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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세시풍속(歲時風俗)
(1) 元日,(설); 원단은 1년의 첫날이다.
歲首 또는 年首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 또는 설날이라고 한다.
연수 또는 세수란 일 년의 첫째 날이란 뜻이고, 설이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간다는 뜻이다.
大晦日로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몸가짐으로 辟邪招福을 기대하였으며, 연 초인 설날에 몸과 마음의 근신을 꾀하고자 했던 뜻도 짐작이 간다.
農者를 天下之大本으로 여겨 왔던 한민족은 신라시대에 ‘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 이라 하였으니 1년 동안의 雨順風調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신에게 제사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하는 풍속이 마련되었다. (서울)
① 다례(茶禮); 설날 아침 일찍 歲饌과 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正朝茶禮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長孫)이 모시는데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의 4대조 신주(神主)를 모셔 두며 정초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조상에게만 제사하게 된다.
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 집에 모여 차례를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옛날부터의 오랜 관습에 의하여 元日과 秋夕날은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끼리 지내며 이 때에 하는 행사는 차례가 중심이 된다.
지금도 연말과 추석 명절에 교통이 대 혼잡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몸을 깨끗이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같은 宗族은 모두 宗家집에 모여 茶禮를 지낸다. 차례는 4대조, 즉 아버지 내외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내외까지만 지낸다.
5대조 이상은 차례도 지내지 않고 제삿날 忌祭祀도 지내지 않고 10월에 時祭로 대신한다. 4대조의 차례를 윗대에서부터 차례로 지내는데 사당 문을 열고 신주를 모셔다가 지내거나 신주가 없는 집은 紙榜을 써서 붙이고 지낸다.
집안이 번성한 집에서는 아침에 모두 와야 하므로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지내는 사람도 있다. 祭需는 술, 떡국, 과일, 적 등이며 술은 원칙적으로 소주는 쓰지 않는다. 떡국이 주식이 되어 지내기 때문에 팔월 한가위의 송편 차례에 비하여 떡국차례라고도 한다. 이 때에 ‘메’는 짓지 아니하는 것이 원칙이다. 삼색실과 편 등 모든 음식이 제상에 오른다.
이것을 요약하여 酒果脯醯라 한다. 설날에는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도 모두 고향에 돌아가 생존하신 분에게는 인사를, 돌아가신 분에게는 차례를 지내게 되기 때문에 大小家의 여러 가족들이 이 때에는 거의 다 모이게 된다.
섣달 그믐께나 팔월 추석 전에 귀성객이 붐비는 것도 이 풍속에서 연유한다.
(京畿)차례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정초제사, 조상을 모신다.
차사, 설 제사, 명일제사, 조상봉사라고도 한다.
ㄱ. 대부분 대상은 4대 이하의 돌아가신 조상
ㄴ. 제주(祭主)는 장자, 장손이 제사를 지낸다.
ㄷ. 제사 시간은 아침 8 ~ 9시 경에 지낸다.
ㄹ. 진설장소는 대청(안청] 혹은 마루라고 하는데 삼간집인 경우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의 마룻방이다. 이 대부분이지만 대청이 없을 경우 큰 방이 된다. 경남에서는 집안에 사당(祠堂)이 없고 감실(龕室) 대신 벽감(壁龕)이라는 방을 집채에 두어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차례나 제사를 지낸다.
山村에서는 융판집[귀틀집․ 통나무집]안에 선반을 가로질러 위패를 모신다고 한다. 紙榜은 지방 틀에 써 붙이고 양위설찬(兩位設饌)을 한다.
지방 틀은 가축 울음이 들리지 않은 깊은 산중의 돌배나무나 밤나무 따위로 만든다. 지방을 안 써 붙일 경우에는 제주가 [아버님 드시이소]혹은 [할아버님 드시이소]하고 고하고 차례를 지낸다. 제수(祭需)는 기제사(忌祭祀)와 유사하나 떡국을 반드시 마련한다. 그래서 [떡국제사]라고도 한다.
차례나 기제사에 쓰지 않는 생선의 종류가 지방에 따라 다르다.
ㄱ. 비늘 없는 고기는 쓰지 않는다.
ㄴ. 치라는 명칭이 잇는 고기[갈치, 멸치, 참치 따위]는 쓰지 않는다.
ㄷ. 치자가 든 고기와 잉어를 쓰지 않는다.
ㄹ. 치자가 든 고기와 비늘 없는 고기를 쓰지 않는다.
비늘이 없어도 가오리는 쓴다.
ㅁ. 숭어, 상어, 낭태, 물 매기 등 따위를 쓰지 않는다.
ㅂ. 같은 河東이라도 고막이라는 조개를 해안 지방에서는 쓰지 않지만, 내륙지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제물이라고 한다.
대체로 금물은 치자가 든 고기와 비늘이 없는 경우가 많다.
뱀 모양이나 흉한 꼴의 고기는 쓰지 않고 대부분 고기는 민어, 조기, 도미, 전어, 볼래기, 노래미 따위와 건명태, 문어포를 꼭 쓴다.
산촌에서는 그저 조기나 한 마리 사서 쓰는 정도이다.
설찬(設饌)과 제사 모시는 법은 기제사와 비슷하다.
제상 옆 밥상 위의 큰 그릇에 각각 밥과 나물을 차리고 밥숟가락을 여러 개 꽂아 祖上神이 올 때 동행한 下人․馬夫가 먹게 한다는 지방도 있다.(慶南)
江原道지방의 정조차례(正朝茶禮)는, 옛날에 명절제사라도 저물게 늦게 지내지 않고 보통 새벽 날샐 무렵에 지낸다. 그믐날 저녁에 모든 것을 준비하여 놓았다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5시 전후쯤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날에는 제사를 일찍 지냈는데 지금의 명절 제사는 늦게 지내는 편이다.
차례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 집에 모여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서 함께 지낸다.
큰 댁 같은 경우는 선대조까지 메밥만 따로 더 떠서 제사를 지낸다.
차례 음식은 메밥과 국․떡․지짐․탕․나물 등을 간단히 차린다.
밥 대신 떡국을 끓여 놓는 집도 있다. 밥은 흰쌀로 짓고, 국은 쇠고기와 두부를 넣어서 끊인 두부국이며, 과일은 아무 것도 없고, 생선으로 지짐질하고, 해물로는 새우․ 임부치를 사다가 탕을 만들고 나물은 고사리, 취나물 등이다.
떡을 하는 경우는 절편 또는 인절미, 시루떡을 같이 하는 집도 있고 시루떡만 하는 집도 있다. 떡을 하는 집안에서는 물론 차례 상에 떡을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정초에 며칠 간 아이들 또는 전 가족의 간식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한다. 생활이 아주 곤란한 집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많거나 웬만한 가정에서는 대체적으로 떡을 한다고 한다. 개피떡․송편 같은 떡도 한다.
강원도지방에서는 설날 아침 떡국을 올려놓고 차례를 지내는데 어떤 집들은 그믐날 저녁에 떡국을 차려 놓는 사람도 있고 또 아침 차례 지내기 전에 떡국만 먼저 차려 놓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떡국은 쇠고기에다 만두소 넣는 것처럼 두부 넣고 당근도 잘라서 넣고 끊인다. (江原 영동지방)
설날 아침에 조상이 있는 집 곧 神位를 모시고 있는 집에서는 차례를 지낸다. 신위가 없는 지차(支次)집에서는 큰집에 가서 함께 차례를 지내므로 종손이건 지차이건 간에 차례에는 모두 參祀하게 된다.
차례참사(茶禮參祀)의 범위는 堂內에 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위는 수십 대 된 종손이라 할지라도 4대만 사당에 봉인되어 있으므로 고조(高祖)를 같이한 8촌 이내가 모여서 정조 차례를 지낸다.
동고조(同高祖)의 당내라 할지라도 종손 집에만 신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2, 3대 된 지손 집에도 신위가 있으니 정조차례를 그 집에서도 지낸다.
특히 동성촌(同姓村)에서 당내의 수십 가구가 한 동리에 집단적으로 살 때에는 차례의 순차에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손을 중심으로 직계 혈손끼리 모여서 정조차례를 지내고 나서 一門이 다 종가에 모여 마지막 종가 차례를 지내는 가문이 있고, 전 가문이 종가에 모여 먼저 종가의 차례를 지낸 뒤 각기 직계별 조상의 차례를 그 혈손들끼리 지내는 가문도 있고, 堂內를 單元으로 그 당내의 직방조(直傍祖)를 막론하고 신위가 있는 집은 차례로 다니며 일문이 함께 차례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종가에 와서 지내는 가문도 있다.
일문이 함께 모여 당내의 신위 있는 가구마다 다 같이 참사하는 집안의 경우, 종가집에서 먼저 하고 지손집을 도는 집안도 있다.
정초에는 종가의 사당문은 잠그지 않고 닫아만 둔다. 이것은 外地에 있는 후손들이 늦게 온다든가 세배 온 사람 가운데 사당에 拜禮할 사람을 위해서이다.(강원 영서지방)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것은 조상을 숭배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행위이다. 새해를 맞이한 첫 행동이 차례로 나타나며 무엇보다도 먼저 했다는 데 의미가 있고 한국인의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② 세배(歲拜);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 때 祖父母․父母․伯叔父母․兄弟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祠堂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 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 경우에는 수 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敎養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먼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元日에 相慶하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 풍속으로 신당서『新唐書』신라전(新羅傳)에 기록되어 있다.
새해를 맞이해서 서로 만나 경사스런 인사로 절을 하는 것이다. (서울)
상청(喪廳)을 모신 집이 있으면 찾아가서 상청에 弔問하고 喪主에게 인사를 한 다음에 일가친척 중에선 나이가 많고 行列이 높은 어른에게서 시작하여 그 동네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 그 다음에 나이 차례, 行列 차례로 세배를 행한다. 어른께 「새해에 더욱 건강하십시오」「새해에는 백세향수(百歲享受)하십시오」「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등의 덕담으로 절이 끝난 다음 인사를 드리면 세배 받은 어른도, 세배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응분의 인사를 한다. 「금년에는 소원성취하게」또는 「금년에는 복만이 받게」등으로 인사에 답한다. 정월 덕담은 새해를 맞아 피차간의 행복을 빌고 발전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겠다. 세배가 끝나면 음식을 차려 대접한다.
그리고 세뱃돈이라 하여 돈을 조금씩 주기도 한다.(京畿)
음력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온 식구가 설빔으로 새옷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조상에게 먼저 차례를 지낸다. 제수(祭需)는 기제사 때와 같으나 떡국을 반드시 갖춘다. 그러므로 떡국차례라고도 부른다.
산 사람도 세찬(歲饌)으로 떡국을 반드시 먹는데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는 말은 나이가 몇 살이냐는 말과 같이 쓰여진다. 차례를 지낸 다음 부모와 조부모등 손윗사람들에게 새해 인사 곧 세배를 드리고 다음으로 당내 친척과 이웃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 올린다. 이 때 연장자(年長者)는 세배 온 사람에게 모시고 과세(過歲) 잘했나 올핸 아들 낳을 꿈을 꾸었나 장가갈 꿈이나 꾸었나등 상대자에 맞도록 덕담을 해주며, 성인(成人)이면 간단한 주안상(酒案床)을, 아이들에게는 과일 등속이나 세뱃돈을 주게 된다. 이 차례와 세배의 원일 풍속은 전국적으로 현행되고 있는 세시풍속이다. (忠北)
차례는 조상에 대한 세배이므로 차례가 끝나고 나면 집안 세배를 한다.
이 때 상가(喪家)로서 상청(喪廳)이 있으면 차례 후 즉시 상청에 上食을 올리고 나서 세배를 한다. 집안 세배는 남자들끼리 먼저 하고 다음으로 남녀의 세배를 한다. 남자 세배는 연령과 行列을 따져 나이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하고 항렬 낮은 사람이 항렬 높은 사람에게 한다.
이 때 나이는 어리나 항렬이 높은 사람이 항렬 낮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세배를 하면 항렬 낮은 노인이 앉은 채 절을 받지 아니하고 반드시 답례를 한다. 항렬도 낮고 나이도 어린 사람의 세배를 나이 많고 항렬이 높은 사람이 받을 때에는 앉은 채 답례를 하지 아니한다.
가문이 번성치 못하여 세배하는 사람이 많지 아니할 때에는 각기 세배를 하지마는, 번성한 가문으로 설날 모인 인원이 많을 때에는 行列別로 合拜를 하는 가문도 있다. 집안 세배가 끝나고 떡국으로 아침을 마치면 이웃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닌다. 일가나 친척으로 내외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안팎 세배를 다 하지마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남자 어른들에게만 한다.
옛날에는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들과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방안에 들어와서 세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마당에서 허리만 굽혀 세배를 했다.
세배를 가야 할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면 그것이 정월 내이면 세초에 뵙지 못했습니다, 라고 세배를 대신하여 절을 한다.
세배 와야 할 사람이 안 와도 괴이하다 하고, 처가의 세배는 늦게 가는 풍속이 있었던지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 꺾어 들고 간다」는 말이 있다. (江原)
사람이 조부모 부모 그리고 연장자에게 절하고 경의를 나타내는 것은 인륜이요 질서 있는 일이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해서 이 어른들에게 절하고 경의를 나타내는 세배를 제도화시킨 데 한국인의 秩序觀, 禮義觀이 있었다.
만일에 새해를 맞이하고서도 세배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예의를 모르고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예의관이 우리의 장유(長幼)의 관계를 질서 있게 만든 것이라 믿어진다.
③ 성묘(省墓);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새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 시 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子孫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孝烈談을 들어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 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강원도에서는 성묘는 글자의 뜻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山所에 가서 인사드리고 異狀이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살피는 의식이다.
茶禮로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께 음식을 갖추어 歆饗하도록 인사를 베풀고, 곧 이어 산 사람에게 비기면 생활하는 집에 비교할 수 있는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린다. 차례 때 쓴 祭需 이외에 간단한 酒果脯를 별도로 장만하여 산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자손들이 모두 늘어서서 성묘를 하되, 가장 웃대 산소에서부터 차례로 성묘를 한다. 이 밖에도 겨울에 눈이 왔을 경우에는 子孫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산소에 덮인 눈을 쳐낸다.
조상을 위하는 정성의 표현이다. 또 한편, 이렇게 눈을 쳐내면 성묘할 때에 눈 위에서 절하는 불편도 덜게 된다.
성묘는 설 때와 寒食날에 많이 하고 7월 伐草때와 8월 추석 때에도 가장 많이 한다. 부모를 先壟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꼭 看山하려 하여 자손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성묘의 예를 흔히 본다.
설 성묘의 날짜는 元日이 주가 되어 초닷새까지 끝마치고, 먼 곳의 자손들은 그 밖의 날에도 성묘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설날 생존한 어른에게 세배를 하듯이 사별한 조상에게도 인사를 드리는데, 江原道 지방에서는 대부분 팔월 추석 때 성묘를 많이 하고 설날에는 날도 춥고 해서 성묘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연세가 높은 노인이 계시는 집안이나 葬禮를 치른 지 얼마 안 되는 집안에서는 설날에도 성묘를 한다.
(2) 입춘(立春) 立春日은 千歲曆에 정해 있는데, 年初인 경우가 많다.
입춘일에는 도시나 시골 할 것없이 각 가정에서는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며 이를 春祝이라고 한다.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손수 立春祝을 쓰거니와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해서 써 붙이기도 하는데, 喪中에 있는 집에서는 하지 않는다.
입춘문은 대개 정혀져 있으나 가장 널리 씌어지는 입축문은 다음과 같다.
立春大吉 建陽多慶, 國泰民安 家給人足,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萬家 門迎春夏秋冬福 戶納東西南北財
입춘대길 건양다경, 국태민안 가급인족,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문영춘하추동복 호납동서남북재
옛날 대궐에서는 내전의 기둥과 난간에다 元日에 文臣들이 지은 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서 써 붙였는데 이것을 春帖子라고 불렀다.
『洌陽歲時記』에 의하면, 立春되기 며칠 전에 承政院의 正三品 通訓大夫 이하와 侍從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各殿과 宮의 春帖子를 지을 사람을 召命하는 牌를 보내서 부르게 하고 大提學이 五言七句의 四律이나 絶句로 각각 1편씩을 지으라고 韻字를 내어 준다.
마치 科擧를 뽑는 것과 같이 3등급 이상을 뽑아 합격시키고 글머리에 橫으로 줄을 그어 나누는 표지를 하고 그 수대로 써서 올리도록 한다.
元日의 延祥詩와 端午日帖도 이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했다.
立春은 정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12월에 드는 수도 있다.
壬辰倭亂을 만나 나라가 온통 시끄럽고 불행했을 때인 壬辰 다음해인 癸巳年 12월에 입춘날을 맞이했다. 政院에서는 이번 입춘 날에는 모든 일이 안장되지 안정되지 못하여 春帖子를 지어 올릴 수가 없으니 立春大吉 넉 자만 정서해서 行宮의 안팎에 붙이는 것이 어떠하냐고 上奏한 바 있다.
왕은 할 수 있으면 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입춘날이면 우선 궁중에서 왕에게 춘첩자를 지어 올려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난리가 나서 서울이 유린되고 왕이 行宮에 있을 때에는 입춘라 春帖子를 올리기보다는 간단하게 立春大吉의 넉 자만 써서 行宮의 기대에 붙여도 무방하다는 말이 나왔다.
아마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4자만 쓰는 일이 생기게 될 거 같다.
『東國歲時記』에 입춘의 春帖文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대궐안에서는 春帖子를 붙인다.
卿士大夫와 一般 民家 및 상점에서도 모두 春聯을 붙이고 송축한다.
이것을 春祝이라 한다. 『荊楚歲時記』에, 「입춘날에는 봄에 합당한 문자를 써서 문에 붙인다」고 하였다. 지금의 춘련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觀象監에서는 朱砂로 辟邪文을 써서 대궐 안으로 올린다.
그러면 대궐 안에서는 그것을 문설주에 붙인다. 이것은 곧 『後漢書』禮義志에서, 지난 12월 1일 대대적인 儺禮를 하여 疫疾․ 鬼神을 쫓을 때 侲子가 和答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입춘날의 符籍이 되었다.
단오날에도 이것을 붙인다. 春祝文에는
門神戶靈 嗬噤不祥 國泰民安 家給人足 雨順風調 時和年豊 등의 對句語를 쓰고 있다. 여염집의 기둥이나 문설주에는 두루 대연을 많이 쓴다.
壽如山 富如海 去千災 立春大吉 建陽多慶 堯之日月 舜之乾坤 愛君希道泰 憂國願年豊,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 國有風雲慶 家無桂玉愁, 災從春雪消福遂夏雲興, 北堂萱草綠 南極壽星明, 天上三陽近, 人間五福來, 鳳鳴南山月 麟遊北獄風, 門迎春夏秋冬福 戶納東西南北財 九龍載輸四海珍,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滿家,
또 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單帖이 있다.
春到門前增富貴 春光先到吉人家 上有好鳥相和鳴 一春和氣滿門楣 一振高名滿帝都 사대부집에서는 흔히 새로 지어 붙이거나 혹은 古人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쓴다. 경기도의 산골지방 六邑에서 움파, 멧갓, 辛甘草를 올린다.
멧갓은 이른봄 눈이 녹을 때 산소에 자라는 芥子다.
더운물에 데쳐 초장에 무쳐서 먹으면 맛이 매우 맵다.
그래서 고기를 먹은 뒷맛으로 좋다. 승검초는 움에서 기르는 富歸의 싹이다.
깨끗하기가 은비녀의 다리 같다. 꿀을 그 다리에 끼워 먹으면 매우 좋다.
詩에, 「입춘날 봄 채반에 가느다란 생채라」하였고, 蘇東坡의 시에 「파란 쑥과 노란 부추가 봄 채반에 올랐도다」하였다.
이것들이 모두 옛날부터 전해 오는 풍속이다. 함경도 풍속에, 이 날이 되면 나무로 만든 소를 官廳으로부터 밀어 내보내는 制度를 모방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풍년을 기도하는 뜻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입춘은 24節候중의 하나인데, 그 명칭이 지칭하는 바와 같이 봄으로 접어든다는 節候이다. 음력으로는 節氣의 차이가 심하여 그 해 입춘이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再逢春이라 한다. 정월은 새해의 첫 번째 드는 달이고, 입춘은 대체로 정월에 첫 번째로 드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여러 가지 민속적인 행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春祝․立春祝들로 부른다. 그리고 입춘은 24절기 중의 첫 번째 절기요, 太陽의 黃經이 315°로서 이 시각부터는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날이 입춘이고 입춘 중에서도 이 시간이 立春時이다.
입춘날 입춘시가 되면 모든 행복을 나타내는 글귀를 대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데, 다만 喪家에서는 않는다.
(3) 경칩일(驚蟄日); 千歲曆에 정해져 있는 驚蟄 무렵에는 날씨가 따뜻해서 초목의 싹이 돋아나면 冬眠하던 짐승들도 땅 속에서 나온다.
이 날 농촌에서는 논이나 물이 괸 곳을 찾아가서 개구리 알을 건져다 먹는다. 개구리의 精蟲은 몸에 補가 되어 좋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경칩일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한다. 일설에는 경칩일에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해서 일부러 흙벽을 바르기도 한다.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네 귀퉁이에 놓아두기도 하는데, 그러면 빈대가 없어진다. 경칩일에 보리싹의 성장을 보아 일 년의 豊凶을 예측하며, 丹楓나무를 베어 나무에는 나는 물을 마시면 胃病이나 性病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약으로 먹는다.
(4) 청명(淸明); 淸明日은 寒食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청명일을 기해 봄일을 시작하므로 이 날에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大闕에서는 버드나무와 느릅나무에 불을 붙여 각 司에 나눠주었는데 불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유래했다.
淸明 무렵이 되면 하늘이 차츰 맑고 밝아진다.『洌陽歲時記』에 의하면 淸明日에 內兵曹에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 불을 붙여 임금께 올리면 그 불을 홰에 달이어 內外의 여러 官廳과 官吏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 곡우(穀雨); 곡우는 24節侯의 하나이며 3월에 들어 있다.
곡우 때가 되면 못자리를 마련하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北上해서 충청남도의 格列飛列島쯤 올라오므로 黃海에서 조기가 많이 잡힌다.
이 때에 잡는 조기를 특별히 「곡우살이」라고 한다.
곡우살이에 잡은 조기는 아직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기 때문에 곡우살이를 위해서 서해는 물론 南海의 漁船들도 모여들어 바다가 흥청댄다.
곡우 무렵이 되면 농가에선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볍씨를 담아 두었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며, 밖에 나갔다가 喪家에 들렀거나 不淨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惡鬼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는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잘 트지 않고 따라서 농사를 망치게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洌陽歲時記)에 漢江의 물고기가 있는데 큰 것은 1자나 된다고 했다.
비늘이 잘고 살이 많아서 회를 할 수도 있고 국을 끓일 수도 있다.
해마다 3월초가 되면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楊州郡 渼陰까지 간다.
穀雨를 전후한 3일에 가장 심하게 올라오지만 이 때를 지나면 없어진다.
그래서 江村 사람들은 공지로 節侯가 이르고 늦음을 미리 알게 된다.
全南지방에서는 穀雨節이 오면 名山으로 산다래물 또는 거자수물을 먹으러 가는데 이는 藥水로 먹는다. 康津․海南 등지에서는 海南 大興寺에 가고, 高興 등지에서는 錦山으로 가서 다래물을 먹는다.
거자수는 는 智異山 밑 求禮 등지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이 곳에서는 穀雨 때에 藥水祭까지 지낸다. 이 藥水는 거자수라는 나무에 상처를 내어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말한다. 身病이 있는 사람이 治病하기 위해 이 물을 먹고 있는데, 이것은 外地의 사람에게는 더 약이 된다고 한다.
驚蟄 무렵에 나오는 약구[고리수]물은 여자물이라 하고 이 거자수는 남자물이라 하여 여자들에게 더 所用되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물을 마련하여 팔고 있는데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고 오히려 약이 된다고 해서 이 藥水 마시기를 권하고 있다.
(6) 한식(寒食); 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이 寒食日이며, 3월이 되기도 하나 대개는 2월에 든다. 이 날은 祖上의 墓에 과일과 떡 등을 차려 놓고 寒食茶禮를 지내며 조상의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改莎草라고 한다. 묘 둘레에 植木을 하는 것도 이 날이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
또한 이 날은 더운밥을 먹지 않고 찬밥을 먹는데, 이것은 중국 晋나라의 충신 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즉 개자추가 간신에게 몰려 緜山에 숨어 있었는데 晋文公이 개자추의 충성심을 알고 찾았으나 나오지 않으므로 이 날 나오게 하기 위하여 緜山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介子推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고 말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충성됨에 감동하여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따라서 찬밥을 먹는 풍속은 중국에서 전해 온 遺俗이다.
한식날 농가에서는 나무를 심거나 채소씨를 뿌려서 새해 농경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이 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매우 꺼려한다. 한식 무렵엔 봄갈이가 시작되고 풀도 새싹을 보이기 시작하여 희망에 부푸는 때이기도 하다.
도시에서는 山所에 올라가 제사를 올리는 것을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의 4名節에 행했다. 술, 과일, 포,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節祀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끊어지지 않았다. 『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後週 때에 한식날에 野祭를 지내고 紙錢을 불사를 뿐이지만, 그 후 孔子가 墓祭를 지내도록 하였고 唐代에 들어와서 한식날 山所에 가서 墓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근세조선조에서는 太宗 10년(A.D. 1410) 2월에 왕이 昭格殿에 나아가서 寒食祭를 지낸 바 있다. 太宗은, 전에는 한식 때에 제사가 없었는데 혹 개자추에 연유되었다고 하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하문하자, 金汝知는 「개자추의 說은 古人도 부인하고 있어서 冬至후 105일이면 풍우가 심하여 曆家들은 한식이라 하였다」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러나 太宗 15년(A.D. 1428)에는, 한식 때는 바람이 부는 일이 많으니 禁火卽廳이 五部官員과 같이 시내를 순시하며 禁火케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일종의 火氣를 주의시키는 행사이다.
朝鮮時代의 한식날은 省墓와 함께 換節期의 불조심 행사도 겸하였던 것이다.
(7)삼짇날(三辰日); 3월 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강남에 갔던 제비도 이 날이 되면 옛집을 찾아온다고 하며 제비는 좋은 집을 찾아가 추녀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친다. 이 무렵이면 날씨도 溫和하고 산과 들에는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살 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 지져 먹는 花煎은 봄의 味覺을 한층 돋워주며 時食으로 風流있는 別味에 속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다음, 가늘게 설어 굴을 타고 잣을 넣어서 먹는 것도 별미 중의 별미이다.
또 진달래꽃을 따다가 녹두가루와 함께 반죽해서 만들기도 하고, 혹은 붉게 물들여 꿀을 섞어 만드는 수면(水麪)도 빼 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삼짇날 무렵이면 봄기운이 왕성하고 흥이 저절로 나 사람들은 산과 들로 몰려 나가 화전과 수면을 만들어 먹으며 봄을 즐긴다.
삼짇날에는 갖가지의 나비들이 선을 보이며 꽃을 날아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비를 두고 占을 치기도 하는데,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서원이 이루어질 吉兆이나, 흰나비를 먼저 보게 되면 父母의 喪을 당하게 될 凶兆라고 한다.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이 흐르듯이 소담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다투어 머리를 감기도 한다. 近世朝鮮 중엽 이후에는 많은 儒賢들이 3월 심짇날에도 時祭를 지내는 일이 있었다.
忠北에서는 3월 삼짇날에 일반적으로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한다.
重九日 즉 9월 9일에 江南 갔던 제비가 春三月 好時節 上巳日에 또다시 옛주인을 찾아든다고 한다. 또 이 무렵 해서 나비가 나오는데, 만일 흰나비를 보면 그 해에 喪服을 입게 된다고 해서 좋지 않게 여기고, 노랑나비나 범나비를 보게 되면 當年運數가 大通한다고 한다.
冬眠하던 뱀도 나오는데 이 날 뱀을 보면 좋지 않다고 해서 꺼리는 일이 있다. 이 삼짇날에는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쌀가루를 반죽하여 산과 들에 나가 花煎을 지져 먹고 봄 놀이를 했다.
서당 儒生들이 花煎을 지져 먹느라고 들에 나가고 山에 올라 하루를 즐기며 보내는 ‘꽃다림’이 널리 유행되었다고 한다. 山城의 꽃다림, 九政 벼루의 꽃 다림 등은 이름 있는 일이었고, 그 밖에 山水 좋은 곳에서 놀고 즐기는 풍습은 踏靑이라는 이름으로 계절행사의 하나였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러한 광경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간혹 이 때를 전후하여 敬老會를 베풀어 노인으로 모시고 주식으로 대접하는 일이 있다.
元旦의 행사로 茶禮를 지내고 어른께 歲拜를 드리며 조상의 묘소에 찾아가 省墓를 하는데, 儒敎가 들어온 후로 설날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정착되었다.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은 인간륜리(人間倫理)의 基本이라 생각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 첫 행사로 거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儒敎 이후의 것이지만 韓國人의 意識에서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춘절(春節)의 기복풍속(祈福風俗)
사람은 一生을 幸福하게 살기를 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일하고 노력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이 豊足해야 하고 몸이 건강해야 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먹을 것이 풍족하기 위해서 祈豊을 하고 건강을 위해서 몸을 단련하고 醫藥의 힘을 비는 것이지만, 이 밖에 福되기 위한 呪術的 행위를 하게 되고 이 행위가 歲時風俗으로 定着해서 계절적으로 反復되어 왔다.
설날 福조리를 사고 歲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德談을 나누고 있다.
조리는 쌀을 일어 골라내는 기구이니 부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기우였다.
따라서 조리를 사서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설날 새벽에 사야하고, 설날에 산 조리를 복조리라 부르는 데에는 實用 이상의 信仰的인 意識이 개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年初에는 돈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연초부터 돈을 쓰면 1년 내내 돈이 나가기만 하고 저축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돈이 모이지 않으면 生活이 빈곤해져서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財福이 준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복조리만은 꼭 돈을 주고 샀으니 禁忌를 초월해서 조리가 福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설날 꼭두새벽에 복조리를 샀다.
사람이 말로 「건강 하라」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세배를 하면서 주고받는 德談은 상대편의 형편에 따라 알맞고 필요한 말을 주고받는다.
이것은 일종의 주언(呪言)이다. 총각보고는 장가를 가라든가, 처녀에게는 시집을 가라든가, 學生에게는 공부를 잘하라 든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번창하라든가 하는 등의 알맞은 말을 교환하게 된다.
祝言은 呪言의 기능을 가지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정초에 마을의 吉凶을 알아보고 14일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河川에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의 편선(便宣)을 도모하여 좋은 일을 하는 積善을 한다. 부잣집의 마당 흙을 몰래 파다가 자기네 뜰에 뿌리면 부잣집 복이 轉移해 온다고 해서 福土훔치기를 하고, 자기 연령수대로 팥을 밭에 묻어 厄을 막고 질병을 없애려 했으며, 上元날 아침에 부럼을 깨물어 健齒와 無病을 시도했으며, 등거리를 남몰래 불태워서 身數가 좋도록 전개되기를 바랐다.
井華水를 떠다 놓고 복되기를 빌었고, 밥을 9번 먹고 나무를 9짐하고 길쌈도 9자를 하여 축액(逐厄)하고 건강해서 福祿을 갖추고자 했고, 山寺에서 승려가 내려와 法鼓를 치고 施主의 福祿을 빌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모두 복되기를 비는 것으로 행복하기를 갈망한 나머지 세시 풍속화한 것이다.
① 복(福)조리: 섣달 그믐날 子正이 지나면 어둠 속에서 복조리 사라는 소리가 들려 온다. 자정이 지나면 벌써 다음날이다.
조리장수들은 조리를 한짐 메고 골목을 다니면서 복조리 사라고 외친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소용되는 수량만큼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산다.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고 있어서 서로 남보다 먼저 사려고 한다.
설날 이른 새벽에 조리를 사 두면 1년 동안 福을 많이 받는다는 데서 설날 사는 조리를 복조리라고 부른다. 조리는 쌀을 이는 기구로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가는 竹絲로 엮어서 만든다.
사들인 조리가 둘이면 둘, 셋이면 셋을 한데 묶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달아 두었다가 쓰며 조리 속에 돈과 엿을 넣어 둔다.
강원도지방(江原道地方)에서는 설날에 조리를 사면 일년 내 복을 받는다 하여 설날이나 정초에 사는 조리를 복조리라고 부른다.
요즈음 도시에서는 그믐날 밤중이나 설날 새벽에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대문 안에 넣어놓고 며칠 뒤에 돈을 받으러 다니기도 한다.
농촌에서는 조리장수가 와서 조리를 사는 것이 아니고 새해의 첫 장날인 (개시장)때 장에 가서 조리를 사온다.
그 해의 마지막 장날인 대목장에는 질그릇을 사 오면 좋다 하며 새해 첫장인 개시장에는 복조리를 사 오는 풍속이 있다.
지금은 조리를 鐵絲나 합성수지로 만들기도 하지만 在來式 조리는 대로 만들어졌다. 福조리는 하나 사는 수도 있지마는 두 개를 사는 수가 많고 이 두 개를 함께 하여 자루를 묶어 부엌 또는 방구석 혹은 안방 드나드는 문 위에 걸어 놓으며, 이 조리 안에는 성냥․ 태실을 넣어 둔다.
이렇게 하면 일년 내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정초에 복조리장수의 來訪을 마을의 吉兆로 여기고 엿장수 내방을 마을의 凶兆로 생각한다.
② 덕담(德談): 正初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와 세배할 때에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德談이라고 한다. 이 때에 과세(過歲)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하며, 年下의 사람들에게는 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 또는 새해에는 소원성취하게 하는 등으로 處地와 環境의 알맞은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慶南지방에서는 세배를 받는 이는 방안에 있고 드리는 이는 툇마루에 나와서 절을 한다. 절을 하면서 ○○ 세배 드립니다.
혹은 세배 받으이소「過歲 편히 하셨습니까? 라고 하면 오냐, 과세 잘했나? 혹은 오냐, 命福 많이 탔나? 오냐, 금년엔 소원성취(所願成就)해라하고 그에 알맞은 말을 한다. 집안 이외의 어른에게는 茶禮를 지내고 찾아뵙고 툇마루에서 절하지 않고 방안에서는 세배를 드린다.
부녀자는 正初 出入을 삼가기 때문에 3,4일 이후라야 남의 집에 세배하러 가는데, 노인들에게 갈 때는 떡국을 끓이고 설음식을 한 상 차려 간다.
査頓間은 종이나 머슴을 시켜 便紙와 歲饌을 보내기도 한다.
③ 용(龍)알 뜨기; 경기지방의 부인들은 정월 보름날 첫닭이 울 때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온다. 이것을 福水, 壽福水, 龍알 떠온다고 한다.
남이 길어 가기 전에 먼저 물을 길어야 하므로 14일 열 두 시만 넘으면 동이를 들고 우물 옆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물을 긷는 극성파도 있다. 정월 열 나흗날 밤에는 하늘에서 龍이 내려와서 우물에 알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첫 번째 긷는 사람의 물에 용의 알이 섞이어 들어가기 때문에 용알을 건져 간 집은 運數大通라고 豊年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부녀자들이 서로 먼저 용알을 드려고 시새워 가며 서두는 風俗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15일부터 농사를 시작한다는 생각을 굳히기 위하여 새벽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한 方便이기도 했다.
강원지방에서는 정월 보름날 새벽에 주부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나가 물을 퍼 오는데 바가지로 우물물을 푸는 것을 龍알을 줍는다고 하며, 이 때에 우물에 藥食을 주먹 크기 만하게 뭉쳐 넣고 물을 푼다. 용알 줍기는 공동우물은 경우에는 제일 먼저 가서 퍼 와야 용알을 폈다고 하지, 남이 이미 거쳐 간 뒤에는 용알을 풀 수 없다고 하여 밤을 새우다 시피 한다.
上元 우물물에 관한 것으로 ‘물 훔치기’가 있다. 우물이 좋지 아니하여 물맛이 나쁘다 던가 샘이 깊지 아니하여 가뭄에 자주 마르는 우물을 가지고 있는 집에서는 보름날 새벽에 그 동리에서 물맛이 좋고 어떠한 가뭄에도 물 줄이 마르지 아니하는 우물에 가서 용알도 풀겸 물을 훔쳐 온다.
이 때 좋은 우물의 물을 떠서 자기 집 우물로 오면서 물을 길에다 계속해서 흘리고 와야 하며, 남은 물은 자기 집 우물에 부으면 좋은 우물의 물 줄이 이 쪽으로 돌아오고 물 도둑맞은 우물은 廢井이 되고 훔쳐 온 우물은 물맛도 좋고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한다.
④ 용왕제(龍王祭); 龍王은 水神으로 우물, 河川, 池沼, 바다 등 물이 있는 곳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래서 물과 관계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 특히 漁夫, 沙工 등은 龍王祭를 크게 지내고 가정에서도 우물물을 먹고 물로 농사를 짓고 있어서 용왕을 제사하고 있다.
全北의 어촌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四季節 지낸다.
배가 고기잡이를 떠날 때에 船主 집에서 豊漁를 빌기 위하여 지낸다.
떡시루를 가지고 바다 혹은 강가에 나와 떡을 사방에 던져 흩는데 女人에 의해서 진행된다. 年末年始에는 점을 쳐서 새해에 身數가 나쁘면 1월 7일에 용왕제를 지내게 된다. 上元날 물가에서 밥과 떡을 三色實果를 놓고 촛불을 밝히고 지내는데 1년 동안 災殃이 없고 豊漁와 豊年을 기원하게 된다.
경남에서는 정초에 새벽에 沐浴齊戒하고 개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개울에 가서 祭需를 차리고 간소하게 고사하는데 용왕산제, 용왕제 혹은 물신 제라고 말한다. 용왕제를 지내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1년 身數를 빌 때에는 정초에 하고 名節마다 빌 때에는 上元․2월 1일․3월 삼짇날․4월 초파일․5월 端午日, 7월 七夕, 9월 9일, 10월 보름11월 7일에 지내고 12월은 공달이라고 해서 지내지 않는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꼭 필요한 것이고, 稻作農事에 불가결한 것이므로 물을 담당하는 龍王은 농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