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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해(1)
골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읽은 1, 2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골로새서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수신자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당시, 골로새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에베소(터키 에페소스)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오늘날 터키 남서부 지역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
골로새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라오디게아’, 위쪽에는 ‘히에라폴리스’가 있었는데요,
한때 골로새는 직물 산업으로 번창했던 도시였지만, 주전 3세기 무렵 북서쪽으로 24km 떨어진 곳에 히엘라폴리스가, 서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라오디게아가 차례로 건설되면서, 골로새는 점차 쇠락하다가, 주후 1세기에는 사회적, 상업적 위상이 많이 떨어진 작은 도시(성읍)로 전락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AD60년 초에 라오디게아가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는데요, 이때, 많은 학자들은 라오디게아와 함께 골로새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부유한 도시였던 라오디게아는 로마 제국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힘만으로 곧 복구되었으나, 작은 도시(성읍)였던 골로새는 빈약한 재정 때문에 제대로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다만, 골로새서에 ‘지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이 서신은 지진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가 설립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했으며,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19:8,9).
그리고, 행 19:10을 보면,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말 그대로, 하나님이 그 자리에 ‘말씀의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에 ‘말씀의 경험(체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세운 교회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며,
그 자리에서 온전히 주의 말씀을 들었던 에바브라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여
골로새 교회를 설립하게 되며,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에도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4:12,13)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나하나 확인하겠지만,
에바브라가 설립했던 골로새 교회 안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골 2:8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2:18,19상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
이처럼, 바울의 교훈, 권면, 가르침이 담긴 이 서신을 보면,
에바브라가 어떤 문제를 갖고, 로마에 감금된 바울을 찾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회가 겪고 있던 모든 상황을 들은 후에,
그는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로새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펜을 들었는데, 그 서신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우리, 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근데,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해 볼 수도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그리고 신실한 형제 자매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여기서 “성도들”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하기오이스”(αγιοις)이고,
“신실한”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피스토이스”(πιστοις)입니다.
근데, “하기오이스”(αγιοις)라는 단어를 형용사로 번역하면 “거룩한”이 되고,
명사로 번역하면 “성도들”이 됩니다. 즉, 명사로 번역하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되고, 형용사로 번역하면, ‘거룩한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제가 약 20권의 주석을 확인해 보니,
‘어떤 해석을 따르든 바울이 의도한 의미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좀 더 자연스러운 번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그리고 신실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즉, “거룩한”과 “신실한”이라는 두 개의 형용사가 “형제 자매들”를 수식함으로써,
앞으로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전개할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이는 동시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큰 메시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거룩한”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중에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거룩할 수도, 거룩을 만들어 낼 수도, 심지어 흉내 내거나, 연습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위, 신분, 위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옮겨 놓으신 후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불러주신 선포(언)‘가 ’너희는 거룩하다‘입니다.
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21,22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3:12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
이처럼, 우리의 ’거룩함‘은 ’그(하나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신‘ 결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신’ 결과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좀 애매한 대답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해 보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하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어주심, 부활, 승천,
성신의 내주하심으로,
내가 믿음을 통하여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거룩도 동일합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은혜이며, 결과입니다.
둘째, “신실한”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릅니다.
“신실한”에 사용된 형용사는 “피스토이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실한, 믿는, 믿음을 가진, 진실한‘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요,
하지만, 골로새서 전체 내용과 견주어 보면,
’신실한‘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믿는‘ 것을 뛰어넘어,
어떤 압박이 있더라도, 어떤 어려움, 거짓 가르침, 고난이 있더라도,
굳건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세를 말합니다.
즉, ’신실함‘이란 좌우 선택의 문제 앞에 주께서 기뻐하실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신실한‘의 의미를 갈3:1~5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요,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리면,
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또 5:16에도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호통 속에서 ’신실함‘이 무엇인지 느껴지십니까?
바울의 간절한 경고가 느껴집니까?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이처럼, ’신실함‘이란 어떤 pressure가 있더라도,
진리의 말씀에 믿음으로 확신하여, 그 길을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유지하는 삶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며, 그리스도의 지혜가 나의 지혜가 되며,
그리스도의 교훈이 나의 교훈이 되는,
말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산다는 말은 곧 다른 신들과는 분리된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당시에는
골로새를 포함하여 많은 도시에서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신‘은 행19장에 나오는 아데미(아르테미스) 여신입니다.
라틴어로 말하면, ’다이애나‘가 되죠.
태양을 상징하는 신이 ’아폴로‘라면,
’다이애나‘ 신은 ’임신, 출산, 다산, 풍요를 돕는 신‘으로 믿었기에,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숭배했습니다.
골로새 성도에게, 이런 신들과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실함을 위해, 우리는 다른 신들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나요?
사람들 안에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머물러 있는,
그래서 부인할 수 없는 3가지 대표적인 우상을 말한다면,
’돈, 섹스, 권력‘입니다.
이 우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를 떠날 생각도 혹은 우리가 떠날 생각도 없습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그것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자신의 신으로 삼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그분의 말씀과 권면, 충고조차 버릴 수 있는 삶을 말합니다.
딤전6:10을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리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돈만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죠.
이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교만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내 믿음 생활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둘 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자만심에, 마6: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들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산다는 말은 주님이 주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골1:4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이 말씀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이며, 감사입니다.
기도 중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감사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그리스도 안에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나라이며,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교회는 심지어 세상은
우리의 신실함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경건의 연습이 가능한 곳입니다.
교회는 더더욱 그러한 곳이죠.
엡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니, 신앙공동체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기도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믿음의 삶, 신실함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
교회만큼 확실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나누지 말아야 하고, 차별하거나, 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 사람들을 나눕니다.
나이에 따라, 학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인종에 따라, 사회적 배경에 따라,
구분하고 등급을 매기며, 다름을 두고 차별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신실함이 아닙니다.
갈3:28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새 백성‘입니다.
직분에 따라, 학연, 지연, 혈연, 사회적 배경 등에 따라, 구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함께 성장하고,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룩‘과 ’신실함‘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셋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그리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분리될 수 없듯이,
’거룩‘과 ’신실함‘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은혜를 통하여 평강이 오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만이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근데, 인생을 살다 보면, 한가지 배우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변하던가요?
이천수 목사의 말에 따르면,
34년 목회하면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안 바뀐다.
잘 바뀌지 않는다.
더러더러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결정적으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많이 경험합니다.
결국, 이 말은 예수 믿은 후에도 한 사람의 죄악된 본성과 본능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도 변할 생각이 없고, 너도 변할 생각이 없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만나보면, 교회에, 목사에게 실망하여 신앙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많다는 것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죄성, 욕심, 탐욕, 어리석음을 갖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잘 안 됩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람이 맞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앞에 날마다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보다 탁월하고, 명확한 방법이 있을까요?
내 본성, 어리석음, 탐욕, 정욕 등이 나를 끌고 가지 못하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날마다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히4:12를 읽어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딤후 3:16, 17에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 앞에 서면, 그분은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시며, 뿐만아니라,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교육하십니다.
둘째, 분별해야 합니다.
롬12:2,3에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말씀 앞에 앉도록, 자신을 복종시킨 후에,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를 할 때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해야 분별력과 통찰력이 살아납니다.
생각을 해야 회개하게 됩니다.
생각을 해야 옳은 판단 위에 책임이 필요할 때는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할 때는 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십시오.
생각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솔로몬처럼 간청하세요.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 왕상3:9
셋째,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과 분별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도 우리는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매번 우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내) 마음이구나.‘(렘17:9)를 확인합니다.
이런 좌절을 맛볼 때마다, 예수님이 요15:4,5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열매는 맺는 법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끊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면,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자랍니다.
고전15장을 보면,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살다 보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늘 좌절, 갈등, 실패, 슬픔 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망조차 우리를 조롱합니다.
이때,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주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15:58)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와 신실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충만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구절을 읽어 드립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말하는 영생은 영원히 산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예수를 믿는 자를 하나님이 영원히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실패는 실패로, 좌절은 좌절로, 슬픔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세우실 것입니다.