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련 외
조 영 심
목련 한그루
올해도 한 상 걸게 차려 놓고 있다
땅기운 채 풀리기도 전에
크고 작은 하얀 접시들을 챙기더니
남쪽 끝에서 올라온 냉이
살짝 데쳐 된장에 버무려 놓고
새콤하게 묻힌 고들빼기
참 취, 곰 취, 개미 취 어린잎도 데쳐 무치고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두릅 옆에 초고추장
생으로 무치고, 데친 미나리나물
쌉쏘름한 달래 버무림
돌나물을 넣어 시원한 물김치
머루 잎자루를 삶아, 볶음, 조림, 짱아찌며
그릇 마다 쌀밥 소복하게 담아놓고
맑은 된장국 쑥 향이 가득하다
풀은 아무것이나 뜯어 먹어도
약이 된다는 이른 봄날
남녘에서 올라온 햇살이며 바람이며
데치고 버무려,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있다
강 가 *
조 영 심
강가에 가던 날
할아버지 지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네
얘야, 강 건너 편에 더 좋은 곳이 있단다
나를 따라 가자꾸나
숨 달린 것들은 모두 강가로 오네
강가로 들어와,
평생 걸친 몸뚱이를 어머니의 물*로 닦아내고
장작개비 불살라 살과 뼈가 재가 되면
강물 따라 혜안의 언덕까지 간다네
이 질긴 생의 고리를 끊는다네
갠지스 강가 누구의 초상인지
막 장작에 불을 지피자
주검을 보려고 산자들이 모여 들었네
일백여덟 지류로 흘러온 생각들
보이는 것조차 믿지 않았던 눈
겉 소리에만 솔깃했던 귀들
남을 닦달하며 쉴 틈조차 없던 세치 혀
너를 위해 쉽게 덥히지 못한 가슴
제 몫을 챙기려 더 바빴던 다리
몸뚱이를 감쌌던 허울까지
장작불에 먹혀 한줌 재가 되네
강물은 재를 안고 조용히 떠나네
산자들은 강가에서
제 죄를 제가 묻는 양
옷 벗어 두들기지만
때 절은 속까지 벗을 수는 없는 것을
강가, 할아버지가 따라 오라던
꿈속처럼 안개 자욱한 건너편에
홀로 서 있네
물살들 내 안의 실뿌리를 흔드네
** 강가
인도의 갠지스 강을 힌두어로 강가라 함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물이여 어머니의 강이라고 함
아라크네 *
조영심
나에게도 집 한 채가 생겼다
바람 길이 끊이지 않는 집
멀리까지 풍경이 내다보이는 집
허공을 가로지른 집
아침 이슬 한 방울의 무게에도
통째로 휘청거리는 집
누구라도 한 번 들어서면
방과 방의 미로를 빠져 나갈 수 없는
블랙홀을 가진 집
한창 때 기를 죽였던 단칸 방 시절
턱을 괴고 앉아
가장 맑게 빛나는 별나라에
숱하게 집을 짓고 허물었듯
닫힌 방 문고리 열어젖히면
소리와 문자와 그림들이 동시에 달려 나오는 나의 집
오늘도 나는 손가락 하나로
판도라가 쏟아 놓은 세상의 창문을 열고 닫는다
익명의 그 바닷가로 나가 혼자서 써핑을 즐기기도 한다
신들도 때로는 실수를 하여
자기 꾀에 갇히는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눈 깜짝할 사이
옴짝달싹 못하는 세상의 함정 위
나는,
날마다 씨줄과 날줄을 뽑아
허공의 집 한 채
안식을 보수한다.
** 아라크네 [Arachne] :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직조 기술이 뛰어나 아테나에게 벌을 받아 거미가 된 여성.
네팔인 니르
조 영 심
걸어서 갈까 날아서 갈까 레썀 삐리리
탈 것에 실려 하루를 달려, 다시 외줄로 강을 건너고 하늘로 이어지는 산길을 밟아 꼬박 하루를 돌면 또 다른 골짜기로 이어지는 언덕배기, 사철 눈 덮인 산봉우리가 하늘을 둘러친 곳에 네팔의 꼬마 니르가 살았다.
산속까지 흘러 들어온 네모난 상자 속에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서로 울고 웃기는 그들을 스위치 하나로 틀었다 끄는 요술 소리통은 날마다 어린 니르에게 꿈의 풍선이었고 바람의 사원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어느 날 팔뚝에 살 오른 세 동무와 그 풍선 줄을 잡았다 산 너머 강 건너 다른 세상에 떠돌다 떼돈을 번다는 소문에 부풀어 단숨에 동쪽의 작은 나라 꿈의 코리아로 방향을 틀었다고.
달포도 안 되어 발을 헛디딘 한 친구 공사장에서 먼저 가고, 손이 절단 난 친구도 돌아가고 땅도 물도 설은 구석진 방에 송아지 눈망울을 한 니르만 남아 사장님 눈치 보며 욕을 약 삼아 버텼다고.
푸른 하늘 끝닿은 고향집의 흙벽을 벽돌로 다시 쌓고, 제 이름 붙여 땅 넓히는 재미로 젊은 피를 찍어 뼈에 새기고 지우면서 다시 되뇌어 보는 한국 말 한국 노래 그리고 아리랑 아라리요.
새 기운으로 채워진 풍선을 타고 고향으로 가던 날, 비상약 다루듯 사장님의 욕도 챙겨 넣은 청년 니르가 고향에선 개천의 용 났다고,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나랏돈 노자삼아 한국어 서당에서 다시 삼년 세월 풍월을 읊었기 때문이었다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제가 만든 풍선의 풍향을 조율하며 사장님 같은 여행객들에게 농을 치며 밀양과 정선아리랑을 불러주는 두 아이의 아버지, 니르가 가르쳐준 네팔 아리랑을 오늘은 내가 흥얼 거린다.
걸어서 갈까 날아서 갈까 레썀 삐리리
걸어서 갈까 날아서 갈까 레썀 삐리리
끼니는 돌아온다
조영심
끼니는 돌아온다 끼니를 놓쳐도 끼니는 오고 끼니를 챙겨도 끼니는 온다 한번 지나간 끼니는 지금의 끼니가 아니고 지금의 끼니는 다시 올 끼니가 아니다 끼니는 건너뛰는 법이 없고 앞당길 수도 미룰 수도 없다 끼닛거리 없는 이에게도 끼니는 오고 넘치는 이에게도 끼니는 온다 끼니는 알 수 없는 것 누가 뭐래도 끼니는 끼니로 들이 닥친다 끼니 사이의 무수한 새참도 끼니 앞에서는 무효다 끼니는 과하지도 터무니없지도 않은 끼니일망정 끼닛거리가 없는 이에게는 더 가혹하다 끼니가 없는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울타리에 남아있던 온기는 어느새 샛문을 열고 나가 버린다 끼니는 걱정하는 가장을 밖으로 내 몰아 그의 등을 휘게 한다. 끼니를 찾는 이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돌아오는 길을 막는 바람에 질긴 핏줄들 눈물끼니 짓게 하기도 한다 끼니도 사람의 일이라 끼니를 거르는 일이 끼니가 되면 목구멍에서 거짓이 기어 나오고 끼니를 건너뛰는 일이 끼니를 때우는 일이 되면 두 발이 먼저 알고 남의 담을 넘는다 끼니는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 끼니가 뒤집혀 고향산천 뒤로하고 명당을 찾아가도 끼니는 끝이 나지 않는다 끼니는 어김없이 먹던 밥을 찾아서 해마다 그날이 오면 돌아온다 제 혼 불 들고서 끼니는 버젓이 다시 돌아온다
당선소감
조영심
언어에 나를 매달았습니다.
내 사유의 편린들을 정제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도 내 혀끝에 놀던 언어가 가슴에서 손끝으로 옮겨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소망 하나 한결같이 품고 가다보면 그리운 모습들 만날 날이 올 것 이라 수없이 기도했습니다.
제 기도의 응답 같은 날이 왔지만 벙어리 냉가슴으로 아직 더듬거릴 뿐입니다.
두렵고 떨립니다.
오직 홀로 외롭게 싸워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에게 응석을 부릴 수도 함부로 투정을 부릴 수도 없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부족한 글에 물꼬를 터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시를 온몸으로 쓰겠습니다. 무기교의 기교로 꾸밈없는 삶을 노래하기 위해 부단히 마음의 밭을 갈고 일구는 부지런한 농부가 되겠습니다.
시의 세계로 입문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시고 시의 방향을 잡아주신 송수권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 한편 쓰고 죽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 다시 한 번 새겨두겠습니다. 함께 고민해 온 문우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칠순의 나이에도 연필심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쓰듯 하루를 또박 또박 메일로 보내 주시는 어머니. 가장 절실한 시 한편을 매일 받아보는 행복한 딸입니다.
그리고 항상심으로 기꺼이 저의 배경이 되어 주는 든든한 후원자 자작나무님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약력 :
조영심(趙英心)
1961년 전북 전주출생
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현 전남 여수정보과학고등학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