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의 수기
김인숙
그해 여름, 수기는 파란대문집에서 살았다. 동네에는 파란 대문들이 많았지만 그 집처럼 선명하게 파란색인 대문은 없었다. 페인트 칠을 한 사람이 주문을 잘못 이해했거나 지나치게 독창적이었는지 모른다. 수기가 그집에 들어 가기직전이었던 초여름의 어느 날에 새로한 칠이었다. 칠장이라는 칠이 곧 잡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색은 그윽해지지도, 바래지도 않았다. 그 선명한 색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누구보다 그 집 식구들이었다. 누구나 한 번씩은 대문 앞에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개는 한번 놀라고 끝이었지만, 매번 놀라고, 매번 속이 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기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집주인, 정말로 고등학교의 수학 선생님이었던 김숙희가 그랬다. 퇴근을 해 집에 돌아 올 때마다 서쪽으로 난 대문이 찬란하게 파랬다. 김숙희는 매번 가슴이 더럭 내려 앉을 뿐만 아니라 어떤 날은 몹시 기분이 나빠지기까지했다.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한여름이 오면 한여름의 해가끓고 한여름의 비가 쏟아 붓고 또 거친 모래바람이 불었다가 지나가면, 세상의 그 어떤 파란색이라도 저토록 말갛게 버텨내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여름, 김숙희의 기대대로 해가 끓고 비가 쏟아붓고 거친 모래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쌓였다. 그 모진 바람이 중국에서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은 골프장이 조성되는 중이던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산에는 좆섬이라고 이름붙은 유명한 바위가 있엇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 바위를 찾아가 아들 낳기를 빌었다고 했다. 바위가 남자의 그것처럼 생겼는데, 아주 장하게 서 있다는 것이었다. 수기의 집 마당에서는 그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산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것이라는 말이 떠 올랐고, 뺨이 붉어졌다.
폭우가 산을 무너뜨린 후에도 바위는 그곳에 있었다. 그 곳에 있었으나 더는 장하게 서 있지 않고 물 한가운데 동동 소리를 내듯이 떠 있었다. 폭우에 잠긴 동네도 마찮가지였다. 집들은 붉고 푸른 지붕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그 지붕들조차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붕들이 집을 떠나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중인지도 몰랐다.수기네집도 마찮가지였다. 수해가 났을 때, 산사태에 가장 먼저 무너진 집들 중의 하나가 수기네 집이었다.
그날 밤, 수기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것이 무너지는 소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일이었다. 잠에서 깰때는 뭔가가 자신을 건드리는 소리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아니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방문쩍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흙더미가 쏟아져 들어왔다. 비와 물은 그 뒤로 쫓아 들어왔다. 비가 쏟아져 산을 무너뜨리고 흙을 밀었을터인데, 마치 흙더미가 비를 끌고 오는것 같았다. 비는 방안으로 들어 오고 싶어 아우성이다가 반대편 뚫린 벽으로 기어 나가는 수기의 온몸으로 달려 들었다. 사나운 송곳니 같은, 짐승의 이빨같은 비였다 그러니까 비라는 게, 도대체, 그렇게 사납게, 그렇게 엄청나게 퍼부을 수도 있는 것인지, 하늘에 구멍이 똟렸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한꺼번에 세상 저 위쪽의 모든 물이 쏟아부어졌다. 하느님은 팔이 아팠을것이다 그 많은 물을 한순간에 쏟아부으려니, 비를 내리는것은 하느님에게도 그만큼 필사적인 일이었으려나, 그후 오랜세월, 그해 여름이 떠 오를 때마다 수기가 했던 생각이다.
그날 밤, 엄마 아버지는 못 빠져 나왔다. 엄마 아버지는 흙더미에 깔려버렸고, 그들이 데리고 자란 동생도 마찮가지였다. 동생은 죽고 그들은 살았다. 놀랍게도 스물여섯시간만에 구조가 되어 티비 뉴스까지 나왔다.그해 여름 수기가 파란대문집에서 살게 된 이유였다. 생명력으로 가득찬, 영웅적으로 살아남은, 이 고결한 부부의 아이를 대피소 따위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다는 어떤 결연한 의지가 누군가에게 작용 했던 것이다. 시장인가, 부시장인가, 아니면 도지사인가, 김숙희의 남편은 시청 공무원이었는데 시장인가 도지사인가하는 사람이 결연한 의지를 발휘하는 순간에 하필이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또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수기의 학교와 가장 가까운곳에 살았다. 여름 방학이 빨리 끝나려면 아직 멀었을 때였지만, 그 도시의 슬로건이 멀리보는 도시였다. 비는 거쳤지만 또 내릴터이고, 무너진 집들이 언제 다시 새로 서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수기에게는 가까이 사는 친척이 없엇다. 엄마 아버지가 입원애 있고, 곧 동생이 장례식식도 치러질 그 동시를 떠나고 싶지도 않앗다. 그렇더라도 김숙희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 결정에 수기의 의견이 보태진 것은 없었다. 수기 입장에서 보면, 그건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일이었을 뿐이다. 그 집에 들어간 첫날, 수기는 김숙희 부부와 나란히 대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엇다. 도청 소식지에 시린 사진이었다. 수기는 창피했다. 자신이 수재민이라는 사실이, 그래서 남의 집 신세를 져야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동생이 죽은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일까.
느닷없이 한 여자 아이들을 떠맡게 된 김숙희는 다른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그 일을 그리 불편하거나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봉사하는 일이었고 공명심 있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기꺼이 할 만한 일어었다는 뜻이다. 그랬음에도, 간혹 김숙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엇는데, 저 아이가 불쌍한 아이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아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서였다. 저 아이의 엄마 아버지는 고작 살아 남았을 분이 아닌가. 살아 남는다는것은 충분히 고결한 일이지만, 문제는 어린 아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자신들만 살아 남았다는 것은 분명히 영웅적인 일일수도 있지만, 뭐 그럴것도 같긴 하지만 , 아니 뭐 그게 그리 영웅적인가, 아무튼 영웅적이든 뭐든 자식을 잃고 살아 남는다는건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동생이 죽었는데도 저 아이는 어찌 그리 밥을 잘 먹는지,
김숙희에게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방학을 맞아 아들이 집에 내려올 테지만 김숙희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아들은 대학생이었고 수기는 고작 중학생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일이 생기겠는가. 그러나 그해 여름, 깜짝 놀라게 선명한 파란 대문집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을 때, 낮부타 밤까지, 밤부터 낮까지 함께 있었던 수기와 명기, 하필이면 이름 끝글자가 같아서 친남매처럼 여기지기까지 했던 그들이었다. 정작 그해 여름에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다. 명기는 수기라는 이름을 실은 숙이 인줄만 알고 있었고, 그게 이름의 끝자리로만 부르는 애칭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우ㅐㄴ지는 모르지만 그런 처지에 놓인 아이를 그런식으로 부른다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졌고, 그래서 아예 부르지 않았다.나이많은 명기를 이름으로 부른 일이 없던 수기 역시 마찮가지였다.낯을 가리느라 오빠라고 똑똑히 발음을 해서 부른적도 없었다. 수기가 명기를 그렇게 부른 건,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부른건, 그로부터 아주 오랜세월이 흘러서였다.
조심해요, 오빠 떨어져요!
수해가 발생했던 그해 여름, 수기가 그 선명했던 파란 대문 집에서 살았던 그해 여름, 명기와 함께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밤에는 그렇게 소리지르지 못했다.그냥 우어어어, 그렇게 비명만. 그 일이 발생하기 일주일쯤 전에 명기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선명한 파란색 대문에 먼저 깜짝 놀란 후, 명기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숙희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가 명기를 맞았다. 대문이 왜 저렇게 되었냐고 명기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그앤 집에 있느냐고 묻는 물음에는 더 깊이 인상을 찌푸렸다. 명기의 물음에 대답하기전에 김숙희가 먼저 물었다. 넌 옷이 왜그래? 안더워? 한여름인데도 명기는 긴팔옷을 입고 있었고팔목에 감긴 붕대도 언뜻보이는듯했다. 그런데도 김숙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명기가 물은 말에 대답을 하고싶은 망름이 더 컸기 때문일것이다. 집에 없어, 근데 얘가 좀 이상해. 넋이 나간거 같아.
명기는 수기를 만나기도전에 그애를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이 온전하다면 오히려 그런 애가 이상한 애일 것이다. 명기는 수기의 부모가 구조되는 장면을 티비에서 보았다. 그들의 구조 장면은 심지어 생중계까지했다. 명기는 학교 앞 김치찌게집에서 그 생중계를 친구들과 같이 보았다. 식당안 사람들이 손에 들린 수저를 잊은 채 화면을 바라보다가 환호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해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구조되던 수기 어머니가 들것 위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고, 그 장면에서 생존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아나운서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고, 바로 그 순간에 수기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아들은 구조되지 못한채 발굴되었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김치찌개를 먹던 사람들이 탄식을 하거나 눈꼬리를 적셨다.
수기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신발이 젖어 있었다.자세히 보니 신발과 양말뿐 아니라반바지 맡단까지 젖어 있었는데, 맑은 물을 젖은게 아닌것이 확연했다. 수해지역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종아리를 적신 흑탕물은 말랐지만 대신 진흙 부서러기로 남아 있었다. 명기에게 남은 수기의 첫 인상은 바로 그 흙뭍은 야윈 종아리였다.
김인숙
울산매일신문사와 S-OIL㈜가 공동주최하고 울산시가 후원하는 ‘제28회 오영수문학상’ 수상 작가로 김인숙(56·사진)씨가 선정됐다. 수상작품은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 2019년 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그해 여름의 수기」다.
오영수문학상운영위원회(공동위원장 김호운·김병길)는 지난 25일 서울에서 최종심사위원회를 열고 예심을 통해 올라온 4편의 작품 중 만장일치로 수상자를 선정했다. 시상금은 3,000만원이다. 시상식은 4월 중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가을로 연기됐다.
선정작 「그해 여름의 수기」는 수해에 산이 무너져서 집이 물에 잠긴 10대 주인공이 수치심을 극복하면서 장년으로 자라난 이야기다.
최종심 심사위원은 이태동(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임헌영(문학평론가·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방현석(소설가·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씨다.
심사위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거대한 자연의 힘에 복종하면서도 저항하는 인간의 문제를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제28회 오영수문학상 운영위는 현대문학, 실천문학, 문학동네, 창작과 비평 등 국내 권위 있는 문예지와 한국소설가협회, 울산소설가협회 등 문학단체로부터 등단 10년차 넘은 작가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내에서 발행되는 각종 문예지나 단행본을 통해 발표한 중편· 단편소설 중 우수작 20편을 추천받아 예비심사를 거쳤다. 예비심사는 2월 14일부터 28일까지 오영수 문학상 역대수상자와 소설가 등이 맡았다.
김인숙 수상 작가는 “모두가 걱정스러운 이때에 누군가에게 내 소설이 문득 위로가 될까 모르겠다”면서 “오영수 선생님의 소설과 함께 컸고, 작가가 돼 선생님의 존함을 건 상까지 받게 돼 큰 격려를 받는다. 그 격려를 안고 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인숙 작가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전태일문학상 특별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먼길』 『꽃의 기억』 『봉지』 『소현』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그 여자의 자서전』 『안녕, 엘레나』 『단 하루의 영원한 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