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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차례!>의 줄거리:
누가 복음은 앞서 있는 두 복음과는 다른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똑 같은 내용의 예수님 공생애를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에 담아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에 이 형식과 연관해서 누가 복음이 담고 있는 예수님 공생애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됩니다. 이 단서는 바로 하늘에서 이 땅을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의 땅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역사입니다.
하나님 차례!
(눅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서문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 차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의 차례가 끝나고 이제는 하나님의 차례가 되었다, 이 뜻이지요.
복음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차례가 되었다, 무슨 얘기인지 한번 살펴봅니다.
방금 읽은 대로 누가복음은 그 형식에 있어서 앞에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는 좀 다릅니다.
데오빌로라고 하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 편지형식 안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편지 내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에 관한 보고를 편지형식으로 보내는데, 역사적으로 이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뭐 추측밖에는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데오빌로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일 수도 있고 또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는 누가의 의도되어진 이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데오빌로라고 하는 이름을 둘러싼 추측이 여러 가지로 진행되는 동안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우리에게 떠오르게 됩니다.
2000년 교회사 속에서 이 누가복음이 편지형식으로 전해져오고 있는데, 결국 그 수신자인 데오빌로가 우리 각자라는 얘기에요.
이렇게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겁니다.
특히 누가복음이 편지형식을 띠어서 기록될 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이 있음으로 가능했다고 하면, 그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될 때 데오빌로라고 하는 이름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특정한 역사적인 한 인간을 가리키든 가리키지 않던, 가리키더라도 그 이름이 갖는 의미가 누가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전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데오빌로라고 하는 것이 별명이기가 참 쉽게 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그 뜻이 이렇습니다.
데오빌로, ‘떼오스’라는 말과 ‘필레오’라는 말이 합쳐진 것이에요.
그런데 ‘떼오스’는 하나님, 신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필레오’는 사랑한다, 누구와 친하다, 이런 뜻입니다.
필레오라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쓸 때는 주로 친구 간에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는 아가파오,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연관 지은 단어인데도 필레오라는 우정을 얘기할 때 쓰는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친구가 되다, 친구를 사랑한다는 그 단어가 하나님과 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를 필레오라는 말로 썼을까?
절대적이고 헌신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아가페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띤다는 얘기에요.
하나님과 친하다는 뉘앙스를 띠기 위해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썼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바로 마가복음에서 무얼 살펴봤는가 하면,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친해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내가 연합하는 것인데,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될 경우에는 무덤에 내려가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부활하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승천하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구원인데,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친한 관계가 바로 구원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것은, 이것이 마가와 누가가 서로 짜고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데,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과 가장 친한 상태가 되었고,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인데, 데오빌로라는 그 말이 바로 구원 받은 자의 별명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이미 각하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사건을 알고 있고 받아들인 겁니다.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 그걸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자 모두가 다 각각 그 별명을 말하자면 데오빌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자, 데오빌로,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이에요.
그 구원 받은 자들에게 누가는 지금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을 기록해서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좀 특이하지요.
물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람들을 의식하고 쓰여 진 것이에요.
그러나 누가는 특별히 더 그 뉘앙스를 달리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해진 자들에게 전하는 말씀.
왜냐하면 마태와 마가가 속한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교회공동체 안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과 친해지지 않았고 하나님과 친해진다는 사실조차도 복음이 요청하는 바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이런 모든 경우를 고려해서 썼는데, 누가복음은 특별히 데오빌로, 하나님과 친해진 자들에게 맞춰서, 마태나 마가가 기본내용으로 삼고 있는 똑같은 예수님의 공생애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자, 그러면 그렇게 데오빌로에게 전달되는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특이한 점을 띠게 될까요?
마태나 마가는 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일성(一聲)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독특한 관점이 있다는 것이에요.
이미 그 천국으로 마음이 들어간 자들입니다.
천국으로 마음이 들어간 자들에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자료를 선별해서 기록을 해나갈 때, 똑같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런 말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누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마가가 말하는 천국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는 거예요.
마가가 말하는 천국은 가까이 온 천국으로서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거기로 들어가야 될 천국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내려와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하나님나라의 내용이 된다는 얘기에요.
다시 말해서, 마가는 끊임없이 모든 예수님의 사건을 우리가 우리 마음을 이 세상을 떠나서 가까이 온 천국으로 보내야 할 요청으로써 전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을 하늘로 보내라, 하늘로 보내라! 마가의 요청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거꾸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이 땅에 내려와서 움직이고 계시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하나님 차례가 되었다는 얘기에요.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고, 계속 약속되었던 메시아가 옴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사건은 수천 년 동안 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완성이고 구원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고, 마가복음은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사건이 나 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되고,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 사건이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렇게 우리가 복음사건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다 보냈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 인간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시고 이끌어 가시느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해나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차례가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서 하나님과 친한 자, 데오빌로 ‘떼오스 필레오’, 하나님과 제일 친한 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내게 제일 친한 분이 된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삶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이 세상을 우리 마음으로 떠나버립니다.
이 몸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의 현장을 우리 마음이 떠나버립니다, 그게 죽는 거죠.
그렇게 죽는다고 했을 때 될 수 있는 오해가 완전히 제거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오해가 제거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삶이 무가치한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마음이 묶여있으므로 고통이 주어진다고 하는 문제점은 예를 들어 불교에서도 발견하고 있고, 명상이나 요가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을 들여다보면 그들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마음수행’이라는 것을 많이 보는데, 마음수행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이 세상 문제에 묶여있는 마음,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마음을 해방시키자는 겁니다.
문제점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마음의 해방을 위해서 마음이 붙잡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단지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허상.
그런데 그건 마음에 내 스스로 속이는 거예요.
이 세상의 사건과 존재는 공(空)한 것이 아닙니다, 허상이 아니에요.
그 나름대로 다 실체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더 먼저 앞서서 만나야 되는 실체로 인정하고 이 세상 것을 버리는 것이고,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허상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무가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탄성을 내뱉으시면서 만들어내신 세상의 일입니다.
가족이 무가치한 게 아닙니다.
내 자식을 내가 십자가에서 마음에서 버리고 하나님께로 갔다고 해서 내 자식이 무가치한 게 아닙니다.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가 버리고 갔던 이유는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하나님이 더 우선적이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제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뒤로 남겨두고 간 이 세상의 모든 디테일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나가신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누가복음에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도 누가가 쓴 거예요.
사도행전을 우리가 성령행전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그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과 뜻을 헤아려서 이 땅에서 그것을 성취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1장부터 성령에 관한 얘기가 쏟아 붓듯이 나옵니다.
누가의 관심이에요.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탈 유대적인 특징이 있어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룬 모든 일들은 몇 천 년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언하셨던 일의 성취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겨냥해서 쓴 것이라면, 마가복음은 그 예수님의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된다는 요청을 전달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그렇게 마음이 올라간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이 땅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져 나갈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말하듯이 누가복음도 성령행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단지 누가복음은 ‘성령행전 예수편(篇)’이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사도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모든 대상들을 다 버리고 떠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너무 섬세하게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관심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얘기에요.
그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땅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 누가복음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 사회에서 약자로 있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많이 나타납니다.
여인이라든지 어린아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인 관심이 우리가 갖는 관심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뿐이에요, 데오빌로, 하나님과 제일 친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 그 데오빌로들의 이 땅의 삶, 사회생활,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약한 점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껴안으시고 보살피시고 이끌어 가신다고 하는 그런 관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이 누가복음의 관점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 삶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구나, 아! 감사하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면 안 되는 거죠.
우리도 우리 삶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도 우리 삶에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차례가 돼서 하나님의 활동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내 차례가 먼저 제대로 수행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차례는 데오빌로가 되는 겁니다, 데오빌로, 떼오스 필레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친한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이 세상에 내 마음에 친해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내 차례를 내가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 차례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 차례가 주어질 때, 이 세상은 무가치한 것도, 무의미한 것도, 공도 허도 아닙니다.
전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 의미를 깨달으신 성령께서 이 땅에서 행해나가실 그런 활동의 터전이 된다는 이야기를 누가는 하나님과 친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낸 모든 세상에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 위에 존재하는 데오빌로들에게 이 누가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취직문제, 건강, 자식문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로 믿고 여겨서 내 마음을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께 다 보내버리고 이 세상에 대해 죽어버렸습니다.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가 사랑으로 아름다운 창조를 향하신 의지로 그것들을 어루만지시고, 그것들을 계획하시고, 그것들을 수행해나가신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해 데오빌로에게 말한 것처럼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
확실하게 그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에 우리가 굳건히 서게 되는 기회를 계속해서 포착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가 바로 데오빌로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데오빌로가 되어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 우편의 하늘에 있는 내 마음이 이 땅에 ‘이젠 내 차례다!’ 하고 외치시면서 내려오셔서 내 삶의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감사의 찬양이 끊이지 않는 복된 삶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 - 제가 데오빌로여야 한다는...
오늘 저에게 주신 귀한 하나님의 메세지였습니다. 또 확인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