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壬辰倭亂시 왜군 부대중에는 민간이 납치 전문파트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조선 민간인들을 강제 납치한 숫자가 약 10만여명 이상이라고함, 당시 이들을 "被虜朝鮮人 = "피로인"이라 칭하였으며, 당시 강항이란 사람도 피로인들 중 양반출신으로 그가 직접 기술한 일기.
看羊은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던 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로, 본래의 제목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으나,
1656년 (효종 7) 책이 간행될 때 제자들이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간양으로 고쳤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4년간 일본 포로 체험기이다. 그는 1597년부터 1600년까지 납치 당한 생활을 했으며, 제자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강항은 형조좌랑의 자리에 있었는데, 고향에 갔다가 왜군을 만나 강재로 납치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난을 겪었으나, 유학자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황의 성리학을 일본에 전하게 되었다. 3년간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대응할 수 있게 한다는 의도에서 기록했고 귀국 후 책으로 엮었다. 내용은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적중봉소 賊中封疏〉, 일본의 지도를 그린〈왜국팔도육십육주도 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주는 글인〈고부인격 告浮人檄〉, 자기 체험을 기록한〈섭란사적 涉亂事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당시 극소수 일부 귀국한 피로인들은 양반 권력층들로부터도 냉대와 천시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층의 구조가 나약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당시 피로인들 중 상당수가 일본인들에 의하여, 자국민 노예 수출은 금지 시키고, 조선 피로인들을 포루투칼, 중국, 인도로 노예로 팔려 갔다는 기록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며, 유럽을 통하여 총 제작술도 배우고 있었으나, 조선의 지배계급인 대다수 양반들의 반도 지형에 따른 쇄국 정책 고수와 당시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의 실정도 모르는체 의존을 하며, 결국 왜세의 침략을 야기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임금인 선조는 세습에 따른 왕이었으나 자질이 너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일본을 왜인으라며, 왜소하다며, 깔보다가 당한 것이었다. 국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유교 정책과 성리학, 고려청자, 이조백자 도자기가 당시 무슨 값어치를 하는가? 패전국의 국민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가? 그후 조선 말기에 일본에 의한 한일합병의 치욕을 또 격은 것을 보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는 이제는 정치인들을 포함 피부로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