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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쿱의 감사인 크객전문 변호사 박명원은 참 용감합니다.
요즘 재학생이 본격적인 루트 등반하기 쉽지 않은데 남의 산악회 후배 대리고
마음 놓고 첫선등 세웁니다. ㅎㅎ
군대가기 전에 저랑 같이 잠깐 등반했던 후배를 아주 빡세게 첫선등세웠습니다.
서울대 총산악부 & 농대산악부 2020 추계 설악 연합 등반
1/2박 3/2일 Timeline
[10. 30 金] 설악의 품으로: 일상으로부터 숨가쁜 속세 이탈
16 : 30 서울 경부 -> 속초 고속버스터미널 차 출발 (선발)
19 : 30 속초 도착 및 이마트 장보기 이동
20 : 30 장보기 완료 및 야영장으로 이동 - 11인 3택시
21 : 00 야영장 입장 및 진지 구축 (4텐트)
20 : 00 저녁 요리 및 식사 및 sool
01 : 00 얼그레이 티타임 후 취침
[10. 31 土] 각자의 길에서
04 : 30 기상 및 아침식사
06 : 00 한편의 시를 위한 길 & 대청봉 트래킹 조 출발, 명원 형님 싸이트로 합류
08 : 00 야영장에서 소공원으로 출발 (버스)
08 : 50 소공원 입구 신흥사 돈 강제 징수 통과
10 : 00 울산바위 앞 문리대길 4번길 도착
10 : 00 ~ 16 : 45 문리대길 4번길 총 8피치 등반
16 : 45 하강 시작
17 : 10 하강 완료 및 장비 정리
17 : 40 하산 중 흔들바위 지점 (주진석 통화, 한시길 하강 80% 완료시점)
18 : 30 소공원 도착 (통화, 한시길 팀 소토왕골 시점)
19 : 00 야영장 창고용 텐트 해체 및 개인 짐 회수
19 : 40 「연탄 생구이」집 삼겹살 저녁식사 (설악산장 앞, 화채마을)
20 : 30 박명원(문리대, 88) OB형님과 인사 및 터미널로 택시 승차
20 : 48 한시길 복귀팀과 짧게 해후 (21 : 50 차)
21 : 20 다음차로 출발
23 : 40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도착
00 : 15 낙성대역 도착
00 : 50 걸어서 기숙사 등산복귀 및 모든 일정 종료
- 오순도순 야영
16시 반 서울발 속초행 차는 막힘으로 인하여 예상보다 1시간여 지체된 데다가, 장보기 및 야영 환경 구축 등을 거치고 나니 22시가 훌쩍 넘겨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일찍이 예정된 기상까지 일각을 다투는 일정에도 다들 마음만은 여유롭고 즐거웠으리라. 다같이 한 날 떠나 한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이 설레고 재밌으니까. 공교롭게도 하늘은 뉴스에서 소개될 정도의 천문학적 이벤트로 블루문과 미니문이 동시에 뜬다는 밤이었다. 그 달이 휘영청 밝아 설악의 맑은 공기와 밤하늘이 별 또한 수놓았다. 정성스레 준비한 식사,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과 함께 깊어갔다. 잔잔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얼그레이 차 한잔 넘김을 마지막으로 01시 경 각자의 자리로 몸을 누였다.
- 산뜻한 출발, 일출의 따스한 가을아침
31일 결전의 아침, 후에 벌어질 일도 모른채 날씨와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짧은 새우잠마저 정겨운 벗처럼 맞아주었고 스프와 구운 빵으로 몸도 마음도 덥혔기 때문일까. 이 날은 서로 다른 세 갈래로 갈라진 팀 각각에게 도전과 고난, 모험의 길이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 모험을 두 팔 벌려 끌어안으러 담담히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 및 야영장 정리 후 6시를 전후하여 앞의 두 팀은 먼저 떠났다. 그 후 소현 누나(권, 문리대 16)와 함께 명원이 형(박, 문리대 88)의 야영 싸이트 B35에 합류하였다.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출발한 우리는 8시에 야영장을 떠나 10시 경 울산바위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소공원에서 울산바위까지 공사중인 환경으로 길 곳곳이 끊기어 우회하느라 낙엽이 즐비한 길 아닌 길을 헤치며 얼마간 땀을 뺐다. 날은 해가 비치고 그리 춥지 않은 따뜻 혹은 더운 날씨였다. 물론, 변화무쌍한 바위 위에서와 해질무렵 가을의 서늘함은 우선 제외된 오전의 기술이다.
- 인생에서 처음은 갑자기
이날 이곳에서 나는 인생에 없던 진귀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정말 놀랍고 선득하게도, 나는 생전 처음 제대로 된 선등을 울산바위 문리대길(4번)에서 서게 되었다. 정식 선등을 바로 지금, 그것도 인수도 아닌 설악 울산암에서 처음 서게 되리라 꿈조차 꾸지 않았었다. 지금껏 여러 해 산을 거닐었지만 늘 누군가의 뒤에서, 등과 발을 바라보며 산을 올랐던 나다. 단초는 명원 형님의 작은 말씀이었다. "거의 딱 너만할 나이 때 쯤, 나도 여기 와서 갑자기 선등부터 시켜서 처음을 선등으로 올라갔었다." 1, 2피치는 할만하다는 말씀에 혹한것인지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바위 맡에 도착하여서는 사실 진지한 결사항전의 자세는 아니었다. 모든 피치를 끝까지 짊어지리라 마음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게 단타로 친 후, 누군가 대신하겠지'라는 얕은 마음이었다. 물론 내가 임하리라 마음먹은 소수의 첫 리드 클라이밍에는 최선을 다하였다. 다만 끝까지 관통할거란 규모의 맹렬함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문리대 4번길 도합 8피치 중 제 7피치까지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가볍게 먹은 마음 탓인지 내 행동은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선등자는 벽 앞에서 5분 안에 벨트 및 모든 선등장비를 차고 바로 출발할 준비가 되어야한다 명원이 형이 말씀하셨다. 그 동안 내 손에 회수만 수없이 스쳤던 캠(SLCD)을 서투른 손놀림으로 "내 몸에" 차고 어색한 손길로 정리를 한다. 낯설다. 어느덧 진짜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손끝에 비수가 스친다. 5분 임무는 실패 후 주섬주섬 준비를 마치고 간다. 재우(홍, 행신고등학교 2)의 빌레이 하에 무사히 1피치를 마쳤다. 첫 볼트의 긴장감을 넘고, 마지막 주름진 바위면을 넘어설 때 약간의 아리까리함이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해내었다. 별 건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겐 첫 호흡을 넣어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밑에서 바라만 보던 것이 어느덧 내 손을 만지고 있었다. 호흡이 벅차올랐다.
- 2-2 반분리 등반 시스템
등반 전반적으로는, 1피치 후 2와 3을 합, 4와 5를 합하고 나머지 6, 7, 8을 각자 끊어서 총 5번 끊어 갔다. 짧은 두피치인 23, 45를 하나로 묶어 등반한 결과다. 그렇게 6피치까지 모두가 함께하고 7, 8 마지막 두 피치는 명원이 형과 나 둘이서만 다녀오게 되었다. 재우와 소현 누나는 꽤 편편하고 넓은 6피치 완료 지점에서 기다렸다. 마지막에는 6피치 완료지점에서 다시 만나 다같이 하강하였다.
시스템은 조금 특이하다. 처음 경험한 것이었는데 4명이 실제로는 완벽히 독립적으로 분리한 2-2 시스템이 아닌 반분리 시스템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다. 선등자인 내가 등반줄 외에 별도로 줄 하나를 더 몸에 달고 간다. 선등자가 피치 완료 후 달고온 별도의 줄 하나를 픽스시키고, 그 줄로 또 다른 등반자가 등강기를 차고 오른다. 그 동안 선등자는 세컨을 후등 빌레이 보고 먼저 도착한 등강기 등반자가 바로 네 번째 등반자를 빌레이 봄으로써 후등 2명이 짧은 간격으로 거의 동시에 올 수 있게 된다. 다만, 노련한 등강기 등반자와 슈퍼 베이직이라는 자동 유통 등강기가 준비되어야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훌륭한 장비와 훌륭한 등반자, 그리고 훌륭한 정신이 준비되면 등반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낮은포복
1피치를 완료 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이어나가게 되었다. 머리속에 멈칫, 물음표 하나가 스쳐간 것도 같지만 그대로 2, 3피치 연계를 한 번에 치게 되었다. 짧은 2피치 후 3피치에 왼쪽으로 아주 잘생기게 파인 반침니를 만났다. 이곳에서부터인 것 같다. 진심으로 식은 땀줄기가 등줄기를 타기 시작한 것이. 벼가 왼쪽으로 고개를 반쯤 숙인 모양이었고, 딱 몸 하나를 낄 수 있으며 손재밍이 먹지 않는다. 속칭 노가다라고 말하는 등반이 예상되었고 그걸 선등으로 직접하게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이 감돌았다. 손 쉬웠던 1피치와 달리 사선으로 걸쳐진 상태에서 캠의 역할을 진심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몸은 잘 껴졌다. 그렇지만 끼는만큼 힘과 체력이 소모되었고, 부족한 자세 및 기술로 인해 효율적인 등반은 아니었다. 추한 몸부림이 꼭 낮은포복으로 각개전투를 하는 느낌이었다. 지렁이 흙탕물 튀기듯 전전끙끙 나아간 결과 손재밍이 먹히는 폭으로 좁아졌고 감사하게 끝을 올라타서 완료하였다. 1피치와 다르게 시간이 꽤 걸렸다.
- 깊은 추락
계속하여 운명의 4피치가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한번 크게 꺾이고 만다. 판대기가 앞으로 덮여 위쪽에 있는 크랙에, 판대기 왼편 모서리가 너무도 정석적으로 잡히는 홀드들로 거의 연직의 길이다. 다만, 덮여있는 왼쪽면 또한 같은 방향으로 거의 연직이고 크랙을 기준으로 옆으로 접혀있지도 않게 평행으로 이어져 있다. 즉, 레이백의 옆으로 눕는 방향 자세는 취할 수 없으며 면에 수직인 뒤쪽으로 강하게 당기고 발로 앞 방향을 밀어야 하는 힘의 길이었다. 인공으로 하지 않고 가면 정말 힘든 길이라 말씀해주셨는데, 나는 너무 객기를 부렸다.
두번째 볼트에 퀵을 걸려고 한 손을 땐 순간 추락하였다. 연직방향 그대로 빌레이어 쪽으로 떨어진 위험한 추락이었다. 재우가 몸으로 잘 받아주어 나는 상처하나 없었지만 뒤의 벽에 강하게 부딪히는 바람에 오른쪽 어깨 후면에 타박상을 입었다. 한참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이 흔들렸다. 골절이나 바로 하산해야할 응급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깨를 위로 들거나 힘을 주면 아프다고 하여 등반은 힘들게 되었다. 내가 능력 밖의 무리한 시도를 하였기에. '떨어져도 잡아주는 줄이 위에 있는 후등과 다르게 선등을 하다가 떨어지면 밑이 다칠 수 있다.' 감히 허투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앞설 수 없다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다. 반칙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마음에 후회가 들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인공으로 고쳐잡고 볼트에 퀵을 따서 서둘러 올랐다.
- 마음의 문제
강렬하게 몰아쳤던 4피치는 그 짧고 굵은 크랙을 올라 넘으니 허망하게도 매우 짧게 끝나 있었다. 이어진 5피치는 선등자의 시스템적 대비와 마음가짐을 시험하였다. 직전의 강력한 힘의 당기기 뻥홀드성 크랙과 달리 상대적으로 손에 딱 잡히는 얇은 저그(jug) 홀드의 쉬운 크랙이었다. 사실 다 오르고 나니 정말 별 것 없는 길이었지만, 이날의 모든 눈은 선등자의 시점으로 비추어졌고 처음인 길은 불확실성만이 넘실거렸다. 출발할 때 명원이 형님께서 퀵이 거의 필요치 않을 것이라 말씀해주셨는데 4피치를 거쳐오니 알파인 드로우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캠이 전부였다. 그 부분에서 일차적으로 당황한 나는 소리쳐 퀵이 하나밖에 없다고 여쭈었다. 돌아온 대답은 크랙이 좋고 캠만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볼트가 아예 없었기에 어리석고 공허한 질문이었으나 나도 모르게 퀵에 집착하고 있었다.
프렌드라는 별칭처럼 친숙한 벗이 되어야 할 터인데, 퀵과 달리 미숙한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내겐 자꾸만 망설여졌다. 결국 전적으로 캠을 믿고 올라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그 진실을 마주하기 피하려 했던 것은 힘이 빠지면 떨어지는 구조의 수직의 길 형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필요 장비상으로는 3피치와 거의 같았지만 몸을 낑겨서 힘든 대신 떨어지지는 않으며 사선으로 걸쳐 떨어져도 캠에 충격이 먹는 각이 다르다는 심적 안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정신을 옥죄어 캠의 사용과 믿음, 루트 전체를 보는 시야를 시험했다.
다만 각도상 크랙의 너머가 보이지 않으니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크랙 자체는 짧고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너머의 고정 확보물의 존재를 알 수 없으니 선뜻 발이 내밀어지지가 않았다.
'만일 짧은 구간을 쉽게 치고 올라갔는데 확보할수가 없고 힘은 빠지면 어떡하지?'
'그렇게 해서 추락했는데 캠이 터지면 어떡하지?'
크랙의 너비 상 만일의 상황이면 믿어야 할 건 얇은 소수점대 캠밖에 없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75 혹은 .5 캠을 최소한의 확보로 생각하고 안정적인 스탠스의 크랙 출발지점에 설치하고 올랐다.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계산과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몇 번 심호흡한 후 추락의 가능성을 자못 각오하고 빠르게 올랐다. 올라오니 볼트가 없어도 앵커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닌 곳이었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해보고 나면 극히 쉬워도 하기 전까지의 발상은 쉽지 않았다. 만약을 생각하고 가거나 하지 않고 가거나. 둘의 차이가 어마어마함을 깨달았다.
- 고마운 오른발
싱겁게 5피치를 올랐지만 4, 5피치의 연이은 물리적, 정신적 사고가 나를 몰아붙였다. 나와 부딪혀 다치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재우를 최대한 끌어당기며 빌레이를 보았다. 뒤이어 정신의 문제였음을 입증하듯, 명원이 형과 소현 누나는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모두 금방 올라왔다. 반을 넘게 올라왔지만 어느덧 바꾸자는 생각도 말도 못한채 기계적으로 리드는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재우가 다쳐서 더이상 부탁할수도 없었다.
6피치는 시점부의 짧은 반침니를 다시 얼마간 끙끙대며 타고 올라가 오른쪽으로 짧은 슬랩을 트래버스하였다. 반침니 위 꺾이는 점에는 알파인 드로우를 설치하였다. 슬랩에 약한 나로서는 이 곳이 정말로 추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모든 루트 전체의 크럭스에 가까웠다. 왼발이 한번 터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때 좋았던 오른발이 계속 안터지고 개겨주는 것이 어찌나 고맙던지. 주자자작- 주자자작- 계속 불길한 소음을 내며 터지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흘러갔다. 5-6 밖에 되지 않았던 걸음 수가 50보처럼 느껴지는 트래버스였다.
손이 잡히고 행복도 잠시, 또다시 반침니다. 좌향 약한 사선 반침니가 지겹도록 힘들게 느껴졌다. 어리숙한 발놀림에 발이 껴서 빼는 것도 몇번이고 반복되며 지치게 하였다. 정말 어중간한 너비의 침니에서 발 전체를 돌려서 끼고 일어서는 넓은 재밍 기술이 도저히 발에 익지가 않는다. 발을 잘 쓰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함을 다른 모든 부위에서 일어나는 시위로 처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좌향 반침니가 끝나니 좌측에 커다란 벙어리 바위를 끼고 도는 우향 예각 반침니가 나왔다. 이 예각은 정말로 사랑할수가 없는것이 정말로 아무 '손'을 쓸수가 없는데 발조차 더욱 허우적인다. 벙어리 바위 절묘한 위치의 퀵에 볼트를 따고 또다시 인공으로 올라섰다.
- 희미해져가는 이성
계속 반복해온 시스템으로 모두 6피치 완료지점으로 올라오고 7피치는 보이지 않는 지점으로 꺾어 올라갔다. 올라갈 때 내려갈때 또다시 지겨운 그놈의 침니크랙이다. 올라갔다 내려가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넘어가 소통이 어려웠다. 좌측으로 계속 진행해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쌍볼트가 있는데 길을 잘못들어 조금 더 내려갔다. 쉬운 접근길을 놔두고 한참을 끔찍한 반침니에서 씨름했다. 5호 캠을 넓게 쳐서 인공으로 따면서까지 당겨봤지만 손도 안잡히고 발도 찍히지 않았다. 침니에 올라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쌍볼트가 3m 위에 정말 가깝게 눈앞에 있는데, 얄밉게도 그 한 지점 올라타는 것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후등도 아니기에 내가 가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압박감이 심하게 올라왔다. 내가 할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이 지점 하나에 막혀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무시무시한 분노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러다 계속하여 실패한 채 제풀에 꺾여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 무언가 도저히 이상해서 길을 찾으려 눈을 돌리니 그제야 허무하리만치 쉬운 얇은 크랙이 보인다. 관성에 의해 반사적으로 내려오다가 정답을 지나칠 정도로 이미 체력이 너덜해진 상태였다. 한심함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완료를 하고 줄을 당기며 주변을 보니 손가락 바깥면과 오른발목 안쪽, 온몸에 옷과 내내 만지고 뭍은 자일 곳곳에 피칠갑이 낭자한 것이 보였다.
- 피와 땀, 악과 깡
그리 길지 않은 7피치에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긴 시간을 소모할 동안 다른 팀원들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을 것이다. 줄을 사리고 있는데 어느순간 훅 빠지는 느낌이 들면서 스르르 딸려오더니 끝자가 나타나 놀랐다. 내가 오랜 시간이 걸려 7피치를 마치며 재우와 소현 누나는 6피치에서 대기하기로 한 것이었다. 명원이 형이 곧 등강기 후등으로 나타나시고 우리 둘만 마지막 끝까지 다녀오자고 하셨다. 마지막이니 힘을 좀만 더 내보자고 하셨다. 사실 나는 이 때 이미 이상한 반침니와의 씨름으로 거의 몸이 퍼졌다. 발뒤꿈치도, 손도, 대퇴근도, 장요근도, 삼두도, 몸에 어느 하나 땡기지 않는 곳이 없고 손이 바위를 잡고 만지기만해도 살아있는 날에 참 아팠다. 특히 장시간 죄여매어 풀고 쉬지도 못한 발뒤꿈치가 너무나도 아팠다. 더 이상 침니에 발을 끼지 못할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한풀 꺾인지 한참이지만 또 다시 맹목적으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정말 끝날 때까지 한결같은 길이구나. 마지막 시작점까지 칸테나 레이백, 혹은 반침니의 크랙이다. 징글징글, 징하다 못해 화가 나고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나의 표정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4호캠을 치고 힘이 나지 않아 당긴다. 형의 말씀대로 5호를 텐션 상태에서 치고 또 당기려 하였다. 각도 때문에 하네스에 앉은채로 캠을 잘 설치하지도 못했고 당겨도 다시 텐션을 풀고 잠시동안 끌어서 위 캠에 걸 힘조차 남아있지가 않았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서 고함을 내질렀다. 욕이 입에서 절로 새어 나오고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힘이 풀어져 몸이 너절해졌다. 이를 지켜보시던 명원이형께서 결국 마침표를 대신 찍어주셨다. 이 상태로 계속하다가 다칠거 같다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기진맥진한 채 2m 남짓 더 악으로 깡으로 비벼본 나의 여정은 여기까지였다.
- 이 길의 끝
내려서 다시 시작지점에 확보하자 하강에 대해 물으셨다. 어쨌든 명원이형께서 마지막 피치를 오르시고 내가 빌레이를 봐야 한다. 내가 오를 수 없으면 하강하시면서 트래버스를 치신다는 등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리란 것을 말씀해주셨다. 체력적으로 힘이 남아있냐고 하셔서 우선 신발을 벗고 조금 쉬면 나아질 것이고, 선등이 아닌 후등으로 가며 위에서 당겨주시면 어떻게든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우선 명원이 형께서 7피치를 오르며 등강기로 매고 오신 파란 줄을 같이 매고 올라가기로 하셨다. 두동으로 하강을 해야했기에 선등 빌레이와 동시에 슈퍼베이직의 파란줄을 당겨 유통시켜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확보줄과 등반자일, 매고 가는 파란 줄이 꼬여서 얼마간 가다가 중간에 등강기를 해제하였다. 명원이 형이 금방 완등하시고 나는 곧 잠시간 쉬었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짧은 휴식에도 비명을 지르는 발을 비롯 온몸을 이끌고 마지막 등반에 임했다. 사실 등반이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거의 모르겠다. 거의 아무런 남은 힘이 없이 경련이 일어났다. 쉽게 몸을 넘기는 동작조차 바들바들 떨려왔다. 닥치는 대로 캠과 퀵을 따고 정말 마지막 지점의 길고 굵은 슬링까지 아무 미련없이 잡고 밟았다. 허무함과 극도의 피로를 지닌 채 문리대 4번길을 마쳤다.
"밑에 애들 기다리다가 추워서 얼어죽겠다." 말씀을 마치기 무섭게 명원이 형은 빠르게 하강하셨다. 나 또한 서둘러 내려와 곧 재우가 먼저 내려가고 남은 소현 누나를 만났다. 입에서 떠는 숨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추위에 떠는 모습에 당황함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내가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더욱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미지근하게라도 식은 핫팩을 건네고 계속 빠르게 하강을 이어나갔다. 계속 바람이 불었지만 해가 저물면서 내려올 때 특히 무시무시한 바람이 몰아쳤다. 낮의 따스함과 땀방울이 무색하게 잊혀질 정도의 칼바람이었다. 2번 끊어서 하강을 마쳐 내려오자 해는 이미 산등성이를 넘어갔고 날도 어두워지기 직전이었다. 서둘러 장비를 정리하고 완전히 어둑해지기 전에 내려올 수 있었다. 소공원으로 가면서 어두컴컴해졌고 소공원에 도착할 때에는 6시 반쯤의 완전한 밤이었다.
- 해후
20시 40분차를 예약해둔 상태에서 18시 30분에 소공원에 왔으니 그리 여유롭다고 할 순 없었다. 우리가 소공원에 왔을 때 즈음엔 한시길 릿지팀도 탈출로를 찾아서 하강한 후 소토왕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제일 빠르게 내려온 팀은 대청봉 트래킹 팀이었다. 그들은 8시 10분차를 타고 제일 빠르게 떠났다고 한다. 빠르게 택시를 타고 야영장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바로 떠날 수 있도록 나의 개인 텐트를 해체하고 두고 온 짐까지 챙겼다. 야영장에서 500미터 남짓 화채마을까지 걸어올 때의 마지막 체력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단언컨대 근 2년간 있었던 모든 일을 통틀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저녁은 예전에 한 번 묵어본 적 있는 설악산장(설악롯지) 마을의 고기집에서 연탄 생고기를 먹었다. 재우와 명원이 형이 먼저 도착하여 고기를 굽고 계셨다. 근래에 금주를 하고 있었는데 이 날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들이킨 맥주 첫 잔의 미친듯한 맛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새벽부터의 잠 못자고 달려온 고된 여정이 한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고기도 밥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숨겨진 맛집이었다. 기분도 기분인 만큼 명원이 형의 말씀마따나 본디 맞추어 가려고 했던 시간까지 조금만 더 연기하여 다음차를 예매하였다. 오늘의 등반을 갈무리하면서 함께한 동료들과 위에서의 이야기, 힘든 시간을 공유하고 밥도 맛있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함께해준 팀원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 잘 있거라, 설악이여
몇 번을 오고간 설악이지만 유독 이번만큼 기분이 후련했던 적도 없다. 0.5박 1.5일 일정도, 등반도 정말 짧고 굵고 빡셌다. 밥을 먹고 나와 소현 누나와 나는 택시를 타며 남은 명원이 형과 재우에게 인사했다.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인사를 나누며 택시는 떠났다. 8시 반쯤에 택시를 타고 나와 터미널까지는 금방 날랐다. 공교롭게도 터미널에 딱 48분에 도착했는데, 앞서 한시길 친구들이 50분 차를 탄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혹시나 싶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버스에 잠깐 올라봤더니 익숙한 얼굴들. 짧게나마 잘가라고 손 흔들며 먼저 보냈다. 우리 역시 뒤이은 21시 20분 차가 있었기에 여유롭게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뭍은 피와 손떼를 씻겨내고 조금 정비하였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 거짓말처럼 잠들었고, 눈 감았다 뜨니 서울 도착. 올 때는 차가 안막혀서 지연없이 잘 도착한 모양이다. 11시 50분에 우리 둘 다 기적적으로 끝나지 않은 버스를 잡아 타며 인사했다.
그러나 나에겐 정말 최후의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는데 기숙사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낙성대역까지는 643을 잘 타고 왔으나 관악02는 완벽히 끊겨있었다. 택시를 탈까, 싶다가 가진 것도 없고 가진 건 두 다리 뿐이라는 생각이 미쳤지. 이미 미쳐버렸는데 해탈해서 별 생각도 없고 터덜터덜 16kg 등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00 : 50 에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제야 안전히 집에 도착하면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라 어디 나갔는지 룸메가 없어 다행이다. 짐짝도 많아 부스럭거리느라 민폐인데다 내 꼴을 보면 말도 아니었을테니. 엄청난 피로와 함께 뿌듯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씻고 누웠다. 못 일어날 것 같은 잠이었다.
- 후
함께해준 사람들 덕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들이 고맙고, 미안하다. 다 담을 수 없지만 그들의 얼굴, 해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억에 남을것 같다. 이래서 순간순간이 소중한건가.
정상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라지만 끝까지 모든걸 부딪혀 보았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았다. 눈물로 이 악물고 올라갈 정도로 힘들었지만 무언가 남은 게 내 안에 있는 것도 같다. 무언가에 이 정도로 힘을 쏟아본 적이 얼마만이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가끔씩 돌아보다 보면 조금씩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 <Fin.>
첫댓글 피나면서까지 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