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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속으로
2011년 겨울의 시들 김이듬, 김이듬, 이근화, 박진성, 김재훈, 박상순, 김소연의 시들
장은정
우리는 어디에서 시를 쓰고 읽고 있을까. 이 질문은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질문은 자기 자신의 정면에 오로지 시만을 맞세움으로써 시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면, 후자는 전자가 누락한 세계를 다시 불러들여 지도처럼 넓게 펼친 다음 그곳의 단 한 지점에 깃발을 꽂는 일에 가깝다. 이것은 냉정한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한다. 깃발의 위치가 어디이건 간에 ‘여기’를 설정하는 일은 ‘여기가 아닌 무수한 곳’을 설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또 다른 날 선 질문을 불러온다. 어째서 여기여야 하는가. 왜 이 곳이 아니면 안 되는가. 우리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인가? 이것은 시를 쓰는 자들에게 있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선행하게 되는 ‘최초의 질문’이며, 좋은 시를 읽은 후에 느끼는 기쁨 이후에도 독자들이 스스로 던져야 할 ‘최후의 질문’이기도 하다. 쓰는 자들은 자신이 ‘어디서 쓰고 있는가’에 대해, 읽는 자들은 자신이 ‘어디서 읽고 있는가’에 대해. 시인과 독자(비평)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질문은 명확하게 의미화 되지 않는 장르인 ‘시’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어서 마치 입 속에 물을 머금고 말하는 것처럼 대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물을 뱉거나 삼키지 않고, 웅얼거리는 불명확한 발음으로나마 답하고자 계속 시도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 글은 시들의 웅얼거리는 질문과 대답을 받아 적고, 동시에 그 질문과 대답을 듣고 있는 장소를 다시 되묻고자 한다.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어디에서 시를 쓰고 읽고 있을까.
1. 장소로부터 배제당하는
매년 이맘때쯤 터지는 폭죽소리 환호하는 사람들 발산하고 발작하고 발화하고 발포하고 발을 굴려요 실신할 때까지 그러고 싶으면
귀를 막아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훤하다면 갈등도 없이 가고 있다면 축제는 돌아오고 장사는 끝날 줄 모르고 확성기는 꺼질 줄 모르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네가 그들과 같이 간다 해도
……중략……
한번 시인은 영원히 시를 쓰고 일단 화가는 계속 화가고 화가 난 어중이떠중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게다가 넌 계단을 치우지는 않잖아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계속 올라가고 옥상에는 비밀 화원이 있고 떨어지던 사과가 아직도 떨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수줍게 키스를 나누고 영원히 키스를 해야 한다면 웃는 사람들만 계속 웃는다면
만년청춘이라면
이토록 생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순간순간이 축복이라며 눈을 돌리고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저 시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해도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해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떠나야 해요 나는 거기가 어디든
― 김이듬, 「만년청춘」부분 (『문예중앙』2011년 겨울호)
흥미롭게도 이 시는 ‘시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진단하면서 역설적으로 있어야 할 곳을 모색한다. 시가 보기에 이 세계는 축제장이다. 폭죽소리,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 장사꾼들의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이곳은 “귀를 막아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훤”하다. 그런데 어째서 축제장인가. 축제에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즐겁게 수행해내고, 그 역할을 분배하는 그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음반을 사고” “그림도 살 수 있”는 자들은 “살 수 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고 “한번 시인은 영원히 시를 쓰고 일단 화가는 계속 화가”다. 그들은 축제가 지정해준 각자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일만을 반복한다. 그 곳은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계속 올라가”는 곳이다. 축제의 세계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시는 시의 장소로 지정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계단 청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으면서, 시만을 쓰면서, “순간순간이 축복”이라고 말하며 “눈을 돌리고 보면” 그 축복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시라면, 모두의 역할을 분배하여 영원히 같은 일만을 반복하게 하는 축제의 구조 자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시의 결론은 명확하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축제 속에 안락하게 앉아있는 시인의 말대로 생이란 순간순간이 축복일지라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 이 시는 일종의 다짐과도 같은 시다. 시는 축제장 속에 포함된 ‘시라는 역할’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어디로 가야하는가. 물론 축제장에서 마련해준, ‘시’라는 간판을 붙인 전시 부스를 허물고 떠나야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이 시의 결심에 동행하게 된다면, 다음의 시가 흥미롭게 읽힐 것은 명백하다.
숲으로 엠티 왔네 이름도 거시기한 반성수목원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과 함께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퍼지는 햇살 아래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고 마시네 먹을 게 넘쳐나네 신비한 숲속의 향연이 따로 없네 저만치서 걸어오는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한 그가 히죽히죽 어슬렁거리던 그가 내게 다가오네 먹다 남은 음식 좀 달라고 하네 연신 손바닥을 비비네
흠뻑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왔네 혼자서 칠갑하고 있겠지
먹던 도시락을 건네네 방울토마토 굴러가네 마시려던 맥주병도 던져주었지 내 곁에 쭈그려앉은 그가 추잡한 옷차림의 그가 여기저기 버려둔 떡이며 찌꺼기 같은 걸 갈퀴 같은 손으로 끌어와 입으로 주머니로 쑤셔넣는 그가 게걸스럽고 무례하고 추례한 또 뭐라고 할까 그래 인간도 아니다 수치심을 이긴 죽음을 극복하는 허기 불멸하는 궁기 그리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신이다 신이 오셨다
걸신도 되지 못한 아버지를 두고 왔다 자꾸 미끄러지는 턱받이를 하고 음식을 토하는 어린애를 혼자 두고 왔다 반성수목원으로 동료들과 섞이려고 반성은커녕 식물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어이, 알거지병신새끼라고 부르고 싶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아버지가 고이 기저귀에 똥 싸면 될 것을 엉덩이로 비비고 뭉개 온몸에 처바르면 내가 곁에서 오래 닦고 치워야 하니까 어디 도망 못 가라고 날 미치게 하려고 바꾸려고 수련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텐데
동료들이 또 웃네 내게 손가락질하네 넌 왜 만날 따로 있어? 그렇게 잘났어? 거기가 좋아? 둘이 제법 잘 어울려
동료든 아버지든 내 가슴 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구역질나는 미신 엉덩이 털고 일어나 나는 풀밭으로 뛰어간다 푸닥거리하듯 떡과 밥 사이로 쓰레기 오물과 웃으며 뒤집어지는 사람들과 배불러 죽겠는 사람들과 걸신과 환자 사이로 펄쩍펄쩍 넘어다닌다 얼추 미친년처럼
― 김이듬, 「너라는 미신」전문 (『창작과 비평』2011년 겨울호)
이 시는 축제를 떠나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탐색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시의 배경은 여전히 축제다. “이름도 거시기한 반성 수목원”의 “숲”에서 축제는 이어지고 있다. 화자는 동료들과 함께 엠티를 와 있는데, 이곳의 풍경은 흡사 “퍼지는 햇살 아래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있어서 “신비한 숲속의 향연이 따로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이 완벽한 축제의 표면을 찢고 나오는 두 명의 존재가 있다. 한명은 화자가 집에 두고 온 아버지이다. 화자는 그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신비한 숲속의 향연”에 온전히 속할 수 없게 된다. 숲 속의 소풍을 묘사하다가 불쑥 생각나버리고 마는 아버지에 대한 2연(“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은 4연에서(“흠뻑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왔네 혼자서 칠갑하고 있겠지”) 더욱 구체적으로 다시 묘사됨으로써 소풍의 화사한 이미지를 다시금 “칠갑”해버리고 있다. 소풍을 망치는 두 번째 인물은 걸인이다. 그는 “먹다 남은 음식 좀 달라고” 하면서, 연신 손바닥을 비빈다. 동료들 모두가 그를 외면하는데, 화자만이 그에게 도시락과 과일과 술을 건넨다. 그녀는 소풍의 세계에서 ‘영원히’ 소풍을 즐기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그는 “게걸스럽고 무례하고 추례한” 모습으로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이 들만큼, 어떤 수치심도 없이 허겁지겁 음식물들을 집어삼킨다. 한편으로는 예쁘고 화사한 소풍의 세계에 속한 동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와 굶어죽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걸신이, 시에는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여기까지 따라오자면 화자는 후자의 장소에 서서 화사한 소풍을 냉소적으로 웃는 것으로 귀결될 것만 같다.
하지만 보란 듯이 시인은 다시 장소를 옮긴다. 마지막 연을 보자. 화자는 돌연 전자와 후자의 세계를 하나로 묶으면서 “동료든 아버지든 내 가슴 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구역질나는 미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곤 “나는 풀밭으로 뛰어간다”. 마치 굿을 하듯이, “떡과 밥 사이로 쓰레기 오물과 웃으며 뒤집어지는 사람들과 배불러 죽겠는 사람들과 걸신과 환자 사이로 펄쩍펄쩍 넘어다닌다”. 어째서일까. 사실상 소풍의 세계는 거짓과 위선으로 범벅되어 있으므로 속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병자와 걸신의 세계는 속해있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속해있기 ‘어려운’ 곳이다. 화자는 모두가 외면하는 걸신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 자이지만, 동시에 아버지를 모른 척 외면하고 동료들과 소풍 온 자이기도 하다. 화자는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에겐 소풍의 세계를 냉정하게 냉소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결국 화살은 화자의 “내 가슴”을 겨냥한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속하지 않기’와 ‘속할 수 없음’ 사이에서 휘청이고 있다. 시가 있어서는 안 될 곳과 시가 있어야 하지만 인간의 한계 조건 때문에 속해 있기 힘든 두 영역 사이를 오가며 두 영역의 경계를 ‘칠갑’하는 것이다. 시는 결국 모든 장소에게 배제 당한다. 전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배제하며 후자는 스스로의 고통에 의해 배제 당하는 것이다.
김이듬의 시가 딛고 있는 최초의 장소는 분명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의 층위에 있다. 그래서 김이듬의 시에서 ‘나’는 대부분 시인 자신으로 대체하여 읽어도 무리가 없어서 어떤 발견이나 깨달음 역시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들린다. 물론 그 목소리는 시 속에서 현실에 대한 반성적인 시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현실에 밀착되어 있으나 속박되지는 않는다. 「만년청춘」, 「너라는 미신」 역시 마찬가지다. 전자는 현실적 영역을 ‘축제’라는 비판적 해석/자아 반성을 통해 거리 유지를 하고 후자는 엠티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시적 해석과 엠티에 참석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시적 거리를 획득한다. 이때 시의 장소란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반성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2. 여기는 어디일까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불편한 식사를 거절하고
약속을 만들지 않고
형광등 불빛 아래 빛나는 초콜릿 바를 깨문다
끈적한 입속에 가지런한 이들이
다가올 여름을 위해 제대로 썩어간다
퇴근길에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의 유전자가 냇물같이 흘러서 어디에 이를지 고민하다가
발이 세 개인 수레가 남기는 긴 흔적을 따라가본다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아이들의 입속에서 예고 없이 흐르겠지
아이들의 턱밑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산다면
다가올 여름을 위해 나의 사람과 너의 사람을 준비하고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 이근화, 「한밤에 우리가」전문 (문학과 사회 2011 겨울호)
우선 가정을 세워보자.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그곳에는 축제 속에서는“보이지 않는 산”이 보이고, “흐르지 않는 강”이 흐르지 않을까? 이 시의 화자에게도 그런 기대가 있는 것 같다. 아마 여름에 그곳에 갈 예정인가보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도 화자는 다가올 여름을 기대하고, 그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다. “불편한 식사를 거절하고/약속을 만들지 않”으면서 말이다. 일상 속에 작은 기대가 이렇게 스며들어 자리를 잡아 간다. 그런데 가슴 부풀어 오르는 이 기대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렇게 핑크빛을 띠고 있지만은 않다. “끈적한 입속에 가지런한 이들이/다가올 여름을 위해 제대로 썩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일상이란 “퇴근길에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손”이 있고, “우리의 유전자가 냇물같이” 흐르는 곳이다. 그런데 다가올 여름이 일상에 스며든 순간, 화자는 퇴근길에 아이들을 직접 번쩍 들어 올리는 대신 그 손을 바라본다. 우리의 유전자가 어디에 이를지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발이 세 개인 수레가 남기는 긴 흔적”이 결국 어디에 당도하는지를 “따라가본다”. 그리고 불현듯 알게 된다. 여름 그곳에 집을 짓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대로라면, 아이들의 입속에서는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예고 없이” 흐를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마지막 연이 참 이상하다. 표면적으로는 1연의 반복임은 분명한데, 2~3연을 통과하면서 4연은 1연과는 다른 의미로 변하게 된 것 같다. 두근거림이 맥박처럼 뛰고 있던 1연의 기대는 4연에 이르러 어딘가 확고한 체념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일상 속에는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흘러들면서 이를 썩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여름의 중남미가 설렐까? 이것은 막연하고도 근거 없는 추측이지만, 화자는 여름이 와도 결코 중남미에 가지 않을 것 같다. 어쩐지 화자는 그곳에 가도 산을 볼 수 없고, 흐르는 강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보이지 않는 산”과 “흐르지 않는 강”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닐까. 앞으로도 영영 보이지 않을 것이고 흐르지 않을. 사실상 이 시에서 화자는 어디로도 이동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여름에 치킨버스를 타러 가볼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화자가 속해있던 장소는 퍽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는 일상에 있지만 일상에 완전히 속해 있지는 않다. 우리의 유전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흐르는 냇가의 일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가려고 했던 장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시란 우리가 있는/있으려는 곳이 사실은 있지 않음을, 그 장소의 의미를 바꾸는 곳에 위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 시를 어디서 읽었는가. 시를 읽고 나서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좋겠다.
이근화의 「한밤에 우리가」는 김이듬의 시만큼 현실에 대한 밀착도가 높지는 않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시적 정황과 일상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김이듬과 마찬가지로 현실적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김이듬의 시가 직접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시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묻는다면 이근화의 시는 우리가 딛고 있는 곳의 의미를 묻는다는 차이를 지닌다. 즉 이근화의 시적 자리는 현실로부터 질문과 관찰을 통해 그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존재하고 있다. 「한밤의 우리가」의 경우는 마치 서 있던 자리에서 잠시 시의 눈을 감았다가 뜨자, 장소의 의미가 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이 시적 행위가 이근화 시의 핵심이자 자율적 영역임은 틀림없다.
4. 뛰어드는 장소들
여기는 불 안이야 타오르고 있어 고갤 드니까 음악들은 수직으로 뻗어오르네 질량 없는 음악들, 어스름한 빛들, 그래 여긴 빛의 제국이야 우리는 음악도 버리고 술도 버리고 어두워지고 싶은데
촛불 앞에서 미간을 만지며 노래를 부르는 너는,
야야야야야 장미야 불안을 연주하느라 손가락이 시뻘겋게 젖었구나 장미야 오월인데 너는 성기를 어디에다 던져주고 혼魂만 타오르고 있니
촛불 위에서 기타줄을 튕기면서 나는,
에헤헤헤에 바람은 불꽃을 밀어 올리려 사방팔방 촛불을 에워싸는구나 나무는 온몸이 성기잖니 새벽의 우주를 간음姦淫하려 바르르 부르르 떨고 있잖니 거대한 촛불 수령 사백 년 화계사 느티나무 아래가 내 고향이야 볼래?
몽상을 몽상하는 몽상적인 심령학자 표정으로 원광스님 불광스님 적광스님 촛불을 숲에서 들고 나오면
촛불 아래서 촛대를 움켜쥐고, 떨어지는 촛농을 발가락 발바닥 발목 발뒤꿈치로 받아내면서
우리는 기약 없는 높이를 사랑하였네 앗 뜨거 앗 뜨거 뜨거우므로 공중으로 튀어 올랐네 뜨거움으로 음악을 고독을 술잔을 버려진 아이들을 연주하였네
자, 합창
촛불 속의 불꽃 속의 가느다란 꽃, 가열한 떨림 가열차게 허공으로 행진하는 공기들
심지는 불 안으로 기어들면서 촛대가리를 벗겨내면서 심지는 불을 먹으면서 불안을 먹어치우면서
수직으로 수직으로 고요하면서 자, 우리는 새벽을 통째로 삼키면서 마침내 우리 자신의 죄를 태우면서 노랠 부르면서
― 박진성, 「촛불에서」(『애지』2011년 겨울호 )
김이듬, 이근화의 시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적 장소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시적 장소를 발견했다면, 이 시는 정반대로 시적 장소의 중앙으로 직접 뛰어드는 것을 통해 시적 장소를 발견한다. 첫 문장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듯, “여기는 불”의 내부이고 불과 함께 “타오르고 있”는 이곳은 “빛의 제국”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인가. 이 시는 “촛불 앞에서 미간을 만지며 노래를 부르는 너”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으로는 촛불 앞에서 노래 부르는 네가 있고, 그 노래를 들으며 마치 촛불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화자가 있다. 화자를 집중케 하는 여기는 “질량 없는 음악들”이 너울거리고 바람이 에워싼다. “기약 없는 높이를 사랑”하는 도취는 높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빛과 음악이 뒤섞이고, 그 속에서 힘껏 도약하는 행동들. 시를 읽으며 우리는 촛불이라는 대상을 ‘이해’하거나 음악을 직접 ‘듣기를’ 그치고 촛불과 음악의 내부에서 함께 뛰놀게 된다. 화자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시의 언어가 품은 가녀리고 섬세한 떨림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음악은 화자와 우리를 이끌어간다. 타오르면서, 타오르면서, 가장 밝고 뜨거운 곳으로.
어두운 곳이라곤 없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은 노래를 부르는 너의 존재와 일렁거리는 촛불의 경계를 뒤섞으면서 일상적 분별의 상태를 벗어난다. 이처럼 화자와 장소가 하나가 되어 함께 불타는 이 밀도 높은 합일 상태가 이 시의 핵심이다. 이런 종류의 시는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좁히는 것을 통해, 심지어 화자가 대상과 뒤섞여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자신만의 시적 장소를 발견해낸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도취 상태가 우선 ‘촛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너’로부터 비롯된 점이라는 것이다. 즉 우선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앞서 존재하고, 도취라는 시적 상태를 통해 너와 나, 음악이 뒤섞이는 독특한 시적 공간이 형성된다. 이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이 시가 현실 영역에서 출발하여 고유한 시적 공간에 도달함으로써, 평평한 현실 공간에 ‘가능성이라는 내부’가 생겨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밤. 잠잤어. 돌처럼 잠잤지.
녹슨 대문처럼, 대문 옆 평상처럼 잠잤어.
거북이처럼, 붕어처럼 잠잤지. 물처럼 잠잤어.
나는 어디로든 갔지.
너의 창가. 운동장. 해바라기 밭.
허공에 매달려 고개 젓는 얼굴들.
달리는 마음. 낙서와 낙서.
찢어버린 이야기.
나는 다시 잠잤지. 주먹 쥐고 잠잤어.
툰드라.
툰드라. 얼어붙은 순록의 직시하는 눈.
늑대. 독수리. 달리는 마음.
이빨. 손톱.
찢어버린 이야기.
달리는 마음의 숲. 숲. 숲.
불면에 시달리는 꿈을 몽유하는 화석들,
공룡의 알들, 수천만 년 동안 끓고 있는 눈물 욕조 속에서
눈뜬 짐승들이 자기 살을 물어뜯고 있다.
뜨거운 돌 하나 들고
나는 어디로든 갔지.
착시를 직시하는 눈.
달리는 마음의 돌. 돌. 돌.
― 김재훈, 「夢遊, 화석」 (『문학동네』 2011년 겨울호)
이 시는 어디에 있는가.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화자의 꿈속에 있다. 그러니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의 이름은 화자‘의’ 사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너의 창가”, “운동장”, “해바라기 밭” 모두 화자의 꿈 속 장소들이며, “달리는 마음”, “낙서와 낙서”, “찢어버린 이야기” 또한 꿈속의 일들이다. “툰드라” 역시 화자의 내면이 불러들인 장소로 툰드라가 연상시키는 “얼어붙은 순록의 직시하는 눈”이라거나 “늑대”나 “독수리”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는 자신의 무의식이 불러 모은 이 사물들의 사이를 힘껏 내달리며 가로지른다. 그렇게 “달리는 마음의 숲. 숲. 숲”이 형성된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기호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의 주인공이 시의 화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꿈을 꾸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화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5연을 다시 주목하자. 어째서 “불면에 시달리는 꿈”일까. 이곳은 화자와 무관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상 ‘나’로 충만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시는 정작 그 주인공들은 꿈의 기호들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공룡의 알들, 수천만 년 동안 끓고 있는 눈물 욕조 속에서/눈뜬 짐승들이 자기 살을 물어뜯고 있다.”라고 하질 않는가. 그래서 화자는 그저 맨몸으로 자유롭게 만끽하며 달리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돌 하나 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박진성의 「촛불에서」 가 나와 너, 음악, 촛불의 경계를 자발적으로 뒤섞는 환희의 공간이었다면, 김재훈의 「夢遊, 화석」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벗어나고자 하는데도 자꾸만 나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공간이다. ‘뒤섞임’은 공통적이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의 차이가 유사한 시적공간의 뒤섞임을 전혀 다른 장소로 위치시킨다. 「촛불에서」의 경우는 앞서 설명했듯 현실적 공간이 시적 공간으로 서서히 확장된다. 하지만 「夢遊, 화석」의 경우,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지시체의 세계는 삭제되고 의미로서의 공간만이 남아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겪는 소외는 바로 이러한 지시체의 세계가 삭제됨으로써 발생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촛불에서」와 「夢遊, 화석」의 중간에 위치한다.
5.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
왕십리는 왕십리.
하늘 아래 왕십리. 가을 왕십리.
부서지는 낙엽 언덕
내려올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의 왕십리. 둘도 없는 왕십리.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새하얗게 밀어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여름, 웨딩홀 앞에서도 왕십리.
목 없는 나무가 있고, 겨울이 있고
목 없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봄이 있고
그녀도 거기 있었음.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왕십리를 걸었음.
지난봄, 지하철역 앞에서
그녀를 보았음. 봄날의 그녀는
왕십리를 초대했음. 결혼식에 초대했음.
미국사람도, 일본사람도 초대했음.
그러나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잎 떨어지는 왕십리에 있었음.
그날은 슬금슬금, 가을비를 안고서
비 내리는 왕십리를 종일 걸었음.
삐딱하게 주차를 한, 타조알 같은
차에서 내리는 여자와 맞닥뜨렸음.
여자가 소리쳤음.
왕십리?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달걀 같은 여자가 따라 내렸음.
왕십리?
두 여자는 그녀들끼리 마주 보고 소리쳤음.
왕십리?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뿌리치고 걸었음.
비 내리는 왕십리를 마냥 걸었음.
가을 왕십리.
봄이 와도 왕십리, 밤이 와도 왕십리.
낼모레도 왕십리.
가을 왕십리.
울긋불긋 단풍들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쓸쓸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물결치는 왕십리, 그래봤자 왕십리. 리얼 왕십리.
왕십리의 왕십리, 아직 왕십리.
타조알도 올뎃. 낼모레도 올뎃. 하늘만큼 올뎃.
가을 가득 올 댓.
둘도 없는 왕십리. 끝도 없는 왕십리.
가을날의 왕십리. 올뎃 왕십리.
― 박상순, 「왕십리 올뎃」 (『창작과비평』 2011 겨울호)
경쾌한 종결어미와 반복에 의한 리듬감의 형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시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시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겨울부터 시작하여 가을, 여름, 그리고 봄에 이르기까지 거꾸로 서술되고 있다. 봄, 그녀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 시에 나오는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아닌 듯하다. 여름, 이번에는 남자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역시 당연하게도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그 장소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을, 그녀와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겨울, 그 사실이 모두에게,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하나의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한히 반복되고 있는 ‘왕십리’가 바로 그곳이다. 시의 시간이 역행하는데다 그 시간을 서술하는 방식이 모두 과거형이기 때문에 무엇이 선후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호하게 호명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요약한 이야기가 정확한지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하지만 이 모든 모호한 정황에 대비하여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역시 왕십리라는 장소인 것이다. 그녀와 남자는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통과하면서 제각기의 사건과 감정으로 왕십리라는 공간을 더욱 확장시켜나간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고 언젠가 죽게 될 것이지만, 그들이 풍부하게 부풀게 하던 시간 역시 왕십리를 통과하고 이내 사라질 것이지만 왕십리라는 공간 자체는 남는다. 그 공간은 열려있는 채로 수많은 이들의 사건들을 전제하고 시간들을 흡수한다. 왕십리는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이 시의 특징 중 하나는 명사처럼 다뤄지는 종결어미와 모든 감정적 반응을 차단하는 마침표에 있다. 이를 통해 시는 일어나는 사건들 개개에 몰입하게 하는 대신 사건의 배경이자 최초의 전제로서의 왕십리라는 공간성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 시에게도 최초/최후의 질문을 던져보아야겠다. 이 왕십리는 대체 시적으로 어떤 공간이며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이 시는 앞서 설명했듯 그녀와 남자의 서사는 배경처럼 처리하고, 오히려 배경에 있어야 할 왕십리라는 공간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 결과 서사의 서정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는 배제되고 이 시만이 형성해놓을 수 있었던 독자적 영역인 ‘왕십리’가 생겨났다. 이 공간은 자명하게도 실제 왕십리로부터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시적 공간이다. 하지만 이 자율적 공간이 실제 왕십리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자율적 공간은 실제 왕십리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역으로 뒤집어놓음으로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왕십리 올뎃」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6. 더욱 추운 곳으로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 시를 읽고 쓰는가’라는 질문은 시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적 영역의 층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6편의 시를 읽었다. 우선 현실에 가장 가까이 밀착하면서도 비판적 해석과 현실적 자아의 반성을 통해 시적 장소를 발견하는 김이듬의 시들이 있었고, 현실의 자리에서 섬세한 관찰력을 통해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내는 이근화의 시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시적 거리를 통해 시적 장소를 형성했다면, 박진성의 시는 그 거리를 무화시킴으로서 평평한 현실 세계 내부에 가능성으로 가득 찬 내면의 자리를 시적 장소로 만들었다. 김재훈의 시는 현실적 영역의 층위가 삭제된 곳의 소외를 시적 장소로 삼고 있었다. 박상순의 시는 이전에 본 적 없는 낯선 왕십리라는 공간을 형성하지만, 이 역시도 현실적 영역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음으로써 형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는 가장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순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적 영역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서 시를 읽고 쓰느냐고 묻는 것은 현실적 영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를 되묻는 작업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의 세계는 전혀 다른 종류의 풍부함을 갖게 되고, 전혀 다른 관계를 맺을수록 시의 세계 역시 낯설어진다. 이런 고민 속에서 다음의 시는 의미심장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최초의 인류는 동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해가 뜨는 그곳으로 가려고
오늘은 그들이 동쪽으로 어느만큼 갈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너무 멀리 동쪽으로 이동하다 홀연히 서쪽으로 가게 되진 않았을까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무리 중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 아래쪽으로 내려가보자 제안했다고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 사람은 오랫동안 남십자성을 보아두었을 겁니다 하늘에도 정수리가 있다고 친구들에게 말해두었습니다 나무들이 가지를 뻗는 방향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나뭇가지를 두고서 새들은 의자라고 물고기는 지느러미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혼자 빙그레 웃어두었을 겁니다
살아남을래요
같은 말보다는
사라질래요
같은 말을 해두고
무리들과 결별했을 겁니다
따뜻한 나라를 찾았고 과일을 처음 맛보았고 제 피부를 만지며 온 몸이 까만 눈동자가 되어가는 경이를 반가워했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바오밥나무의 나뭇가지를 뿌리라고 부르는 기린과 지면서 피는 석양을 학교라고 부르는 누 떼와 함께 하루만큼의 하루를 삶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을 그 사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김소연, 「생각의 일정 1」 (『한국문학』 2011 겨울호)
화자는 더 따뜻한 곳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하는 최초의 인류들을 상상하고 있다. 그 중 한명이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자고 제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래쪽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으므로 매우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용감하게도 그는 잘 아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것은 그저 영웅이 되려는 마음에 불쑥 내뱉은 제안이 아니라, 남십자성과 나무들이 가지를 뻗는 모양을 상세히 관찰한 결단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제안을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마침내 혼자서 걷기 시작한다. 화자는 아마 그가 무리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살아남을래요”가 아니라 “사라질래요” 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아마 그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마침내 “따뜻한 나라를 찾았고 과일을 처음 맛보았고 제 피부를 만지며 온 몸이 까만 눈동자가 되어가는 경이를 반가워했을” 것이다. “바오밥나무의 나뭇가지를 뿌리라고 부르는 기린과 지면서 피는 석양을 학교라고 부르는 누 떼와 함께 하루만큼의 하루를 삶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시를 읽고 쓰는 우리는 이 단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혼자이므로 그리고 가본 적 없는 곳이므로 두려움으로 그는 무척 추울 테지만 그 추위 속으로 혼자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살아남을래요, 보다는 사라질래요, 라고 인사하고. 마침내 도달할 따뜻한 나라를 찾으러.
약력 : 장은정, 1984년 출생, 2009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