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연극소설 '궁리'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국제신문 2012-03-27
환갑을 맞은 '문화게릴라' 이윤택(60·사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0년 만에 야심찬 신작을 들고 나타났다.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라는 연극 작품이다.
'궁리'는 조선 세종 때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삶과 정체성을 다룬 역사극이다.
국립극단이 공동 제작에 참여했으며,
다음 달 24일부터 무대에 오르고 오는 7월 부산 공연도 계획돼 있다.
부산 출신인 이 예술감독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연출가이자 전방위 예술가다.
국제신문은 이윤택 극본·연출의 '궁리'를 부산 역사콘텐츠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연극 소설'로 전환,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이 예술감독의 새로운 장르 실험이며, 부산 문화의 '킬러 콘텐츠'를 만드는 의미있는 작업이다.
# 작가의 변
장영실 스토리텔링은 지금 이곳의 관점에서
서울 중심과 지역 자치,
인문학적 권력과 과학적 전문성,
중국 중심 동북아 정세 속에서의 한반도 등
다양한 화두가 녹아든 부산 문화 콘텐츠입니다.
무엇보다 저의 10년 만의 야심작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철저한 변방인으로서의 부산사람이고,
장영실 또한 변방 부산인으로서의 과학자입니다.
이 장영실 스토리텔링은 먼저 연극(국립극단)으로 만든 뒤,
소설·뮤지컬·영화·TV드라마 등 원소스 멀티유즈의 소재로 확산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100년을 남길만한 고전으로 빚어내고 싶습니다.
이윤택 '연극소설-궁리' <1> 세종과 장영실이 만나는 지점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국제신문2012-03-27

이윤택 극본·연출의 연극 '궁리' 한 장면.
양맹준 부산시립박물관장과의 방담(상)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해 여름 부산시립박물관(관장 양맹준)의 장영실 기획 전시회 '궁리(窮理)'를 본 뒤
즉각 '해 볼만하다'는 감을 잡고,
친구인 양 관장과 깊은 얘기를 나누며 연극의 골격을 잡았다고 밝혔다.)

#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 역사에서 실종된 당대 최고 과학자, 그 이유가 궁금해

# 양맹준 부산박물관장 ; - 원나라서 흘러온 관노비의 자식을 누가 기록해주나
양맹준: 세종 이야기를 먼저 하면…. 세종이라는 임금이 훈민정음이란 한글을 만든 거야.
이윤택: 그래서 세종은 한국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 받지.
지난달 텔레비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도 오르고 하는 대시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네.
"내가 섬기는 두 신이 있다. 한 분은 남자이고 한 분은 여자이다."
그러면서 남자 신은 세종 임금이시라는 걸세.
양: 그 많은 신들 중에 왜 하필 세종이야?
이: 한글을 지어 주셨다는 거지.
그래서 자신이 한글로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 아니냐는 말일세.
양: 거 말 되는 소리다…. 또 한 사람 섬기는 여신은 누구래?
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는 걸세.
양: 허, 거 참. 그거는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다.
나이가 드시니까 눈치 되게 보는 것 같네.
이: 왜 말이 안 돼?
시인에게 시를 쓸 수 있는 모국어를 만들어 주신 분 이상으로 귀중한 존재가 어디 있겠어?
그런 맥락에서 최고의 여신은 역시 자신과 평생 함께 살아가는 아내일 수 있지.
■가려진 인간 장영실
양: 역사를 그런 결과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역사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지나간 과거를 지금 자신에게 귀중하다고 최고로 섬기는 신이니 어쩌니 하다보니까,
곁에 같이 사는 여편네가 가장 중요한 신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거지.
역사는 과거가 아닌 영원한 동시대의 연속이지.
그래서 조선 오백년 역사는 실록(實錄)이란 일기체로 남았지.
매일 가타부타 입을 대지 않고 임금의 행적을 사실 그대로 적어 나간거야.
'승정원일기'는 임금을 모시는 비서관들의 회의록이라 할 수 있고,
뒤에 '일성록'이라고 임금이 직접 쓴 일기도 있지.
역사에 대한 기록은 냉정해야 돼.
임금도 매일 하급 사무관 정도의 사관이 적어 나가는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지.
물론 대신도 볼 수 없었고 백성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기록이었지.
그게 첨삭가감이 없는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왜 그렇게 엄격했을까?
양: 있는 그대로 기술했으니, 사실 그대로 보고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으라는 거겠지.
역사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실제 삶 그 자체의 기록일세.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인간의 삶의 궤적 그 자체가 역사가 되는 거지.
이: 그러나 장영실의 존재는 물질로만 남았지. 정작 인간 장영실은 보이지 않거든.
양: 그렇지, 물시계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물시계를 발명해 낸 인간인데 말일세.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역사적 결과물이 아니라
역사적 결과를 이루어낸 인간일세.
이: 나는 왜 당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사라졌는가를 알고 싶네.
세종과 함께 했던 당대의 지식인과 과학자들은 모두 후대까지 가문을 날리며 잘 살았는데,
왜 유독 장영실 혼자만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네.
양: 자네가 뭔가 몰라도 정말 모르는데…. 장영실이는 천민이었어.
지금 와서야 장영실이 조선의 과학자로 추앙을 받고 부산에 장영실 과학고도 생겼었지만,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에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비의 자식이었어.
그러니까 천민에다 지방민이고,
게다가 장영실은 요샛말로 원나라에서 흘러들어온 다문화 가정 출신일세.
누가 장영실을 기억하고 기록해 주겠는가.
이: 그래도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 아니었는가?
양: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는 이순지라고 새파랗게 젊은 천문학자가 있지.
세종의 명을 받아 중국 시간을 조선의 시간으로 바꾸어버린 천재 말일세.
이: 이순지란 이름 처음 듣는데….
중국의 시간을 조선으로 바꾸고 그 천문기구까지 만들어 낸 인물은 장영실 아니었는가?
■다시 봐야 할 이순지
양: 장영실이야 재주가 있으니까 물시계도 만들고 천문 관측기구도 만들고 그랬지.
그러나 '조선의 시간이 중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생각한 분은 세종이시고,
그런 세종의 주체사상을 과학적 사고로 구체화 시킨 학자는 이순지일세.
이: 그럼 장영실은 뭐했는가?
양: 장영실이는 한마디로 타고난 금속 공작인이라 할 수 있었지.
손재주로 말하면 가히 천부적이었지.
주군 세종이 "영실아, 조선의 시간을 잴 수 있는 천문기구를 만들어라."
그러면 그때부터 꾀가 발동하여 우르릉 뚝딱 만들어 내는 거야. 그래서 장영실이지.
이: 천문역법에 관한 사전 지식도 별반 없는 천민이
주군이 무얼 만들어라, 그러면 우르릉 뚝딱 만들어 낸다고?
양: 장영실은 그런 기술자였어.
이: 주군이 무얼 만들어라 명령을 내리면….
양: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내는 거야.
장영실이는 그렇게 명을 받아서 편경이란 악기까지 만들어 내었다네.
이: 장영실이 악기를?
양: 그렇다니까, 장영실이 무슨 음악 공부를 했겠어?
조선의 음악 체계를 세운 예술가는 박연이지.
장영실은 세종과 박연을 위해, 그러니까 조선의 음악을 위해 악기를 만들어낸 기술자란 말일세.
이: 기술자? 그런데 왜 장영실인가?
양: 물질은 남으니까.
이: 그렇지 일반인들은 이순지란 천문학자나 박연이란 음악가는 잘 몰라도
장영실은 다 알고 있지.
그건 정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인문학도 아닌 과학이지.
그런데 왜 장영실은 사라졌지?
양: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술자에 불과했으니까.
이: 그런데 왜 장영실이었지?
양: 주군이 총애하는 측근이었으니까.
영실은 세종의 이부자리까지 펴 주는 내시 노릇까지 했다네.
이: 그 정도로 세종은 영실을 총애했는가?
양: 장영실 개인을 총애했다기 보다 장영실의 과학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거지.
세종은 조선을 과학적 사고로 통치한 최초의 임금이셨네.
소위 말하는 인문적 지식인이 주체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힘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려 하셨지.
그 점이 세종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고 위대한 업적을 낳는 물적 기반이 되었네.
이: 그러나 조선을 500년 동안 이어온 힘은 인문학적 기반 아닌가.
양: 당연하지.
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도 인문학적 결과 아닌가?
양: 만들어낸 한글을 주물로 녹인 활자로 대량 보급하지 않았으면 한글은 통용되지 않았을 걸세.
갑인자라고 주물로 녹여낸 활자, 그것도 장영실이 활자 제조과정에 참여했지.
이: 그게 그렇게 되나? 인문학과 과학이 그렇게 엮이는군.
■세종의 과학적 사유
양: 세종은 권력의지 대신 과학적 사유를 선택했지.
세종은 그 점에서 국가 경영의 전문성을 획득한 최초의 임금이지.
국가를 인문학에 바탕을 둔 권력의지로 끌고 나가지 않았어.
전혀 다른 각도에서 국가 경영의 기반을 닦아 나간거지.
이: 그게 무어야?
양: 전문성을 지닌 다양한 민중계층에게서 국가 경영을 위한 물적 기반을 쌓았지.
이곳이 세종과 장영실이 만나는 지점일세.
이: 기득권 세력이 아닌….
양: 당연하지.
그 당시 청년 세종에게는 모두가 자신을 위협하는 적일 수밖에 없었어.
독재적 권력을 구사하는 아비,
호시탐탐 기득권을 노리는 대신들,
권세를 엿보다가 아비에게 박살난 장인 집안,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군부.
모두가 상대하기 힘든 기득권 세력일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세종은 아버지의 국정 운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조선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 거야.
무엇보다 세종은 냉철한 논리로 무장한 토론자였고,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한 이후에야 곧바로 실행에 옮긴 실천가였어.
대신들의 거듭되는 반대에 부딪칠 때마다 세종은 끝까지 성질을 죽이고 논리로 대응했어.
그런 식으로 대신들의 인문학을 격파해 나간 당대 최고의 논리학자였다네.
세종이 참 대단한 위인이라고,
글쎄, 세종은 국정을 운영하면서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대응하지 않았어.
뒤에 온전한 임금이 되어서도 감옥에서 의문사한 장인의 일을 문제 삼지 않았어.
죽은 장인을 복권 시키지도 않았지.
이: 냉정하시군.
양: 아버지가 판단하고 결행한 일에 대해서 아들이 어쩌고 저쩌고 않겠다는 거지.
그게 세종의 단정한 태도이자 냉정한 입장이지.
대신 세종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쌓아 나갔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