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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성지순례기를 연재한다. 앞으로 성지순례를 가실 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국내외 기존 발간 자료는 물론 현지에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여 집필하였다. 필자는 학부시절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감리교 신학(신학석사) 및 경영학(경영학석박사)을 공부하였다. 수필가(창조문학 등단) 및 시인(시문학 등단)으로 활동 중이다. |
이번 성지순례의 행로는 바울의 선교여행지 핵심지역과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교회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지는 수리아안디옥<현재 안타키야>, 갈라디아지역(이고니온<현재 꼰야>, 더베<현재 케르티회육>, 루스드라<현재 일리스트라>), 빌립보<현재 필리피>와 네압볼리<현재 까발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현재 데살로니키>, 베뢰아, 아덴<현재 아데네>, 고린도와 겐그리아, 에베소<현재 셀죽> 등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한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에베소(현재 셀죽), 서머나(현재 이즈미르), 버가모(현재 베르가마), 두아디라(현재 아크히사르), 사데(현재 살르히르), 빌라델비아(현재 알라쉐히르), 라오디게야(현재 데니즐리) 등이다.
6월 22일 수 : 성지순례단 구성과 터키의 기본정보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여 현지가이드(이동환 선교사)를 만나 호텔(The City Hotel)에 짐을 푸니 저녁 10시 반(서울은 새벽 4시반)이어서 씻지도 못하고 즉시 잠들어 버렸다. KE-955로 오후 2시반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이스탄불까지 11시간 넘게 비행하는 긴 여정이었다.
우리 성지순례단은 성지순례 전문업체인 호산나 여행사가 구성한 평택에 있는 시온성교회 교인 21명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4쌍은 개별로 참가하였다. 우리 부부는 하나여행사를 통해 참여하였다.
성지순례는 종교인이면 평생에 한번은 가기를 원한다. 기독교의 경우 크게 이스라엘(이집트포함), 로마(스위스포함), 터키와 그리스 등 세 곳이 가장 핵심 순례지역이 되고 있는데, 나는 이미 다른 지역은 다녀왔기 때문에, 몇 번이나 벼르다 아내의 회갑 축하를 빌미 삼아 짐을 꾸렸다. 이번 여행은 성경에서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이 중심이 되고 있다.
내가 영문학을 공부할 때 배운 초오서의 <캔터버리 이야기>에 나오는 순례단은 31명이었다. 우리 순례
단도 호산나여행사 가이드(정성영)와 현지가이드(이동환선교사)를 합하면 31명이 되는 셈이다. 물론 우연이지만,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뭔가 연결고리를 찾는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게 사실이고, 나 역시 이번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찾은 핑계거리라 하겠다.
한 나라의 유적지를 살펴보려면 우선 먼저 간략한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성지순례인 만큼 우선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바울의 발자취와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각종 자료도 구입하고 인터넷 서핑을 통해 방문할 곳에 대한 자료도 프린트해서 가져갔다.
1. 터키의 지리적 특징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터키는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해협을 경계로, 터키 전체 면적의 3%에 불과한 유럽에 속하는 드라게지방(그리스와 인접지역)과, 97%를 차지하는 아시아에 속하는 아나톨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터키는 한국전쟁당시 16,000명을 파견하여 우리나라 최전선에서 열심히 싸웠으며 740여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2004년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와 3-4위전에서 터키가 승리하였는데, 우리 관중석에서 대형 터키국기를 흔들며 터키팀을 환영해 주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다고 한다.
터키는 우리나라로부터 수입이 많고 수출이 미미하여 무역역조가 심하고,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노무현 대통령만이 터키를 방문하는 등 터키에 대해 우리가 소홀하게 대접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현지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일방적인 터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하다고 한다.
2. 터키의 약사
터키(아나톨리아 지역) 역사는 (1) 히타이드 시대(BC2000-BC700) (2) 페르시아 제국(BC900-BC334)
(3) 헬라시대-로마시대(BC333-AD395):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BC333년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키고 아나톨리아를 헬라(그리스)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나 대왕 사후 몇몇 왕국들로 분리 독립하였다.
그러나 BC1세기를 전후하여 모두 멸망하여 로마로 흡수된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330년에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옮기고, 392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신화에 근거를 둔 아나톨리아의 우상들은 파괴되었다. 395년 로마는 동서로마로 나뉘게 되고, 서로마는 게르만 족에게 476년 멸망하게 된다.
(4) 비잔틴제국(395-1453): 동로마제국을 비잔틴제국이라 하며,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여 많은 기독교 유적을 남겼으나 1453년 오스만 터키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5) 오스만 터키 제국(1453-1922): 이슬람 세계의 중심 세력으로 번성하였으며, 많은 호화로운 이슬람 유적들을 남겼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편에 섰기 때문에 연합국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6) 터키공화국(1923- ):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Ataturk)가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Ankara)로 옮겼다. 그는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하였으며 이슬람을 세속화하였고 헌법상으로나마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였다. 1938년 사망때까지 4선 대통령으로 터키의 발전을 이끌어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터키의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곳곳에 그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터키 국기와 함께 게시되어 있다.
<국부 아타투르크의 초상화와 터키 국기>
3. 터키의 종교
현재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아타투르크의 친서방정책으로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이슬람교가 생활화되어 있어 국민의 98%이상이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타 종교가 발붙이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만약 무슬림이 타종교로 개종하면 소위 왕따를 당해 모든 공직과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와 일가친척들로부터 소외당하기 때문에 비록 속으로는 기독교인일지라도 겉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570-632)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출생하여 메디나에서 죽었다. 모하메드는 40세때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알라신의 사자로서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슬림은 이스라엘 솔로몬성전 자리에 691년 모스크를 세우고 메카, 메디나 다음으로 제3의 성지로 삼고 순례하고 있다. 무슬림 신앙의 핵심은 (1) 신앙고백(알라신은 유일한 절대신이며, 모하메드는 알라신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2) 기도(메카를 향해 하루 5차례 실시) (3) 라마단(금식. 9월) (4) 구제 (5) 성지순례(‘하지’라고 하며 평생 한번 이상은 메카를 순례). 이슬람교에는 시아파, 수니파, 수피파가 있는데, 시아파는 모하메드 혈족이 무슬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수니파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무슬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터키는 대부분 수니파에 속한다.
6월 23일(목): 갑바도기아(카이세리, 괴레메, 데린구유) 지역 순례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을 맞아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이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갑바도기아(Kappadokia)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행 2:1-13).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유대인과 로마인들의 핍박으로 각기 고향으로 흩어져 복음이 널리 전해졌으며 갑바도기아에도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갑바도기아 지방은 네부쉬힐(Nevsehir)을 기점으로 동쪽으
로는 카이세리(Kayseri), 남쪽으로는 니이데(Nigde)을 잇는 삼각지대를 말한다.
당시는 기독교가 인정되지 않았고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아 갑바도기아 초대 기독교인들은 괴레메(‘보이지 않는다’는 뜻을 가짐)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전까지 지하에 교회와 수도원을 만들어 신앙을 지켰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는 크게 융성하여 지상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중심인 오스만 터키 제국 시대에는 또다시 시련을 맞게 된다.
(1) 갑바도기아 지역을 향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마누라가 화장을 하는 동안 호텔밖을 서성대니 갈매기 떼가 끼룩거리며 아침 환영인사를 한다. 보스포러스 해협 가까이에 호텔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갑바도기아 지역에 있는 카이세리로 가는 국내선을 타기 위해 순례단은 이스탄불 시내에 있는 호텔(The City Hotel)을 떠나 이스탄불 공항으로 향하였다. 아침식사도 도시락으로 때웠다. 출발기도를 시작으로 순례여행이 시작되고 도착기도를 끝으로 하루의 순례 일정이 끝났다.
페가서스 국내항공 PC-166를 타고 8시 40분에 출발하여 약1시간 반정도가 되어 카이세리에 도착하였다. 공항을 나서니 흰눈을 머리에 인 에르지에스산(해발 3,914M)이 우리를 반겼다. 공항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데 웬 눈이냐고 모두 신기하게 여기며 사진기에 열심히 담았다.
갑바도기아지역은 수백만년전 에르지에스산에서 화산폭발로 분출된 용암인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응회암은 무른 돌이라 쉽게 호미같은 기구로 가공할 수 있어서 탄압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굴을 파고 은신처를 만들기에 적합하여, 당시의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첫 번 순례지를 향하는 버스 속에서 순례단 총무가 체리를 몽땅 사서 나눠 주었다. 지금이 제철이라고 한다. 1kg에 2,500원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에 비해 참으로 저렴하다. 터키에서 공산품 가격은 우리나라 보다 엄청 비싸지만 농산물 가격은 매우 저렴하다고 한다. 체리를 먹으며, 터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동굴식당(Kaya Restaurant)에 도착하니 12:00였다. 화산재들이 쌓여 생성된 응회암을 파고 동굴을 만들어 그 안에 음식점을 차린 것이 특이했다.
<동굴식당 앞에서 시온성교회 목사님과 함께, <터키에서는 6월 버찌철이었다>
위에 환기통이 보인다.>
응회암은 숟가락으로 파낼 수 있을 정도로 약하여, 이곳에서는 집 없는 사람도 숟가락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자기 집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한다. 점심식사는 현지식인 항아리 케밥이 주 메뉴였다. 항아리에 소고기와 야채를 함께 끓여 만든 것으로 우리 입맛에 맞았다. 후식으로 먹는 수박도 매우 달았다.
(2) 괴레메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괴레메 야외박물관(Goereme Open Air Museum)이다. 기암괴석을 파내어 만들어진 교회와 수도원이 모여 있는 곳이다. 데린구유(Derinkuyu)와 달리 지상으로 나있는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은 건축시기가 9세기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려진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들 성화는 대부분 예수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성화들은 대부분 글을 모르는 성도들에게 훌륭한 교육용 자료인 셈이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화는 우상이라는 명목아래 성상 파괴운동이 있어 많은 성화들이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아름다운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순례단은 성바실교회, 사과교회, 뱀교회, 버클교회 등을 찾았다.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 되는 성바실 교회(Chapel of St. Basil)에 들어가니 입구에 여러 개의 무덤자리가 있었다. 시신은 없고 시신이 누워있던 곳을 발굴해 놓은 것이다. 성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직접 벽에 황토염료(ochre)로 그린 것과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프레스코화는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으로 기원전부터 로마인에 의해 그려져 왔다. 프레스코화에 사용된 염료는 근처에 많이 살고 있는 비둘기 알에서 채취한다.
< 직접 벽에 황토염료로 그린 마리아> <괴레메 지역 비둘기 집>
<성경을 쓴 사람들의 초상: 프레스코화> <사과교회 디시스: 예수님 마리아 요한>
뱀교회(Church of St. Onouphrios)는 천정에 성인(St. George)과 함께 뱀이 그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왼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예수님모습,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세 명의 성자, 즉 오누프리우스, 토마스(도마), 바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긴 머리를 가진 오누푸리우스는 발가벗은 채 야자나무 옆에 서있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1세기경 이집트에는 사막에서 홀로 신앙에만 헌신한 은둔자(hermits)들이 적지 않았다. 이 지역 성인 중 한사람이 4세기경 참된 은둔자의 생활을 배우려고 이집트에 가서, 지극히 도덕적이고 자기통제의 달인인 오누프리우스를 만나 도움을 받았는데, 이를 기념하여 이 교회 명칭을 오누푸리우스 교회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버클교회(Tokali Church)는 버클모양의 벽화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가장 완벽한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버클 교회는 네게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옛교회(Old church), 새교회(New church), 그리고 천상교회(Paracclesion)와 지상교회(Lower Church)로 구성되어 있다. 옛교회는 약10세기에 세워졌으나 원형일부가 파손되어 11세기 초경에 새교회를 만들면서 보강하여 새교회로 들어가는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다.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이 교회 성화에는 암청색(Dark Blue)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림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생애를 비롯한 신약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몇몇 성인들도 벽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괴레메 지역에서는 앉은뱅이 포도나무와 아카시아 가로수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포도나무는 키가 큰 덩쿨포도인데 여기 포도나무는 바로 땅에서 여러 가지가 나와 위로 자라지 않는다. 우리 사무실 옥상정원에 심었으면 좋겠다. 또 아카시아 나무를 곧게 자라게 하여 위 부분을 둥글게 만들어 가로
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치 큰 풍선에 줄을 달아 띄운 모양이어서 보기에도 좋았다.
<괴레메 야외박물관 전경앞 성지순례단> <터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앉은뱅이 포도나무>
괴레메 야외 박물관에서 중요한 몇몇 교회를 둘러보고, 우치사하르와 젤베계곡을 거쳐 데린구유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에 Hanem Art Center라는 터키석 가공제품을 파는 가게에 들려 집사람은 터키석 반지를 샀다. 가장 질이 좋은 터키석은 터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며 12월 탄생석이다. 푸른 빛이 좋았다.
(우치히사르 주거지역을 배경으로) (젤베 계곡의 수도원 지역)
우치히사르는 괴레메동굴에서 3Km정도 떨어진 응회암 바위산으로 벌집모양을 이루고 있다. 히타이트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바위성은 오래전부터 대상들이 왕래했던 실크로드였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포도주와, 주위에 산재한 요정굴뚝의 환상적인 모습, 여기저기 산재한 아파트형 비둘기집들이 어우러지면서 이 지역을 지상낙원으로 만들고 있다고 현지가이드가 극찬한다.
<우치히사르부근 파샤바아 바위요정> <젤베계곡부근 데르벤트 계곡의 석상>
젤베 계곡은 괴레메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 수도원 지역이었다.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존재했으며,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무슬림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를 거쳐, 1950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붕괴위험으로 주민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3) 데린구유
데린구유(Derinkuyu)는 최대 3만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도시이다. 이 지역에는 적지 않은 지하도시가 있으며, 언제 어떻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건설되었는지, 그리고 정확한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네부쉬힐(Nevsehir)에서 29Km떨어진 데린구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데린구유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좁다란 통로 곳곳은 무너져 내린 곳도 많지만, 내부 환기시절이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땅위로 다시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얼기설기 여러갈래 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각종 안전장치를 해 놓았다.
예를 들면 사람 키만큼의 높이를 가진 둥근 돌문이 있는데 안쪽에서만 개폐가 가능하여 외침의 방어가 용이하게 설계되었다. 공개된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며, 공개된 55m에 달하는 8층까지에는 가축우리, 포도 압착기, 돌로 만든 두 개의 긴 탁자가 있는 식당 겸 교실,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지하감옥과 공동묘지 등은 물론 곡물과 오물을 수직으로 운반하는 승강기식 장치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로마인들의 핍박을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의 오스만 터기 제국의 박해 때도 이용되었으며, 터기공화국의 독립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로 이주하였다.
십자가모양의 지하교회에서 우리 순례단은 함께 찬송(“성도는 핍박중에도 신앙을 지켰네”)을 부르고 각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몇년전 로마의 카타쿰베라는 지하무덤 겸 거주지에 들렸을 때도 위대한 신앙에 옷깃을 여미였었는데, 과연 나에게 이러한 극한상황이 왔을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반문해 보았다. 천국의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지하도시 출구를 나오니 카페트를 파는 상점이 있다. 각종 크고 작은 카페트를 여자들이 집안에서 손수 짠다고 한다. 결혼하고 나서 여자들의 하는 일은 집에 들어앉아 카페트를 짜며 또 이지방의 케밥같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뚱뚱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갈라디아 지역
일정을 마치고 이고니온(꼬냐)에 있는 Balikcilar Hotel에 투숙하였다. 이고니온은 터키 최초 문명의 발생지이며 셀주크 터키(8C-13C)의 수도였다. 현재 인구 100만여명에 이르는 터키의 5대도시이며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곳이기도 하다(행 14:1-5).
<갈라디아서>는 남부 갈라디아 지방(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세운 교회(행 14:1-23)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다. 56년경 3차 선교여행 중에 기록한 서신으로 바울서신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다.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받게 된 갈라디아 교인들은 세례도 받았고(갈3:27), 성령체험도 하였으나(갈3:5)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이며,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스스로 구원이나 성화를 이룰 수 없다.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또한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임을 천명하고 있다(갈 5:2-16, 6:12-17).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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