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나 백두산 갔다 올게요
홍재숙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돈 가지고 유세 떨지 말라고 그랬지요? 내가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니까. 혜정이만 보면 그 알량한 지식가지고 얘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더니만. 당신, 이제부터 그놈의 신문 좀 보지 말아요. 당신이 통계학자유 뭐유? 기사에 나온 도표를 뚫어지게 보더니 ‘찬 둥지 증후군’ 이 몇 프로니, 우리 집에도 해당되는지 몰랐다느니, 잔소리를 끓어 붓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당신 때문에 혜정이가 백두산 보러 가서 여태껏 소식이 없는 거잖아요. 뭐 나이가 들었는데 독립을 안 하고 집에서 뭉기적거린다고? 언제까지 너를 돌봐야 하냐고? 집에서 노는 혜정이가 아무리 거슬려도 그렇지 당신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 줄 몰라요? 혜정이 얼굴이 싹 변하지 않았냐고요. 찬바람이 쌩 부는 게 심상치 않습디다.
흥, 찬 둥지 중후군 좋아하시네. 내일부터 신문을 끊든지 해야지. 혜정이 그 애가 집에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시우? 혜정이는 말예요. 자기 능력을 알아줄 회사를 못 찾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 당신도 생각해보구려. 기껏 들어간 회사가 언론정보대학원까지 나온 인재를 고작 하루 종일 모니터만 들여다보게 한다잖아요. 거기에 봉급이나 많으면 몰라. 4천 조금 안 되는 연봉에 이것 떼고 저것 떼서 월 3백이라는데 우리가 얘한테 들어간 교육비가 도대체 얼마유? 아파트 한 채 값은 들어갔겠다. 그래서 혜정이가 견디다 못해 사표 쓰고 나온 걸 가지고 몇 달 다니고 그만 뒀냐고, 그런 성격이니 적응을 못 한다느니, 새우 눈을 아래로 뜨고 위로 치뜨고 흘겨보니, 그 마음 여린 애가 어찌 견디겠냐구요. 자식이라고는 딱 하나 있는 거, 눈 만 뜨면 그렇게 달달달 볶아대니 지아빠 무서워서 어디 집엔들 편할까. 당신, 돈 쌓아놨다가 이고 갈래요 지고 갈래요. 딸자식 하나 있는 거 지마음대로 가슴 뛰는 일을 찾으라고 날개 달아주면 안 돼요? 또 취직, 취직 하는데 요즘 우리 혜정이 같이 똑똑하고 많이 배운 20대 백수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고나 그런 말을 하지. 청년들을 받아줄 질 좋은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대잖아요. 신문에서 청년실업, 청년실업 떠들어대는데 그런 기사는 안 보고 독립 안 하고 부모한테 기댄다는 찬 둥지 증후군만 눈에 들어와요?
백두산 물은 또 뭐예요? 당신, 엄마 보고 싶다고 애한테 그런 숙제를 줘요? 가져와야 집 물려준다고? 집이야 당신이나 내가 떠나면 어차피 혜정이 몫인데 왜 치사하게 구냐고요. 팔십이 내일 모래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그동안 당신이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먼 산 바라보기를 했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이래봬도 내가 당신 속에 몇 천 번도 더 들어갔다 나왔수. 나, 이래봬도 눈치 백단이야. 당신이 허공을 더듬을 때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워 한다는 거 내 애저녁에 알았어요.
왜 우리 처음 만난 날 있잖아요. 차 마시다가 당신이 지갑에서 누렇게 바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꺼냈잖아요. 사실 그때 나는 당신이 실향민이라고 고백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북한 사람이라니. 당신 아버지가 당신 손을 꼭 잡고 서울로 피난 왔다는 말에 당신이 딴 나라 사람인줄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참 열심히 사셨어요. 어머니가 내려오시면 호강시켜 드린다고 밤낮 없이 일했어요. 그러다가 끝내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나는 이제 하늘아래 천애고아입니다. 순자 씨는 우리 엄마와 참 많이 닮았네요.” 당신이 가족사진에서 어머님을 꼭 집어서 나를 아련히 바라보는 바람에 그때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어요. 심지어는 내가 당신 엄마가 되어 당신을 보살펴줄 마음까지 들었다니까요. 사실 내가 뭘 알고 그런 마음이 들었나요? 스물여섯 살 되도록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서 그렇지. 엄마, 아버지에게 어리광만 부리고 당체 생활이란 걸 몰랐던 나였으니까 내 운명을 결정짓는 걸 쉽게 내렸겠지. 지금 생각해도 철부지였지. 그래도 당신 만난 걸 후회 안 해요.
우리 아버지도 시부모님이 안 계신 걸 꺼려했어요. 그래도 성실하게 잘 자라서 공무원도 되고, 그럭저럭 알토란같이 살겠다하니 허락하셨어요. 덕분에 아들 하나 공짜로 생겼다고 좋아하신 거 당신도 알잖우. 당신도 무릎 끓고 우리 엄마, 아버지를 부모님으로 모시겠다고 했고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우리 둘이 무탈하게 서로 의지하고 잘 살아왔네.
그런데 이게 뭐유? 정년퇴직하고 집에만 있더니만 이상해졌어. 당신, 혜정이에게 내준 숙제, 괜히 심술로 그런 거지요? 뭐 백두산 천지 물을 담아오라고? 아니 백두산에 올라가서 맑은 천지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천지를 보는 것은 몇 대에 걸쳐 조상이 덕을 쌓아야 본다는데… 우리도 백두산 올라갈 때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날씨가 심술을 부려서 도로 내려온 거 기억 안나요? 쨍쨍하던 날씨가 갑자기 컴컴해지면서 비바람이 몰아치던 거. 그때 당신이랑 나랑 백두산 올라가는 입구에서 이천 원짜리 노란 비옷을 사서 입고 벌벌 떨었잖우? 결국에는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말려서 정상에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은 애석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뒤돌아 보았잖우. 뭐 천지를 보면서 엄마,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나 뭐래나. 당신 어머니가 당신 꼬마였을 때 민족의 영산 백두산 이야기를 해주면서 같이 가자고 손가락 걸었다면서 꼭 봐야 한다고 하더니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예요? 그래서 혜정이를 보낸 거유? 아니면 부녀가 같이 가던지. 혜정이 그 미련한 것이 천지를 못 보면 천지 기슭에서 흐르는 물을 담아 오면 될 것을, 아마도 곧이곧대로 천지 물을 떠온다고 여태 안 오는 걸 거야.
차라리 백두산 올라가는 길 가 들판에 참방참방하게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핀 들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 꽃들이 지천으로 핀 둔덕이 얼마나 아름다웠수. 천상의 꽃밭이잖아요. 당신도 기억나나 몰라. 너무 예뻐서 들여다보느라고 혼이 빠져서 가이드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은 거 말이유. 그때 참 면구스러웠지. 일행들 모두가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데 당신이랑 나랑 늦게 버스를 탔을 때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리든지. 그때 당신, 나보고 꾸무럭거렸다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말도 안했잖아요. 남자가 속이 좁아가지고는, 내가 뭐라고 말을 시켜도 퉁퉁 거리더니만. 지금도 눈앞에 선하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고산지대에서 피는 노란색 꽃은 두메양귀비와 하늘 매발톱, 구름송이풀이라네. 아휴, 이름도 곱기도 하지. 여기저기 고산 평원에 핀 꽃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기분이 꾸무럭대면 그 꽃들을 떠올려요. 그 모진 바람을 이기고 꽃을 피우느라 키가 크지도 못하고 땅에 나부작히 엎드려서 피는 꽃이 얼마나 대견한지요. 화가 나다가도 백두산 들꽃을 생각하며 마음을 환하게 다스린답니다.
당신, 통일이 되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 땅을 지나 백두산으로 직접 올라가기 전 까지는 다시는 안 간다고 했지요? 중국 땅을 거쳐 장백산으로 둔갑한 백두산은 안 올라간다고요. 하기는 그렇지요. 우리 민족의 영산인데 가이드도 중국 공안이 본다고 태극기를 펼치지 말라고 했을 때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백두산을 우리나라에서 직접 올라가지 못하고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까지 갔다가 보러가야 한다니 마음이 쓰라렸어요.
당신, 아직까지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한 것 알아요? 이거 원 벽창호도 아니고… 나, 혜정이도 찾을 겸 겸사겸사 백두산에 다녀올라구요. 당신하고 같이 갈려고 했는데 혼자 사는 정선이, 미자하고 셋이서 가서 당신은 뺐어요. 남편 먼저 보낸 얘들이랑 가는데 당신이 끼면 모양새가 그렇지 않수? 마침 잘 됐지 뭐. 혜정이 대신 내가 백두산 물 떠오지 뭐. 거기 백두산 천지 올라가는 데 폭포도 있고 온천도 있잖우? 거기서 우리 둘이 온천물에 삶은 달걀을 먹은 거 기억나지요? 가게 안에 온천물이 있고 그 물에 달걀이 가득 들어있는 게 얼마나 먹음직했던지, 중국 남자가 뜰채로 떠서 비닐봉지에 넣어준 달걀을 받아서 먹었더니 참 별미였어요. 이번에도 거기 가서 달걀도 사 먹고 근처 폭포에 가서 물도 담아와야지. 당신, 어머님이 그리워서 어깃장 부리는 거 내가 잘 알아요. 고만 마음 풀어요. 그래봤자 4박 5일이예요. 당신 꺼내먹기 좋도록 좋아하는 반찬 네 가지해서 반찬통에 담아 쟁반 째 냉장고에 넣었으니까 끼니 때 마다 쟁반만 꺼내면 되요. 국은 소갈비 넉넉히 넣고 푸짐하게 끓여놓았으니까 데워먹어요. 당신도 혜정이랑 내가 없어봐야 식구들 귀한 줄 알지. 어머, 시간 됐네. 여보 나, 갔다 와요. 집 잘 보고 있어요.
첫댓글 조국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은유적으로 그려낸 훌륭한 소설입니다.
백두산 고지대에서 피는 꽃들의 모습을 '땅에 나부작하게 엎드려서 피는' 이라고 말한 것처럼
서정성 높은 표현도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큰 박수를 보냅니다.
에고! 졸작을 칭찬해주셔서 용기가 샘솟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