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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수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머춤했다. 낯이 익은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 어디서 봤을까? 미간을 좁히고 한동안 기억의 파일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지만 여자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찾아 낼 수 없었다. 여자가 승강기를 올라와 두리번거리며 좌석을 찾아 앉을 때까지, 버스가 터미널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도, 나는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머리가 아파왔다. 무엇인가 한 가지를 집요하게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는 편두통이다. 아, 모르겠다. 좌석을 뒤로 젖히고 벌렁 누우려던 바로 그때 머릿속으로 시 한 구절이 스쳐갔다.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져 일어나며 소리쳤다.
“자, 그러면 가자꾸나, 그대와 나는…….”
‘J. 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였다.
“수술대 위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놀이 하늘에 퍼뜨려지거든. 가자꾸나, 인적 드문 거리…….”
나의 입에서는 마술사의 주문인 양 막힘없이 그 詩句가 흘러나왔다. 세 좌석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틀어 나를 돌아다보았다. 어떤 놈이 헛소리하는 거야? 하는 듯이. 나는 곧추세웠던 몸을 다시 뉘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려고 했는데 뜬금없이 엘리어트의 시가 떠오르다니…….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영문과 강의실 밖에 피어있던 하얀 목련꽃을 생각했다. T.S.엘리어트를 강의하던 K교수의 얼굴을……. ‘그대와 나는’ 이라는 詩句에서 ‘그대’는 ‘외적인 자아’를, ‘나’는 ‘내적인 자아’를 의미한다고 강조하던 그의 목소리를……. 프루프록이라는 이름의 무미건조함과 찬란한 봄날과의 대조를……. 늙어가는 한 사나이와 피 끓는 우리들의 청춘을……. ‘그나저나 나는 늙어간다……. 늙어간다. 바지를 걷어 올려서 입어야 겠도다’라는 부분을 번역할 때 그 얼마나 절묘한 우연의 일치였던가? ‘바지를 걷어입는다는 것은 페니스를 발기시키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하던 K교수의 바지 지퍼가 내려가 있음을 발견하고 키득거렸던 일들을……. 그런데 나는 왜 여자를 본 순간 이 시가 떠올랐을까? 영문과, K교수, 목련꽃을 여자와 연관시켜 보았지만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아, 또 머리가 아파 온다. 그때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건너편 창가 좌석에 앉으며 나처럼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화장기 없는 여자의 얼굴은 나보다 서너 살 위로 보였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속버스의 뒷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으나 사람들은 앞자리에 몰려 앉아 끼리끼리 떠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가을 풍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웨딩마치에 발맞춰 입장할 때 양 옆에서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하객들처럼 창밖을 스쳐갔다. 턱시도와 나비넥타이. 연분홍 양란(洋蘭)이 수줍게 웃고 있던 재영의 왼쪽 가슴. 긴 레드 카핏 위를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가던 그. 박수치는 하객들 속에서 그를 지켜봐야 했던 내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저 가을 풍경과 무엇이 다를까.
지우려고 했다. 블록을 씌우고 Delete를 눌러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삭제하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나의 손은 Ctrl+Z를 눌러 되살리기를 하고 있었다. 부분삭제는 불가능해 보였다. 무엇이건 그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웠을 때 내 인생도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D 드라이브, 내문서 폴더를 차례로 클릭해 들어가 h24부터 h30까지 7개의 파일을 통째로 휴지통에 넣는 수밖에. 서른 개의 한글파일들은 수많은 품사와 부호들, 그리고 갖가지 색채와 명암으로 그려진 내 삶의 궤적들이다. h는 내 이름의 이니셜이고, 숫자는 내 나이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그 파일을 휴지통에 넣었다가 다시 바탕화면으로 드래그 해오기를 반복하며 재영을 내 인생에서 덜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의 기억은 삭제를 시도할수록 악성코드처럼 나를 얽어맸다. 나는 휴지통비우기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며칠간의 여행을 감행키로 했다.
차창 밖 풍경과 여자의 잠든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죽암 휴게소에서 잠시 버스가 멈췄을 때 눈을 떴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버스로 돌아왔다. 여자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수 없이 고속버스를 탔지만 내 옆 좌석에 누가 앉든 별 관심이 없었다. MP3의 볼륨을 높이고 책을 읽다가 눈이 아프면 창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왜 여자를 찾고 있는 걸까? 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여자가 올라왔다. 내 옆자리로 다가온 여자가 캔 맥주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도 캔 커피 하나를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가 소리 내어 활짝 웃었다.
“우리 서로 마음이 통했군요?”
여자의 목소리는 높은 콧소리였고, 뜻밖에도 애교가 넘쳤다. 여자는 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어서 마시라는 듯이 내게 손짓을 했다. 여자의 손이 희었다. 나는 왼손 팔목과 가슴 사이에 캔을 끼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캔 뚜껑 고리에 걸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가 캔을 가져가더니 뚜껑을 열어 다시 내게 건넸다.
“그 손은 어쩌다가 다쳤어요?”
여자가 흰 장갑을 끼고 있는 내 왼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공연히 여자의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져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다친 게 아니라 잘랐어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물어왔다.
“군대 안 가려고 그랬군요?”
여자의 엉뚱한 되물음에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손 때문에 못간 건 아니구요, 사실은 제가 평발이었거든요.”
여자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여자의 스스럼없는 행동이 싫진 않았지만,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맥주가 바지 위로 조금 쏟아졌다. 여자가 맥주를 닦아내기 위하여 급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녀의 손길이 내 허벅지 안쪽에 닿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움츠렸다. 허리를 펴면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물려 있었다. 나는 여자의 시선을 비키면서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전 군대에 가는 남자들을 많이 보아왔어요. 그들의 눈엔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술을 마시나 봐요. 그걸 버리기 위해서, 때로는 동정까지도……. 그런 남자들이 안됐어요. 아 참, 우리 아직 이름도 모르죠? 전 이유미에요.”
“홍현푭니다.”
“홍현표?…….”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현표씨는 아직도 동정을 지키고 있나요?”
참 당돌한 여자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가 다시 물었다.
“정말 스스로 자른 거예요, 그 손은……?”
여자는 둘 중 하나다. 딱히 ‘나의 동정’이 궁금했던 게 아니거나, 눈치가 빠른 거 거나.
“현표씨는 아주 독한 사람인가 봐요?”
나는 맥주 캔을 왼팔로 말아서 가슴에 안고 오른손을 여자의 눈앞에 펴 보이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손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게 다 좋은 건 아니었어요. 철이 들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 손 때문에 많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아야 했죠.”
아, 아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여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손 때문에 운명이 어긋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얼른 여자에게 물었다.
“혹시 손금 볼 줄 아세요?”
“아뇨. 하지만 손 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 성격, 운명 같은 걸 대략 짐작할 수는 있어요. 특히 남자의 경우엔 성기의 모양과 정력까지도…요.”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리 집엔 많은 남자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여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멈추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마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나 보다. 여자는 이렇게 말을 바꿨다.
“저도 손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손에 대한 이야기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우리집에 ‘가정의학백과’라는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책에는 수상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었어요. 난 손금보다는 손의 모양과 크기,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 손톱의 모양으로 사람의 운명과 성격, 직업, 연애 등을 알 수 있다는 부분에 더 관심이 많았죠. 그 곳에는 원시적인 손, 철학적인 손, 실제적인 손, 활동적인 손, 예술적인 손, 공상적인 손, 잡종의 손 등 일곱 가지의 손이 그림과 함께 해설되어 있었어요. 이해하기도 쉬워서 저는 그 부분을 달달 외워 친구들의 운명을 봐주곤 했었죠. 지금도 전 남의 손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아요.”
여자는 나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가 가소롭게 생각되었지만, 내 손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하여 그저 손을 내맡기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자가 정말 수상에 일가견이 있는 것일까? 이 여자는 정말 내 손을 보면서 내 성기의 모양을 떠올리고 내 정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걸까?
한참 만에 손에서 눈을 뗀 여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가에 묘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남자친구가 많죠?”
여자의 물음에 나는 잠시 난감했다. 그건 여자들에게나 던져야할 질문이 아니던가?
“현표씨의 손엔 두 가지의 모양이 함께 들어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사이비 수상가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자는 모를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내가 된장찌개에 넣을 파를 썰며 그 된장찌개를 함께 먹을 남자를 기다리던 남자였다는 것을……. 여자의 책에는 그런 남자의 손에 대한 내용까지 나와 있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의 손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여자는 ‘원시적인 손’의 모양과 그 손의 소유자의 성격, 인생, 연애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손에 대해 얘기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이 손은 ‘공상적인 손’에 가까워요. 손가락이 가늘고 고운 게……. 이 손은 하얗고 매끄러워서 마치 白魚같아요. 아주 직감력이 뛰어나서 詩的인 정서가 풍부하죠. 공상을 좋아하고, 理想을 동경하며, 현실은 볼 줄 모른대요. 실행력도 없구요. 그렇지만 연애를 하면 사랑 속에 완전히 빠져버리기 때문에 주의해야 돼요.”
내 손이 어떤 종류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던 여자가 주의해야 할 점까지 일러주었다.
“이 손의 소유자는 이성관계가 아주 복잡해요.”하면서 여자는 나를 짓궂게 쳐다보며 웃었다. 입을 가리려고 들어 올린 여자의 하얀 손이 눈부셨다. 사파이어 빛깔의 매니큐어로 물들여져 있는 여자의 손톱에서 알 수 없는 色氣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J.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머리를 뒤에서 갈라 봐? 용기를 내서/복숭아를 먹어봐?/난 플란넬 바지를 입고 바다 속을 거닐겠다./거기에선 인어들이 끼리끼리/노래 부르던 것을 내 들어 왔나니
K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숭아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플란넬 바지…… 이건 발기한 남자 성기를 비유한 것으로…… sex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던.
나는 이제껏 여자에게 성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여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스쿨버스에서 몇 번 여학생에게 말을 붙이고, 애프터를 받아내기 위해서 떠벌였던 일들은 순전히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 여학생의 몸매는 어떤지, 얼굴은 예쁜지, 다리는 날씬한지……. 나는 그런 것에 무신경했었다. 그런데 이유미에게는 조금 달랐다. 그녀에겐 내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프루프록의 연가’를 떠올리게 한 여자.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고서 성기의 모양과 정력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 여자가 나는 차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미씨, 아까 얼핏 남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무슨 가게를 하시나요?”
여자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조그만 가게예요.”
그 이상의 질문은 곤란하다는 듯 여자가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렸다. 키 작은 소나무 군락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 저 소나무 숲이 싫어요. 슬픈 기억이 있거든요.”
여자는 자조하듯 한쪽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현표씨는 무슨 일로 Y시에 가시나요?”
“정리 좀 하려구요…….”
나는 재영을 떠올렸다. 결혼식 내내 입이 귀에 걸려 있던 그의 얼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가 떠올랐다. 잊고 싶은 얼굴인데 떠오를 때마다 더욱 선명해지는 건 무슨 이유인가? 나 몰래 뒤꽁무니로 여자를 사귀고, 보란 듯이 장가를 간 놈의 그 얼굴이……. 나쁜 놈. 결국 그렇게 변할 거면서……. 온 몸의 혈관을 따라 담쟁이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열기를 억누르며 난 체머리를 흔들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을까?”
재영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깨달았어야 했다. 그가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늘 그렇듯이, 사랑은 시작된 순간부터 배신을 잉태한다는 것을. 적어도 나의 사랑은 그랬다. 끝이 훤히 보이는데도 그 끝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가야 하는 사랑. 그 사랑에 전부를 걸지만 결국 내가 떠안는 건 상처뿐이라는 것을.
절단된 손의 모양은 실연의 아픔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인가? 잘려나간 네 개의 손가락을 기억하고 있는 손끝이 시려 왔다. 재영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가슴이 미어지고 쓰리고, 아프다.
아픔을 잊기 위해 상처를 도려냈는데, 그 상흔을 보면서 오히려 아픔을 기억한다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애인이 결혼을 했어요. 석 달이나 됐는데 못 잊겠어요. 친구들 만나서 술 퍼마시고 뻗으면 잊힐까 해서요.”
“실연엔 술이 약이죠. 남자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룸살롱 같은데 간다던데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은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현표씨는 그런데 가 보셨어요?”
“네. 그렇지만 해 본 적은 없어요.”
아뿔싸, 이런 말은 안 해도 되는데……. 난 오늘 너무 수다스러운 게 틀림없다.
“뭘요? 뭘 하는데요?”
여자는 사냥개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다그쳤다.
“……긴 밤 짧은 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안하셨어요?”
나는 여자를 놀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좀 전 여자의 말을 흉내 내서 이렇게 대답했다.
“거기엔 슬픈 기억이 있거든요.”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내 팔을 꼬집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몸에 찌릿하게 전류가 흘렀다. 그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떨림이었다. 형언키 어려운 흐뭇한 느낌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여자와 남자는 이래서 같이 만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나의 대답이 전부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자와 사랑을 나눠 본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여자와 사랑하는 일이 싫어서 그랬다는 사실이…….
“현표씨처럼 여자한테 무관심한 남자들이 간혹 있는데요, 혹시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요? 그게 아니면 남성 콤플렉스? 그것도 아니면 좀 드물긴 하지만 同性을 사랑하는 사람? 현표씨는 어디에 해당되나요?”
나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기가 죽었다. 여자의 당돌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기가 죽었고,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에서 기가 죽었다. 이 여자는 정말 내 손을 보면서 내 인생을 읽었단 말인가? 나는 잠시 답변을 찾지 못했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건 세 가지 중 한 가지에 해당된다는 뜻인가요?”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집요한 걸까?
“네, 그래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혐오감이든, 콤플렉스든, 동성애든 그녀가 그 중에 하나를 골라 나를 판단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설령 나에 대해 알아냈다 하더라도 이 버스에서 내리면 서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자는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앞에서 교통사고라도 난 것일까?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매를 젖히고 시계를 보았다. 4시 20분이었다.
“그 손은 아직도 아픈가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아뇨, 하지만 장갑을 끼고 있으니까 오히려 아프게 느껴져요. 다른 사람에게 보일 용기가 아직은 없어요. 좀 흉하거든요.”
“후회하는군요?”
“아뇨. 잘했다고 생각해요. 천 번 만 번.”
나는 기억의 커서를 몇 달 전의 경동 시장으로 옮겼다. 한약방 한 구석. 작두에서 일정한 크기로 잘려지던 마른 약초 뿌리들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말라버린 손이라면, 감각이 마비된 손이라면……기억하지 못할 거야. 사랑했던 사람의 체온을. 그 사람의 질감을.
재영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가서 그를 쾌락에 젖게 했던 나의 손. 그의 피부 깊숙이 숨어있는 작은 떨림마저도 고해상도로 스캔해내던 나의 이 손. 저 작두라면 그 모든 기억을 삭제해 줄 수 있으리라.
재영으로부터 청첩장을 받던 날 나는 철물점에서 작두 하나를 샀었다. 재영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과 욕망이 솟아오를 때마다 난 작두를 꺼냈다. 휴지통과 바탕화면을 오가며 삭제와 되살리기를 반복하듯, 작두 위에 손을 얹고 어긋난 운명의 뿌리를 도려내야 한다와 만다를 수없이 망설였다.
결단의 날은 늘 예정보다 빨리 오는 법. 재영의 결혼식을 사흘 앞 둔 날, 난 솟아오르는 질투와 배신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작두를 꺼내 들었다. 때가 왔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작둣날 사이에 낀 나의 하얀 손도 겁을 먹은 듯 푸르스름하게 죽어있었다. 맨 정신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주 두 병을 단숨에 비우고 난 뒤에야 용기가 생겼다. 고통 없이는 절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목숨보다 독한 것이 습관이라고 수없이 최면을 걸었다.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꽉 감았다. 머릿속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그 검은 돌개바람이 점점 나를 휘말아 위로 솟구치려할 때……작두를 힘껏 내리눌렀다.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작두에서 잘려져 나간 네 개의 손가락과 손에서 솟아오르던 검붉은 피, 그리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날의 고통을.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그 핏빛 악몽을.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잘못된 운명의 뿌리를 잘라내고 기절했던 그날을.
다시 태어나는 거야. 보통 남자로.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로. 손이 예쁘지 않은 남자로. 이 손에 다시는 다른 남자의 정액을 묻히는 일은 없을 거야.
또 하나의 사랑이 끝나는 날이었다. 재영을 보내고 지금까지의 나를 모두 버리던 날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나를 향해 그녀는 또 물었다.
“참 궁금해요, 스스로 손을 자르고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까 현표씨는 여자와 사랑해 본 일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 일이 손가락을 자른 일과 관련이 있죠?”
나는 그녀의 집요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왠지 그녀가 징글맞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 말해 버려? 이 여자한테. 나의 과거를? 내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된 것이 바로 이 손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교복 소매 밑으로 드러난 하얀 손 때문에 국사선생한테 이끌려 숙직실에 갔고, 그날 이후부터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사랑이 뿌리 내렸다는 사실을…….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사랑이 나를 지배해 왔고, 그 사랑에 대한 환멸을 도려내기 위해 손을 잘랐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런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이 여자는 내 삶의 얼룩을 지울 수도 없고, 내 운명을 어떻게 해줄 수도 없다.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는 이미 손가락을 자르지 않았는가?
“난 아내가 필요해. 아이를 갖고 싶어. 나를 닮은 아이.”
난 그때 가스렌지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뚝배기를 막 들어 올리던 참이었다. 손이 떨렸다. 재영이 흰 사각봉투 하나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 결혼해.”
뚝배기가 미처 식탁 위로 옮겨지지 못하고 내 손에서 이탈했다. 뜨거운 국물이 뚝배기와 함께 내 발등으로 쏟아졌다. 재영이가 잽싸게 나를 욕실로 옮겨 찬물이 차오르는 욕조에 밀어 넣을 때까지도 내 머릿속은 우박 맞은 열무밭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발등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으로 밀려왔지만 재영의 결혼한다는 말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결혼? 누구와? 그래, 아이를 낳으려면 여자와 결혼해야 겠지. 결혼하면 잘 살 것 같아? 여자를 불행하게 하면서까지 아이를 낳겠다고? 청첩장 다 만들어 놓고 통보만 하면 되는 관계였어? 너하고 나하고? 도대체 그동안 너에게 난 뭐였니? 니가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속이지는 말았어야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나는 욕조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상태로 숨을 쉬지 않고 물을 먹으면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그래 죽자. 언제까지 이런 이별을 반복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한심한 나, 환멸을 느끼면서도 욕망과 습관에 길들여진 사랑이라면 이제 다 끝내자. 나는 물이 넘치는 욕조 바닥에 머리를 꾹꾹 밀어 넣었다.
버스는 어느 새 Y터미널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메모지 한 장을 꺼내서 몇 자 적더니 그것을 내 윗주머니에 꽂았다.
“제 연락처거든요.”
“핸드폰에 찍으면 되는데…….”
나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그녀는 곧바로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나는 Y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초저녁의 거리는 벌써 불빛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유미와 헤어진 것이 왠지 아쉬웠다. 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그녀. 남자들을 많이 상대하는 조그만 가게를 한다던 그녀. 나를 관통하던 그녀의 예리한 눈빛이 뇌리를 쉬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도 헤어진 뒤에 내 맘 속에 이렇게 긴 아쉬움을 남긴 적은 없었다.
Y역 앞에는 재영과 들락거리며 술을 마셨던 포장마차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4년 전 성탄절 이브날, 재영을 순찰차에 실려 보낸 뒤 괴로움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난 포장마차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었다.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하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재영과 나만이 하숙집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 춘자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나의 겨울방학은 행복했으리라.
성탄절을 사흘 앞두고 서울 집에 올라왔던 나는 재영과의 멋진 밤을 상상하며 성탄절 이브 날 술과 안주를 사들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하숙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와 내 방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마루 아래 놓여있는 하이힐 한 켤레를 발견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머릿속으로 춘자라는 술집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고, 재영과 춘자가 이불 속에 누워있는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마음 속에 질투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이 눈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재영은 작은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중이었는데, 6개월 동안 내 방에서 숨어 지내는 처지였었다. 그런 그가 나 없는 틈을 타서 춘자를 내방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서울로 올라갔던 그날부터 둘은 함께 있었을 것이다. 하숙집 문 밖으로 나온 내가 어떻게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가의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섰는지 모른다. 내 맘 속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로 가득했다. 분별력을 상실한 나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용히 골목으로 진입하는 순찰차 한 대가 내 눈에 포착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후 하숙집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끝냈어야 했다. 재영을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춘자를 경험한 그 순간부터 그는 나의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때 그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정보다 조금 깊은 감정’이었다는 그의 궁색한 이별 통보를 듣지 않아도 됐었다.
나는 포장마차를 지나쳐 천천히 시장을 향해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내 눈에 공중전화박스가 들어왔다. 불현듯 이유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준 메모가 생각나서 윗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내 정체를 그렇게 알고 싶어하던 그녀에게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모조리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얘기 못 할 것도 없다. 모두 지나간 일이니까. 이제 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계획이니까. 아직까지 내 마음 속에서 싹도 제대로 틔워보지 못한 사랑, 국사선생이 다가오기 전의 그 사랑으로 돌아갈 계획 말이다.
‘가자꾸나, 그대와 나는…….’ 프루프록의 연가를 떠올리며 나는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무엇일까? 이유미에게로 나를 이끄는 이 알 수 없는 힘은? 재영을 잃은, 아니 배신당한 사랑에 대한 반발심 혹은 보상심리로 솟아나는 ‘그대의 마음’인가? 손가락과 함께 잘려나간 ‘그대의 마음’ 위에 다시 싹트는 ‘내 마음’인가?
나는 윗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펼쳤다. 그녀의 전화번호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이유미’라는 이름 옆에 ‘송춘자’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나는 숫자를 누르다 말고 메모지를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10만원권 수표였던 것이다. 친구들 만나고 시간이 나면 전화하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송춘자’라는 이름에 눈길이 머물렀다. 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예전에 나 몰래 만났던 여자도 춘자였는데 성이 뭐였더라? 허긴 우리나라에 춘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수표를 나에게 주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표를 돌려주기 위해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미안해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만약 여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가 이유미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화장한 이유미의 얼굴은 고속버스에서 보았던 화장기 없는 얼굴과 너무도 달랐다.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짙은 색 코트를 벗었다. 앞가슴이 깊이 패인 드레스가 몸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도 가득 채웠다.
“현표씨 하고 술 한 잔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남자들을 만나는 군요?”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서 말없이 연거푸 두 잔을 비웠다. 그녀에게 가졌던 호감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녀도 두 잔을 원 샷 했다.
“그렇지만, 전화한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어요. 현표씨하고……”
“누구예요? 저같이 어리석은 놈이?”
그녀의 덫에 걸렸다는 게 조금 화가 나서 나는 언성을 높였다.
“현표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린가? 이 여자는 오늘 나를 처음 만났잖은가?
“전 현표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 4년 전에.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 텅 빈 머릿속 한 가운데로 수표의 뒷면이 떠올랐다. ‘송춘자’라고 쓰여 있던 글씨가 짙게 클로즈업 되고 있었다.
“그날 현표씨는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어요. 현표씬 제 얼굴을 기억 못하겠지만 전 재영씨 방에서, 재영씨의 수첩 속에서 현표씨 사진을 봤어요. 그래서 그날 밤 공중전화 걸던 사람이 현표씨라는 걸 단박에 알았죠. 휴대폰이 있을 텐데 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터리가 나갈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고 생각했었죠. 그날 현표씨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렇다면 춘자?”
“그래요. 그때 내 이름은 송춘자였었죠.”
“그날 저녁에 재영이와 함께 내 방에 있지 않았었나요? 문 앞에 하이힐이 있었는데……”
“재영씨의 운동화를 끌고 나왔었어요. 골목 입구 슈퍼에서 술과 안주를 사고 우리 가게에다 전화를 걸려고요.”
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무슨 상관이에요. 이미 옛날 일인데요. 그리고 전 옛날의 춘자가 아니구요.”
그녀가 내 팔을 힘껏 잡아끌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2차 가요.”
나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고속버스에서 현표씨를 본 순간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굴까? 곰곰이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현표씨의 옆자리로 옮겨 앉은 거예요. 대화를 하다 보면 떠오를 지도 모른다 싶어서……. 혹시 우리 업소의 고객은 아닐까? 그런데 ‘홍현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저는 비로소 재영씨의 방에서 보았던 사진을 떠올렸죠. 격포 해변에서 재영씨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저는 한 동안 숨이 멎는 듯 했어요. 그렇지만 제 자신을 밝힐 수가 없었어요. 미안했어요. 아깐 장난이 좀 심했죠? 그래서 사과도 할 겸…….”
나는 맥이 빠진 채 말없이 걷고 있었다. 내 정체를 모두 알고 있는 그녀 앞에서 허둥댔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얼굴로 피가 확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녀에게 내 사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까? 나는 분명히 어리석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어느 사랑이든 사랑엔 죄가 없는 것인데 말이다. 어느 사랑이든 똑같이 정신적이고, 똑같이 육체적이다. 그 사랑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단 그 사랑을 속이지 않았다면, 그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면 말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귀중한 거니까.
그녀는 계속 떠들었다.
“하숙집에 와 보니까 재영씨가 없었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재영씨가 사라진 것과 현표씨의 전화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발신자를 알리지 않기 위해 공중전화를 사용할 수 있잖아요. 황급히 전화박스로 가 보았지만 이미 현표씨도 그곳에 없더군요. 그게 끝이었어요, 재영씨와는.”
“…….”
“전 재영씨를 사랑했지만 재영씨 마음 속엔 늘 현표씨가 있었어요. 그땐 현표씨가 미웠죠. 현표씨도 제가 많이 미웠을 거예요. 제가 어떻게 생겨먹은 년인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나는 그녀가 좀 측은하게 느껴졌다.
“결국 우리는 한때 재영을 서로 좋아했었고, 이젠 재영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사랑의 패배자가 되어 만난 셈이군요.”
“그럼 현표씨의 변심한 애인이 재영씨?”
“맞아요. 그놈이 결혼했어요. 석 달 전에.”
그가 교도소에 갔었고, 2년간 복역했으며, 출소한 뒤에 나를 찾아온 그와 내가 2년 가까이 함께 살았었다는 말을 나는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클럽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성급하게 양주를 마셨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흔들었다. 온갖 번뇌를 다 털어 내 버리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우리는 춤을 추었다. 느린 음악으로 바뀌면 자리로 들어와 숨을 고르고, 댄스곡이 나오면 다시 무대로 나가 춤을 추었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보니 우리는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느린 곡이 흘러도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오늘 밤 저하고 자는 거예요? 현표씨는 여자와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했었죠? 현표씨의 기억에 오래 남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난 꽤 취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가느다란 전율을 느꼈다.
클럽에서 나왔을 때 거리는 한결 조용했고, 불빛들이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팔짱을 낀 채 서로에게 체중을 의지하며 걸었다. 밤바람이 클럽에서의 열기와 취기를 식히며 불어갔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정신이 또렷해 졌다. 그러면서 나의 가슴은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미와의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잠자기로 한……. 나는 그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또 다른 자아’가 자꾸만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기로 다짐하면서도 왠지 모를 두려움과 어색함으로 가슴이 조여 왔다. 우리 앞에 모텔의 간판 불빛이 들어왔다. 느려지는 나의 발걸음을 그녀가 재촉했다.
내 마음 속의 ‘그대와 나’가 망설였다. 모텔 문 앞에 이르러서는 룸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였고, 그녀가 샤워하는 동안에는 도망갈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서 그 다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술을 마셨건만 왜 이리도 정신은 또렷한 것인가? 나의 가슴은 마치 통과의례를 치루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소년처럼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몹시 두근거렸다. 나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 좋아, 받아들이는 거야. 두려울 것도 불안해 할 것도 없어.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 이렇게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았는가? 다시 시작할 기회가 온 거야.
……한바탕 용기를 내어/우주를 떠들썩하게 해 볼까?/아니, 일 분이라는 것 속에도/순간이 뒤집힐 여러 결단과 修正의/시간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J. 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의 끝부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점차 안정시키고 있었으며, 때로는 묘한 흥분과 의욕을 품게 했다. 시 속에서 ‘저이 팔다린 어쩌면 저리도 가늘기만 할까! 하고’ 말하는 여인들처럼 그녀도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지? ‘현표씨는 어쩜 그렇게도 서툴러요’하고……. 아니야, 그녀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내가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내가 겁내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그녀가 욕실 문을 밀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그녀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짙은 장미향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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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작품을 올리셨네요. 모처럼 작품다운 작품을 글동네에서 공짜로 읽게 되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황소설가님의 팬이지 않습니까. 직장 다녀오서 읽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어제저녁 어찌나 술을 퍼마셨는지 숙취와 위통으로 이제까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소설을 앞부분만 조금만 우선 읽어봐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어찌나 궁금증을 잃으키고 노련한 문장 솜씨로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지 단숨에 끝끄지 끌려왔습니다. 정말 남자도 사랑을 하면 여자와 감정이 같을까요 배신이느껴지고 고통 스러울까요. 동성애, 저도 다루고 싶었던지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다음 작품을 기다립니다.
과찬이십니다.... 늘 저와 제 작품을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의 주변에는 좋은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소설가는 별로 없습니다 있어도 별 도움이 안되는 스타일이라 너무 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실력과 스타일, 모두가 맘에 드는 작가님을 만난거지요 정말 귀한 인연입니다. ^^
^^
재밋게 읽었습니다.
한줄메모에서도 흡인력이 있더니만, 단숨에 읽었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