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다시 4년 만에 시집을 묶는다.
어줍잖은 글들을 두 번씩이나 묶어 세상에 내어놓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괴롭다. 무엇인가 희망도 많았지만 이룬 것 하나 없는 시련의 나날이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고민은 언제나 끝날 것인지, 부끄럽지 않게 살며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조금씩은 느끼는 것 같다.
절망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묵묵히 힘이 되어 준 가족, 특히 어린 딸들이 너무 고맙다.
시집을 묶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된다. 새 천년에는 묵은 친구의 말대로 슬픔의 날들이 쌓이고 쌓여, 이젠 그 슬픔이 기쁨이 되는, 그리하여, 우리 어깨동무하고 지나온 그간의 길보다는 앞으로 밟고 가야 할 길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태해 질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은 풍향계 동인들 그리고 시집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 준 묵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두 번 째 시집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신 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0년 5월
계족산 아래 貞菴 寓居에서
김 원 진
1부 방황하기
시를 사랑하는
시를 사랑하는 죄를 짓고
어둠을 타고 찾아든 은골
선비 정신이 묻어나는 대청 마루
술잔을 기울이다
세상사를 떠들다가
세기말을 논하다가
작품에 탐닉하다가
난로의 불빛만큼이나 달아오르면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달구어진 구들장
익어 가는 술이 되어
잠시나마 시린 등을 지지고,
어선의 불빛 바라보며
다가오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
억새풀 조용히 흔들리는 바람 타고
대청호 벗어나는
내 눈 앞으로 아이들의 미소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부서지며
저만치 앞서가고,
살아온 나날들이
두꺼운 껍질로 온 몸을 둘러싸고
새벽의 향기가 숨차다.
안개
어느 날
신탄진 도로의 새벽은
계족산을 반쯤 가린 안개
나도 반쯤 가리운 인생이기에
계족산의 버릇을 닮아가고
출근길 빨리가기 위해 속도를 내고
스스로 느낀다는 것은
어떻든 살아있다는 것이기에
아파트 문열고 전등 스위치 올리면
폐부를 울리는 밝아지는 소리
혼자임을 느끼면
다시 돌아오는 일상
언제나 울리는 소리
언제나 신호 걸리는 교차로
언제나 마주치는 사람들
언제나 퇴근길 교차로 그 자리
조금도 오차가 없는 하루
깨뜨리고 싶은 날
안개처럼 슬며시 다가오는
술 한잔의 유혹
정신적인 주량과
육체적 주량 사이에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
다음 날 대낮까지 힘들어하고
마무리 없이 잇달은 나의 문제들
그런 대로 시간이 가르쳐주겠지만
안개처럼 언제나
나라는 한이 없는 인간
끝내는 언젠가처럼 못 다한 이대로
서장으로 그칠 그 골짜기
다시 어느 날의 안개일 테고
계족산을 반쯤 가린 안개
나도 반쯤 드러낸 인간이기에
안개 속을 뚫고
빨리가기 위해 출근길을 서두를 테고
밤길
안개 낀 날에는
남 몰래
밤길을 걷고 싶다.
아픈 기억들
멀리 산을 타고 넘어
부서지는 불빛 사이로
어둠을 가르며 사라지는
그리운 얼굴들
담배 연기 하나 되어
눈이 시리도록 아픈
몸뚱이를 부여잡고
풀기 없는 희망 위해
서럽게 서럽게 걸어 보는
도시의 거리 사이로
안개꽃 한다발 움켜쥐고
혼자인 나를 느낀다.
안개가 낀 날에
남 몰래
밤길을 걷는다.
아카시아 향기
거기서 나는 아카시아나무
꽃을 떨구는 수줍음을 보았다
언제나 처럼
법천지* 둑 언저리
수십 개의 벌통이 아가리를 벌리고
온 산이 하얀 치마를
반쯤만 걸친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향에 취해
행복해하는 가족들 속에서
아빠를 요구하는 딸아이
간절한 소망을 들으며
법천지가 그려지는 나는
아카시아 향기를 맡을 수가 없었다.
* 법천지 : 계족산 초입의 저수지, 언제부터인지 수문 부분이 고장나 항상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기능을 상실한 저수지로 매봉 중학교 쪽에서 올라가다 보면 볼 수 있다.
추억에서
- 우리들의 20주년은
어려움이야
한낱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는 기쁨에 들떠
빌딩 사이로 퇴미고개 길 내려서면
가슴 안에 들어선 우리의 교정이 있다.
저 눈부신 햇빛 아래
웅장한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계룡의 줄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신체,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멀리 보이는
빛바란 강당의 커다란 몸체만이
오늘의 의미를 아는지
흔들리는 교훈탑 앞에서
잠시 우리들의 과거는 수평으로 흐르고
계룡이 대전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의 한모를 기를 수밖에 없다.
운동장 저 편에서
다만 검정 운동화의 소년이
바람개비를 몰고 달려나온다.
친구에게
언제나
구슬픈 메아리
갑사 계곡 언저리
풀피리 소리 낚는다.
캐미가 흔들리는 수면
저수지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 가는 봄
물새 한 마리 지나고
호숫가 축축이 적시는
새싹들 사이로
파문 지우려
초여름의 빛깔을 더듬는다.
오늘도
갑사 언저리
발자국 남아
산길에 흩어지는 마음
허공을 가른다.
발자국 남기기
- 이제는 바라볼 수 없는 친구에게
비바람 거칠게
가느다란 풀잎 할퀴며
강물 속으로 사라지던
견딜 수 없는 밤
술잔에 어리는 달빛
어느 봄날에
갈곳 몰라
헤매던 눈물이었을까
서러운 몸짓
사랑스런 아내
두 딸을 걱정하던
젊은 아버지 한숨이었을까
사라져도
삶은 늘 제자리인
강물 속
저 강둑 길 따라
한껏 불태우려는
욕망 때문이었을까
바람은 갈대밭을 깨우고
새떼만 발길을 옮기는
서러운 황톳빛 강물
숲 가지에 걸린 검은 그림자
하얀 날개로 파닥이는
거친 숨 몰아내는 슬픈 새여
그 자리에
--김영배 선생님 정년에
머언 세월
잡힐 듯 잡히는 듯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의 숨결
들릴 듯 들리는 듯
아쉬움만 늘어
시장 이야기
중리 시장 들어서면
세월을 묻어둔 기다림이
사람이 모임으로서
지난 세월이 펼쳐진다.
갈라진 천막 사이
고개 들어 빈 하늘 바라보면
좌판에 내놓은 채소
지나는 사람에 하소연하듯
갈라진 손등에
지난 세월 묻어 두고
때늦은 밥이 넘어가지 않는 듯
시장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며
그려보는 이문 계산에
연신 미소를 훔치며
전대로 가는 손을 억누르며
주름진 이마에는
장가간 아들놈
엊그제 얻은 손주놈 생각에
길 건너 완구 진열된
유모차가 아른거린다.
중리 시장
- 겨울 이야기
쌓인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처진 천막 지붕 아래
익숙한 칼질에 모양을 이루어
팔려나가는 어물전 생선만큼도
못되는 사람들을 본다.
지나는 사람의 움츠린 모습
살아가기가 어려울수록
햇볕이 더욱 그리워
어둠이 짙어오는 시장바닥에
꽃이 피어난다.
길바닥 삶을 쓸어 담아
저마다 살아온 순간들이
취기에 달아오르고
시장에 내리는 겨울밤은
추위에 비틀거린다.
방황하기 1
피아노에 앉은
아내의 두 손 사이로
바람 불고,
빗줄기가 보이더니
여자의 역사가 묻어 나온다.
피아노에 앉은
딸아이의 두 손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투영되고
음악에 취한 내 얼굴이 겹쳐지면서
아이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방황하기2
선화 강변 대전천
때 늦은 철새
강변에 포장마차
하나 둘 늘어
겨울의 옷자락 흔드는
거리에 서면
이별을 예감하듯
철새 떠난 자리
하얀 무늬 묻히는 잿빛 하늘
어둠의 한 편을 채우는
가로등 불빛이 시리고
달빛에 어스름히 보이는
제자의 그늘진 인사를 받으며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낯설은 음악에 취해
밤거리를 헤메는 인파 속으로 묻힌다.
가을 소묘
미소로 쓸어 앉고
하늘 향한 한 떨기 외로움
구름 속에 들어가
가 없는 기운이 세상에 피어 온다.
넓은 귀 늘어뜨리고
더 그윽한 밀어로 속삭일 때
멀리 보이는 시가지 밑바닥에서
돌멩이 하나 깨어지는 소리 들린다.
텅 빈 배낭의 무게로 짓누르는
외로운 소나무 사이
바람이 분다.
그 속에 내가 있다.
단풍이 진다.
타오르는 붉은 잎이 하늘에 숨는다.
삼국지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컴퓨터 앞에서 좌판을 두드린다.
유비 관우 장비를 따라
중원을 휘젓다 보면
가슴 속 아우성은
어느새 푸른 잔디밭 말을 달리고
세력을 넓혀 가는 기쁨보다는
사람을 사고 파는 것 같아서
씁쓸한 미소가 입가를 스치고
좁은 방 어지러운 가운데
역사를 다시 쓰다 보면
세상사는 일
다 잊어버리고
멀기만 한
삼국 통일도 이룰 듯 싶어
우매한 인간이 되어
포로가 되는 줄 모르고
컴퓨터 앞에서 좌판을 두드린다.
장마
비가 내린다.
할 일이 없다.
이불을 덮고 누워
지난 세월 먹구름
많은 사람들이
내 머리를, 가슴을……
짓밟고 지나간다.
밤새 뒤척이던 비
물안개 피어오르고
지난 신문 조각 펼쳐
하루를 그린다.
한 파
끊어진 은파 다리
서러움마저 눈에 가리어
봄을 기다리는 민낯의 여인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어린 생명을 바라보며
지난 여름을
진저리치는 여심
낯선 서유럽의 교회
동토의 땅에 쌀 보내기 운동이
덧물진 빙판 위로 피어나는
봄꽃인 양 퍼지는 데
순수한 작은 정성마저도
계산된 전문가의 정책으로
투명성을 주장하는 질곡의 현실
나중에
봄꽃이 만개했을 때
“그 때 왜 우리를 돕지 않았나요”
귓전을 때리는 매운 바람
2부 흑백사진 속으로
겨울나기
눈꽃으로 뒤덮인 산골짝
찬 기운 깔린 거리
들판에 내려앉은
눈부신 햇살
입김은 한올한올 희망을 엮어낸다.
달이 없는 밤
바다에는 희망
줄망이 엉켜
기침 소리
바람의 비명 소리만 가득하다
유난히도 시린 별빛
모두의 마음은 내내
푸른 바다에 내려앉아
물결 따라 부서지고
바람은
빈가지 눈가루 털어 내고
유리창 성에 꽃
피 흘리며 무너져 내린다.
귀향
골이 깊으니
꿈도 더디 가는구나
주말을 이용해 찾아온 부모님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산자락 밭떼기
밤은 깊어 서리는 내리고
한 해가 다르게 늙어만 가시는데
합칠 수 없는 형편에
고향 친구들과 술자리 꿈에 보인다.
천장에 걸린 형광등 조는데
밤 깊어 노인들만 남은 집에
밝은 달빛에 씻고 가는
마음만 슬프다
돌아오는 길
가지 끝에 걸린 가을이 몸을 떨고
세월의 꼬리를 자르다
이내 지쳐버린 감나무
나뭇잎 떨어져 황량한
들판을 뒹굴어도
주인 없는 나무인 양
홍시가 늘어갈수록
가슴의 억장이 무너지시는
그래서, 휴일이면 고속도로 달리는
시골에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돌아오는 길은 항상 정체되어 있었다.
고향
철 이른 한파가 몰아와도
고향은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언 뺨에 맞고 싶은
황토재 고갯마루에
흩날리던
눈
질퍽거리는 마당을 가로 질러
뒤란 대나무에
떨어지는
햇볕
늙은 형수가 온 몸으로 지키던
옹기 항아리 몇 개 남은
큰집이 혼자 떨고 있다.
대청호반에서
갈대에 바람 이는 아침
안개 속 호반 길을 돌아
지난날
그리움을 낚는 강태공 되어
외롭다 말 못하고
그립다 가슴으로만
가는 세월 한 세월 움켜쥐고
물밑 고향을 떠올리곤
옛날을 그리워한다.
흑백 사진 속으로
고향 어구에 들어서면
머리에 눈을 이고 선 돌무덤
사립문 너머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고드름 달고 있는 빨래
바람 불어 와
지난날 흩날리는 계곡
오솔길 따라 사람들은 가끔씩
고향에 다가가는 데
발자국 어지러운 고향 길
길섶의 묘지 위로
무심히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그 옆에 뒹굴고
메아리가 그리운 아이
산울림 들리는 듯한데
거친 숨 몰아쉬는 입김은
겨울을 연출한다.
나무에 의지하고 선 칡덩굴
봄을 기다리는 마음
흑백 사진 속의 친구를 대하고도
그 흔한 소주 한 잔 들이킬 수 없었다.
수몰민 김씨의 독백
눈이 내리면 대청호에 가서
못 가는 호수 속 오솔길
은행나무 옆
내 집을 보았습니다.
내 집으로 내리는 눈의
푸른 물결만 보고 앉았습니다.
눈이 내리면
대청호에 가서
못 가는 호수 속
번지가 없어진 내 집에
편지를 씁니다.
18년을 그렇게 편지를 씁니다.
가뭄에 보았습니다.
무너진 흙더미
은행나무 등걸만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이제는 나이 들어 흐려진 눈
눈이 내리면
대청호에 가서
번지가 없어진 내 집에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받을 수 없는 편지를 씁니다.
다 떠나간 뒤에는
다 떠나간 뒤에는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는 아픔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빛 바랜 낮은 건물 사이
전선줄 널브러지고
이리 저리 찢기어 삶을 곡예 하는 비둘기
하늘을 비상할 줄 모르는 인생이기에
어느 만큼은 비워지고
어느 만큼은 채워지면서
짧은 노을 앞에 지는 것들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언뜻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도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유리창에 어리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갈라진 손이라도 붙잡고
남새밭 김이라도 메다가
어느 만큼은 채워지고
어느 만큼은 서러워지면서
길가 널려 있는 고추라도 뒤집으면
햇빛 따가울수록 깊어만 가는
어머님의 허리를 바라보는 서러움이
실낱같은 흰 줄기 빛을 뚫으며 다가온다.
다 떠나간 뒤에는
세상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대조
도심을 벗어나면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숲, 들판을 볼 수 있는
그린벨트에 묶여 수십 년
재산권 행사도 못한 채
도심의 허파가 되어
숨죽인 삶이
도심이 광역화되면서
시가 되고, 시민이 되어
도로가 좋아지고
버스가 다니고
자식이 자가용 끌고 오더니
도심 사람들이 모여들어
휴일을 즐기고
인심은 흉흉해지고
놀다간 자리엔 쓰레기 더미만 늘어
기쁨도 잠시
시민의 의무만 늘어
빚만 늘은 노인네
깊어 가는 주름살 속으로
다리 품 팔던
오솔길 친구들 하나 둘씩
사라져 간다.
강가에서
유년의 모습들이
하얗게 일어서고 있었다.
산은
달을 감추고
길섶에 피인 꽃
자동차 불빛에 반사되어
퍼져 흩어지는
유년의 모습
모랫벌 한 쪽 모퉁이
아이의 미소가
어둠을 타고
흘러가는 물줄기 사이로
그림자 드리우고
달빛 쏟아지는 강가에서
유년의 모습들이
하얗게 일어서고 있었다.
겨울 바다
다가서는 바람의 무게만큼이나
순수한 마음 담을 수 있을까?
반쯤 해송에 가린
볼 시린 바닷가
고음으로 찢어지는 파도 소리이고 싶어
옛날을 꿈꾸며
모래밭 배회하지만
순백의 설화를 몰고 달려와
멀어져 가는 사랑아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바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살을 에이는 바람에 밀려가는
내 영혼의 순수한 몸짓
석굴 구워 소주잔 기울이는
상혼에 찌들은 슬픈 이야기
벗어날 수 없었네
바다와 하늘이 갈라지는
모래성을 쌓는 아이
해맑은 미소 파도에 쓸려가고
바닷가 백사장 끝에
해송 한 그루 울고 있었다.
3부 교단에 서면
교단에 서면 19
- 불현듯 떠나간 제자의 명복을 빌며
황사 현상 자욱한 날에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봄 꽃가루 흩날리듯
호숫가에 부는 바람으로 다가와
작은 파문 일으키며
부서진 너의 아픔
햇살 잘게 쏟아지는 교정
두 뺨에 흐르던 눈물
무심한 구름 흘러가듯
하나도
변함이 없는, 사람
죽이는 사회를 응시하며
또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만 늘어
교단에 서면 20
― 낚시터에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귓가에 스치고
진종일 낚시대 끝에 걸려
아른거리는 기다림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어그러진 얼굴
메아리 되어 수면에 울리고
물오른 나뭇가지마다
돋는 새싹들
여린 목 내밀어
물 그림자 사이로
가끔은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다.
교단에 서면 21
― 교육 개혁 2주년을 맞이하며
활자는 콩기름 잔뜩 묻혀
새벽 공기를 뚫고
햇살 받아 빛을 발하는데
교육 현장은 입시에 죽고 산다.
친구여
그대를 보내던 날
논산 길 시원스럽게 보이는 중턱에서
유난히 아름답던 과수원의 나목들
간간이 보이는 머위의 끈질진 생명력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6차 교육 과정 연수,
수요자 중심 교육,
학교 생활 기록부,
연일 쏟아지는 공문에 치여
체벌마저 폭력으로 둔갑되더니
새로운 수업 준비에 광분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라
빛바랜 낡은 교사 말이 없고
운동장 가의 나무들 묵묵히 변함없는 데
친구여
그대를 보내고도
과로로 휴직한 또 다른 친구의 소식을 접하고
돌아 오는 길에
울고 있는 가로수 사이로
비겁한 나의 모습 감출 수밖에 없었다.
부질 없는 개혁의 소리는
집집마다 울려 퍼지고
현장의 선생들은
또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교단에 서면 22
―고 3 학생의 시대 유감
다 떠나간 뒤에는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어느 만큼은 비워지고
어느 만큼은 채워지면서
숙연히 노을 앞에 지는 것들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대학 입학 수학 능력 시험이
우리에게서 외로움을 앗아갔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모든 것이 열외되고
오로지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황제입니다.
비록 새벽부터 밤중까지
내 교실, 책상에 모든 것을 맡기고
열심히 사랑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집에 들어가면
내 눈빛, 말 한마디에
우리 집의 희비가 엇갈리는.
나는 황제입니다.
신 새벽 교문에 가면
꿈을 간직한
바쁜 걸음걸이를 대할 수 있고,
황혼 어스름에
학교 주변에 가면
시간과 싸우는 한 무리
질서가 실종된
오직 먹고살기 위한
전쟁만 보인다.
지난 3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의 입시에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회의를 느끼다
담배를 배우게 되었고
화장실에서 기쁨을 느끼다
몇번의 청소
정말 마음을 닦는 자세로
반성도 해보았지만
갈수록 떨어지는 성적
모든 것이 성적에 의해 좌우되는
학교는 정말이지 싫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지난해에는
가출도 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의 꼬리표를 달고
어른의 흉내도 내보았습니다.
환락에 젖어 보내는 시간
무엇인지 모를 아쉬움이
간혹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 무엇을 아는 데 1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 버릇 남 주냐고
적응하기 어려워 한 때
죽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회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역시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제 교실, 제 책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해하는 데
1년이란 세월을 문제아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남은 기간 어떻게 시간을 때우고
선생, 부모 속여가며
열심히 하는 척하다 보면
시험일 다가올 테고
적당히 시험보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성적 나오면 여기 저기 원서 내고
기다리다보면 추가합격연락 올 테고
대학 생활의 자유 누리다가
앞날이 컴컴해지면 군대로 도망가기로 했습니다.
교단에 서면 23
- 다시 일상 속으로
비가 내리던 바닷가
아름다운 상념들
밀물 따라 바다로 흘러보내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와
빈 복도
마음의 가장자리를 떠돌던
힘없는 눈동자만
안경 너머로 반짝이고
작은 바램이
빛바란 형광등 아래에서 흐믈흐믈 녹아가면
어느덧 밤은 깊어 가고
여름의 하루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렇게 간다.
교단에 서면 24
어둠이 내리면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위해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길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갈 곳을 몰라
두려웠다.
어둠에
질주하는 차들
저녁이라고
남편 없는 상을 차리는
아내의 힘없는 몸짓에
가위눌린 딸년들
언제 올 지 모르는 아빠를
기다리기가
두려웠다
살붙이를 위해
차를 몰고 돌아오는
신작로 위로
어둠보다 먼저
안개 밀리어 오고
잠들지 못한 딸년들
아빠를 그리며
잠들어 있는 밤이면
교단에 서면 25
복권 한 장에 잠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학교 건물이 보이고 운동장과 함께 공중전화 부스,
한 녀석이 전화를 들더니 선생님이 때리려고 하는데 형사 한 분 보내주세요,
전국 뉴스를 타고 내 귓가에 들려오기까지는
지난 여름
쏟아지는 폭우 속에
아우성치는 파도로 휘몰아와
나를 바다 가운데 섬으로 떠돌게 하고
첩첩이 무너지는 산으로 다가와
갈기갈기 찢어 놓더니
복권 한 장에 잠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교단에 서면 26
-비오는 날에
빗소리 들리는 교실밖에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형광등 빛에 시린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고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잘게 부서지는 빗줄기
강렬하게 다가와선
이질감만 던져 놓고
다시 다가오는 빛 속에
부서지는 빗방울
잔디밭 너머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와
마음을 흔들고 가는
끈질긴 생명력
보리가 출렁이는 하상에는
어린 시절 동무들이
구르고 뒹굴어 하나가 되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촌
가족을 기다리는 듯
문화의 동질성을 상실한
희미한 불빛만이 처량한 빗소리 듣는다.
교단에 서면 27
- 대학 수학능력 시험 전
교실에 앉아
시간의 순수한 무늬가 창 틈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인가, 아닌가
밤늦도록 야간 자율 학습
새벽부터 틀어대는 방송 수업
문제 풀이 과정은 삶의 과정인가.
몇 일씩 아빠를 기다리다
잠들어버린 어린 딸을 바라보는 것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린 딸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고
그리고 더욱 다행인 것은
이제는 마지막 일 것이고
오늘로서 야간 자습이 끝나고
아이들은 수능 점수를 얻어
고민과 희망으로 교정을 떠날 것이고
아주머니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우리 반 아주머니는 귤 한 상자
밀어 놓고 마지막 급식을 마쳤다.
수능을 보면
이 시간에 가족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1999년을 보내며
나는 선생인가 아닌가
반문해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살아 온 생애가 창 틈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교단에 서면 28
- 2000 대학 수학능력 시험 일
짚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달리는 이길
선득한 바람이 도로보다 낮게 엎드려 차창을 흔들고 있다.
4부 선술집에서
금강
- 웅포에서
정겨운 이삭들의 인사
마구 조잘거리는 딸아이를 앞세우고
콩밭 가로질러
둑에 이르면 활찐 갈대숲,
새들 날아와 비행을 연습하고
우뚝 솟은 자태 뒤로
멀리 흐름이 정지된 물결
갑작스런 인적에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이고,
이별을 예감하듯
스러지는 갈대 사이로
부는 바람
번지는 핏빛 저녁 놀
암서재에 와서
- 우암 선생
천지 만물이 태어나는 근본과 성현이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은 모두 곧음이다.
눈이 얼마나 깊어야
화양동 계곡 우암 선생의
깊은 사연을 엿볼 수 있는가
잡풀들만 다투어 목을 뽑은 채
겨울을 뒹구는
역사 속의 화양서원
지나는 길손의 심회를 돕고
유생들이 글 읽던 소리
자연과 하나되어 흐르는
겨울의 암서재 그윽한 풍취에
냇가에서 머리를 감던
당신은 신선이 되어
세월도 더디 가겠지요
계곡이 몸을 비틀며
하늘로 오르려 하고
풀은 자라서 소리가 되고
소리는 계곡처럼 그윽해진다.
선술집에서
비 내리는 백양사 역에 서면
기차는 보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손끝에서 묻어나는
돼지 두루치기, 막걸리가
유난히 촉촉이 젖어드는
산 사나이의 애환이 살아 움직이는
장성 식당만 보인다.
솔밭에서 배어나는 향기
무심히 들여놓은 발길
야생 꽃으로 피어
바람이 전하는 소식
가을 비 적시는 하늘
흐느끼지 않는 서러움 홀로 달래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잔주름 늘어가는 마음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산으로 돌아다닌 반평생이
산야에 핀 난만큼이나
서러운 사연
선술집 주모의 넉넉한
막걸리로 씻어버리고
비 내리는 백양사 역에 서면
오가는 기차 소리 들리지 않고
몸부림쳐 새겨진 지난날이
빗물되어 흐른다.
연포에서 1
폭우로 놀란 가슴
빗속에서 텐트를 걷고
바다가 보아는 산길을 넘어
사람도 없는 민박에 몸을 풀었다.
담배 연기 찌들은 벽지 위에
스쳐간 사람들의 모습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밤새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아내의 푸념소리 들으며
비 내리는 백사장
느럭느럭 발자국 남기며
홀로
깊은 바다를 지나온 바람
온 몸으로 느끼며
얼마나 더 바다를 사랑하고 느껴야 하는지
고개 너머 산사태 소식을 뒤로 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돌아오는 길에
연포에서 2
밤새 내리던
밤새워 연주하던 자연의 울림은
훗날 두고두고 인간에 회자되었다.
여기 저기 산사태,
침수 현장은
주인집 사내의 말을 통해
바닷물 밀려 나가듯 퍼져 나가고
하나 둘 지친 마음
다 떠나고 남은 바닷가에서
아쉬운 듯 불어오는 소금기 머문 바람
멀리 작은 섬 사이로
검은 바다가 작아지면
언제 보아도
물이 빠지는 바다는 알 수 없어
아이들 데리고 뻘에 앉아
잠시 동심에 젖어본다.
춘장대에서
하르르한 솜털 날아와
차랑차랑 흔들리는 솔밭
담배 연기 흩날리면
바람 타고 들려오는
지난 여름,
갯바위 두드리는 파도
소리 없이 부서지고
백사장 나서면 들릴 듯
술밭 숨으면 보일 듯
슬픈 피리 소리로 다가온
동백 움트는 바다
계룡산
- 상신리에서
껄끔해지는 빗소리에
문득
계룡산 바라보면
솔잎 스치는 바람 따라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북소리 듣는다.
물안개 피어올라
갈매빛 등성
살짝 감추오고
연인들의 이야기 귀 기울이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산모퉁이
감사나운 구름
몰려다니더니
먼 고개 티에 박혀
갑오년
서러운 원혼들
눈물 쏟아낸다.
겨울 산행
산에 오르면
겨울 낙엽
쌓인 눈
진종일 비탈을 굴러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
발자국으로 남아
세월을 묻는다.
혼자만의 의미를 반복하는
겨울 산 등산로
꽃피우는 살아가는 이야기
힘에 겨울수록
온몸으로 다가와
눈바람 노출된 나뭇가지
사랑을 배우다가,
삶을 망각하고
오늘도
술자리 찾아가는 야간 산행
계족산 내려오며
봉황정에 앉아 눈 감으면
어렴풋이 들려 오는
어스름 끝에 내리는
버려진 양심의 소리
황혼을 짊어진 발길 따라
문적문적 부서지는 썩은 솔가지
아득히 밀려오는
투박한 오지 그릇 같은
산동네 주민의 사연
애욕이 꿈틀거리는
시가를 바라보며
허든거리는 다리를 끌고
용화사 너덜경 내려오는 마음
머리끝에 스치는데
금강
비단 가람 천사백 리
흐르는 물길 속에
서러운 눈으로
넉넉한 미소로
숨기려는 사연
흘러 마음껏 뽐내
하나로 모이게 하며
아득히 오르는 마을 저편으로
휘돌아 몰아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강
별빛처럼 무거운 시작으로
부강 대곡류에 이르기까지
북서쪽으로 흐르는
반역의 강으로 각인 되어진
푸른 물을 간직한 도도한 가람
들꽃 사이 흔들리는
인간사 그림자를 간직한 채
이슥하도록 돌아오지 않는
금강만이 아는 사연
말하려 하지 않는
외로운 천사백 리 길
난(蘭)
강은 바람으로 그리고
꽃은 시간으로 말하고
난은 정성으로 품는다.
방안 가득 출렁이는 물결 소리
살얼음 냇물 위로
지는 해 아쉬운
꽃대를 도려낸 향이 더욱 진한
난 빛 바라보며
꽃대 올리지 못하는
원망은
가지런히 놓아진 외나무다리
꽃밭
꽃바구니 옆에서
녹차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까?
망설이다
한 밤의 창 틈을 엿본다.
밀려가는 어둠 속에서
귀가 길 서두르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문화촌 집집마다 자리하던 꽃들은
아이들 노래 가사에서나
대할 수 있고
나무 심어 가꾼 공원
이름 모를 나무와 잔디만 푸르고
아파트 베란다
이름도 어려운 풀꽃으로 가득하고
어려서 부르던
채송화, 맨드라미, 나팔꽃은
보기도 힘든 세상
시골 가면 만나볼까
없으면 어쩌나 두려운
신토불이 우리 나라
봉숭아 물 들이던
처녀애들 손톱에는
역겨운 매니큐어만 남아
오늘도 햇빛 받아 빛나는
신토불이 우리 민족
선화 강변
철새 떼 날아와
어둠을 가르며
하늘을 선회하던
선화 강변
가로등 불빛 늘어
강물 밝힐 때
목놓아 울 수 없던
서글픈 새,
이별을 예감하듯
찬란한 불빛만 늘어
無香
밤재 터널 지나
섬진강변 달려온 마음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찻잔에 머금고,
쌍계사 울리는 종소리
반야심경 글자마다
향으로 흩어지고,
차(茶)를 덖는 몸짓
다기마다 흐르는 사연
한없는 이방인의 부러움
■ 해설
다시 몽상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이종진(시인)
Ⅰ
참 좋은 계절이다. 꽃 피고, 그 꽃들을 벌들이 희롱거리고, 피는 꽃에 한 없이 넋을 잃고 앉아 있고 싶은. 그러고 보면 여러 날이 지난 것 같다. 겨울 바람과 봄바람이 알맞게 섞여 불어대는 어느날 이었으니까. 내가 다른 곳에서 지내다 다시 거처를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으로 옮기면서 나의 묵은 친구 몇이 집들이 겸 좋은 글 쓰라고, 터를 눌러 주려 왔던 것이. 산방(山房), 말이 그럴싸하지 산방(山房)은 무슨. 난 그냥 산 속에 빈집이나 우거(寓居)라고 하고 싶어진다. 터가 실제 눌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말을 핑계 삼아 순전히 짠조되게 술을 한 번 퍼 마시자는 것이겠지. 마시려는 은밀한 수작이 벌어지려고 할 때, 그간 틈틈이 썼다며 원고 뭉치를 나에게 던져 놓는다. 던져 놓으며 멋적어서 뒷통수 긁는 소리이지, 지 뱃속까지 다 보여주자니 은근히 부끄러워서 하는 소리이지 말이 틈틈이 쓴다는 게 뭐 그리 쉬운 일일까. 학교 가면 애들한테, 웃전한테 부대끼고, 술이라도 한 잔 다소 걸치고 늦게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에 애새끼들 한테 밤낮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썼을 일인데 얼마나 고생 많았을까. 오죽 했을까.
A4 용지의 뒷면에는 학생 생활 기록부를 만들다가 파지가 됐는지, 그러한 재생 용지의 앞면에 알알이 박힌 초고 활자가 안스럽다. 대견하다. 그 대견스러움을 넘기고 넘기며 읽다보니, 아, 삶의 모습이 그렇구나, 그럴수도 있구나 하며 난 몇 번이고 읽기를 멈추고 멍하니 앉아 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여 읽고는 난감하기가 짝이 없다. 책 뒤에 발문인지 뭔지를 써내라는 것인데, 무엇을 써야 하나,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하니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마누라한테 들킨 졸인지 뭔지 모르게 망막하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수작을 걸어오는 것도 여러 가지이다 싶다. 난 어제 겨우 없는 집 담 엮듯 엉성하게 벽지 바르고, 장판을 깔고 신방이랍시고 차려 놓고는 이쁜 새 마누라 쪽머리 비녀도, 섬섬옥수 술잔도 한 잔 건너지 않았는데, 뭐, 시집을 낸다고, 내겠다고. 자랑을 하는 것인지, 누가 염장을 꾹꾹 쑤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세상에 별반 유명세도 없고, 탤런트는 더더욱이 아닌 내게, 내게 켕기는 대로 몇 줄 쓰란다. 몇 줄이라고, 정말 무엇을 몇 줄 써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간 이 책 저 책 뒤에다 쓴 발문인지 뭔지를 꽤나 읽어보고 냄새 맡아보니, 계꾼들끼리 어울려 계돈을 테워주는 것인지, 술 따르고 안주한 젓가락 먹여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참 ‘이쁘고’, 환장하게 고상하고, 칭찬 일색의 글줄들만 냄새 맡아지는 것이 미치겠네, 천성이 품위와 품격하고는 어디인지 모르게 거리가 있는 내가 원고는 덜렁 받아 놓고는, 내 자신이 글쟁이라고 은근히 뻐기면서 살아왔는데도 남의 글줄에 이러쿵 저러쿵 헷소리에 잔소리 까지 늘어 놓는다는 일이 참 어이가 없다. 넘들이 하는 대로 법대로 해, 어째. 좌우지간에 이 말 저말로 시비 걸어가며 내 나름대로 요렇게 궁시렁 떠는 것은 친구의 글에 조금이나마 누가 될까하는 마음이 먼저 앞서가기도 하지만 이 이쁜 내 친구 놈이 『황토재에 부는 바람』이후에 또 한 권의 책을 묶는다는 데에 속으로 무지하게 부럽고도 부러운 내 마음을 감춘다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간다.
Ⅱ
안개 낀 날에는
남 몰래
밤길을 걷고 싶다.
아픈 기억들
멀리 산을 타고 넘어
부서지는 불빛 사이로
어둠을 가르며 사라지는
그리운 얼굴들
담배 연기 하나 되어
눈이 시리도록 아픈
몸뚱이를 부여잡고
풀기 없는 희망 위해
서럽게 서럽게 걸어 보는
도시의 거리 사이로
안개꽃 한다발 움켜쥐고
혼자인 나를 느낀다.
안개가 낀 날에
남 몰래
밤길을 걷는다.
「밤길」 전문
그러니까, 우리가 박박 밀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만났던 게 고교 시절이니까 20여 년을 벌써 물 건너듯 훌쩍 넘어버린 지금. 몇몇은 염색을 해서 자신의 흘러간 세월을 감추고, 몇몇은 그 세월에 묻혀 그저 녹이 슬어 가는데, 난 내 친구 김원진의 글을 읽으며 한없이 그리워지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유효한 젊은 날이 스스럼없이 떠오른다. <유년의 모습들이 하얗게 일어서>는 신탄진 강가에서 고교 문사이었던 우리들이 무엇하나, 누구 두려울 것 없이 소주를 마시며 철부지 문학에 심취하여 밤을 세울 때, <달빛 쏟아지는 강가에서> 우리가 가졌던, 깊이 품었던 소중한 것들을 다 쏟아내며 <영혼의 순수한 몸짓>을 주체할 수 없어 울어버리지 않았던가. 우리들의 반짝이는 영혼의 울음 사이로 밤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지 않았던가.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졌던 젊은 날일 것이다. 앞뒤 분간이 서지 못한 채 백정처럼 패기만만하게 칼을 또는 침대롱을 흔들어대는, 그래도 젊다는 것이 이를 모두 용서해 주고 용서받는 아, 젊은 날.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제는 이미 아름다운 말이 되어 버렸던가.
대전역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 중앙로를 따라 몰려다니던 젊은 날. 은행동 예식장을 빌려 문학제를 하고 중국 집에 모여 앉아 짬봉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더러는 이쁜 여학생에게 접근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기도 했던. 두부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 놓고 달빛보다도 더 빛나는 문학을 마시며 실컷 취해 버렸던 젊은 날. 삼삼오오 어울려 밤거리를 걷던 단발머리 그 계집아이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슨 꿈들을 꾸며 살아갈까. 아직도 난 그때만 떠올리면 아득하여라. 지금의 내 삶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그때 그 골목길로 달려가고 싶어라. 그런데 그러한 꿈들을 나의 친구 김원진은 지금도 몽상하고 있구나. 남모르게 꾸고 있었구나. 시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질을 감히 누군가 나에게 물어 온다면, 여전히 몽상하는 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고, 그 끝없는 몽상만이 그 시를 끝없이 감동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Ⅲ
철 이른 한파가 몰아와도
고향은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언 뺨에 맞고 싶은
황토재 고갯마루에
흩날리던
눈
질퍽거리는 마당을 가로 질러
뒤란 대나무에
떨어지는
햇볕
늙은 형수가 온 몸으로 지키던
옹기 항아리 몇 개 남은
큰집이 혼자 떨고 있다.
「고향」 전문
난 지금 나의 우거(寓居)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다. 내 친구의 책 뒤에다 몇 개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꼬리표를 만드는 내가 있고, 또 하나의 내가 있다. 내 속의 또 하나의 난 지금 내 친구와 길동무되어 추억으로의 여행을 채비하고 있다.
죽창 빼들고, 붉은기 앞세우고 황토현의 바람이 불어대는 너의 고향 정읍 뜰. <늙은 형수가 온 몸으로 지키던 옹기 항아리 몇 개 남은> 추억의 집으로 너와 여행을 하고 있다. <골이 깊으니 꿈도 더디 가는> 너의 고향집 <천장에 걸린 형광등> 불빛 아래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다. 이 얼마 만에 너와 나의 여행이든가. 그간의 어떤 삶이 우리를, 너의 피붙이를, 너의 마음 속 작은 언덕을, 너의 꿈을 이토록 멀리 갈라놓았음을 알고 난 너와의 여행 길에게 그만 눈앞이 아득해 지고 마는구나.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버릴 수도 없는 고향. 유목민처럼 떠돌다가도 하늘 한켠에 초저녁별 일찍 뜨면 그 아래에 움크리고 있는 고향을 너는 다시 떠올린다. 가고 싶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이다. 유년이다. 생의 전부이다. 부서지고 부서진 몸뚱아리 끌고 달려가면 언제이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난 지금 네가 그토록 꿈을 키우던 만경강 가에서 게헤엄을 쳤을 너를 생각하니, 나도 문득 나의 고향 선친의 묘소 앞 봄바람을 흔들어 대는 할미꽃이 그리워지는구나.
Ⅳ
어둠이 내리면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위해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길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갈 곳을 몰라
두려웠다.
어둠에
질주하는 차들
저녁이라고
남편 없는 상을 차리는
아내의 힘없는 몸짓에
가위눌린 딸년들
언제 올 지 모르는 아빠를
기다리기가
두려웠다
살붙이를 위해
차를 몰고 돌아오는
신작로 위로
어둠보다 먼저
안개 밀리어 오고
잠들지 못한 딸년들
아빠를 그리며
잠들어 있는 밤이면
「교단에 서면 24」 전문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가.
난 오늘 너의 시 속으로 무한 걸어가면서 너의 슬픔을 읽는다. 너의 슬픔 뒤에 두 눈 깜박거리는 너의 딸들을 읽는다. 너의 슬픔 뒤에 아침 냉수 한 사발 떠들고 오는 너의 아내를 읽는다. 무너져서는 안돼라고 소리치는 너의 교단을 읽는다. 가계(家系)를 읽는다. 그보다는 절대 무너지지 않으려는 너를, 너를 읽는다. < 계족산을 반쯤 가린 안개 나도 반쯤 가리운 인생 >을 읽으며 지금까지의 어떤 삶이 너를 힘들게 했는지 읽는다. <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모든 것이 열외되고 오로지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 >라고 힘들어하는 제자의 어깨를 안쓰럽게 감싸며 사도(師道)의 길이 무엇인지 번민하는 너를, 우리 사회의 슬픈 선생을 읽는다.
그렇지만,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어린 딸들이 뛰어나와 너의 손을 잡으며 메달릴 때, 너를 < 바다 한 가운데 섬으로 떠돌게 하 >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는 너를 읽는다. 슬픔이 기쁨으로 보상되는 너를 읽는다. 그러나 아직도 슬픔이 기쁨보다 더 짙게 뒤섞인 너를 읽는다. 이럴 때 난 너의 슬픔과 기쁨을 어떻게 위무해야 하나. < 어둠이 내리면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위해 저녁을 먹고 > 집으로의 귀소가 아닌 교실로 귀소하는 너의 뒷모습에다 대고 ‘다 그런거야’하고 말해야 되나. ‘사는 것이 다 그런거야’라고 해야되나.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기쁨이라고 말하는 그 기쁨은 슬픔이 늘 책받침처럼 받쳐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늘 기쁨과 슬픔은 친구이자, 먼길을 동행하는 우리들의 삶인 것을.
하지만 이 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너의 슬픔을 사랑하고 싶구나. 아, 결코 넘어져서는 안 되는, 넘어질 수 없는 나의 친구 김원진. 슬픔의 날들이 쌓이고 쌓여, 이젠 그 슬픔이 기쁨이 되는, 그리하여, 우리 어깨동무하고 지나온 그간의 길보다는 앞으로 밟고 가야 할 길로 이제 너와 여행을 하고 싶구나.
Ⅴ
그 때, 우리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아름다웠던 꿈들을 하나씩 꺼내 놓고 눈물 글썽이며 밤새도록 소주를 마시고 싶구나. 안녕. 다시 몽상의 세계로 새로운 여행을 막 출발하며, 친구여 다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