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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히말라야 대탐사 Ⅰ -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여행
김창호 서울시립대 OB
▲ 밴타브락1봉(중앙부 왼쪽 봉) 1봉 오른쪽 봉이 83년 악우회가 초등한2봉이다
최근 미국과 아프간 전쟁으로 뒤숭숭한 상황에 처한 파키스탄은 북부 지역으로 K2(8,611m)와 낭가파르밧 (8,125m) 등 8,000m급 거봉 5개를 비롯해 수많은 거봉과 흰 산들이 솟아 있는 산악국가다. 카라코룸, 그레이트 히말라야, 힌두쿠시 등 크게 3개 산군으로 나뉜 가운데 수많은 거봉과 거벽이 솟구쳐 있는 국가가 파키스탄인 것이다. 이 파키스탄 히말라야는 우리 등반대들의 보고를 통해 카라코룸 방면, 그것도 일부분만 알려져 있을 뿐 아직도 한국 산악계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다. 이것은 네팔 히말라야에 비해 늦게 진출한 까닭도 있지만, 이보다는 여름 한철에 한정된 짧은 등반 기간과 사막성 기후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캐러밴과 등반의 어려움 때문에 8,000m급 거봉 외에 다양한 지역으로 눈을 돌리는 등반대가 별로 없었던 탓이다. 탐험정신과 개척정신으로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13개월간 파키스탄 일원의 빙하를 탐사하고 돌아온 김창호씨(33․서울시립대 OB)의 연재를 통해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빙하들과 주변에 솟아 있는 명봉들을 소개한다.
창문 밖 세상에는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어 갔다. 히말라야에 관한 수백 권의 책들과 한쪽 벽면에 매달린 대동여지전도와, 또 다른 벽에 붙어 있는 카라코룸산맥 지도에 묻혀 1년이라는 준비기간이 흘렀다. 떠날 때가 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하는 여행을….
가장 큰 문제는 산에 간다면 병이 날 정도인 노모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다.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어느 날 밤, 내 방에는 잘 들어오시지 않던 어머니께서 얘기 좀 나누자며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길 가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무엇인지는 잘은 모르겠다만 너는 그것 할 때만 행복해 보이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책상 위에 하얀 봉투를 올려놓고는 나가셨다.
대학 노트 6권 들고 떠난 탐사
그 날 밤은 뜬눈으로 새웠다. 며칠 후 현지에서 취득할 정보와 탐사기를 기록하기 위해 7권의 두꺼운 대학노트를 구입하여 그 중 한 권을 노모께 드리고는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들을 여기에 쓰세요. 그러면 제가 돌아와서 책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는 이 여섯 권에 소중한 내용들을 담아 오겠습니다고 말했다.
우리 모자는 그렇게 약속하고, 노모께서 여자의 일생이라고 가제목을 짓고 몇 장을 채워 나갈 때쯤인 2000년 5월6일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앞에는 65년의 긴 여정의 여행기와 7개월의 짧은 여행기가 놓여 있다.
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한 명의 가이드와 몇 명의 포터를 고용하고, 전세 지프를 타고 다닌다면 같은 기간동안 최소 5,000만 원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그리고 고용인과 같이 다니면 이동 속도가 너무 느려 카라코룸과 힌두쿠시 산맥만 탐사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인 시로 시라하타가 카라코룸이라는 화보집을 위해 3년이라는 기간이 걸렸고, 평균 40명의 현지 고용인과 스탭이 움직이느라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내가 다닐 지역은 시로 시라하타가 답사한 지역의 두 배가 넘는다. 촬영장비를 비롯, 먹고 자고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낭 하나에 다 꾸려야 한다. 그 무게는 30~40kg이 될 것이다. 때문에 모든 준비물이 무게에 맞추어 결정됐다. 체중은 5kg 정도 늘렸다. 탐사 도중에는 많이 먹지 못한다. 그래서 체중을 유지하며 하루 두 끼 먹는 연습을 3개월 동안 했다.
파키스탄으로 가는 영호남 K2 원정대와 일정을 맞추느라 계획보다 1주일 늦게 출국했다. 김포공항 터미널에서 많은 축하객들 사이에 서서, 나도 환송하러 나온 사람 마냥 서 있었다. 이젠 혼자다. 험악한 카라코룸의 산에서 빙하에서 다친다거나 강하지 못하면 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는 앉아 있어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대사관을 비롯,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다. 일단 외국인 체재 신고부터 해놓고 3개월이 가까워 오면 연장하러 내려오기로 마음먹고 스카르두로 향했다.
탐사 중 먹을 음식을 현지식으로 해결하기로 하여 7~8개월 동안 사용할 짐이 카고백 2개가 채 안되었다. 도로를 만드는 데 20년이 소요됐다는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20시간 달려 도착한 스카르두는 8년 전 트랑고를 등반하러 왔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바자르에서 야채 파는 아저씨, 호텔 주인들, 지저분한 시장골목 등-.
스카르두는 인더스강이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라닥과 레를 거쳐 협곡을 이루다가 갑자기 산맥들 사이에 광활하게 펼쳐진 강가 사막 위에 형성된 작은 도시다. 봄이 되면 카라코룸의 유명 봉을 등반하고자 하는 등반대들이 세계 각국에서 이곳으로 모여든다. 다른 직업에 비해 원정대 포터가 임금을 몇 배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농사와 양을 치는 주민들은 등반철만 되면 쟁기와 삽을 버리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서로 고용되려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자기네들끼리 싸운다.
▲ 비아호와 발토로 빙하의 분기점에 위치한 아스콜레의 치사르 폴로 경기장.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페허 상태다. 발토르 빙하 주변의 산군들이 계곡을 메우고 있다.
시끄러운 도로을 벗어나 스카르두 카라포초 성을 한 바퀴 일주하려고 모래사막을 걸어 인더스강변으로 갔다. 뿌연 강물에 물고기가 있는 듯 양가죽으로 만든 배(zak)를 타고 낚시를 하던 주민이 나에게 타보라고 권유하였으나 불안정한 그곳에 카메라를 들고 올랐다간 바로 인더스강에 곤두박질칠 것 같아 사양했다.
바위절벽에 가로막혀 길이 없어지자 등반하며 들어간 곳에 푸른 밀밭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암벽등반을 배워둔 것이 이러한 순간에는 큰 도움이 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바위 밑에서는 맑은 석간수가 솟아오르고 주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곳이 나르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스카르두를 혼자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하룻밤 천막을 치고 지내리라 마음먹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비아호 빙하 탐사는 한국에서 가져온 식량을 먹기로 하여 짐을 꾸리는 일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튿날 이른 아침 K2팀의 지프에 30kg 무게의 배낭 하나와 몸을 실었다. 지프는 인더스강을 건너고 사막을 달려 발티스탄의 옛 소왕국이었던 시가르에 멈추었다. K2팀이 경찰서에 신고하는 동안 오래된 시가르의 이슬람 모스크에 발길을 돌렸다.
명색은 이슬람 사원이지만, 이곳은 서기 7~8세기경 불교가 번성했고, 티벳이 지배하고 있어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지붕은 티벳식이고 기둥과 발코니는 고대 페르시아 양식을 띠고 있다. 또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발티어는 고대 티벳어다. 발티스탄을 다른 말로 소티벳(Little Tibet)이라 한다.
고독보다 두려운 낯선 이들의 접근
급히 촬영을 마치고 기다리는 지프를 타고 브랄두강을 따라, 스카르두 출발 8시간만에 이 계곡의 마지막 마을 아스콜레(3,048m)에 도착했다. K2팀의 짐 정리를 도와주고 동네에서 구입한 닭으로 백숙을 만들었다. 하지만 고소에 사는 늙은 닭은 2시간 동안 압력솥에 들어 있었어도 자동차 타이어와 같이 씹으면 이빨이 튈 정도였다. 식사 도중 K2팀 등반대장이 바인타브락에서 죽은 사람도 많은데 혼자 가면 무섭지 않느냐?고 묻는다. 묵묵부답-.
5월15일 원정대는 새벽부터 포터들에게 짐을 분배하느라 정신이 없다. 먼저 출발해 언덕을 올라 아스콜레 마을로 들어갔다. 반 지하식으로 진흙으로 지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몇 년은 세수를 하지 않았을 법한 꼬마들이 볼펜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도랑물에 세수하면 볼펜을 주겠다고 했으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어떻게 이들을 이해하겠는가? 며칠이 지나면 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겠지.
▲ 파미르, 카라코룸, 힌두쿠시 개념도
(그림 down이 안돼요!!)
두 시간을 걸어 산 친구인 문종국, 윤치원과 다리 건너는 지점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이제 각자의 길로 가야한다. 그들은 발토로 빙하로, 나는 비아호 빙하로-. 종국이가 내 배낭을 들어보더니 너무 무겁지 않느냐고 묻는데 그냥 웃었다. 그의 단출한 배낭에는 기타가 매달려 있다.
성공하라는 말을 남기고 뒤로 돌아섰다. 저편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돌아보지 않고 땀이 날 정도로 빨리 걸었다. 너희들도 바라는 대로 정상에 올라라. 나 또한 출국할 때 계획했던 바를 이루리라.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돌아갈 수도 없다. 땀인지 눈물인지 볼 위로 흘러내린다. 태양빛은 목덜미를 따갑게 비추었다.
사방 100여m의 평평한 풀밭이 나타났다. 치사르 폴로(polo)장이다. 아스콜레 마을 전설에 따르면 옛날 티벳 왕 치사르가 출정하기 전 부인으로 맞은 현지 공주를 차포의 온천 옆 돌집에 감금시킨다. 그가 없는 사이 악마인 진이 나타나 부인을 데리고 발토로 빙하로 도망쳤으나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치사르는 비마를 타고 날아가 구출한다. 그 후 부인이 아이를 낳았으나 그 아들은 진의 아이였다. 이에 분노한 치사르왕은 아들의 목을 잘라 그 머리로 이 곳에서 폴로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말도 없고 경기장은 폐허로 남아 있을 뿐이다.
비아호 빙하로 들어가는 언덕을 1시간 올라 안부에 도착했으나 빙하로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올해 처음으로 빙하를 걷게 되어 트레커나 등반대의 캐러밴 흔적이 전혀 없다. 등반을 하여 모레인에 내려섰다. 배낭이 어깨를 짓누른다. 빙하 남쪽 가장자리로 길을 잡고 오늘 캠프지인 남라까지 가기 위해 정신없이 걸었다.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다. 가끔 뒤돌아보면 빙하 말단의 바코르다스(Bakor Das․5,809m)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푹푹 무너지는 흙과 자갈이 섞인 모레인 표면은 운행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먹을 물도 없다.
빙하 위의 남라 캠프지에 도착했다. 지도상의 그곳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저녁 노을 황금빛으로 물드는 우준브락(Uzun Brakk․6,422m)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천막 안에 누웠다. 육신이 땅 속으로 꺼져 내리는 느낌이다.
17일 새벽, 잠에서 깨 정신이 들 때쯤 이 광활한 산중에 천막 쪽으로 다가오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보니 세 사람이 총을 메고 도끼를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순간 현지 친구인 굴람이 한 얘기가 머리를 스쳤다. 이 지역에서 가끔 혼자 다니다 실종되는 사고가 많다고-. 그는 마지막 마을을 떠날 때는 항상 뒤를 돌아다보고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라고 몇 번을 일러줬다. 이 상황을 대처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맨발로 천막 밖으로 뛰어나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비상시에만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가스로 차를 끊여 한 잔씩 주었다. 그들은 사냥하러 호블럭으로 간다고 했다. 몇 마디의 말이 오가고 나니 해칠 사람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늘 산양(ibex)을 잡아 고기를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한다. 정신없이 나는 천막을 걷다 말고 너희 먼저 가라고 하고는 그들이 언덕을 넘어 가는 모습을 본 뒤 얼른 배낭을 꾸려 빙하 반대쪽으로 갔다. 그 후 다른 빙하의 탐사 때도 좋지 않은 사건이 벌어져 그 다음부터는 마을에서 떠난 첫날 둘째 날은 천막을 쳐두고는 좀 떨어진 바위 밑에서 잠을 잤다.
밴타브락 일원은 거벽들
산으로 들어간지 이틀 사흘째는 그런 대로 운행속도가 빨라졌다. 버드나무 잔가지와 마른 쇠똥으로 불을 피워 끼니를 때웠다. 평평한 얼음빙하를 횡단해 비아호 빙하 북동쪽, 우준브락 빙하와 만나는 밴타(Bainta) 캠프지에 도착했다. 1892년 마틴 콘웨이 팀이 쌓아놓은 큰 돌탑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른 시즌이라 목동들은 없다.
아스콜레 마을에서 산명을 채록할 때 어느 누구도 바인타브락(7,285m)을 바인타브락이라 하지 않았다. 밴타브락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바인타브락이라고 부르는 데는 초창기 우리 나라의 진출자들이 일본 자료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바인타브락2봉(6,960m)이라고 불리는 봉은 악우회가 1981년 1차 시도에서 실패하고, 83년에 세계 초등을 달성하는 대업적을 이루었다.
밴타(Bainta)라는 말은 이 산 밑에 있는 목동들의 여름 방목지에서 따왔다. 브락(Brakk)이라는 뜻은 발티어로 암벽이 많은 봉우리를 뜻한다. 우리의 설악산이라 할 때 악(嶽) 자의 의미와 같다. 당시 현지인이나 밴타의 여름방목지의 목동들에게 한 번만이라도 물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초등시 이름이 없는 봉우리는 초등자에게 산명을 명명할 권리를 일부 부여한다. 또한 2봉은 1봉과는 완전히 별개의 봉으로 순서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물론 바로 옆의 라톡(Latok)에도 1~4봉으로 명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밴타에 천막을 쳐 두고 라톡의 서면인 밴타 룩파르 빙하와 우준브락 빙하를 탐사했다. 트랑고타워와 같은 암봉이 많은 이 산군은 앞으로 한국 산악인에게 거벽등반의 대상지가 될 것이다. 특히 라톡3봉(6,949m)의 수직고 3,000m의 서벽은 아직 미등벽으로 남아 있으며, 라톡1봉(7,147m) 북릉은 당대 최고 등반가들의 20여 년의 도전을 물리치고 미등으로 남아 있다. 올해 폴란드의 쿠르티카와 일본 야스시 야마노이의 시도도 무산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내가 탐사하여 확인해야 할 것이 마틴 콘웨이가 지도상에 표기한 오거(Ogre․밴타브락1봉)가 현재의 지도상에 표기되어 있는 우준브락인가 아니면 밴타브락인가 확인하는 것이다. 콘웨이가 이 지역을 탐사한 뒤 7년 후인 1899년 블록 워커만 부부가 탐사한 지도와 의견에 따르면 콘웨이의 오거(영어로 사람 잡아먹는 악마라는 뜻)는 우준브락이고, 지금의 밴타브락에는 카일라사(Kailasa)라는 이름을 붙인다. 내가 탐사와 각종의 지도를 대조한 결과 콘웨이 지도의 오거 위치는 우준브락이다. 비아호 빙하 말단에서 보는 우준브락의 형상에서 명명의 동기를 유추해볼 수 있다.
다시 비아호 빙하를 거슬러 올라 소스분브락(Sosbun Brakk․6,413m)을 탐사하러 빙하의 원류인 심강 빙하로 갔지만, 눈이 내리는 악천후로 캠프지로 되돌아왔다. 이 일대는 콘웨이가 스노 레이크(Snow Lake)로 이름을 붙인 곳이다. 흐르는 빙하가 아닌 눈과 얼음의 호수로 알았던 지금의 룩페라와 빙하와 심강 빙하는 워크만 부부에 의해 의혹이 증폭되었으나, 1939년 십튼 탐사대에 의해 수계가 밝혀지고 비밀이 풀렸다. 이곳은 탐사하지 못한 채로 다음을 기약해야했다.
내일은 아스콜레 마을 바로 아랫동네인 통골에서 일본인 다케와 나무를 심기로 한 날이다. 사흘 걸은 거리를 오늘 단 하루만에 가야한다. 배낭을 들쳐 메고 뛰었다. 장장 14시간의 마라톤 끝에 통골에 도착했다. 도중 배낭을 내려놓고 단 한 번만 쉬었다. 그러나 그곳에 다케는 없었다.<계속>
◈파미르
아시아의 모든 산줄기의 발원지
소파미르에서 티벳 접경까지 카라코룸에 포함
카라코룸(Karakorum) 산맥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유라시아대륙에 형성되어 있는 산맥구조의 전체적인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한반도의 산을 알고자 할 때 백두대간을 이해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리는 것과 같다. 문제는 세계의 지붕(The Roof of the World)이라 일컫는 파미르 매듭에 있다.
파미르는 산맥이라 부르지 않는다. 파미르(Pamir), 파미르 매듭(Pamir Knot), 파미르 고원(Pamir Plateau)이라 칭하고, 중국 옛 사서에는 야생파가 자란다고 해서 총령(蔥嶺) 또는 음역하여 파밀(播蜜)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국경구분 상 타지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아프가니스탄, 중국의 사이에 있는 파미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산맥들의 출발점이다.
이제 그 산맥들을 분류하여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듯 이 광활한 대륙을 살펴보자. 먼저 파미르에서 시작한 천산(天山)산맥은 동북쪽으로 뻗어나가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측의 동쪽으로 사라지고, 또 북쪽으로 흐른 한 줄기가 알타이 산맥으로 연결된다. 파미르에서 동남동쪽, 타클라마칸사막 남측으로 뻗어나간 곤륜(崑崙․Kunlun) 산맥은 중국의 청해성에서 한 지맥이 북동쪽으로 뻗어 알틴 타그(Altyn Tagh) 산맥이 되고, 곤륜은 세력을 낮추었다 적석산맥으로 연결된다.
산맥 분계상 소파미르에서 연결된 카라코룸은 남동으로 흘러 서부 티벳의 접경지 샤이욕(Shayok)강에 이른다. 그 남쪽에 대히말라야(Great Himalaya) 산맥은 인더스강이 북서쪽으로 흐르다 급격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굴곡점의 낭가파르밧(8,125m)에서 부탄의 동부 브라마푸트라 강까지 2,500km 길이로 뻗어 있다. 또 남서쪽으로 뻗은 힌두쿠시(Hindu Kush) 산맥은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불 북측까지 600km 길이로 달린다. 그리고 이 산맥은 그 세력을 낮추었다 다시 서쪽으로 가 코카서스산맥에 연결된다.
혼동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세계의 지붕이라 해서 파미르가 가장 높은 곳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높이로 따진다면 티벳 고원이 4,000~5,000m로 더 높다. 파미르는 구조적인 세계의 지붕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파미르라 함은 코뮤니즘(7,495m), 레닌(7,134m)봉이 있는 트랜스 알라이 지역이 아니고, 산맥구분 상 중요한 매듭 지역은 대파미르(Great Pamir)다. 현재의 아프카니스탄의 와칸 회랑 지역과 타지키스탄에 있다.
산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물을 아는 것이다. 히말라야(위에 설명한 산맥들 전체를 통칭 히말라야라 부르고 있고, 산 구분상의 그레이트 히말라야를 앞으로는 대히말라야라 구분표기하기로 한다)에서 강의 원류는 바로 빙하이다. 카라코룸, 대히말라야, 힌두쿠시 남쪽으로 흐른 지류들은 모두 인더스강에 합류하여 아라비아해로 흘러나간다.
반면 파미르 서쪽과 힌두쿠시 북측의 물은 각각 시르 다리야(Syr Darya), 아무 다리야(Amu Darya) 강이 되어 아랄해로 들어간다. 또 곤륜의 북측과 천산의 동측은 각각 야르칸트 강과 타림 강이 되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사라진다. 대히말라야와 티벳 고원 사이의 창포 강은 브라마푸트라 강이 되어 뱅골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창포강이 정확히 탐사되기 전인 150여 년 전에는 이 강이 지금의 미얀마 이라와디강으로 연결되는 되는 것으로 알았다.
또한 동부 티벳 고원에서 황하, 양자강, 메콩강 등 대하들이 발원한다. 인더스 강과 창포 강, 즉 브라마푸트라 강은 대히말라야 산맥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 형님인 셈이다. 네팔히말라야에서 남쪽으로 흘러 갠지스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는 생성 연대로 보면 산맥의 동생들이다.
이러한 산맥 산군 구분이 정확치 않으면 많은 혼란이 따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주의 카시가르 남쪽에는 3개의 고봉이 있는 산군이 있다. 콩구르(7,719m), 콩구르 튜베(7,480m), 무즈타그아타(7,546m)가 있는 지역을 과연 어디로 분류할 것인가이다. 1991년 서원대학산악회 무즈타그아타 등정 보고에는 곤륜으로 되어 있고, 일본 자료를 근거로 한 <역동의 히말라야>(저자 남선우)에는 파미르 중 카시가르 파미르로 분류되어 있다. 그리고 2001년 대한산악연맹 무즈타그아타 탐사대는 또 곤륜으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혼란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지질적인 개념을 중시하면 곤륜으로 분류되고, 지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파미르로 통상적으로 분류한다. 개인적인 소견은 지리적 측면의 야르칸트 강을 기준으로 분류한 일본의 <히말라야의 고봉>에 따라 파미르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히말라야를 가는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학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의견 교환이 있어야 하며, 한국 산악계 내에서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분류표를 만들 필요가 있다.
♠ 발행일 : 2002.01.01
♠ 기고자 :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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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고 김창호씨의 귀한 글을 읽었습니다.
작년에 후배를 추모하러 동산공원묘원에 갔더니, 바로 옆에 고인이 쉬고 있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