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데이빗 핀처 주연 : 다니엘 크레이그, 루니 마라, 크리스토퍼 플리머, 스텔란 스카스가드 개봉 : 2012년 1월 11일 관람 : 2012년 1월 11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내 평생 이렇게 두꺼운 소설을 이렇게 빨리 읽은 적이 없었다.
한때 저도 친구들한테 문학소년이라고 불리운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또래 친구들과는 다르게 항상 시집을 들고 다녔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소설을 읽었으며, 직접 소설을 쓰겠다고 노트에 끄적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에 푹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책은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두가지를 함께 하는 성격이 못되었기 때문에 내게 남은 시간은 거의 대부분 영화 보기에 소모되었고, 책읽기는 가끔 영화의 원작소설이 궁금할 때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어쩌면 제가 스티그 라그손의 소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기 시작한 것도 영화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스웨덴의 추리 소설은 이례적으로 2009년에 만들어진 스웨덴 영화와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최근에 리메이크된 할리우드 영화가 1주일 차이로 연달아 개봉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이 소설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처음 받아본 순간의 막막함은 글로 설명할 수가 없네요. 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도 한 권을 읽는데 무려 한달동안이나 걸렸을 정도로 책 읽는 속도가 거의 지렁이 100미터 달리기 수준인 제게 각 400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의 소설은 읽기전부터 질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며칠 만에 이 두꺼운 소설을 전부 읽어버렸습니다. 시간이 날때마다 책을 집어 들었고, 영화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소설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1권에서 전개가 상당히 느린 편입니다. 방대한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와 미카엘, 리스베트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400페이지를 전부 할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권째 들어서 미카엘이 사건의 작은 실마리를 잡고 미스터리의 실체에 한발자국 다가서면서 속도감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건을 해결해버립니다. 그런데 워낙 1권에서 꼼꼼하게 밑바탕을 깔아 놓아서인지 2권의 속도감이 지나치다거나, 허술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치밀함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특히 제가 주목한 리스베트라는 캐릭터인데 사회 부적응자에 외모는 피어싱 투성이인 이 20대 여성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 매력을 품어내며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원제가 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아닌 '용문신을 한 소녀'인지 알겠더군요. 제가 이런 비호감적 여성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줄 정말 몰랐습니다.
소설을 읽고나니 영화가 걱정되더라.
며칠 만에 이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읽어버린 저는 책을 덮은지 2시간 만에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보기 위해 공항 CGV에 앉았습니다. 요근래 읽었던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인 만큼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걱정도 앞섰습니다. 사실 사건 자체는 그다지 영화의 러닝 타임을 길게 잡아먹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도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와는 달리 미스터리는 간단한 편이었으니까요.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몇몇 불필요한 방예르 가문의 사람들 설명을 생략해버린다면 영화의 러닝 타임은 확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캐릭터, 특히 리스베트(루니 마라)를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데이빗 핀처 감독이라 할지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리스베트는 분명 영상 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니 대사로 그녀의 캐릭터를 완성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그녀의 행동으로만 완성이 가능한 캐릭터인데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니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는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야말로 까다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분명 데이빗 핀처 감독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방예르 가문의 복잡한 가계도를 생략하기 위해 그는 사건 진행에 꼭 필요한 몇 캐릭터만 부상시켰고, 급기야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세실리아와 마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의 로맨스는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서 세실리아가 갑자기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미카엘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영화를 1, 2부로 나눠서 제작할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리스베트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영화의 초반 상당 부분을 할애해서 리스베트가 새로운 후견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그에 대해 복수하는 장면들을 그려 넣습니다. 사실 소설 1권에서 가장 속이 후련했던 장면임과 동시에 리스베트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는 리스베트를 제대로 잡아내는데 한계를 보입니다. 그건 데이빗 핀처 감독이라 할지라도 어쩔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타인 속에서 일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리스베트가 왜 미카엘의 조수가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이 안됩니다. 소설에서도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이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를 위해서 상당 부분 공을 들였지만 그것은 리스베트의 심리를 글로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영화에서 그녀의 심리를 해설자의 목소리로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애초부터 리스베트의 매력을 100% 잡기에 영화는 한계가 있었던 셈입니다.
원작에 비해 모자람이 많다.
영화는 원작 소설에서 많은 것을 생략합니다. 특히 미카엘이 두달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출소하는 장면이 생략되었는데, 소설에서는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하는 부분으로 미카엘의 출소를 계기로 소설을 본격적인 방예르 가문의 미스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숨고르기입니다. 초반 모든 상황을 설명하면서 천천히 걸었던 소설의 분위기는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마을의 풍경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두달간의 숨고르기가 끝나고 나면 계절은 겨울에서 봄이 되고 겨울 내내 몸을 움츠리던 소설의 진행도 풀린 날씨 속에서 가속도를 내며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카엘의 수감 자체를 생략한 영화에서는 그러한 숨고르기가 불가능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들의 옷차림이 두꺼운 겨울 옷에서 가벼운 봄 옷으로 대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계절이 변했음을, 시간이 흘렀음을 표현합니다. 이건 숨고르기가 아닌 훌쩍 넘어뛰기입니다. 분명 소설과 영화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방법만으로도 미카엘이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 장면이 소설에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가 드디어 실마리를 잡다.'라는 느낌에서 영화에서는 '갑자기 실마리를 잡다.'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소설과 비교해서 영화에 실망한 것은 미카엘이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그 순간의 희열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살인자의 존재는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아무 생각없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무지한 독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리에트의 실종입니다. '과연 그녀는 밀실과도 같은 이 섬에서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누가 그녀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를 감쪽같이 유기했을까? 아니 그녀가 살해되긴 한걸까? ' 이 질문은 소설의, 그리고 영화의 전제조건입니다. 결국 살인자의 존재는 미끼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리에트 실종의 미스터리에 대한 진실입니다. 이 부분에서 소설과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물론 데이빗 핀처 감독은 너무나도 유명한 원작 소설의 명성을 알고 있기에 결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관객이 결말을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은 영화의 재미를 갉아먹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소설과 영화의 결말은 다르다.'라고 광고하면서 그러한 단점을 메꾸려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말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말이 드러날 때의 희열의 강도 문제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하리에트 실종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질 때의 그 팽팽한 긴장감과 희열이 영화에서는 없습니다. 미카엘의 무표정만큼이나 영화는 무덤덤하게 그 진실을 밝혀낼 뿐입니다. 그 장면을 기대했던 저는 그로인하여 실망감이 물 밀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뛰어난 원작을 가진 영화의 비애
사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만 놓고 본다면 꽤 잘만든 스릴러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무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 타임을 이용해서 원작의 모든 것을 담아 내려고 애썼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그는 최소한의 생략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사실 저는 소설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베네르스트륌에 대한 복수가 생략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건 사족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데이빗 핀처 감독은 놀랍게도 그 장면까지도 담아냈습니다. 대신 그가 생략하기로 선택한 것은 방예르 가문의 비밀을 언론에 밝힐 수 없는 미카엘이 기자로서의 의무와 인간으로서의 측은함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장면입니다. 이만하면 하리에트 실종의 진실 부분만 제외하고는 데이빗 핀처 감독은 원작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영화 속에 담아낸 셈입니다. 원작 소설의 팬에게는 감사한 일이죠.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이 조금 변형되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표현되는 것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니까요.
영화 자체도 꽤 잘만든 영화입니다. 스웨덴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거대 기업인 가족의 감춰진 추악한 본능,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은 데이빗 핀처 감독이 [세븐]에서부터 추구해온 주특기입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루니 마라 연기도 좋은 편이었는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그 냉소적인 표정과 루니 마라의 무표정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새해부터 어두운 영화 보기 싫다며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강하게 거부했던 구피(그녀는 영화의 제목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는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서 '그런대로 재미있었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커서 실망스러웠던 저하고는 정반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 자체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 있고, 원작도 제법 꼼꼼하게 옮겨졌으며, 스릴러 자체로만 놓고봐도 꽤 잘만든 영화의 축에 끼지만, 원작 소설과 비교하면서 보면 아무래도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뛰어난 원작을 가진 영화의 비애일지도...
오랜 세월동안 세상에 상처받고, 세상과 등지며 살던 리스베트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미카엘에게 선물을 준비했지만 그의 곁에는 이미 에리카가 있었다. 영화를 보며 이 부분에서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책을 읽어보라. 나는 책을 덮는 그 순간, 그 장면이 너무 안타까워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
출처: 영화, 그 일상의 향기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