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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나를 재촉한다
늦은 밤 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
야참은 국수를 섞은 귀한 라면이었다.
국물이 후르륵 목젖을 넘어가는 소리
이불 안에서 고개 들면 형이 머리를 찍어 눌렀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푹- 덜어 주신 라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형을 힐끗 쳐다보면서
한 가닥씩 천천히 아껴 먹었다.
다음날 형이 새벽 라면에 앙심을 품고
발길질을 해댔지만 난 라면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아버지 일 마치는 새벽 시간에는
형이 잠에서 깨지 않게 바랄 뿐이었다 .
국민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가출한
형이 여느 해와 달리 2학기가 시작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서
라면에 관한 경쟁은 끝이 났다.
장남이라는 굴레 쓰고
늘 동생에게 양보를 강요받았던 유년의 형
중년 어느 날
우리 형제에게 찾아온 불청객으로 삶은 담금질되었고
강철 같은 불패의 전사로 거듭나게 하였다.
에필로그
세살 터울인 형님과 나는 비슷한 시기에 파킨슨병을 진단 받았다
나 어릴 적 지게에 얹어
장터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던 우리 아버지
지게 작대기 머리에는 양민 천민이라는
두개의 뿔 새겨놓고
장죽에 불 댕겨 허공을 불어내며
고단한 속내를 삭히던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에게는 큰 산맥이었다.
먼 바다를 노려보며 서 있는 이순신 장군처럼
지게 매고 긴 지팡이 허리에 차고 다니며
세상 불의함과 맞서 가솔을 지켜내던
불패의 전사가 전장터에서 쓰러졌다.
오장육부 세상에 다 내주고
깊게 패인 주름 손등에 꽂힌 링겔 수액이
남은 아버지 생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 완력 다 빠져나가고 35kg 껍데기로 누운
노인병동 405호 불 꺼진 병실
모로 누운 아버지 등짝은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셔요 아버지 지게에 모시고
금강산 구석구석 구경시켜 드릴게요.
귀에 대고 속삭일 때면
고맙다 하시며 마른손으로 잡아주시던
지금은 없는 아버지
세월의 나이테가 수록된 아버지의 지게
바람 빠진 자전차와 서로 관절 얽고
담장 아래에서 좀 쓸어 있다.
시린 하늘 중천에 걸린 거울에 투영된 낮달이 물비늘에 실려 흐르던 못
일제 강점 시절 미스사끼라는 일본인이 만들었다는 못
인근 산 중턱에 봉분 다지며 그의 아들이 내려다 보던 못
초등학교 5학년 때 철사 엮어 만든
앉은뱅이 스케이트 타던 못
그 이듬해 방죽 터져 아랫동네 물난리 났던 못
폐병 앓던 외딴집 기침 소리가 가끔 들리던 못
홧김에 뛰어들겠다던 여자의 소란을 받아내던 못
자꾸 불러오는 배를 감당 못한 여학생 뛰어내린 못
어머니가 달려오고 경찰이 달려오던 못
문청시절 노동운동하다가 회사 짤린 후 매일같이
방죽 풀 섶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에 낙서하던 못
이상화 백일장 입상하고 발갛게 물든
노을이 벤치에 앉아 있던 나 사진 찍어 주던 못
작가회의 송년모임 마치고 호젓한 방죽 길 그와 걷던 못
방광암으로 흙이 된 그가 생각날 적마다
방죽에 올라 쪼그리고 앉아 울던 못
입술 오므리고 나직이 그의 이름 불러보면 메아리로 대답 하던 못
무너질 듯 휘청거리며 수문 쇠기둥에 머리 박고 울던 못
세월의 두께가 자꾸 쌓여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내 마음 한복판에 판화로 새겨 놓은 못
소금바람이 파도를 밀고와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에 처-얼썩
부딛쳤다가 바다로 되돌아간다.
짝꿍 시험지 답안
빼꼼 넘겨다보던
긴 책상 그어진 금위에
소복이 먼지 쌓여 있다.
한 뼘 햇살
다리 부러진 의자 위에서
한참을 머물다 간다.
복도 교실 구석진 곳마다
험상 굳은 거미들
얼기설기 함정 엮어 놓고
공복의 시간 인내하고 있다.
흑심에 침 발라 꾹 꾹 눌러 쓰던
공책 표지에 그려진 바닷새가
음표를 물고 은파가 넘나들던
쪽빛 바다 먼 하늘로 날아갔다.
음악 시간 지휘봉 좇아 음계의 계단을
오르내리던 6학년 1반 아이들의 화음이
미닫이 문틈으로 빠져나가
갯가 바위 그늘 맴돌았다.
내 틀린 음정들이 흘러 나가려다가
교실 턱을 넘지 못하고
고여 있을 듯한 내 영혼의 교실
*연평국민학교 : 남제주 우도에 있다. 아내가 졸업한 학교.
지금은 해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사람들 사이로
바람 불어오는 날이면
내 맘이 시럽다.
마지막 부두에 서면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온다.
니가 바람 되었다고 난 믿지만
넌 잡을 손이 없어
내 허리 맴돌다 간다.
마음이 저려오는 건
꽃이 피고 지는 까닭인가.
어스름 하늘 햇살 품은
붉은 구름 너머 마을
모퉁이 외딴집은
길손들 쉬어가는
객잔인가.
네가 머물다 간 그 자리
꽃방석 짙은 향기가
자욱이 하늘에 날린다.
꽃잎 지고 또 피고 지면
계절 따라 먼 길 돌아오려나.
세상 마지막 풍경 자꾸 뒤돌아보던
너를 위한 마음들이 모여
불러 주는 노래
잠시 끊겼다가 다시 들려오는
바람이 전하는 노래
입술 오므리고 나직이 따라 불러본다.
어둠속 새벽인력시장 하루살이 넋들 하나 둘씩 불려온다 버려진 조각 모아 지핀 불에 시린 손 몸 덮이며 한 사내의 지난날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무용담을 듣는다. 호명 할 때마다 팔려나가는 하루살이 넋들 삶의 편린을 꿰매기 위해 붉은 지문도장을 찍는다.
세멘과 물을 적당히 반죽하여 실패한 자신의 생을 벽에 덧칠 한다. 고층 밧줄에 매달려 내려다 본 아래 풍경은 흐릿하다. 허공을 한 발 한 발 짚으며 하루하루를 곡예하듯 이어온 삶 고공에 매달린 그의 그림자도 늘 위태로왔다. 어느 날 그는 삶을 되돌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고안해 내고는 세상 마지막 풍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119구급차가
달려오고 홀어머니가 달려왔다.
그는 비로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
폐타이어 몇 개가 지붕에 올라
바람 꼭 꼭 여미었지만
누덕누덕 기워 덮은 헤진 꿈들이
바람 불 적마다 들썩거렸다.
장마 지면
헌 기와 틈새로 스며든
흙물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받아내던 노오란 냄비 안에서
튀어오른 가난의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찐득거리는 눅눅함이 곰팡이꽃 피워냈다.
아내 손때 묻은 옹색한 세간들
한 짐으로 묶어 나올 때
우리 가족의 꿈도 서둘러 빠져 나갔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던 아내 앓던 방
구부러진 끝 골목 막힌 집
음습한 벽에 걸려 슬프게 웃고 있는
사진첩 속 가족들
야경 돌던 초저녁이 외등 스위치 올려
웅크린 어스름 밀어내고
골목길 환하게 밝혔다.
실업의 주머니 안은 달랑
동전 몇 개가 달그락 거렸다.
마구 엉킨 실타래처럼
미로 같은 혼돈의 아린 기억들을
머릿속 지우개로 하나, 하나씩 지우며
돌아오는 그 길은 유난히도
맵찬 바람이 불었다.
골목을 좁혀오며 쏟아지던 별비에
루핑 얹은 슬레이트 지붕이
더욱 낮아지던 어느 겨울 밤
마음이 건네주는 따뜻한 사람의
사랑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공돌이라고 불리던 시절
12시간 일 하고 돌아오던
시장 골목 모퉁이 좌판
두부 반 모 소주 반 병 내주고
닭 머리 찧으며 졸던 노파
좌판 카바이트 불빛
자꾸 희미해지던
칼바람 불어제끼던 그 골목
분진이 송홧가루처럼 뿌옇게
날리던 그 거리
격주로 쉬던 휴일에도
갈 데가 없어
반 지하 셋방에 엎드려
헤어진 사랑에게 돌아오지 않을
편지를 적던
따뜻한 사람의 사랑이
그리웠던 시절이었다.
신딸 이년 빌고 비니
애지중지 자식 잃은
박복한 저년들 좀 살펴주소
팔십에 죽어도 이승에
미련이 남거늘 이팔청춘
살殺을 만나 이승에 혼魂이
매였구나 사는 것이
꿈길이고 대문 밖이
저승이라 이승 저승이
길 건너 가까운 이웃이네.
작두 위에 몸을 얹어 구르고
또 굴러 이내 몸 꽃이 되고
북이 되고 소리되어
두들겨라 두들겨라 쇠북을
두들겨라 꽹과리 장구도
두들겨라 온갖 영산 불러 모아
질펀하게 놀아보세
어허-얼쑤- 덩더쿵
얼쑤-얼쑤- 덩더쿵
이승 결박 풀어진다.
길 열어라. 길 열어라.
시왕포** 갈라진다. 저년 딸
저년 아들 가시문 넘어가네.
명태 먹고 조밥 먹고
북 장단에 어깨 걸고
발 굴리니 모두가 흥겹구나.
어허- 얼쑤- 덩더쿵
어허- 얼쑤- 덩더쿵
총각 처녀 돌아보며
고맙다고 인사하니
눈물바다 저 바다
아귀바다 저 바다
꽃바다로 붉어지네.
붉은 바다 붉은 바다
꽃바다여 꽃바다여.
*젋은 나이에 혼인도 하지 못하고 물에빠져 죽은 한많은 귀신이 되어 저승을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영혼을 달래 저승으로 보내는 굿의식이다.
**망인이 가야 할 저승길을 상징하는 흰 광목천
영산: 한이 많아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
환경미화원이 밀고나오는 수레에 아침이 실려 온다.
얼음꽃 핀 생선들 지느러미 곧추 세우고
관 속 같은 비릿한 상자 안에 활굽이 등뼈로 누워
입 다물지 못한 채 토막 날 시간 기다리고 있다.
귓밥 얼얼한 추위 앞에 서성이던 나는
생선 좌판 앞에 진열되어 있다가
기웃거리는 이방인들과 등줄기 퍼어른
파도의 싱싱함을 단칼에 도려내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화두로 주고받았다.
몇 홉 소주에 취한 생선가게 사내는
일수도장을 찍지 못한 날씨를 탓하며
팔다 남은 생선 위에 소금 뿌려대면서
소주 몇 홉에 취한 풀린 눈 애써 치켜뜨고
자신의 생이, 바닥에 늘어놓고 산 것 만은
결코 아니라며 주절대는 말의 파편들이
젖은 바닥에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리어카를 밀고
깊은 밤의 집으로 불려간다.
계수나무 접어 도화지에 품고 다니던 유년의 달
대구 남구 남산동 수녀원 안 백백합 보육원에서 살던 일곱 살 적 집으로 불려 가던 달
나만 식기 숟가락 따로 내주던 새어머니 방침에 어이없어 하던 달
장의차 기사 아버지 상가집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다가 뜬금없이 밀려오는 외로움과 사무침에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려 울던 달
새어머니 탓할 때마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며 어께 두드려 주던 달
매년 여름만 되면 가출 충동 일어나던 달
국민학교 3년 새어머니 선반에 얹어놓은 곗돈 들고 인천까지 레일에 실려 가던 달
인천역 뒷골목 반점에서 곱빼기 짜장면 먹던 달
인천역 시계탑 밑 풀밭에서 노숙하던 달
낯선 동네 헤매다가 허기에 지쳐 골목 그늘 평상에 쓰러져 있던 달
평상 주인댁이 씻겨주고 공복의 밥상 부풀어 오르게 하던 달
아동보호소에 이틀 보관되어 있다가 대구역으로 반송되던 달
대구역에 미리 나와 있던 아버지 옆 새어머니가 저승사자로 보이던 달
6학년 봄 소풍 때 보리밥과 김치 담긴 도시락 열고 천천히 먹던 달
선생님 급하게 김밥 챙겨 주시며 엄마 안계시냐고 묻던 달
대구명덕초등학교 혼자 졸업하러 가던 달
*2017 문학상 공모전에서 대상에 뽑혔을 때 청년이 된 아들 손잡고 계수나무 사잇길 걸어 나와 대기만성大器晩成 되 뇌이며 가슴 아프도록 보듬어 주던 내 마음의 달
낮달이 수제비로 떠 있던 푸른 이끼 낀 우물이 있었다.
낡은 정지문
군데군데 깊게 패인 주름 깊은 세월을 예감했다.
어둠이 웅크리고 있던
동굴 같던 아버지 앓던 방이 있었다.
공책 손에 쥐고 순서 기다리던
송판 두 개 걸친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쌀 반 되 연탄 두 장
하루치 생을 새끼줄에 매달고
형이 올 언덕 아래로 자주 눈길이 갔다.
그해 봄부터 사춘기병을 심하게 앓았다.
중장비들이 대오를 갖추고
신천1동 언덕배기 마을로 진군했다.
캐러필트 발 아래 쓰러진 아카시아는
하이얀 꽃잎 수 없이 날려 보냈다.
구겨진 판자집 지붕들
덤퍼트럭 짐칸에 포박 되어 폐기물 집합소로 실려 갔다.
철거 분진이 낮게 떠 다녀 낮에도 마을은 어두웠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이 작은 동산을 허물어버렸다.
바위틈 산까치 둥지가 후폭풍에 먼 하늘로 날아갔다.
포클레인이 긴 팔을 뻗어 지붕을 타격하자
전기가 나가고 먹물 같은 어둠이 들어왔다.
우리 가족의 꿈도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버지, 홧김에 마시던 막걸리 사발 안에
종이장처럼 구겨진 판자집이 둥 둥 떠 있었다.
뻥- 뚫린 지붕으로 별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누이와 나는 슬픔이라는 이불을 덮고
뻥-뚫린 밤하늘 별들을 세어보다가
밤이슬 방울 맺히던 방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는 마흔 일곱 생을 급하게 마감하고
하늘로 불려갔다.
줄장미 몇
최후로 남아 악쓰며 기어오르던 무너진 담장을 넘어
빛바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부서진 골목 혼자서 걸어 나왔다.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밀어낸 아버지 생과
내 사춘기와 언덕배기 그 집이
기억의 창고 한 켠에 추억처럼 걸려 있다.
바람의 텅 빈 가슴속으로
운반된 가을이라는 이름의
이파리들 차곡 쌓여
허전함의 부피를 더해 갔다
산기슭에 웅크리고 있던
늦은 햇살 불려나와
생의 보관함에 저장할
산객들 진열 시켜놓고
역광의 조리개 맞추고 있다
천년 고목 팻말 앞에
멈춰선 산객들
유장한 세월 거슬러간
내장산 옛 이야기 듣는다
휘어진 오솔길 수북 쌓인
낙옆 더미에 발 빠뜨리며 온
명지바람* 내 허리 맴돌다가
빠른 보폭으로 산을 오르며
힐끝 뒤돌아본다
바람의 그림자도 산자락에
얽힌 내력 주섬주섬 주워 담아
한 짐으로 묶어 어깨에 매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아간다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새벽 다섯시 서울행 KTX 첫차
안내 방송이 나간 직후
철도경찰 구두들이
요란스럽게 달려와
꾸던 꿈 마저 포박한다
대합실 곳곳에서는 쫒고 쫒기는
대활극이 리얼하게 상영 중이다
부산역 광장 귀퉁이 정오경
배식차가 늦은 아침밥을
희망의 주걱으로 퍼주고 있다
담배를 꺼내 조각난 삶의 알갱이들
길게 당겼다가 훅- 불어낸다
돌아갈 수 없는 몸뚱아리
앙상한 갈비뼈 마저
레일 위에
통째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누군가 닳도록 밟고 갔을
복도 한켠
바닥에 얹어본 시린 손
따습은 고향집 아랫목이 그립다
신문지로 바람 꼭 꼭 여미고
잠을 청해보지만
노숙의 꿈은 자꾸 새어나온다
제2부
79단촌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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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가 지나간 역사 인근 여인숙에서
묵던 밤은 깊고 어두웠다.
낯선 꿈 뒤척이다가 든 얕은 잠은
마구 헝클어져 낯선 길을 헤매었다.
5호실 아랫목에 엎드려 선데이 서울
마지막 페이지 펜팔 난부터 역순으로 읽었다.
귓밥 얼얼한 추위에
등뼈 꺾인 들판도 몸을 낮추었다.
기차 시간표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던 칼끝바람도 마구 흔들렸다.
새벽어둠이 햇살을 켜들고
저만치 서 있는
아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타닥타닥 잉걸불로 타오르던
조개탄 난로 앞에서 온기를 나누며
측근에게 척살된 유신의 공백을
화두에 올려 대단한 걱정들을
늘어놓던 사이
시대의 가난이 역사 지붕에
은밀하게 차곡차곡 내려 쌓였다.
괘종시계 추의 초침이
더디 오던 첫 기차 실린 레일을
조금씩 당기던 한 장 남은 일력이
걸려 있는 역사가 조금씩 녹슬어 가던
단촌역
어둠이 문 열고 나온 등 굽은 할마이 스위치를 올린다. 뼈다귀 곤 솥이 김을 뿜어낸다. 해가 갈라산에 올라 중천으로 향한다. 북적이는 장은 차력사 기합으로 흥을 돋운다. 맨 손으로 금간 벽돌 몇 개 깨고 나서야 위력을 확인한 촌부들은 자신들의 팔뚝을 점검해 본 후 서둘러 약을 사들고 자리를 벗어난다.
방앗간 볶음 솥 깨가 익어간다. 알전구 켜든 생선가게가 고등어를 토막 낸다. 버려진 아가미, 눈 치켜뜬 저 영혼은 벌써 바다로 향했으리. 산 능선 슬금슬금 내려온 해가 장마당에 드러누웠다. 종일 오가는 바람 앞에 진열되어 있던 장꾼들도 지쳤다. 사내는 자신의 생을 다 널어놓은 게 아니라고 중얼대며 칼 망치 드라이브 몽키 들을 거두어들인다.
초겨울 저녁 어둠이 일찌감치 뼈다귀집 한 켠에서 진국을 후루룩 마신다. 한파 예보 앞에서 궁색하게 마시는 술에 얼굴이 붉다. 일수 도장 찍고 남은 빈칸을 짚어 본다.
내다본 창밖 풍경은 아직 흐릿하다
파아란 이끼 낀 돌방
떫은 물맛 길어 올리던 두레박이 있던 집
삐-거덕 정지문 들여다보면
무수히 칼질 받던 원목 도마가
찬장 옆에 세워져 있던 집
번개탄으로 살린 화덕에 올려진
선학표 백철 솥 안 쌀알들이
매운 눈물 흘리며 익어 가던 집
밤새 스며든 연탄가스에 취해
비틀거리며 김치국물 마시던 집
청마루에 보자기 하나 따습게 펴놓은 햇살이
가끔 졸다 가던 집
신작로 큰 차들이 시커먼 매연 뿜어내며 지나갈 적마다
마루에 걸린 가족사진이 흔들리던 집
장독대 간장독 안에
집안 여인들 내력이 보관되어 있던 집
까치밥 몇 낱 열리던 야윈 감나무가 있던 집
둔덕에 바람 불 적마다
처마에 걸린 시래기 부스스 제 몸을 털어내던 집
1
무력武歷 1961년 야음을 틈타
결사대 30명을 이끌고 지존의 거처를 급습하여
문관들을 몰아내고 옥좌를 찬탈한
독심대제 망박은 제위 18년 동안 무자비한 탄압과
양심적인 무림 고수들에게 철편을 날려
중원을 피바다 아귀바다 지옥 십자관으로 만들었다.
자신도 암기를 가진 자객들에게 당할까
은밀하게 사병을 키워 안위를 도모 하였으나
호위 정보장 도청총마 규재가
돌연 민주 무림 만세 유싱헌법 무효를 외치며
독심대제 망박의 심장에 단검을 깊숙이 꽂았다.
밤마다 주지육림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꿈꾸던 종신 지존의 과욕은
결국 화를 불러온 것이다.
암살은 측근에게 당한다는 중원의 정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독심대제 망박이 척살된지도
수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망박의 맏딸 녹부용 혜근은 은연자중 절치부심
마침내 속이고 필살기를 독파하여
무림 고수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지존의 지리에 등극하였다.
전 무림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무협 신문들은
녹부용 혜근에게 모든 영광 있으라.
천제 맏딸의 강림이다 대를 이어 충성하자.
사나이 타는 한 목숨
녹부용 혜근 미륵에게 오롯이 바치자.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아부의 극치를 보이며
강자존 약자멸
1면 대문에 내 걸었다.
2
청마대 별관에서 녹부용 혜근은 측근들과 추억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를 관람했다. 수하들에게 주인공 이름*을 물었다. 모두 머뭇거리자 뒤돌아보며 카크다글라스라고 했다. 이에 수하들은 기립 박수로 지존에게 존경을 드렸다. 무식은 극치를 싣고 계속 달렸다. 녹부용 혜근의 치마폭 안에서 복지부동하던 모 기획관이 민초들은 개, 돼지처럼 먹을 것만 제때에 주면 된다는 망발망언과 녹부용 혜근이 애지중지 끼고 돌던 철면피 순실이 거부를 겁박하여 금화 수백억 냥을 갈취했음을 모 무협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했다. 수하들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자 녹부용 혜근은 하안거를 앞당겨 남방국으로 재빨리 날랐다. 추종 세력들은 마침내 관심법 경지까지 도달한 지존 녹부용 혜근에게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옴마야 반메홍! 옴마야 반메홍!
강자존 약자멸
정글의 법칙을 각성하는 무림의 신문들은 한 목소리로 속이고 필살기로 지존에 오른 녹부용 혜근에게 바친 충성서약 무효를 선언했다.
무림 헌법 제 1조 1항 무림민국은 민초공화국이다.
무림 헌법 제 1조 2항 주권은 민초들에게 있다.
무림 헌법 제 1조 3항 권력은 민초에게서 나온다.
아버지 망박의 기법을 패러디하여 순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거부들을 겁박하여 천문학적인 금화를 착복하는 등 국정을 농단하자 마침내 중원 방방곡곡의 민초들은 녹부용 혜근의 사악한 주술에 속은 것을 후회하며 땅을 치고 옷섶을 찢으며 비분강개했다.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혜근하야 혜근하야 혜근하야 헤근하야
남녀노소 어깨 걸고 외치는 구호는 삼천리 끝에서 끝까지 메아리쳤다. 장터마다 횃불 든 민초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청마대는 연일 대책회의 끝에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전 관병을 총동원해서 천제天帝가 내려준 녹부용 혜근 지존을 보위하라 청마대 광장에서 지존 임기사수 대회를 마친 녹부용 혜근과 수하들은 신 황야의 무법자를 가열차게 힘차게 부르며 보무도 당당하게 경내를 행진하며 결의를 다졌다.
무력1980년 하남에서 민주 무림 중대선사 납치와 관병독제 반대를 외치며 분연이 일어선 하남 민초들에게 무자비하게 철편을 날려 빛고을을 피바다 눈물바다로 만든 악행망발 괴수 두환을 기억하는 무림은 대헐겁을 예고하는 암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아아 무림이여 무림이여
비열한 무림이여
*클린트이스티우드
옛날 옛적 어느 고을에 어릴 적 부모 여읜 봉숭이라는 처녀가 가야금을 잘 탄다는 입소문이 귀에서 귀로 전해져 대궐까지 흘러들어 갔단다. 임금님이 보내준 황금마차를 타고 대궐로 불려 간 봉숭이는 임금님의 정원 후박나무 아래에서 가야금 뜯으며 옥구슬 굴러가는 천상의 화음으로 임금님을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뜨렸단다.
대궐에서 돌아온 봉숭이는 그만 몸져누웠더란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음계가 깔아준 주단길 따라 봉숭이 집으로 행차 하자 병석에서 일어나 가야금을 뜯던 봉숭이 열손가락에 피가 맺혔더란다. 임금님은 모시 천에 백반을 얹어 피 맺힌 열 손가락 마디마다 일일이 싸매주고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방울까지 닦아주고 대궐로 돌아갔더란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건네주던 첫 정이었지만 날 때부터 미리 정해진 신분은 거스르지 못 할 운명이었단다. 봉숭이는 대궐 향해 북향 삼배를 올린 후 은장도로 자신의 심장을 깊숙이 찔러 시대의 아픔을 안고 홀연히 떠났다는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옛적 이승에서 맺지 못한 봉숭이의 슬픈 사랑 이야기 마무리 대목에서 다가올 미래의 내 사랑을 잠시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때 나를 잠든 것으로 오해 하셨나. 일일이 매듭지어 바닥에 늘어놓은 이야기 주머니들을 치마폭에 주섬주섬 주워 담던 할머니에게 ‘가시게요?’하고 물었더니. 이제 그만 자야지 하는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서 들려왔다. 할머니는 이불을 발끝까지 꼭 꼭 여며 주시고 방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비좁은 문을 열고 나섰다.
옛날 옛적 이 이야기는 봉숭아 꽃말이 되었고 봉숭아 꽃잎 물들인 손톱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 있다면 첫사랑이 영원이 간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봉숭이 이야기는 지금도 싸-하게 신경줄을 타고 온몸에 전율이 온다.
강 숲 키 높은 나무들이
높고 맑은 가을 하늘 당기자.
중천에 걸려있던
투명한 낮달이 기우-뚱
강심 한복판에 떨어져
물수제비로 둥- 둥 떠 다녔다.
갈바람도 풍-덩 제 몸 빠트렸다가
물비늘에 얹혀 실려 가고 있다.
S자로 휘어진 솔밭 길
낙엽 바스락 바스락 밟으며
야경 돌던 초저녁 어둠과
마주 앉아
고단한 차 한 잔
내려두고 떠올려보느니.
전생에 천만 번 만났다는 인연
여섯 층층 계단 윤회
그 엉킨 실타래 같은 혼돈
지우개로 머릿속 하나씩 지우면서
생각해 보느니 우리 후생에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대항마을 어귀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 두 장승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대항 새바지 등대 따라가는
포장길이 생기고
남북으로 뭍을 잇는 긴 다리가 생겨
개발지 졸부들과 오지 빈자들로
나누어져 서로의 마음에 금을 그었다.
울아버지가 던진 그물에 어부의 하루가 갇혀있었다.
자맥질 간 울엄마 기다리며
선착장에서 동무들과 같이
불러보던 노래가 갯바위에 부딛쳐
하얀 포말로 부서져 내렸다.
두 팔 벌려 품고 싶은 남녘바다
산모롱이 휘돌아 가면
절벽 아래 파도가
길손 반기며 손 흔들고 있다.
먹물처럼 어둡고 긴 통로 지나 터널 끝
긴 머리 갈래 묶은 소녀가 서 있다.
구겨진 그 기억 너머 엉킨 길들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반듯하게 펴 본다.
허방을 더듬더듬 짚으며 유장한 세월을 거슬러 간 그 곳
지나가는 바람 세워놓고 제 몸 흔들어대던
맨드라미 채송화 개복숭아꽃 앞다투며 오복오복 피어난 삽짝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빗방울마저도 그리워하던 그 집
주름진 추레한 모습으로 와서
열린 창문으로 빼꼼 고개 디밀고 들여다본 옛 방
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설레는 순정을 채 깨트리던
새침했던 소녀 밤마다 스스로 자아낸
고독을 얼마나 즐겼던가.
어스름 올 때까지 신작로 담배 가게
우체통 앞을 서성이던 센치했던 그 소녀
아카시아 나무 아래 흑백사진 안에서
하이-얀 꽃잎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어느 타관 낯선 길모퉁이에서
꽃처럼 져버리지 않을까 눈물 글썽이며
흘러가는 빛바랜 중년, 혹은
비포장길 한가운데 듬성듬성 묶어놓고 온
청춘에 관한 그리움 몇 낱
내리는 눈 쌀알 같다.
땅에 닿기도 전에
이곳저곳으로
바람에게 불려 다녔다.
우리 자주 미끄러지며 웃었다.
막힌 골목 외등 아래서
감싸주던 그의 두 손이
참 따뜻했다.
눈 쌓인 겨울나무들
가지 휘어진 채 잠이 든 창밖
풍경 노래하던 통기타 가수
음률이 촉수 낮은 카페에
흘러 다녔다.
설렘으로 가슴 뛰던
시간 지나고 초저녁 어둠이
중천에 내걸릴 무렵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할 말이 많아졌다.
소망이라는 연을 하늘 눈밭으로
날려 보내던 새해 첫날이었다.
고무다라이 안에서 느리게 헤엄치는 놈들에게 왕소금 한 주먹 뿌리고 점액질이 다 빠져 나갈 때까지 솥에 넣어 삶는다. 무차별 학살 같지만 우리는 놈들을 한 근이니 두 근이니 하는 저울추 무게로 흥정할 뿐이다. 뼈가 으깨져 가루가 될 때까지 분쇄기를 돌린다. 청양고추 마늘을 잘 다져 썰어넣는다. 시래기 양파 토란대까지 넣고 가스레인지 파란 불꽃을 높인다. 높일수록 진하게 우러나는 국물 마침내 추어탕의 이름으로 거듭나서 저녁 식탁에 올려진다. 우리 가족은 엄숙한 표정으로 성호를 긋고 거룩한 식사를 한다. 혹자는 살생이니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탓하기도 하지만 세상은 정글의 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간다. 생물에 관한 연민이니 방생이니 따위를 논하는 것은 도태의 지름길이다. 다만 놈들이 시장에서 턱없이 값이 오르거나 품절되어 우리 가족 식단에 오르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될 뿐이다.
키 높은 등푸른 나무가 이고 있던
푸른 하늘 바다 아래 古고 터
산새들이 둘러 앉아
바람에 묻혀 있던 세월의 이력
잘게 쪼아대고 있다 .
노승의 아픈 목탁소리가
나이테 속에서 느리게 흘러나와
숲에 머물러 있다
독경 소리에 이끌려 든 대웅전
수미단 위 연화재 부처와 마주앉아
참회문 펼쳐들자 경들이 뛰쳐나와
죽비로 내 등짝 후려친다
나 불법에 기대 살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방석 위에
눈물 몇방울 떨궈 놓고
뜨거운 눈물로 무릎을 세 번 적셔라
법어 떠올려 보다가
삼라에 가득 고인 눈물 닦아줄
불국토**소망등 하나 켜 달고
108계단 내려 올제
부스스 동승이 수행의 문 열고 나와
절 마당 비질하자 우수수
날리는 천년 먹은 먼지들
*신라시대 경주 북천에 있었다고 한다. 성덕대왕 신종이 있던 사찰
**세상 끝날에 미륵이 오면 불국토.즉 부처의 나라고 온다고 불자들은 믿고 있다
전봇대 꼭대기 외등 불빛 하나 매달려 있다. 밀창 열고 나온 할마이 큰 솥 내걸고 다라이 물 쏟아붓는다. 새벽 어둠 수채 구멍으로 빨려나간다. 속초 앞바다 해가 통통 튀어오른다.
함경도 고향까마귀들 한자리에 모였다. 깡아리 있는 마을 개들마저 아바이들 닮았다. 아바이순대 명태순대 오징어순대 순대국밥 함흥냉면 현수막에 차려져 펄럭거린다. 늙은이 아들 실향의 시름 잘게 썰어낸다. 검은 봉지 훅 불어내자 해조음이 풍겨 나온다. 순대가 난전으로 배달 나간다. 나루터 갯배는 청초호에게 가을동화를 연속 상영하고 있다. 선장이 한 사람씩 호명하여 유람선에 싣는다. 낮술에 취한 노랫가락이 아바이 몇 데리고 흥남부두로 향한다. 갈라진 목소리는 뱃머리에 부딪쳐 이내 흩어진다. 루핑 얹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계수나무 만월 일찍 떠오르고 기러기 떼 해파랑길 따라 어스름 하늘바다 노 저어 간다.
꿈을 안고 도회지로 상경한 소녀에게
한 사내가 마법을 걸어왔다.
밤하늘의 별을 모두 따서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성을 쌓았다가 허물었다.
그 꿈이 영글어갈 때쯤
솎아내던 밭고랑 패대기치고
흙발로 달려온 어머니
생머리 움켜쥐고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고는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문밖에는 별을
한 다발 품은 사내가 서 있었다.
주술은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소녀는 사내가 깔아놓은
별이 총총히 박힌 주단 위를
유리구두를 신고 사뿐사뿐
마법의 성으로 향했다.
꿈의 꽃밭을 거닐던 소녀는
마법이 풀릴 때까지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다.
1 겨울
바람에 덜컹대는 창문 닫아걸고
일찌감치 등불 내리고 꺾어진
앙상한 등뼈 반듯하게 펴 뉘입니다
가지 휘어진 채 잠든 나무 자꾸 쌓이는
눈 털어내는 소리 들려옵니다
산마루에서 한걸음에 내달려온
매운바람 은빛톱날 되어
고드름 매달린 창가에서
윙-윙-제 홀로 울다 가던 새벽녘
석고처럼 굳어가는 몸 겨우 일으켜
세상사 눈들을 피해 온 피난처
숲속의 집 현관문 앞에는 날마다
아침등을 켜든 햇살이 서 있었습니다
어느날
내가 깊은 침묵의 문 열었을 때
치유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라고 적힌 리본 펼치며
맑은 아침 햇살이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합니다
2 봄
살찐 봄의 어머니가 내주는 수액
푸른 혈로 밀어 올려 그 줄기에서 무수한
이파리가 돋아나 마침내 숲이 되었습니다
피톤치드 향 자욱 흩날리는 소나무 숲
사잇길 올라서면 `오솔길 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잎사귀를 흔들며'
이방인 반깁니다 산마루에 걸린 노을이
숲속의 집을 빠알간 홍시빛으로 물들이던
해넘이쯤
은색 머리칼 곱게 빗어 넘기고
평화로운 창밖 내다볼제
숲에서 들려오는 치유의 노래
바람에 잠시 끊겼다가 다시 들려 옵니다
치유의 그날이 오면
아아 정녕 그날이 나에게로 오면
그 노래 나즈막히 따라 부르며
행복의 부피를 헤아려봅니다
에필로그
파킨슨 병력 10년차입니다. 자꾸 진행되는 나 자신을
아파하다가 자연 휴양림에 머무는 동안은 이처럼 치유의
희망을 노래할 정도로 행복해집니다
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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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서
하느님께 자식 내보내던 날
쏟아내던 어머니의 눈물
나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파랑 물결 용비늘로 솟아오르는
세상 큰 바다로 나가 낮은 세상
어두운 곳에서 마음 비워내고
성인들 가신 길 좇아 뜻을
펼치라는 마음 왜 모르겠는가.
눈 쌓인 골목길 모퉁이
축대가 있던 그 집
숟갈 부딛치며 도란도란
나누는 가족들의 행복을
나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따뜻한 사람의 사랑을 모르겠는가.
사제관 그 외로운 섬
절대 고독의 시간 속에서 올리는
묵언의 기도는 하늘까지 닿아
사랑하라 사랑하라
천상의 소리로 들려오네.
가여운 영혼들 그 아픈 맥들을
짚어주고 나만 바라보는 슬프고
아름다운 영혼들 세상사 얘기
다 들어주고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하시네.
이 벌판에 가득 일렁이던 축하객들
알전구 아래 서 있는 성모 마리아
미소 담고 썰물처럼 다 빠져 나가고 나면
귀한 자식 주님께 오롯이 내어주신 그 날
어머니 쏟아내던 기쁘고 슬픈 눈물
생각나면 나 혼자 이 벌판에 남아
참았던 울음 끝내 터트리고 말겠네.
부자들이 하늘 마을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일생을 마치고 전재산 떠메고 은하행 레일에 영혼을
얹어 서둘러 떠난 졸부들의 이야기야
거의 전재산을 한 짐으로 묶어간 졸부들은
무지개 문 앞에서 무게 기준초과 해
입국 불허 판정을 받고
지옥문으로 급강하 될 위기에 빠지자.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들의 짐을 모조리 비우기로 결심하고
각종 귀중품을 풍경 아래로 다 쏟아 부었다.
심지어 입고 있던 양털 코드까지 벗어 던졌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던 바람은 바빠졌다.
생을 저당 잡히고 일용할 양식에 매달려
허덕거리던 추레한 이들을 불러모아
먹이고 덥혀서 그들의 가슴을 달궜다.
갑자기 넉넉해진 세상
할 말이 많아진 빈자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한 곳에 모여 기도문을 암송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졸부들은
가벼움의 미학을 되 뇌이며
빈자들의 가슴 속으로 뒤뚱뒤뚱 걸어 들어갔다.
짙은 비릿내 품은 새벽 안개
해안선 따라 낮게 흘러 다니다가
모래톱에 걸려 군데군데 고여 있다.
쪽빛 바다가 거친 바위틈을 벌리자
빠알갛게 익은 아침 해가
공처럼 통 통 튀어오른다.
구부러진 길 돌고 돌아가는 길
절벽 아래 파도가 하-얀 손
흔들며 길손들 반긴다.
밀물 썰물 넘나드는 남녘바다
물질하던 아낙 태왁에 매달려
숨비소리 길게 뿜어낸다.
방목된 염소들 풀 뜯는 한가함이
낯선 섬의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물너울이 밀어낸 밤 포구가 먼 바다에 둥 - 둥 떠다닌다.
그림 속 밀밭 향이 아침 햇살에 실려
금 간 창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올 때쯤이면
서툴게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노오란 집
지었다가 허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서늘한 저 바람과 내가
닯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쪽 귀 없는 정물에게 묻는다.
헝클어진 삶을 풀어내는 방법에 관하여
먼지 몇 두릎 쌓인 채
저물어가는 일생이 남긴 여운들을
완벽하게 지우고 있는 중이다.
텅 빈 마음 들여다보는 안타까운
눈빛 누가 다독거려줄거나.
여백 박차고 날아오른 새 한 마리
잘 익은 밀 이삭 하나 물고
날개 발갛게 적신 채, 해 넘어간
어스름 남천南天 하늘 노 저어가고 있다.
*화가 빈센트 반고흐(1853-1891) 그림 작품이다.
귀를 짜른 후 정신병원 입,퇴원을 거듭하던 그는 프랑스 파리 교외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밀밭에서 자신이 기거하던 월세 방으로 기어가서 반나절을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급히 달려온 동생에게 나는 평생 서툴게 살아왔는데 죽는 것도 서툴다 라고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정신 불안증으로 광란한 행동을 보인 원인은 그 시대 가난한 화가들이 가격이 싼 술을 마셨는데 그 술은 쑥으로 만들어졌다. 압셀론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 압셀론에 중독되면 사물이 노랗게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자제하지 못하는 광란과 자살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고호가 그림 세계에 머물렀던 10년 중 8년까지는 작품이 우울했었는데 마지막 2년은 희열을 느낄 만큼 색체가 밝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란 색깔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고흐의 대표작은 마지막 2년간 그린 작품이었다고 한다.
하루를 솎아내던 해도 지쳤습니다.
지평선 끝 황토길 흙발로 걸어가
붉은 노을 너머 구름 침대에
고단한 몸 뉘입니다.
평생을 아무개 엄마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남루한 살림의 한 축이 되어
작고 연약한 몸
짓밟히고 스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질갱이보다 더 질기고 매운
깡아리 있는 조선의 여인이었습니다.
언제 올래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갈라진 목소리
그 이튿날 어머니 이름 천상에
올려질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계절의 문이 수없이 열렸다가 닫혀도
꽃들이 지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나라
별들이 총총히 박힌 쪽문 열고
‘얘야’ 부르는 소리가 잠시 끊겼다가
밍경*같이 투명히 얼어붙은
해넘이쯤 겨울 하늘 맴돌고 있습니다.
내 마음 한복판에 판화로 새겨진 어머니
늦은 밤 창문 너머 어둠 내다보며
그리운 그 이름 나즈막이 불러 봅니다.
어머니이이이
*밍경 : 거울의 경상도 방언
가끔 반지하 방에 담겨 편지를 쓴다.
우체통은 사연 한 뭉치 어깨 메고
거미줄 같이 얽힌 골목길 바쁘게 달려
일 년에 칠월 칠석 날 단 하루만
하늘나라 배달 간다는
현수막 펄럭거리는 부두에 접수한다.
하늘 한 귀퉁이, 별이 된
울아버지 화답이라도 하듯
아침부터 글썽글썽 눈물비 내리고 있다.
별자리 주소 좇아 안부 한 뭉치 싣고
은하 바다 총총한 별들 사이로 노 저어간
쪽배 돌아 나오고 나면
은하별 1-2번지 문패 달린 쪽문으로
더듬더듬 지팡이 짚고 나온 울아버지
팔 베고 하늘 끝 올려다보던 유년
나 쑥-쑥- 얼른 커서 어른 되면
생선 맛나게 구워낸 저녁 밥상에,
울아버지 올리겠다던
좀 쓸은 편지 읽다말고
나처럼 밤새워 울기도 할까.
싱싱한 5월 하늘에 꽃망울
축복처럼 터트렸던 장미
6월 가고 미루나무
잎사귀 무수히 돋아날 때쯤이면
내 여인처럼
뜨락 한 귀퉁이에서 붉은 꽃잎
눈물처럼 뚝 ― 뚝 ― 떨궈다가
떨어진 꽃잎 자박자박 밟으며
먼 길 가버린 빈 뜨락
장미나무 그늘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저 풀이 되어
어느 무덤가에 피어났었더라면
어느 들녘에 이름 없는 들꽃이었다면
바람 오가는 길목에 서 있다가
그렇게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시들고 말 것을
집안 여인들 시집 올 때 어김없이 혼수품 속에 딸려오던 요강
잠 덜 깬 누이동생 걸터앉아 닭 머리 찧으며 졸던 요강
출렁거리던 오줌 비우러 가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흠뻑 덮어쓰던 요강
성질 급한 아버지 비행접시처럼 날리던 요강 뚜껑
악쓰며 달려들던 어머니 머리 내려치던 요강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어머니를 향해 내던지던 요강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요강
애견 해피 집에서 나와 두 발로 이리저리 굴리고 다니며 관심 갖던 요강
잠결에 조준이 빗나간 오줌발이 양은 상단에 부딪혀 튀어 올라 곤히 잠든
형 얼굴에 물방울 알갱이로 흩어져 내리던 요강
아버지 말년 대낮에도 윗목 구석에 뚜껑 덮여 있던 요강
빗나간 오줌발 알아챌 염려되어 내 머릿속 기억을 없애기 위해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양은으로 만들어진 쭈그러진 요강
우리 집의 세세한 사연을 다 알고 있는 요강
천년 후에 열어볼 타임캡슐 물품에 선정된 요강
한가윗날 첫 울음 터트리며
우리 곁으로 온 보름아
고향집 간장 독 안에 찰랑거리며
떠 있던 저 달은 정화수 떠놓고
빌고 또 빌던 할머니의 달이었단다.
툇마루 창문가에서 모듬발로 바라본
내 유년의 저 달은
막내를 일곱 달만에 낳아
인큐베이트에 넣어두고
빌고 빌던 내 어머니의 달이었단다.
2014년 추석날 올려다 본 저 달은
첫 울음 터트리는 네 모습에 안도하던
이 애비의 달이었단다.
음력 팔월 보름날 축복처럼
달빛타고 우리 가정으로 내려온 보름아
디딤돌 위에 모둠발로 바라보던
내 유년의 달 위에
우리 함께 소원 한 돌 얹자꾸나.
해서
맑은 영혼으로 자라라.
세상 구석구석 비추며 환하게
웃음 짓는 저 달을 닮거라.
사랑하는 내 딸 보름아
네가 이 땅에 오던 날
소담하게 눈이 내렸다.
순백의 영혼으로 오는
너를 위한
눈이 축복처럼 내려 쌓이자
지상을 다스리는 신은
세상 풍경 모두를
태초로 되돌려
하늘 마을로 올려 보냈다.
긴- 겨울밤의 별들을
한 밤 한 밤 다 세고 나면
첫 새벽에 영그는 이슬처럼
티끌 없이 살아가리라.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세상 모퉁이 그늘진
외진 곳에는
작은 꽃들의 슬픔들이
가득 고여 있단다.
그 모퉁이 돌아 나올 적마다
싱싱한 하늘 맑은
햇살 같은 네가
그 눈물들 닦아주는
희망이 되어 주렴
난 천사의 모습으로 잠든
너를 내려다보며
세상의 꽃밭 한 켠
작은 꽃들을 위한 노래
훗날 작은 꽃들과 손잡고
함께 부를 그 노래
나지막이 불러본다.
계단 아래 엎드려 있던 먹물 같은 어둠이
인도 불록 사각사각 갉아먹는다.
사내가 서둘러 짝태 선술집 앞
외등 스위치 켜 올리면 초저녁 어스름이
구부러진 골목을 천천히 밀고 나온다.
풀무질한 화덕
명태 살과 뼈가 타는 내음
환풍구 빠져나와
이 골목 저 골목 흘러 다닌다.
식탐의 그림자들 하나 둘씩 모여 든다.
탁자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청춘시절 무용담에 핏대 세우기도 한다.
구석 한 켠 연인은 짝태 잘게 뜯어
입에 넣어주며
서로의 마음속으로 다가선다.
새벽 두 시
중년 남자와 마주앉은
중천에 걸린 늦은 어둠이
보폭을 좁힐 적마다
추억의 힘은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낯선 길을 더듬거렸다.
신문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바쁘게 아침을 던져 놓고 간다.
고단한 생이 끄는 파지 수거 수레에
짝태 그 술집도 실려 간다.
책장 한 귀퉁이에 꽂힌 사진첩 안에서
오래 눌려있던 아이들이 튀어나와
판자집 마을 미로 같은 골목에 와- 소리 내지르며 뛰어다녔다.
노상에서 젖 물리는 여인. 공동 수돗가에서 물동이 하나씩 들고 순서 기다리던 그 시대 사람들 역 앞 수레 앞에 진열되어 있는 짐꾼들 시장골목 좌판 소주 몇 병 두부 몇 모 올려놓고 닭 머리 찧으며 조을던 노파 낯선 동네 골목 헤매다가 시든 배추 잎 같은 지친 모습으로 올 엄마 기다리며 칭얼대는 막내 동생 업고 어스름 아래 서성대던 국민학교 고학년 누나
늘 세상 가장 낮은 곳들의 풍경이 그의 마음 열고 닫았다.
가난한 세상 위해 오장육부 다 내주고 껍데기만 남았다.
자꾸 활처럼 휘어지던 그의 등에서
인광燐光의 빛이 흘러 나왔다.
함께 변방의 강을 건넜을 카메라에 저장된
빛바랜 사진들이 궤적을 거슬러와
2월 빈 하늘을 빈자들의 아우성으로 메운다.
에필로그
2012년 겨울 최민식 선생님 자택을 방문하여 군부독제 정권의 탄압에도 뜻을 꺾지 않고 고난의 세월을 보낸 갯바위라고 제목을 부친 시를 써서 족자를 만들어 가서 선생님 앞에서 펼쳐들고 읽어드렸을 때 생애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사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만을 담았습니다. 독재정권의 탄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고 국내서 탄압을 받으며 출국금지 상황에서도 유럽에 알려져 유럽15개국에서 동시에 출국에서 출국 허가 권유를 해서 독제 정권이 결국 굴복해서 출국허가를 내주었다는 일화를 선생님께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마음속에 늘 존경을 품고 있는 선생님을 더 이상 뵐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부족하나마 선생님에 관한 그리움을 시에 담았다고 생각하니 다행스럽습니다.
선배는 그 날
무심코 창문 열고 먹물 같은
어둠 내다보았을 것이다.
동공 안 어둠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성지로 가는 모퉁이 길 어귀
저만치 서 있는 굽은 등
어머니 보았을 것이다.
서늘한 달빛 아래 피어난 백합꽃
눈에 밟히는 그늘 털어내지 못하고
장미 붉은 꽃잎 글썽글썽 떨구며
안쓰럽게 종손 맞는 어머니
선배도 시퍼런 감잎 같은 얼굴로
따라 울었을 것이다.
사소한 이유로 격하게
얼굴 붉히던 날 떠올리며
내가 승복할 걸 하는 아쉬움에
활짝 열어놓은 문밖에 빗방울 떨어지는
돼지국밥집에 앉아 주고받던
짧은 글 머릿속 지우개로
지웠다 쓰기를 거듭하던
어느 봄밤 그 날
에필로그
며칠 전에 함께 돼지국밥집에서 삶을 논했던 집안 종손 형님이 잠자던 중 급사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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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어느 하늘 지붕 아래 외딴 섬 외진 곳에
튤립 마을이 있다고 하네.
먼 숲에서 두셋 바람이 운반 해온 풍
청보리빛 풍경 하나
수평선 너머 외딴 섬 외진 마을에는
세상사 곡절도 많아 늘 저문 달만 떠 있다고
서늘한 그늘 아래 홀로 피어 있는
백합꽃이 순례객들의 기록 들춰보며 말하네.
지팡이 점자 짚듯 더듬거리며
성지 가는 길목 객잔에서
초저녁 어둠과 마주앉아 생각하느니
햇빛마저 문지방 넘다가 발길 되돌리던
긴-어둠의 방에 갇혀있던 시간들이여
눈물바다 저 바다여
눈물바다 저 바다여
그 결들을 잘게 썰어
한 뼘 한 뼘 메꾸어나가
튤립*의 소망이 머릿돌에
완치라고 새겨질 그날이 오면
아 아 정녕 우리에게로
그날이 오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의 애칭
문득 책갈피에 꽂아 둔 마른 꽃잎 같은
생각이 바람 일 적마다 구겨진 그대 일상들
반듯하게 펴봅니다.
외로움이 생성한 낯선 변방 떠돌며
아파하는 마음의 상흔 다 꿰매주는
스스로 격을 낮춰도 그럴수록
부피를 쌓아 감동의 여운 되어
내 마음의 바다에 물비늘로 흐릅니다.
그럴 때마다 그건 베품이 아니라고
수줍게 웃는 모습은
순수하고 온순한 그 마음을
엿보는 듯합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 큰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침을 켜들고 온 햇살이
현관문 열고 와락 쏟아 부은 햇빛이
무릎까지 차올라
퍼낼수록 더욱 출렁대는 빛
티끌 없는 맑은 하늘 지붕 아래
언제나 주기만 해서 더욱 빛나는 사랑
그대인 줄 그 누가 알았으리.
쉼 없이 달려드는 모진 세파 앞에서
시린 발 젖은 채로
갯바위로 서 있는 그대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몇 두릅 쌓인 어둠 털어내고
생의 기록 호주머니에 반듯하게
접어 넣고 흙먼지 날리는 광야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밟을수록 퍼져 살아나는 질갱이같은
조선 여인들의 강인함을 대물림한 그대
불의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가장 낮은 곳 향해 조리개를 열어
꽃이 되지 못한 튤립 망울들
상흔들 싸매 주다가
참았던 설움 북받쳐
끝내 울음 터트리던
그날이 우리들 마음속에
추억처럼 걸려 있습니다.
수평선 먼 바다 바라보며 호령하는
여장부 그대 김금윤
푸른 혈죽 따라
깡아리 있는 조선 어머니의
매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별 밭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바라봅니다.
꼬마별들이 촘촘히 박힌 별배가
별들 사이로 노 저어 나와
지상을 위해 들려주는 천상의 선율
바람이 잠시 끊었다가 다시 들려줍니다.
하늘 마을 빙설 보관 창고가 무너졌나.
오리털보다 더 가벼운 수만의 은색 가루가
덩어리로 뭉쳐져 지상으로 마구 낙하한다.
막힌 길들은 관절이 서로 얽혀 아우성친다.
할 말이 많아진 전화기들은
하늘 마을 안부 수시로 주고받으며
귀가를 서두른다.
하염없이 내리던 눈
어둠 위에 자꾸 쌓였다
축 늘어져 신음하던
땅은 스스로 만든 세상 길들을
다 지워버렸다.
지팡이 더듬거리며
길 찾아 헤매다가 깨어보니
창문 너머 세상이 눈부시다.
무심코 방문 열자
첫 눈은 맞아야 멋이라며
살포시 웃던 스무 살 적 그리움이
와락 쏟아져 들어온다.
사랑 없는 세상에
그 사랑 채워주기 위해
천사 날개 달고 내려 왔나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을
샘물 같은 사랑 주시네요.
황량한 광야에서 돌멩이로
굴러다니던
한 세상 비켜서 있던 영혼들
깊게 패인 상흔 약손으로 어루만져
꼭 꼭 여민 마음들 빗장 열게 했네요.
꿈속에서조차 옹송거리는
추운 영혼들 불러 모아
달구고 덮여서 곤궁을 위한
간구를 하늘에 차곡 쌓았나요.
천상에서 품고 온
세상을 위해 은밀하게
적어놓은 일정표
소문이 엿보았나 봅니다.
숨겨둔 왼손이 행할 그 사랑
발 없는 소문 허리춤에 꽂고
남도 땅끝마을까지 파발로 달려가
방파제에 부딛쳐 부서집니다.
부서진 수만의 알갱이들이
무수한 소문의 날개를 달고
얼어붙은 투영한 겨울 하늘 자욱 날아갑니다.
그대
영원으로 가자던 첫 마음
자꾸 흔들어대는 바람 오가는
황량한 빈 들판에
허수아비의 허허로움으로 서 있습니다.
선남선녀 머무는 하늘 아래
무릉도원이 하나 더 있었네.
무심한 세월은 우리네
청춘을 싣고 흘러갔지만
맑은 영혼들이 노니는
풍경 속 들여다보면
계수나무 아래 떡메 치고
농주 빚어 마시며 태평세월
노래하는 낙원일세.
추억을 공유하는 음악 동산
청보리빛 청보리빛
푸르런 들판의 노래 부르며
타오르던 젊은 날의 열망들
가슴에 품고
행복한 우리 깃발 펄럭이며
중년의 텅-빈 마음 한복판으로
운반된 공허함을 위무해 주는
새들의 화음에 맞춰 풍경
하나씩 손에 쥐고 흔들며
우리 사랑 영원히 머무는
헤어짐의 아픔이 없다는
만월이 환하게 비추는
행복 마을 동산에서
영원의 노래 어께 걸고
원을 지어 돌며
아침이 햇살등 켜들고
올 때까지 불러 보세나.
도시를 휘감고 도는 안개 속에
새벽어둠과 길들이 마구 엉켜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햇살이
아침을 켜들고 와서
혼돈의 꿈을 깨웠다.
툇마루 창문 너머 모듬발로
바라본 내 유년의 텃밭
웃자라난 강아지풀들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꽃망울 맺던
채송화 한 송이
신기하게 바라보던 내 마음은
이렇게나 자라 버렸다.
낯선 길에 서 있던 나 꽃처럼 져버릴까.
다가올 시간 염려하였다.
그 능선 너머 가보지 않은
일상들에 관해서
비관론과 낙관론을 저울질하며
팽팽히 맞서보았다.
안개가 다시 내 몸을 품는다.
날씨가 차다.
커튼을 걷고 창문 열자.
시베리아 바람
와락 쏟아져 들어온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르륵사르륵
쌀알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와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첫 눈이구나.
바람도 발목 삔 걸음으로
더디 걷던 눈길
버스 끊긴 길 걸어와
하얀 눈발 축복처럼 맞으며
손 흔들며 저만치 서 있던 너
첫사랑은 헤어져야 멋이라며
살포시 웃던 그가
외등 불빛 자박자박 밟으며
올 듯해서
공원 벤치에 색종이처럼
접혀 있다가
한 마디 변명도 못한 채
헤어진 그 날
시간의 패를 돌려보며
아무도 오지 않는 공원 가로등 아래서
죄 없는 허공을 긁어대고 있었다.
안부 한 뭉치 들고 휘어진 허리길
모퉁이 돌아 남해 가천 다랑이 마을 가는 길
절벽 아래 파도가 하얀 손 흔들며
이방인 반기고 있다.
층층계단 조막논 지나 언덕 위
바위 틈새로 쪽빛바다 펼쳐져 있다.
바람의 씨앗으로 태어난 흑송 몇
절벽 한가운데서 뒤틀린 생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다.
햇살 한 보자기 비추는 마루에서 잠시 든 풋잠
바다가 밀고 온 실연에 관한 기억
잠시 당겼다가 놓아버리자 이내
소금바람이 먼 바다로 싣고 갔다.
해넘이 무렵
바닷새 한 마리 바닷물에 부리 헹구고
어스름 둥지로 날아갈 즈음
두 늙은이 하나씩 지고 온 다랑이 밭
내려놓고 주섬주섬 내놓는 삶은 옥수수
혈관 굵게 돋은 주름진 손이 선하다.
남녘바다 건너온 마파람
풍경 살짝 쳐서 정적 깨뜨리고
담장 밑 햇볕 한 보자기
덮어 씌었다.
담장 밑 텃밭 살찐 흙에서
새순 돋아났다.
속계 인연 매듭 풀어내고
지난해 열반에 들어 적멸보궁으로 가신
큰 스님 영정과 마주앉아
덧없는 생을 화두로 주고받으며
무념무상에 관해 생각하다가
백팔계단 내려올 제
동자승 수행의 문 열고 나와
전날 쌓인 세속의 티끌 비질한다.
2백 수지 될 때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패배가 예감될 때는 주酒님을 원망하며
바닥에 흩어지는 초크 가루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후루꾸 점수로 승리할 때는
내 기도가 하늘까지
닿았음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공짜 술을 위해
시내 술집 곳곳에
강림하실 우리 주酒님께
사나이 타는 이 한 목숨 오롯이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적구 과녁 한복판에 꽂아 넣는다.
패자는 슬픈 마음 감추고 계산대로 향한다.
승자도 흐뭇한 마음 감추고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조아린다.
우금치 고개 넘지 못한 양민 천민들
꽃잎처럼 흩어져 내리는구나.
붉은 피 강물처럼 흘러내리던 날
열두 달 농민해방 세상 헛된 꿈이 되었으니
그대들 마지막 당부 들어주지 못한 채
꿈이란 것마저도 함께 오랏줄 묶여
갈바람 일렁이는 들판 지나
녹두장군 가신 길 좇아가는구나.
타는 이 한 목숨 기꺼이 농민 해방 제단에
오롯이 바치겠다는 끓는 피들
풍운의 꿈 품었으나
하늘이 허락치 않음을 어떡하리.
북망산천 재촉하는 북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구나.
나 일찍이 녹두장군을 만나
새 세상을 꿈꾸었으나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장대 끝에 높이 내걸렸구나.
무명옷 찢으며 흐느끼는
동지들이여
닭똥 같은 굵은 눈물 뚝 뚝 떨구는
아내 봉선이, 아들 현민이 딸 소영아
욕되고 부끄러워도 살아라.
끝끝내 살아남아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그 날이 다시 오면
이승 저승 함께 모여
어깨 걸고 발 굴리며
농민해방 목이 쉬도록
불러 보자구나.
*동학항쟁 때 상주 지역 농민 장군
** 동학의 이념
정원의 후박나무가 두 팔을 길게 뻗어
바람의 잎사귀를 흔들어 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먹구름이 대낮 하늘 가득했다.
시침은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를
느리게 걷고 있었다.
운명처럼 여겨지던 만남도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정열마저도 저물어갔다.
빈 방에 엎드려
모나미 볼펜 꾹꾹 눌러
공백의 안부를 써내려 갔다.
먼저 성지로 간 생生들만
추억해 주는 논객들의
무심함에 관해서도
또박 또박 여백을 채웠다.
힘겹게 구름 떠받치던 하늘이
힘을 빼버리자
장대비가 마구 쏟아졌다.
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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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길 위의 노래, 운명에 맞서는 언어
신기훈(시인)
기억의 호출과 서정의 힘
우리의 삶에서 기억은 과거경험의 심상, 관념, 감정 등을 보존하고 있는 저장고이다. 그리고 기억은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뿐 아니라 행동에까지 관여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를 만들고 결정지은 것이 과거의 시간이라면, 기억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나에게 선택되어진 어떤 심상이다. 그런데 기억은 기억의 저장소에 있는 어떤 구성 요소가 호출되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의 실제 경험은 여러 가지 광경, 소리, 감정, 신체적 긴장, 기대 등 복합적인 것인 데 반하여 기억은 선택된 여러 인상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자들은 흔히 기억을 상상력과 상충되는 무엇으로 간주해 온 점이 있다. 특히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은 존재하는 무엇을 그대로 재확인하는 것이라는 선입관으로 인해 상상력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히 상상력의 재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체험을 재현시킴으로써 현재의 체험을 살찌게 하고 사물에 대한 의미부여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이른바 ‘재현론’의 주장이다. 재현론에 따르면 ‘기억’은 과거체험이 담긴 저장고이며 이 저장고 속에 있는 과거 체험의 내용들은 심상 또는 감각적 인상으로 존재한다. 기억은 단순히 이 심상을 단지 상상되거나 가정된 것이 아니라 믿어진 것으로 재현한다.
과거로부터 생생한 심상을 이끌어 내어 창조하는 시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예민한 기억의 소유자이며 활용자이다. 김성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서 기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가 기억의 힘을 문학적 상상력과 잘 결합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보자.
폐타이어 몇 개가 지붕에 올라
바람 꼭 꼭 여미었지만
누덕누덕 기워 덮은 헤진 꿈들이
바람 불 적마다 들썩거렸다.
장마 지면
헌 기와 틈새로 스며든
흙물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받아내던 노오란 냄비 안에서
튀어오른 가난의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찐득거리는 눅눅함이 곰팡이꽃 피워냈다.
아내 손때 묻은 옹색한 세간들
한 짐으로 묶어 나올 때
우리 가족의 꿈도 서둘러 빠져 나갔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던 아내 앓던 방
구부러진 끝 골목 막힌 집
음습한 벽에 걸려 슬프게 웃고 있는
사진첩 속 가족들
-「가족사진」 전문.
집은 생활을 영위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그 어떤 곳보다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공간이다. 아내를 잃고 집을 떠나던 날의 기억을 담담하게 되살려 내고 있는 이 작품은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삶의 아픈 생채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장마철이면 지붕에서 떨어진 ‘흙물’이 ‘노오란 냄비’안에서 튀어오를 정도로 허술했던 집이지만, 시인에게 그곳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였기에 소중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집은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의 극한에 위치한 곳, ‘구부러진 끝 골목 막힌’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제 기억속의 집으로 남을 이 거처는 ‘찐득거리는 눅눅함’이 ‘곰팡이꽃’을 피우는 곳이지만, ‘음습한 벽에 걸려 슬프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으로 인해 그 비장함을 더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시인의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은 첫 시집의 풍경과 다르지 않게 쓸쓸하고 허허롭다.
이는 시인의 개인사와 깊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1992년 심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17년간 본격적인 글쓰기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2010년 2월 방광암으로 아내와 사별하자 작품 활동에 매진해 2012년 첫 시집 『파란 스웨터』를 출간한 바 있다. 『파란 스웨터』의 여러 시편들 또한 엄마의 죽음, 보육원 체험, 누나와의 이별, 새엄마 밑에서의 신산한 삶, 아내와의 사별 등 우울하고 비장미가 가득한 작품들이 많았다. 시인의 이와 같은 비극적인 삶은 2009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더욱 더 어두운 터널을 만들고 만다.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서 불행은 이처럼 가혹하리만치 겹치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은 급기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할 만큼 자신에게 닥친 이 불운에 대해 스스로 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열찬 창작의 의지를 다진다.
김성찬 시인은 불운한 운명에 대해 절망하기 전에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시간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의 시가 많은 부분 과거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은 기억이 시간과 공간에서 연속성을 가지며, 그리하여 철저히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자신을 되살려내는 것은 그 기억의 현재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걱거리는 길, 길 위의 시간
김성찬 시인이 돌아보는 지난 삶에서의 기억은 대부분 길 위에 있다. 그 길은 ‘먹물처럼 어둡고 긴 통로(「아카시아 나무 그늘 아래서」)가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길 위의 삶은 상대적으로 정착 혹은 안주의 열망과 이어져 있는데, 시인의 열망과는 반대로 그는 늘 다시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보육원에 보내지고,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피할 수 없는 병마와 마주하는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길 위에서의 삶을 김성찬 시인은 스스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돌멩이 같은 삶’, 장대비 한복판 속의 삶(「한여름날의 꿈」)으로 회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삶은 시련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해 간 시간이기도 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다시 호출된 존재들은 과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대부분 사라지는 것, 퇴락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시인은 그 존재들을 껴안고 어루만진다.
낮달이 수제비로 떠 있던 푸른 이끼 낀 우물이 있었다.
낡은 정지문
군데군데 깊게 패인 주름 깊은 세월을 예감했다.
어둠이 웅크리고 있던
동굴 같던 아버지 앓던 방이 있었다.
공책 손에 쥐고 순서 기다리던
송판 두 개 걸친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쌀 반 되 연탄 두 장
하루치 생을 새끼줄에 매달고
형이 올 언덕 아래로 자주 눈길이 갔다.
그해 봄부터 사춘기병을 심하게 앓았다.
중장비들이 대오를 갖추고
신천1동 언덕배기 마을로 진군했다.
캐러필트 발 아래 쓰러진 아카시아는
하이얀 꽃잎 수 없이 날려 보냈다.
구겨진 판잣집 지붕들
덤퍼트럭 짐칸에 포박되어 폐기물 집합소로 실려 갔다.
철거 분진이 낮게 떠 다녀 낮에도 마을은 어두웠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이 작은 동산을 허물어 버렸다.
바위틈 산까치 둥지가 후폭풍에 먼 하늘로 날아갔다.
포클레인이 긴 팔을 뻗어 지붕을 타격하자
전기가 나가고 먹물 같은 어둠이 들어왔다.
우리 가족의 꿈도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버지, 홧김에 마시던 막걸리 사발 안에
종이장처럼 구겨진 판잣집이 둥 둥 떠 있었다.
뻥- 뚫린 지붕으로 별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누이와 나는 슬픔이라는 이불을 덮고
뻥-뚫린 밤하늘 별들을 세어보다가
밤이슬 방울 맺히던 방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는 마흔 일곱 생을 급하게 마감하고
하늘로 불려갔다.
줄장미 몇
최후로 남아 악쓰며 기어오르던 무너진 담장을 넘어
빛바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부서진 골목 혼자서 걸어 나왔다.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밀어낸 아버지 생과
내 사춘기와 언덕배기 그 집이
기억의 창고 한 켠에 추억처럼 걸려 있다.
-「언덕배기 그 집에 관한 단상」전문.
시인이 살았던 ‘언덕배기 그 집’은 시인이 잠시 머물렀던 다른 거처들처럼 가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판잣집이다. 신천1동 언덕배기 마을에 있었던 그 집은 시인이 사춘기를 보낸 곳이고, 누이와 함께 ‘별’들을 세어보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개발논리에 밀려 결국 철거되고 만다. 그 집에는 병마와 싸우던 아버지가 앓던 방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가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오던 형을 기다리던 기다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은 ‘불도저와 포클레인’에 의해 허물어지고 만다. 더 깨끗하고 화려한 도시의 집들이 만들어지는 동안 판잣집 속 ‘가족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무너진 집처럼 가장인 아버지는 ‘마흔 일곱 생’을 그렇게 마감하게 된다.
이처럼 과거의 공간에 대해 쓸쓸한 기억을 지속적으로 길어 올리는 것은 분절된 문명사회에 대한 반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포클레인’이 한 가족의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킨 것처럼 현대의 문명은 끊임없이 대상을 분절하고 구획한다. 이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통일, 자아와 세계의 공감적 융합은 불가능해 보인다. 문명과 문화는 삶의 풍족함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의 분열을 가속시키고 존재와 존재를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다. 김성찬 시인이 과거의 시간으로 자주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러한 문명이 빼앗아 간 관계 회복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다른 공간에 대해서도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자주 발견된다. ‘처마에 걸린 시래기 부스스 제 몸을 털어내던 집/담벼락에 기댄 세월의 시침이 멈추어 서 있는 집(「단촌리 외갓집」)’을 통해 외갓집에 머물렀던 시간을 추억하거나, ‘썩은 다리 부러져 주저앉은 평상 위/주인 잃은 장화 한 짝 비에 젖고 있다’(「아버지의 지게」)는 안타까운 응시는 퇴락해 가는 공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그 공간 속에는 외갓집이나 친가의 가족이 공유했던 따뜻한 시간들이 함께 녹아 있었으나, 더 이상 개발논리 속에서 그런 가치들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아팠지만 추억이 함께 했던 그 공간들을 찾아가 시인은 오랫동안 서성인다.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여러 공간들은 길 위의 생을 건너오면서 시인의 ‘마음 한 복판에 판화로 새겨(「수성못1」)’진 공간들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공유했던 존재들이 자신의 곁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시인은 소멸해 버린 것들에 대해 처연한 시선을 보내고, 언제가 소멸하게 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쓸쓸하게 반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여러 공간 중에 ‘수성못’도 존재한다. 수성못은 어떤 곳인가. 수성못은 일반적으로 유원지이지만 시인의 가슴 속 수성못은 ‘문청시절 노동운동하다가 회사 짤린 후 매일같이/방죽 풀섶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에 낙서하던 못’이며, ‘방광암으로 흙이 된 그가 생각날 적마다 방죽에 올라 쪼그리고 앉아 울던 못((「수성못1」)’이다. 이처럼 시인에게서 쓸쓸하게 퇴락하거나 남아 있는 공간조차 그 시간을 공유했던 존재의 떠남을 재확인시켜 주는 기능만 할 뿐이다. 유년의 시간을 간직한 채 퇴락하는 초등학교(「연평국민학교」)에서나, 떠돌던 날들의 추억을 간직한 기차역(「79단촌역」)과 같은 공간뿐 아니라,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져 생활사 박물관에나 가야 할 물건인 요강(「요강에 관한 추억」)이나 지게(「아버지의 지게」)와 같은 사물로도 이러한 인식은 확장된다.
돌아보면 따뜻한 순간보다 안주할 수 없어 허허롭게 떠돌던 ‘돌멩이 같은 삶’에서 시인이 꼭 건져 올리고 싶어 안간힘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의 시간 속에 녹아 있는 ‘꿈’과 ‘따뜻함’이다.
먹물처럼 어둡고 긴 통로 지나 터널 끝
긴 머리 갈래 묶은 소녀가 서 있다.
구겨진 그 기억 너머 엉킨 길들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반듯하게 펴 본다.
허방을 더듬더듬 짚으며 유장한 세월을 거슬러 간 그 곳
지나가는 바람 세워놓고 제 몸 흔들어대던
맨드라미 채송화 개복숭아꽃 앞다투며 오복오복 피어난 삽짝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빗방울마저도 그리워하던 그 집
주름진 추레한 모습으로 와서
열린 창문으로 빼꼼 고개 디밀고 들여다본 옛 방
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설레는 순정을 채 깨트리던
새침했던 소녀 밤마다 스스로 자아낸
고독을 얼마나 즐겼던가
어스름 올 때까지 신작로 담배 가게
우체통 앞을 서성이던 센치했던 그 소녀
아카시아 나무 아래 흑백사진 안에서
하이-얀 꽃잎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어느 타관 낯선 길모퉁이에서
꽃처럼 져버리지 않을까 눈물 글썽이며
흘러가는 빛바랜 중년, 혹은
비포장길 한가운데 듬성듬성 묶어놓고 온
청춘에 관한 그리움 몇 낱
-「아카시아 나무 그늘 아래서」전문.
이 시에서처럼 시인이 걸어온 어떤 길 위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고 그 그늘 아래 서 있던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길 위를 방황하다가 ‘빛바랜 중년’이 되어 들여다보는 그 소녀의 옛 방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시인은 ‘유장한 세월’의 통로를 거슬러 그 소녀가 키워갔을 과거의 설렘과 꿈을 되짚어 간다. ‘맨드라미 채송화 개복숭아꽃’들 피어나던 과거의 시간 속에서 소녀는 혼자서의 고독을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우체통 앞을 서성이’며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편지를 들고 서성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떠난 소녀는 ‘타관 낮선 길모퉁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이미 영원한 이별의 공간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인은 눈물을 글썽인다. 이와 같은 길 위의 공간들을 다시 되짚어 가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청춘에 관한 그리움’을 다시 읽어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이 시에서 되살려 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는 ‘헤어진 사랑에게 돌아오지 않을/ 편지를 적던/ 따뜻한 사람의 사랑이/그리웠던 시절’의 시인의 모습(「그 때 그 골목」)과 다르지 않다.
길 위에서 떠돌던 삶은 허허롭고 힘겨웠지만, 상대적으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리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도 했다. 시인이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는 많은 인물들은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만큼 더 순수한 희망과 그리움을 간절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이었다. 누구보다 김성찬 시인 스스로가 그런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시인은 ‘따뜻함’을 재발견하고 싶은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김성찬 시인에게서 여러 시편들은 길 위의 생에서 간직했던 기억의 공간과 체험을 다루고 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기억 속 사건들은 현재의 삶과 하나의 인과적 체계성을 지닌다.
온몸의 노래, 기억의 현재화
기억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연속성을 가지며, 그리하여 철저하게 연결되는 사건의 구조를 정립한 것으로 과거를 재인식한다. 김성찬 시인이 과거의 기억에 경도된 여러 시들을 쓰면서도 그 시들이 복고적 회상취미에 빠지지 않는 것은 시 속에서 ‘상상력’을 잘 활용해 인과성의 법칙을 초월해 자유롭게 심상을 결합, 변형시켜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리자면 과거와 현재의 ‘동적 상호 침투성’으로 부를 수 있다.
기억 속에서 지켜지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 꿈과 같은 가치들은 ‘동적 상호 침투성’으로 인해 현재의 삶에서 더 절박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김성찬 시인은 현재의 삶에서 과거에 지켜져야 할 가치들을 훼손하고 있는 억압의 주체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고 그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때 그가 즐겨 쓰는 방법은 억압의 주체에 대해 풍자하고, 그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청마대 별관에서 녹부용 혜근은 측근들과 추억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를 관람했다. 수하들에게 주인공 이름을 물었다. 모두 머뭇거리자 뒤돌아보며 카크다글라스라고 했다. 이에 수하들은 기립 박수로 지존에게 존경을 드렸다. 무식은 극치를 싣고 계속 달렸다. 녹부용 혜근의 치마폭 안에서 복지부동하던 모 기획관이 민초들은 개, 돼지처럼 먹을 것만 제때에 주면 된다는 망발망언과 녹부용 혜근이 애지중지 끼고 돌던 철면피 순실이 거부를 겁박하여 금화 수백억 냥을 갈취했음을 모 무협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했다. 수하들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자 녹부용 혜근은 하안거를 앞당겨 남방국으로 재빨리 날랐다. 추종 세력들은 마침내 관심법 경지까지 도달한 지존 녹부용 혜근에게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옴마야 반메홍! 옴마야 반메홍!
강자존 약자멸
-「신 황야의 무법자」부분
말할 것도 없이 최순실과 탄핵된 박근혜 전대통령을 비롯한 권력 중심부의 치부를 풍자하고 있는 이 작품은 권력자들의 국정농단을 비틀어 공격하는 작품이다. 권력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지와 맹목적 충성심을 꼬집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92년 KBS라디오의 ‘심상 공동 공모전 시부문’ 당선 때 시인은 ‘무림에 출사하여 악의 무리를 척결하고 무림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리라(「詩의 문을 열면서」, 『파란 스웨터』)’는 것으로 ‘당선소감’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찬 포부와 달리 세상은 여전히 ‘정글의 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추어탕의 이름으로」’가고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다. 기억 속에 가치 있는 것들을 빠르게 허문 것은 문명을 바탕으로 한 개발논리와 약자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의 이기심이다. 시인이 뚜렷하게 적대감을 가지고 저항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세력이다. 권력자들의 탐욕은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허공을 한 발 한 발 짚으며 하루하루를 곡예하듯(「어느 청년」)’ 살아가는 삶을 방치한다. 이들의 삶은 권력자들의 시선에는 ‘개, 돼지’나 마찬가지다. 김성찬 시인의 시에서 주변부에 있는 이웃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시들이 많은데 그 출발점은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웃들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시선은 더 처연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리어커를 밀고 깊은 밤의 집으로 불려가는 사내’(「자갈치 어시장」), ‘은장도로 자신의 심장을 깊숙이 찔러 시대의 아픔을 안고 홀연히 떠난’ 「봉숭이」, 실향의 아픔을 나누고 있는 속초의 어민들 (「타관」)에 대해 시인은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한편 김성찬 시인이 삶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인물들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가난하고 낮은 곳에 있는 인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늘 세상 가장 낮은 곳들의 풍경이 그의 마음 열고 닫았(「휴머니스트」)’던 최민식 사진작가를 찾아가고 그에게 헌시를 읽는 김성찬 시인의 열정은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뿐만 아니라 조환길 타대오대주교, 광주 파킨슨 행복 쉼터 장삼숙 이사장, 대한파킨슨협회장 김금윤 후리지아님, 박경선 선생님과 같은 인물들은 시인이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경험하고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는 분들이다.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종손 형님 등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시인에게서 유한한 삶을 더 뜨겁게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실천했던 이들이 추구했던 가치를 자신이 실천하며 온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육체적 힘겨움에 맞서면서 시인이 온몸으로 시를 통해 사랑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김성찬 시인의 시에서는 생의 절박함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림 속 밀밭 향이 아침 햇살에 실려
금 간 창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올 때쯤이면
서툴게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노오란 집
지었다가 허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서늘한 저 바람과 내가
닯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쪽 귀 없는 정물에게 묻는다.
헝클어진 삶을 풀어내는 방법에 관하여
먼지 몇 두릅 쌓인 채
저물어가는 일생이 남긴 여운들을
완벽하게 지우고 있는 중이다.
텅 빈 마음 들여다보는 안타까운
눈빛 누가 다독거려줄거나.
여백 박차고 날아오른 새 한 마리
잘 익은 밀 이삭 하나 물고
날개 발갛게 적신 채, 해 넘어간
어스름 남천南天 하늘 노 저어가고 있다.
-「노란 집」전문
고흐의 그림 ‘노란 집’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절망 속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만년의 고흐와 시인을 동일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흐의 ‘노란 집’은 예술가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을 꿈꾸며 프랑스 아를에 온 고흐가 라마르틴 광장에 집을 빌려 살면서 그린 작품이다. 낮인지 밤인지 판단할 수 없는 하늘의 짙은 청색이 화면의 반을 점하고 있는 황색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태양빛 아래의 노란집과 청색의 산뜻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김성찬 시인은 왜 이 작품에 깊은 영감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압셀론 성분 때문에 중독증세를 느껴 정신 불안증과 광란한 행동을 보이면서도 불후의 명작을 남겼던 고흐의 만년이 시인의 마음에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시인이 마음속에 ‘하루에도 몇 번씩’ 지어보는 ‘노오란 집’은 공동체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이 스며있는 공간이다. 시인은 마음 속 노란집을 지어 놓고 ‘텅 빈 마음’으로 ‘헝클어진 삶을 풀어내는 방법’에 대해 고흐에게 묻는다.
그것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기억 속에 의미 있게 추구했던 가치들을 오늘에 현재화해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온몸으로 그 일을 한다는 것은 가열 찬 시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투사의 모습으로, 때로는 섬세한 상상력을 기억 속에 버무려 내는 감성주의자의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글쓰기는 이 질문들에서 출발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나약한 존재에게서 아주 미약한 의미라도 절박하게 건지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이 아닐까? 김성찬 시인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금 그 길에 서 있다.
이번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은 『운명은 나를 재촉하고 시련은 나를 움직인다』이다. 그러나 시집의 4부에서 시인은 ‘시련’의 자리에 ‘희망’이란 단어를 환치시켜 두었다. 지난 기억 속의 사람과 시공간을 쓸쓸하게 되짚어 온 시인은 앞으로 시련을 겪은 자가 어떻게 ‘강철같은 불패의 전사(「형」)’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시를 통해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가 되살려 내는 기억은 현재의 삶이 갖지 못한 통일성을 발생시킨다. 즉 그의 기억에 의해서 체험이 치밀하고 완결된 형태를 띠게 되는데, 그것을 기억의 조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억의 조직성은 현재화되면서 우리가 더 가치 있게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도 시인은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김성찬 시인이 ‘어스름 남천 하늘 노 저어가는(「노란 집」)’ 새처럼 시의 ‘이삭’을 물고 주어진 삶을 온몸으로 살아갈 것을 믿는다.
사람시집 운명은 나를 재촉하고 시련은 나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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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 2019년 8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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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 2019년 8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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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김성찬 | ||
펴낸이 | 정대호 | ||
펴낸곳 | 도서출판사람 | ||
등록일 | 1994년 1월 7일 | ||
등록번호 | 바-01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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