . . . 나쁜 놈 . . . 불쌍한 놈
57 노을 서산에 걸린 노을을 보다 울컥 토해낸 그리움
힘들었던 하루가 사그라지듯 뒷모습 같은 네가 왜 거기 있었는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기억의 저편이 시나브로 묻혀가는 실개천 물소리이듯 늦은 하루가 발소리를 숨기고 간다.
58 나도 간다 시린 밤 지나면 아픔이 사라지듯 아침도 오는 것
마무리가 아름다운 하루는 노을을 보아야 아는 것은 아니다 가을 단풍은 넘어가는 햇살에 더욱 빛난다 저무는 해를 보기 전에 마음을 익혀야 슬픔도 기쁨으로 승화되고 물드는 강가에 서면 나를 바로 보는 눈이 트이는 것을 하루가 간다 나도 간다.
59 나대로 살자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내가 너의 뜻대로 살라는 말인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그렇게 살자
60 소 한참 만에 껌벅이는 눈에는 어리석음과 지혜가 교직 되고 진실을 슬프게 표현하는 느림의 미덕이 잠을 잔다
순종하는 위력의 저편에 큰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깊은 지혜 인고를 배우던 꼬리가 가식 없는 순리가 되어 파리를 날려보지만 살의가 없다 무능하게 보이는 큰 귀는 트랙터의 굉음에 놀라 화들짝 일어선다지만 역시 느림의 대명사다 앉아서 꿈을 꾸고 그 꿈을 다시 되새김질하는 속도만치나 느리게 번진다. 내 허술한 꿈도 소 등의 작은 터럭일 뿐인가?
61 내 무덤을 내가 만들리 내 앞에 숨 쉬는 돌로 그대가 서 있어준다면 내 무덤을 내가 만들리
<아직 깊은 잠이 덜 들었군!> 하는 그대 말소리를 들으며 귀에 심지를 박고 다음 소리를 기다릴 때 <아직 덜 익었군!> 히죽이 웃고 지나가는 구름이 잠시 그림자로 쓰다듬어준다면 화석이 되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를 내어 잠망경으로 그대 오는 모습 볼 수 있는 그런 내 무덤을 내가 만들리 62 가시 집
작은 가시가 박혀 꼬리까지 숨겼다 잡을 곳이 없어 빼낼 수가 없다 놈은 살 속에서 집을 지었다 아주 튼실한 집이다 보호와 방어를 성벽처럼 두르고 나름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그 작은 놈이 나보다 낫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63 번데기 사랑 부엌 아궁이 앞 냄비에 물이 방울방울 솟을 때 이리저리 유영하던 고치
풀리어 나온 몇 올이 모여 물레에 감기고 실오라기 하나 못 걸치고 발가벗겨진 번데기 부뚜막에 얹어져 물기 말려내고 달구어진 몸이 주름으로 변신해가는 거기 어머니는 쉬지 않고 물레를 감아 진실의 맛과 희망의 고통을 참으며 그 번데기를 닮아갔다 결 고운 비단만을 그리며 그리고 번데기가 되었다.
64 이름 마주 보고 앉는대도 외롭다 생각이 다른 거리를 못 좁혀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기를 원했었지만 자꾸만 헐렁해져 골 깊게 파여 나가는 아픔 뒤에 삭아 내리는 이름
65 선물 며느리에게서 선물 받은 자수정 반지 자랑스럽던 어느 날 헐렁해진 알이 빠져 떨어졌다. 마당 가에 있던 닭이 달려와 삼켜버렸다
발목 매어 두고 마당 가에서 하루가 지나도록 닭똥을 뒤적여 찾아낸 수정 반지 알 그 환하던 어머니 얼굴 지금도 다가온다.
66 홍수 지나면 가랑비 구질 거리며 길게 이어지던 어느 날 퍼붓듯 쏟아져 홍수로 넘치고 돌 구르는 소리 바닥을 흔들었다 그 소리 하늘에 닿아 벼락, 천둥으로 뒤집어지고
검은 물이끼 덥혔던 돌 하얗게 씻기고 흙먼지 썼던 모래알 햇살에 반짝이며 물소리 더 청량하게 들리리 그래 물밑씻개가 강가에 널부러졌어도 하늘엔 뭉게구름 햇살은 빛난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자 이 어두운 세상 썩은 물 씻어내는 데 이쯤 못 참을까?
67 본전 피 흘림 없이 얻어낸 영광이 있던가
뼈마디 쑤시는 것도 벼 포기에 빼앗긴 관절 탓 한 톨이 그리도 무게를 느껴질 때 날 궂지 않아도 허리 쑤신다 남은 것이 무엇일까 빈손 태어날 때 그때로 돌아왔음을 알아 주먹 한 번 쥐어 허공을 치며 잘 살았노라 수지 계산 본전이라고
68 별 하나 나 하나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그 말이 맞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하늘에 별이 줄더니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나라 지원금을 준대도 효과가 없다 작은 별은 보이지 않고 늙은 별도 수가 줄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맞는 말이다
69 감 씨 입원을 했다 연시 들고 들어선 아버지
얇은 껍질 벗겨 빨아 먹는데 감 씨 뱉어냈다 투명한 껍질 벗기며 연시를 먹으려니 눈으로 나오는 감 씨 흐르는 감 씨
70 해탈문 주지 스님을 만나라고 신신당부하여 보냈더니 겨우 일주문 지나 금강문에 한 발 들이밀다 되돌아와 너무 무서워 못 가겠다고
그럼 언제 너를 모시러 올 줄 알았더냐? 한고비도 못 넘기고 바라는 큰 꿈을 꾸었다니 아직도 해탈문은 열려 있느니라
71 배흘림기둥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을 안아보았는가?
무거운 상체 배에 힘주고 서서 거꾸로 본 탑신을 보듯 오랜 세월 전에, 그 전에 이미 당신이 서 있던 모습
72 디딜방아 무료하던 어느 날 잘 여문 알곡이 확을 채웠다
슬근거리던 방앗공이 괴머리에서 소리가 나도록 찧어 가루로 만들고 땀방울 같은 젖은 소리를 낸다 지루하도록 올라서며 밟던 일이 끝나지 않는 삶이라는 것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같은 거리의 인연이 되어 하루해는 아직도 길다 숨소리 차오르도록 하루를 살아야 노을빛이 곱다 내 몸으로 살아야 하는 닳도록 미끈거리는 세상이 여전히 내게는 디딜방아다.
73 빗소리 저리 작은 빗소리인데 왜 가슴이 흔들릴까?
젖은 마음이 자리를 못 잡아 낙엽 밟는 소리가 나는 것일까? 오늘 같은 날은 어수룩한 서정시를 쓰고 헛소리 같은 콧노래에 잠기고 싶어진다.
74 달빛 마주 앉은 얼굴이 좋은 안주가 되면 이야기가 늘어나는 만큼 빈 병이 늘어난다.
안주가 좋으면 술병(病)이 안 남을 믿고 높이 뜬 달이 내게만 비춘다고 믿는다. 다리가 휘청거려도 달빛은 곱구나!
75 선인장꽃 속내를 다 드러내고 싶도록 파고드는 황홀한 꽃잎
창을 겨누는 서늘함에 주변을 경계한다 웃음 속 울음이 있듯 절대고독으로 무장 한 단단한 집념의 끝에 울음소리 같은 웃음이 있어 선뜻 안겨 올까 두려워 그녀의 속옷을 보듯 섬뜩 놀라 내 자리를 다시 살피는 유혹의 뒷자리에 서성이며 내가 초라해지는 당신은 선인장꽃
4부 소리의 무게
76 술병 떠나버린 사람을 슬퍼하는 이에게 위로를 아낌없이 해 주고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미워하는 이에게 등 두드려주고 삶이라는 파도에 밀려 해변 자갈밭에 나뒹굴어진 이에게 손 내밀어 잡아주고 성인보다 더 성인이 되어 가슴 속 다 퍼내어 주고도 구석으로 나뒹굴어진 빈 술병
77 소(沼) 세월이 병이 들어 눈이 희미해지면 사슴을 말이라 하네
그게 맞다 속내는 드러나는데 그런 일은 이승에 오래 머물지 말 지어니 소에 머무는 이 물줄기는 언젠가는 다시 도도히 흐르리라
78 소리의 무게 가슴이 비어갈 때 그 삭막한 모래의 서걱거림을 들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투하는 틈입자 소리는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빈자리부터 정복하고 풀씨처럼 가슴 속은 뿌리로 엉킨다 그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혼돈의 무게로 왕왕거리는 머릿속 번민의 무게만큼 채워지는 관계 혓바닥의 무서운 살육 그로 인해 주저앉고 만다 나를 향해 쏟아져 억누르는 소리의 무게
79 어둠의 저편 어둠을 궤멸시키고 나면 밝은 해가 뜰까?
시간이 흐를수록 어둠은 짙어 발걸음 헛놓이고 갈 곳이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되는 데 아버지가 잘 못 정한 길이라고 새 길을 찾아도 불효만 키우는 것은 아닌지 퇴색한 사진이라고 아버지 아닐 수 없는데 태초의 이야기라고 묻고 갈 수 있을까 아벨의 억울함을 줄여주려고 카인을 매도한대도 어쩌랴, 조상인 것을 80 새들의 경전 조금 먹어라 줄여야 천적보다 빨리 날아 살길을 찾을 수 있다
뼈까지 가볍게 하라 채워지는 욕심은 수명을 갉아 먹고 기생한다.
81 빗방울의 힘 손잡고 내리는 빗방울이 어디 있던가?
풀잎 위에 내리면 이웃과 손잡고 작은 내에 모이면 씨족에서 부족으로 하구에 이르면 얼마나 커졌던가 시끄럽게 조잘대던 그 소리 접고 말없이 흐르는 속내 조용해도 가장 무서운 힘 침묵 속에 세상을 안아 들이는 하구의 소리 없는 함성 숙연해지도록 엄청난 빗방울의 힘이여
82 나이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비밀
입 다물고 끝까지 말 못 하는 비밀 죽어도 말 안 하지만 강제로 몸통을 자르고 알아내려는 이 있다 하는 수 없지 내 나이 드러낼 수밖에
83 광주앝 햇살 받은 물고기가 은비늘을 튕겨내면 흩어지듯 모이는 마음들이 따사롭다 유베루 굽도는 여울물 소리는 함성이 되고 주체 못 할 힘이 솟은 갈미봉도 넘치는 사랑을 발아래 부리는데 흐르는 사연들을 모으고 다독여서 줄렁바위 숨 고르며 채독소에 잠재운다. 84 산사 풍경 풍경 소리에 묻혀 감이 익어가면 산사는 노을빛이다
목어 두드리는 소리에 동자승 해맑은 웃음 빛이 산마루로 오르고 타래를 풀 듯 탑돌이 하던 여인은 머무는 눈빛마다 고요가 흘러 또 한 올의 인연을 잠재운다 심심해진 바람 한 점은 풍경을 밀어보고 산신각 어처구니에 올라 사리탑 그림자로 남은 시간을 잰다. 85 늘 채워지는
바람이 지나가면 물이 따라가고 그 자리는 어느새 다른 물이 와서 선다 그래서 늘 그 자리가 된다
내가 흘러가면 뒷자리에 누가 설가를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리운 이가 섰던 자리에 내가 서보고 싶듯 내가 섰던 자리에 누군가가 또 서리니 그래서 그립다는 말은 물처럼 이어지고 이어진 그 어느 자리에 물처럼 내가 서고 또 흘러갈 뿐이리 빈 가슴에는 그리움이 채워진다. 물처럼 흘러가고 늘 채워지는 그리움 86 배추벌레 원하는 자에게는 베풀어주라고 미덕처럼 작은 잎부터 나누어줬다
덩치가 커지며 하루에 한 잎을 다 먹었다 안으로, 속으로 아주 조금씩 갉아가도 뿌리는 새잎을 키우기 위해 물을 빨아들였다 맘씨 좋은 베풂은 군왕 대접이었지만 바닥은 비어갔다 끝내 생장점까지 먹히고 기능이 필요 없어진 뿌리는 썩어갔다 어디로 갔나 허물 벗고 가버린 배추벌레 남은 것은 말라가는 구멍 난 잎 포퓰리즘의 원조가 배추벌레였다
87 상감 청잣빛 고운 하늘 둔부에 새겨진 곱디고운 상감 무늬를
네 웃는 모습으로 내 깊은 속마음에 새겨 넣어 불 속에 구워 내 영원히 영원한 혼이 되어라
88 몽돌 애써 다듬지 않았어도 땅거미 지듯 모르는 사이 둥글어진 마음
오랜 세월을 내 옆에 두었기에 내 사람이 된 몽돌
89 전지 이편을 살리려 저편을 잘라내는 비장함
풀죽은 모습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삶이란다 아직 이지러지지 못한 가슴이 떨린다
90 노을이 진다 산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 그림자
달빛 번지듯 그리운 사람아 아직도 먼 남의 이야기 가슴앓이 사연은 언제 풀리나 노을이 진다.
91 한낮 신발도 못 벗고 들이닥친 햇살
풀 죽어 힘 빠지는 하루 하릴없이 졸던 고양이가 그늘을 찾는다.
92 양곤의 밤 지평선에 크고 붉은 해가 떠도 고목이 없는 들판에는 10차선 도로가 한산하듯 키 작은 나무가 듬성듬성하다
바간의 수많은 사원만치나 공을 들였던 그 날에는 무엇을 빌었던가? 중심가에 체증이 생겨도 시간의 개념을 잊은 듯 받아드리기만 하는 기다림 밤이 지나고 그 맑은 햇살의 아침을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까? 미얀마에 퍼질 뜨거운 햇살을 기다리는 양곤의 밤은 아직 미명이다.
93 하늘 열기 검은 회색 하늘 아래 하얗게 눈 덮인 거리
줄 서 있는 가로등 어둠을 밀어내려 애쓰는 불빛 밤새워 지켜주려 아픔 참고 눈도 껌벅이지 못하며 지켜보는데 참다가 참다가 이리도 가슴 아파하며 일어섰는데 열리리 밝은 빛으로 열리리
94 음모
사드의 레이더가 정확히 입술을 찾아 명중시키는 그곳에 불꽃처럼 늘어지는 타액
강대국의 우산이 필요해서 허리에 감기는 팔 벗어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은 계획 된 음모였을까? 부서지면 어떠냐 둘이 부서져 하나가 되면 그게 강이고 바다이거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이유가 숨겨진 비밀이라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네
95 봄
빗장이 풀린 가슴에 바람이 스미는 젖은 머리 복숭아꽃 가지 사이로 달빛 찾아들면 얼음 구멍 뚫고 샘솟는 상큼한 안개 핀다.
마음이 안개이니 가슴은 풍선 된다.
96 환한 얼굴
연일 퍼붓던 빗줄기 멎고 산안개가 산비탈을 기어 오르며 푸른빛을 가리지만 끝내는 정상을 기어 넘어버리고 새맑은 햇살이 퍼지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 안겨오는 이 희열 잎마다 가지마다 우렁찬 힘이 된다. 고통도 참고 질곡도 이겨내 수런수런 가슴 열고 햇살을 받는다. 참아낸 자의 환한 얼굴이다.
97 마지막 향기 비바람 불어 부러지고 만 백합꽃 가지 아쉬워 거실에 꽂았다.
집 안 전체에 가득 찬 향 삶의 마지막까지 남을 위하는 그 마음 눈물이 나도록 어머님 생각이 났다.
98 이슬 밤을 새웠는데도 말똥말똥
어둠 속에서도 잎 끝에 매달려 별이 되고 싶도록 반짝여 눈만 살아있는 심장 소리가 익을 대로 익었다.
99 구도로 바람을 가르는 새로 난 길은 휘파람이다
구부러진 옛길은 바닥이 파이고 차선마저 지워지다 흔적만 남았다 성시를 이루던 길 가 맛집에는 오늘도 주차장이 만차다 역시 맛은 옛 맛이 제맛인가 사람들이 옛 맛을 찾는 그 집 주인은 옛 사람이었다 구 도로를 고집하는 옛사람이었다.
100 영(0)이라는 숫자
분명하게 자기 자리를 갖는 0이라는 숫자 자리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데 없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니 여덟 개나 되는 그 자리가 눈에 띄지 않아 0이 보이지 않는 청맹과니가 되면 남을 짓밟고 괴롭힌다. 많이 잊어야 이름은 더 널리 알려진다. 풀꽃이 어디 자기 옆의 다른 풀꽃을 뜯어먹고 살던가? 잊히면 그 자리는 더러움이 채워지고 그래서 그들은 아수라에 산다. 작은 풀꽃들은 늘 웃고 사는데
맺는말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문학을 한다고 했으니 참 오랜 세월을 이 일에 매달렸다. 그 많은 시간을 사용했으면 세상에 내놓은 글마다 좋을 글이라는 평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 한계를 느끼는 때가 많다. 학교에 다닐 때는 반장도 해보고 전체 반장도 해봤는데 글 쓰는 일에는 줄반장감도 못됐으면서 이러고도 이 일에 매달렸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버리지 못하였으니 그 집념 하나는 가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려면 어떠냐. 내 생각대로 살아왔으니 남은 날도 그냥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또 한 권을 엮어본다. 읽는 이가 매질을 한다면 그냥 맞겠다는 생각이다. 이곳저곳에 발표한 글을 다시 보면 잘 못 표현되었고, 구성이 틀렸고, 주제가 선명하지 못하고, 어휘 선택이 어색한 글들이 눈에 띈다. 발표하기 전에 눈에 띄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런 일도 계속 나온다. 계절이 바뀌면 잘 여물어야 하는데 또 폐농했구나 하는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을 다독여가며 이어 온 결과물이기에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에 서툰 성격이지만 그 고마움을 가슴 바닥에서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소재를 얻게 해 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시집을 낼 때마다 표지화를 그려준 오호 화백이 고맙다. 오늘은 산 위에 올라가 소리 한번 질러보고 싶다. 2019년 가을 한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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